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654년, 키르수스-그란치프 전후 헤스페로스벨트 세계에서 '전차'는 입지전적인 위치로 등극하고 있었다. 초기 키르수스-그란치프의 패권 분쟁 상격을 띈 전쟁은, 전쟁 후반기에 패퇴하는 그란치프 제국 측의 전선 봉합 시도로서 구축된 잠깐동안의 참호전은 이전까지 있었던 방진과 기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란치프 제국군은 세계 최초로 구축된 전선 단위 참호에서 농성하며 방어전을 펼쳤다. 그란치프 제국군은 1653년 4분기부터 야전사령부에서 포병용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개조해 장갑과 포가를 덧댄 자주포artillerie를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고, 이런 방침은 더욱 진보되어 전쟁경제 지속력이 한계에 달한 그란치프 제국이 키르수스에게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카르수스군 또한 초기 그란치프군의 이러한 '자주포' 개념에 거대한 영감을 받았다. 야전군 단위로 쉴새없이 기동하며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기동전을 채택한 키르수스군은 이러한 '성벽 전쟁Mauerkrieg'에 큰 충격을 받았고, 비록 전쟁 최후반기에 실시된 그란치프의 참호 구축행위와 자주포 투입이 극도로 치우쳐진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키르수스군 또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말기에 유사 제식채용된 전선자주포Frontpanzerartillerie들를 전선에 투입하는 등 키르수스군은 그란치프군의 아이디어에 큰 영감을 받게 된다.

54년 7월 7일,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종전 이후에도 군축 실패로 인해 극도로 비대해진 군부의 입김과 전선자주포에 큰 충격을 받은 병사들의 수기, 경제 호황의 파도에 올라 선 군부는 신속히 이러한 '전선돌파병기'에 대한 연구를 착수하게 된다. 전쟁 이전 헤스페로스벨트 대륙의 패권국 '그란치프 제국'을 명백한 전력 비대칭 상황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키르수스군의 이러한 군사적 반향은 타국에게 위협감과 동시에 흥미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마요르앵 시가지에서 그란치프군을 향해 착검돌격하는 키르수스군의 기록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초기의 향방을 걸정할 마요르앵 전투에서 패배한 그란치프군은 전장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이에 영감을 받은 이들중에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 그란치프 측에 서서 참전한 이래, 키르수스군과 단독 강화한 게파르토 제국 또한 존재했다. 당시 게파르토는 1650년경 전쟁 발발 직후 요충지 마요르앵 전투에서 패퇴하며 에세르 지방을 지나는 그란치프군을 추격하는 키르수스군 보급선을 압도적인 포병전력을 동반하여 기습, 집단군 단위의 병력을 위기에 몰아넣어 키르수스군과의 단독 강화를 달성했다.

강화 조건 중에는 에세르 지방 영내의 키르수스군 주둔 및 보급로 보장 조건이 존재했으나, 기본적으로 전쟁 기간 동안 키르수스군에게 군수물자를 판매하며 게파르토는 잠시동안의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전후 에세르 지방을 합병한 와중 극도로 호전적이며 민족성이 진한 에세르 민족의 무장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게파르토는 에세르 점령 유지로 인해 국가 재정에 영향이 가는 시점에서도 다카리바고 황제의 적극적 권유로 인해 약 1655년부터 기갑 개발에 돌입하게 된다.

호칭에 대해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 주로 프론트판처아틸레리, '전선자주포Frontpanzerartillerie'라 호칭되는 이름들은 키르수스 기갑들이 기본적으로 기동성 확대를 위해 민간 트랙터 위에 포가를 얹은 자주포에 기반함을 입증한다. 초기 전선자주포들은 최소 소총탄 방호가 가능한 수준의 강철 판을 덧댄 채 전선에 등장했으며, 이런 생김새에 일선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전후에는 전쟁 초 키르수스군의 기동전 양상에 맞춰 키르수스군 기갑의 성격이 과거 '방어병기'로서 엄폐물과 특화점의 위치를 겸하는 일종의 '진지'였던 반면, 전후 키르수스군이 설립한 기동전 교리에 적응시킨 신속한 경장갑 전차들을 위주로 변화하며 전차 특유의 기동성과 다목적성을 강조하기 위해 '장갑전투차량Panzerkampfwagen' 으로 호칭이 변경된다. 키르수스군은 이러한 교리 변경에 맞추어 몇가지 시험적인 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타국에게 반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게파르토 제국군의 기갑교리는 기본적으로 그란치프군의 방어적 성격을 지닌 전차와 키르수스군의 기동적 성격을 지닌 기갑교리를 절충시킨 형태이다. 특히 1000년이 넘어가는 기간동안 게파르토는 전통적으로 발전된 포병을 중심으로 자국영토 방위에 치중해 왔고, 기갑의 역할이 키르수스군과 그란치프로 대표되는 공세, 방어 양자택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1650년대 후반기 게파르토 굴지의 군사학교였던 슈탄다르테 주 오도페스트Odopest 주시에 위치한 슈탄다르테 사관학교에서 전차의 위치가 '기병의 상위호환'이라는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의 논문이 발표되며 게파르토 군사학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쾨지커니저 박사는 그간 기술의 한계로 인해 전차의 크기가 육중하고, 느릿느릿하며 과하게 무장한 포와 조잡한 총안구를 단 기갑의 시대는 이미 종결되었으며, 경장갑 쾌속전차를 시범적 운용중인 키르수스군의 예시를 들며 '인간과 비슷한 전고로도 작아질 수 있으며, 소총탄, 기관총탄에 대한 방어를 제공하며, 무엇보다도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에 계산적 운용이 탁월한 점' 등을 들어 경장갑 전차의 장점을 논했다. 이에 반해 중장갑 전차는 적 진지에 대한 유의미한 타격을 제공하며, 병사들의 엄폐물로서도 기능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상대 전차를 파괴하는데 효율적'이라며 전차의 개념을 경장갑, 중장갑 전차로 이원화하며 게파르토는 국토 방위를 위한 중장갑, 공세 실시를 위한 경장갑 전차 두 종류가 모두 필요함을 강조했다.

헤르만 쾨지커니저Hermann KössyKernszer 박사는 게파르토 기갑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67년에 기갑병과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강의 이후 성인병으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아직 전선자주포의 육중함에 사로잡혀있던 군사학계는 충격에 빠졌고, 뒤이어 키르수스의 경전차를 이용한 기동전 훈련 소식을 접하고 매료된 황제의 의견에 따라 게파르토의 전차는 '돌격차량Sturmwagen'(각주: 당시 게파르토어 반포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다민족국가였던 게파르토의 군사공용어는 키르수스어였다.) (각주: 황제의 사견이었으며, 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 다카리바고 황제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으로 정해진다.

논의와 실전 배치

황제의 명에 따라 게파르토군의 기갑 개발이 즉각적으로 시행되었다. 키르수스의 몇 가지 시범적인 소형 전차 생산 사건으로 인해 향후 전차의 형태가 다소 소형화될 것이며, 적은 인력으로도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한 '초소형 전차'의 형태가 경전차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서 적합하다 여긴 쾨지커니저 박사의 의중에 따라 최소 2인 운용이 가능한, 소총탄과 중기관총에 대한 유의미한 방호력을 제공하는 경장갑 전차 개발이 시작되었다. 또한 유사시 제한적인 대전차전이 가능하며, 기본적으로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대량 양산이 불가능한 중장갑 전차와 초소형 전차 사이를 절충하는 경장갑 전차, 그리고 비교적 가장 소수로 양산되나 적 화력지점과 참호를 돌파할 화력, 경기갑-초소형 전차의 보병지원 및 화력투사 보조를 맡을 중기갑 전차 개발이 예정되었다.

또한 예외적으로 키르수스-그란치프전의 전투경험을 살려 전선 후방에서 기동력을 살려 중포를 이용해 적 포병대를 파괴하는 '자주포' 개발 또한 시작되었으며, 중기갑 전차의 차체를 유용할 예정이었다. 자주포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특히 게파르토 육군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지녀 '제2 육군'이라 불리던 포병 병과의 흥미로 인해 포병 내부에서 어느정도 자체적인 개발이 시행중이었다.

건국력 1655년 2월부터 1656년 7월까지 게파르토 제국에서 트랙터 생산 경험이 존재한 <야고트yagoth> 사가 초소형 전차, 경기갑전차의 차체 설계를, <황제 폐하를 위한 슈라프트Shraft 병기제작국>과 <체스터-볼프만Zester-wolfman 총기회사>가 탑재할 총기와 화포류를 설계, 경합했다. 중기갑 전차 설계는 최근들어 국경에서 거세지는 공화국 연맹과 키르수스의(각주: 에세르를 병합하고 '비겁히' 전쟁에서 이탈한 게파르토는 키르수스 제국 측에게 엄청나게 저주받고 있었고, 공화국 연맹 또한 게파르토군의 시력 확장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지도발, 경제적 압박과 이에 따른 게파르토 내부의 장기 경제불황, 경제 계획에 의거한 강제이주 등의 악재가 겹쳐 예산이 전용되어 설계에 머무르는 상태였다. 자주포는 포병 병과에서 탄약 호환성 문제로 슈라프트 병기국의 기성품을 사용하기로 못박았기에, 중장갑전차의 차체를 유용하기로 한 자주포 개발 또한 조금 늦어지게 되었다.

56년 12월, 험준한 산악지대와 설상지면, 진흙에서의 기동성을 시험한 이후 야고트 사의 설계, 슈라프트 사의 무장이 당선되어 다음 해 4월 M57 '유커쇠eucause' 탱켓이 제식채용되었다. 전차장(장전수), 조종수 총합 2명의 최소인원, 한계까지 축소시킨 장갑차량 내부에 기관총 선회포탑을 장착한 우스꽝스러운 외형은 양산 초기 제국군인들 사이에서 '기형아'라는 불명예적인 별명이 붙여지며 놀림받았다.

(사진 3 해설: m57 유커쇠는 게파르토 최초의 '전차'중 하나로서, 베른하이어에서 출시한 민간용 트랙터를 기반으로 한 구동계가 장착되었다. 7.92×57mm M56 기관총 1정으로 무장한 유커쇠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당대 헤스페로스벨트에서 무장적 경쟁력을 가지기 힘든 전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국민적 인기와 조기 휴전 덕분에 그간 카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의 일로 간단히 듣던 '움직이는 벽'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병사들이 많았다.

유커쇠는 초소형 전차, 경장갑 전차, 중장갑 전차, 자주포 등 총 4단계로 구성되는 기갑계획의 선두로서 기능했다. 당시 야고트 사는 경제적인 협력관계에 있던 '베른하이어 공국'에서 출시한 트랙터를 참고하여 차체를 제작하였으며, 준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슈라프트 사의 M56 기관총이 수냉식 튜브를 탑재함과 동시에 공랭식 총열을 단 제식 보병장비로서도 채용되었다.

유커쇠의 실전 테스트는 당시 국경에서 분쟁 중이던 키르수스와 공련군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어이없이 전쟁에서 이득만을 챙기고 빠져나가버린 게파르토는 당시 키르수스 제국민들의 상당한 치부였는데, 때문에 중앙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꽤나 자주 국경에서 키르수스군-게파르토간의 산발적 교전이 있었다. 공련군 또한 게파르토의 확장세를 우려했기에 상황은 유사했고, 그란치프가 국제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쪼그라든 상태에서 게파르토 동-서국경은 완전히 포위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커쇠의 등장은 인상적이었다. 초기 사단에 시범적으로 대대 단위로 배치된 유커쇠는 주로 강도낮은 박격포 사격과 중기관총, 소화기 정도만을 동원하던 키르수스군과, 단순히 인원을 많이 동원할 뿐이었던 공련군의 습격에서 크게 우위에 점할 수 있었다. 대 게파르토 도발은 몇년동안 계속된 일이었으나 본질적으로 키르수스군 일부의 일탈행위였기에, 최소한 키르수스-게파르토 국경에서의 소란은 병력들의 외도를 눈치챈 키르수스측 중앙정부의 강력한 압박과 확전 우려로 인해 항상 소란스러웠던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은 한동안 비교적 잠잠해진다.

유커쇠에 대한 국경에서의 평가는 순식간에 상향곡선을 긋게 된다. '기형아'라는 별명은 일종의 애칭이 되었고, 특히 키르수스군의 군사적 위협이 잦아든 틈을 타 국경지대에서의 전훈으로(각주: 공화국 연맹은 내전중인 상황이었기에, 연맹 중앙정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게파르토군들은 국경 너머를 약탈하려는 범법자 무리, 군벌 및 반란군들과 조우하곤 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시절에 안주하지 않고 군 현대화 계획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시화되며, 화포, 기갑, 중화기 등에 대한 현대화 요구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이에 따라 게파르토 정부는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아(發芽)

유커쇠의 선전과 함께, 게파르토 제국 내부에선 더 이상 황제만이 전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육군 당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초소형 기갑의 뒤를 이어 쾌속-경기갑 전차를 설계하게 된다. 유커쇠의 등장으로 그간 주로 트랙터 및 자동차-철강 기업으로 익숙했으나, 57년 이래 게파르토 국내에서 기갑회사 분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야고트 사의 차체 제작 독점은 계속되었다.

게파르토군은 1년 이후 공식적으로 58년 2분기에 경전차 'M58 쉴라Shiela'를 채용하게 된다. 탑재한 20mm M58 '우레Mennydörgés' 대전차소총은 (각주: 추후 1668년 M58 쉴라 II로 개량되며 주무장이 40mm M68 L/47,5 전차포로 변경된다.)는 제한적인 대전차전투가 가능했으며, 경쟁작이자 적성차량이었던 키르수스군의 1658년식 전차에 대한 의미있는 파괴력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소강 상태이던 키르수스 전선 대긴 공화국 연맹 국경으로 보내져 수시로 약탈과 소요사타가 벌어지던 국경의 치안을 강화했다.

전선에 배치된 쉴라 경전차. 전방을 중심으로 전차에 도포된 최대 37mm의 장갑은 공련군 및 반란세력들이 운용하는 37미리급 대전차포를 상대로  500미터 이상 거리서부터 효과적인 방호력을 제공했다. 쉴라 경전차는 유커쇠와 함께 당초 예정되었던 경기갑-중기갑의 관계를 초소형 기갑-경기갑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쉴라와 유커쇠는 그간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중기갑전차에 배치될 예산을 기다릴 동안 기갑의 효율성을 시험하고 앞서 사용해 기갑 운용의 기초를 정립하기 위한 수단과도 같았다. 58년 4분기 들어 일부 예산이 배정되었으나, 당시 제국군은 신형 소화기 및 차기 장구류 채용 사업으로 인해 신형 탄약을 도입하기 위한 예산을 최우선적으로 확보 중이었기에 기갑보다 보병의 중요성을 더욱 눈여겨본 군 당국에서는 차기 중전차 예산을 감소시키게 되었다.

기갑계에서는 이러한 결정에 많은 반발이 있었다. 새로이 떠오른 기갑전투의 대부로서 몇년만에 군사학계의 권위자가 된 쾨지커니저 박사를 중심으로 기갑장비로 쟁취한 최근 국경에서의 활약을 강조하고, 박사가 직접 신문에 기초적인 기갑이론에 따른 전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고문을 작성하는 등 군 내부-외부에서 지속적인 수정 요청이 계속되었으나, 아직까지 에세르 지방의 치안유지와 에세르인들과 점령지에 귀속된 그란치프인의 난입에 따라 불거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게파르토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중이었기에 예산이 투입될 틈은 없었다.

이후 쾨지커니저 박사와 중기갑과 같은 차체를 공유하는 자주포의 개발이 늦어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포병 병과의 지원을 중심으로 설득과 항의가 지속된 끝에, 중기갑 전차에 장착될 포탑 개발은 빠른 시일 내로 연기되는 대신 자주포와 중기갑전차의 차체 개발을 가까스로 시작할 수 있었다.

중기갑 차체 설계에 그간 독식하듯 전속적으로 차체 개발을 담당해온 야고트 사의 경쟁자로서 <노르트란트Nordland 원동기 공업사>, <슈베른 공업>, <비르셰> 및 해외 기업들 또한 경합에 입찰하였으나, 야고트는 정치계에 대한 지속적인 로비와 황실의 신임을 강조해 다시 한 번 차체 제작에 도전할 수 있었다.

야고트 사의 로고. 야고트 주식회사는 게파르토 기갑 설계의 중추로서 기능했으며, 제정 시대에는 정경유착과 황실의 신뢰를 기반으로 독점에 가까운 이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58년에서 2년이 지난 건국력 1660년 2분기, 중기갑전차의 차체가 출시되었다. 즉시 포가를 건설하고 황립 슈라프트 병기국에서 출시한 M50 150mm 곡사포 장착 작업이 시작되었다. 61년 1분기 자주포는 제식명 '루베Lube'로 정식 채용되었다. 자주포 개발 이후 기병과 포병 병과 중 어느 병과에서 루베의 배치 권한이 주어지는지에 대해(각주: 1650-60년대 게파르토군은 기갑병기는 기병의 호환대상이라 판단했기에, 초기 등장 당시 전차는 기병 병과 내에 위치한 하위 부서 '기갑과'가 업무를 일임중이었다.) 강도높은 토론과 찬반논쟁이 있었다. 이후 최고사령부와 황제가 병과간의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 최초로 등장했던 자주포는 포병 병과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루베 개발 당시에 포병의 공로를 참작하여 양 병과의 의견을 절충해 루베는 두 병과가 모두 운용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기본적으로 포병 병과에 생산량 중 4분의 3이 돌아가게 될 예정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포탑 개발은 루베 출시 이후 게파르토 제국 내부에서 경제 악화가 지속되어 빈번이 미뤄졌다. 지난 건국력 1656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키르수스 황실이 피해를 입을 뻔한 '혈색의 기 사건' 이후 공산주의법을 제정해 공산주의자들과 공산국가들을 탄압하고 본격적인 확장행보를 시작한 키르수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재개된 국경도발 또한 게파르토의 경제를 뒤흔들어놓았다. 당초 탑재될 예정이었던 신구경 65mm M62 L/41 주포 또한 개발이 사실상 개발이 중지되었다.

1663년 12월 연말부터 1664년 새해 2일간, 지속되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확장과 무리한 에세르 식민지 유지, 그 와중에도 계속된 황실의 사치를 근거삼은 당시 피안토네 주카레프 육군 중장이 연말 황궁 열병식에서 휘하 사단들을 동원해 일으킨 반란으로 황실이 몰락하는 '해넘이 정변' 사건이 발생한다. 반란 이후에는 몇년간 생산중이던 기갑차량의 월간 생산량을 제정 시절로 복구하는데 안간힘을 쏟게 된다.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후원자였던 황제의 지원은 없어졌으나, 인민단결정 수립 이후 기갑병과는 65년 3월 본격적으로 기병 병과에서 독립하며 대외적인 영향력을 구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