발칸 해방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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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해방 전쟁
Austro Army.jpg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 육군 소속 제 13 보병 연대 소속 장병들이 세르비아의 숲에서 행군 도중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날짜1821년 4월 17일 - 1830년 5월 25일
장소발칸 반도
결과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의 군사적 승리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의 정치적 승리

교전국

Flag of Austria Bundesreich.png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
Serbian Kingdom.png 세르비아 왕국
Flag of Greece.png 그리스 왕국
Bulgaria flag.png 불가리아 왕국
Flag of Albania.png 알바니아 왕국
Romania Flag.png 루마니아 왕국
Flag of Hungary.png 헝가리 왕국
영국 영국

Flag of Russia.png 러시아
Ottoman empire.png 오스만 투르크 제국
지휘관

Flag of Austria Bundesreich.png 오토 합스부르크
Serbian Kingdom.png 미하일 오브레노비치
Flag of Greece.png 알렉산드로스 1세
Bulgaria flag.png 이반 2세
Flag of Albania.png 필립
Romania Flag.png 미하일 1세
Flag of Hungary.png 루돌프 합스부르크
영국 윌리엄 윌리엄스

Flag of Russia.png 미하일 바르가티온

Ottoman empire.png 무라드 베이
Ottoman empire.png 투만 베이
Ottoman empire.png 오마르 베이

Ottoman empire.png 앗딘 베이
병력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군
320,000명
세르비아 왕국군
약 90,000명
불가리아 왕국군
약 70,000명
루마니아 왕국군
약 50,000명
알바니아 왕국군
약 30,000명
헝가리 왕국군
약 150,000명
그리스 왕국군
약 100,000명
영국군
50,000명
러시아 제국군

90,000명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

620,000명
피해 규모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군
약 90,000명
세르비아 왕국군
약 40,000명
불가리아 왕국군
약 25,000명
루마니아 왕국군
약 20,000명
알바니아 왕국군
약 7,000명
헝가리 왕국군
약 20,000명
그리스 왕국군
약 40,000명
영국군
약 4,000명
러시아 제국군

약 10,000명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

200,000명

발칸 해방 전쟁 혹은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발칸 해방 전쟁오스트리아 연방 제국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한 전쟁이다.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이 독립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이 지원하는 발칸 연맹이 성립되게 된다.


전쟁 초기

발칸 반도의 민족 운동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발칸 반도 내부의 민족주의 세력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오스만 투르크의 속국으로 있던 발칸 반도 국가들이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이러한 독립 요구를 일체 묵살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발칸 반도의 각국이 독립 전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처음 독립 전쟁이 일어난 국가는 그리스로, 영국,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약속받은 그리스는 1821년 4월 17일에 그리스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처음 약 5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스만과 충돌하였으나,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오스만과의 팽팽한 전선을 유지한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의 다른 오스만의 속국들도 동년에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고, 발칸 반도의 대대적인 반란은 당시 발칸 반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러시아 또한 부동항 차지를 위해 발칸 반도 혹은 오스만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협정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서의 종주국 지위를,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과 부동항 차지를 보장받으며,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전쟁에 참전하고, 발칸 반도 내의 부동항 지역을 대여해주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솜보르 전투

오스트리아 연방 제국은 1823년 협정 이후 군사 작전의 준비를 마치고 오스만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3월 10일 32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진을 시작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군과 솜보르에서 마주친 군대는 오토 합스부르크장군이 이끌고 있었고, 당시 오스만의 군대는 무라드 베이가 지휘하는 약 300,000명의 비등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군은 약 50,000명의 군사가 솜보르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로 보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솜보르 지역의 숲에서 조우하게 된 오스만군은 기병대의 기동성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전날 비로 인해 땅이 진흙으로 변하게 되면서 1차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승리를 거머쥔 오스트리아군은 첫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방심하게 되는데, 당일 밤 50,000명의 오스만 기병대의 습격에 역시 큰 피해를 입고 솜보르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틀 뒤 50,000명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평원지대에서 2차전을 치르게 되는데, 산개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려던 오스만군이 숨어있던 오스트리아 저격병 연대에 습격당함으로써 전술이 실패하게 되었고, 포문의 수도 오스트리아군보다 부족하여 포위 전술이 실패하자 화력의 열세로 대패하고 만다. 이 때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약 50,000명이고,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80,000명이었던 만큼, 전쟁 초기 대전투가 앞으로의 흐름을 좌우하게 되었다.

아테네 공방전

그리스 왕국알렉산드로스 1세가 이끄는 독립군은 그 규모가 80,000명에 달하게 되었고, 영국과 러시아의 30,000명의 군대가 아테네에 상륙, 알렉산드로스 1세와 함께 아테네 수성전을 치르게 된다. 1823년 6월 13일 오마르 베이가 시리아 지방의 지원군을 병합하여 100,000명의 그리스 방면군을 새로이 형성하였고, 아테네에서 독립군과 조우, 포위했다. 6월 15일 영국군과 함대가 아테네에 도착하였고, 항구를 통해 아테네 내부로 진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러시아군의 도착을 기다렸고, 러시아군은 7월 11일 20,000명의 파병군단이 아테네로 상륙했다. 7월 20일에는 그리스 독립군을 필두로 돌파전이 시작되었으나, 오마르 베이의 강력한 본토 기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영국 함대를 통한 물자 보급이 이루어지고는 있었으나, 전반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7월 31일 오마르 베이가 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31일 12시 경 아테네 시의 외부가 돌파당하며 오스만 기병대가 진입하였으나, 14시 경 영국군의 분전으로 오스만의 후속 보병대가 진입에 실패, 결국 5시 경 기병대가 후퇴하며 막을 내린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측은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독립군과 지원군 측은 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 이후 포위망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에 알렉산드로스 1세는 미하일 바르가티온 경과 윌리엄 윌리엄스 경과의 상의 후 해상 경로를 통해 피레우스로 퇴각하였다. 아테네 공방전에서의 오스만측의 승리로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병력 증강이 본국에서 검토되었고, 알렉산드로스1세는 오스만군과의 결전을 피하며 그리스 각지에서 모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스파르타 전투

오스만 군이 아테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 북부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였으며, 이에 알렉산드로스 1세는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1823년 11월 말, 영국은 추가 파병 게획을 통과시켰으며, 명년 2월 초에는 러시아에서 40,000명의 병력이 증원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가 거의 전군을 남하시킴으로써 위기 의식을 느낀 양국이 입지 강화를 위해 시행한 방안이었으며, 이는 후에 이루어지는 인스부르크 회담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그리스 독립관련 회의에서 큰 이권을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24년 3월 9일에는 스파르타에서 알렉산드로스의 90,000명의 군사가 영국의 40,000명의 군단과 합류하였으며, 17일에는 러시아의 60,000명의 군단과 함께 스파르타에서 오스만군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그리스에서 승전한 오마르 베이는 북부 그리스에서 추가 병력을 징집하여 150,000의 군세를 이루어 스파르타로 이동하였다. 4월 1일, 스파르타 외곽 지역에서 오마르 베이의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러시아 군을 필두로 독립군은 준비해둔 참호에 들어가 오스만군을 기다렸다. 참호를 발견한 오스만 측에서 5차례의 포격이 이루어진 뒤, 보병대를 앞세워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군은 참호 안에서 오스만군과 맞서 싸우며 전선을 유지하였다. 6시간 동안 치뤄진 전투는 해가 지기 시작하자 오스만 군이 퇴각함으로써 마무리 되었고, 방어에 성공한 독립군 측은 오스만 군의 한 차례의 공격을 막고 공세로 전환키로 협의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났음에도 오스만군은 진입을 시도하지 않았고, 아테네 공방전 때와 같은 전술을 구사하고자 하는 듯 보이자, 독립군은 4월 10일 돌파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리스군이 필두로 새벽녘에 오스만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오스만 군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다 전투 태세를 갖추어 맞대응 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아테네 공방전 혹은 솜보르 전투와는 달리 전열 보병들의 총격전과 육탄전, 그리고 기병대의 소규모 충돌로 진행되었던 스파르타 전투는 다음날 5시까지 진행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오스만군이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스파르타에서 완전히 축출해내었다. 26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전투로 인해 양측은 막대한 희생을 필요로 했으나, 결과적으로 오마르 베이의 군단이 당분간 전투가 불가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오스만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열강의 분열과 자유주의 운동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립

러시아와 영국과 협정을 맺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1824년 5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프로이센의 귀추를 눈여겨보며 발칸 반도에서의 군사 활동을 잠시 중지했고, 프로이센의 새로운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후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독일 통일의 전면에 나서겠다고 선포하였는데, 이에 대다수의 병력이 발칸 반도로 이동하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긴급하게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와 접촉하였다. 린츠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영국의 무역 독점권에 대해 인정하였고, 러시아가 그리스의 부동항을 취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또한 혁명으로 불안정한 프랑스와 불가침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외 위협의 변수를 줄였나갔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서 2년이 넘는 원정이 지속되고, 내부적으로도 자유주의자들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하자, 절반의 군단을 불러들여 탄압하였다. 이에 프로이센 측에서 항의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내정 간섭이라는 명목 하에 프로이센의 발언을 비난하였다. 8월에는 프로이센과 국경지대에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이에 영국은 프로이센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빈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메테르니히의 주도 하에 대독일 연방 제국 건설이 힘을 얻게 되었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독일 통일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군사적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영국과의 린츠 협약을 파기하였으며, 발칸 반도 내에서 영국의 어떠한 군사적 행위에도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 영국과 외교적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빈 의회

독일 통일과 관련하여 1825년 1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자가 빈에 모여 논의한 기관이다. 자유주의 혁명에 휩쓸리고 있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각각 국경지대에서 접근을 차단하고자 하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자유주의자들은 빈에 결집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는 위기의식을 느껴 빈 의회에 접근하지 않았다. 여러 논쟁이 오고갔으나,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빈 회의는 무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호엔촐레른 왕가합스부르크 왕가는 이에, 통일에 관하여 각기 자유주의 혁명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 문제가 해결된 후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하였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혁명으로 혼란스러워진 프랑스를 함께 견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빈 의회의 영향으로, 카이저는 왕가와 제국에 반대되는 발언을 하지 않는 이상 자유주의자들의 집회를 허용하였다. 이는 곧 오스트리아 제국의 입헌군주제로의 체제변환을 예고하게 된다.

세르비아 전역

세르비아 전역의 끝

오스트리아 제국의 세르비아 주둔 군단은 솜보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마찰이 거의 없었으나, 무라드 베이가 본토에서 도착한 지원군과 함께 1824년 5월 다시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함으로써 전투에 나서게 된다. 베오그라드를 향해 다시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온 무라드 베이는 베오그라드 주변에 주둔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국군 70,000명이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중, 무라드 베이의 정찰대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 본국의 정국이 혼란스러웠으므로, 전투를 회피하고 베오그라드 근교에 주둔하였는데, 무라드 베이의 기습적인 공격에 오스트리아 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5월 말에는 베오그라드 포위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 왕국군 60,000명은 베오그라드에서 절망적인 공성전에 임하고 있었다. 6월 초, 오스트리아 제국 세르비아 방면군 사령관 카를 폰 마린츠의 지휘아래, 100,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이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무라드 베이와의 전투에 돌입하였다. 베오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주둔하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군의 공격에 강으로 인하여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결국 무라드 베이는 30,000명의 사상자와 함께 포위를 풀고 오스만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이른다. 오스트리아 군은 이 전투로 인하여 20,000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오스만 군은 그리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까지 침입하지 못하였고, 1825년 11월 13일, 세르비아 왕국은 독립을 선포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인정하였다.

세르비아의 독립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를 폰 마린츠는 본국으로부터 세르비아 왕국의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세르비아의 독립 이후 베오그라드에서 근무하였는데, 세르비아 왕국의 건설 당시 그가 최초로 발칸 연맹에 대한 초기 구상안을 제출하였다. 세르비아의 왕 미하일 오브레노비치는 이를 흥미롭게 여겨 차후 검토를 약속했고, 세르비아 왕국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때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던 루마니아를 비롯한 기타 발칸 반도 국가들에 대한 병력 지원 대신 세르비아 정비를 위해 노동력과 국방력을 제공하였다. 이에 감명받은 오브레노비치는 이후 오스트리아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였고, 장차 이루어지는 발칸 연맹의 발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카를 폰 마린츠에게 세르비아 1급 무공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리스 전역

그리스의 독립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분쟁으로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그리스 전역은 오스만군이 3차 침입을 시도함으로써 재개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연합군 병력은 그리스를 빠져나간 상태였고, 이에 알렉산드로스 1세는 약 10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오스만군과 대적한다. 오스만 군의 군세 또한 약 100,000명으로 비등비등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다시금 1827년 9월 맞붙게 되는데, 알렉산드로스 1세의 유인전술을 통해 협곡으로 진입한 오스만군은 포위공격을 당해 대다수가 전사, 패퇴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외세의 간섭을 거부했다. 이에 열강들은 군사적 보복조치를 가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그리스 또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메테르니히는 알렉산드로스 1세와 접촉, 삼국이 그리스의 불안정한 국방력을 보완해주는 대신 경제적 이점을, 러시아는 부동항을 조차지하는 것을 제의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오스만의 재공세를 우려하여 승낙하였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알렉산드로스 1세와 밀약을 맺었는데, 이는 발칸 연맹에 훗날 가입하게 되면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완전한 폐기와 자주국으로써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발칸 연맹이 구성될 때 열강들의 압력을 받게 된다.

항구 분쟁

항구 분쟁(港口 紛爭)은 그리스의 항구를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 그리스가 다툰 분쟁이다. 당초 러시아에게 항구 조차지를 약속하였었으나, 영국이 경제적 이점에 항구 이용도 포함시키면서, 논란이 붉어지게 되었다. 이에 그리스 측은 그리스가 항구를 관리하고 영국과 러시아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영국과 러시아는 실익을 위해 거절하였다. 상황이 격해지면서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트라키아 지방의 항구는 러시아가 조차지하고, 영국은 이라클레온과 아테나를 무역 거점으로 삼도록 하는 것으로 비교적 원만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스 측에서 반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밀약으로 인해 암묵적 동의를 표시하였다.

루마니아 전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하드 선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연이은 패배에 분노한 술탄 마흐메드 2세는 발칸 방면군 500,000명의 대군을 원정에 동원하여 성전 즉 지하드를 부쿠레슈티에 선포하여 대대적인 유럽 원정을 개시한다. 서방 세력들은 당연히 발칸 반도에 파병을 강요받았지만, 점차적으로 거세지는 자유주의 운동으로 인해 나빠져만 가는 민심에 해외 원정군의 불필요한 소모로 피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고, 이에 비교적 원만한 타협을 이룬 오스트리아 제국과 자유주의 운동이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 제국만이 군을 파병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규모는 약 200,000명이었고, 러시아 제국군의 규모는 80,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주도로 막후에 형성된 발칸 연맹을 위해 독립하였던 발칸 국가들이 힘을 보태었고, 이에 대략적으로 400,000명에 달하는 대항군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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