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코뮌은 1945년 12월 27일부터 1946년 1월 14일까지 일본 교토 전역에 걸쳐 존재했었던 사회주의 정부이다. 교토 코뮌은 전후의 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좌익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발단

전후 복구 사업과 착취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국적인 전후 복구 사업이 실시되었다. 이 가운데 교토 지역의 전후 복구 사업은 미쓰비시 토목이 입찰받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교토는 수도 도쿄에 버금가는 대도시었기에, 타 지역에 비해 빠른 시일 내로 복구 사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정부의 압박이 있었다. 이로 인해 미쓰비시 토목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는 특별상황이라는 명목 하에 법 외 초과근무(타 지역에도 없던 것은 아니나, 유독 미쓰비시 토목의 경우가 심각했다), 임금 체불, 안전장구 미지급 등 열악한 상황에서의 과잉노동이 강요되었다. 특히나 교토의 미쓰비시 토목은 전후 복구사업이 시작된 8월부터 11월까지 한 번도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퇴사하거나 의도적으로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는 부랑자들을 매수하여 본보기로 폭행하게 시켰다. 지역 경찰은 상부에서 미쓰비시 토목이 월등히 빠른 성과를 내고 있으니, ‘회사 내규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 와중, 미쓰비시 토목은 회사 상황이 안정되었으니 12월 중으로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쓰비시 토목은 임금으로 체불된 4개월치 월급은커녕, 1개월치 월급의 가치에도 못 미치는 양의 외국에서 받아오는 원조 물자를 현물로 지급했다. 이에 미쓰비시 토목과 노동자 간의 갈등은 급격히 확산된다.

키류 모에카와 라운더

한편, 교토 미쓰비시 토목 내부에는 키류 모에카가 조직한 비밀 노동조합 라운더가 있었다. 라운더는 본래 사회주의를 지향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지속적으로 치안유지법 등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하였다. 라운더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직을 유지하다 12월 임금을 현물로 지급한 이때가 기회라고 직감했다. 모에카를 위시한 라운더는 물밑 선전을 활발히 전개해 급속도로 조합원 수를 늘리고 25일 행동에 들어갔다.

전개

파업 시작

파업은 25일부터 시작되었다. 작업장의 작업반장들은 체불된 임금이 즉각 지불할 때까지 일할 수 없다는 노동자들을 매질하며 일할 것을 강요했지만 도리어 수적으로 우세한 노동자들에게 역공을 당하고, 작업반장들을 제압한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파업을 제압하려던 경찰들도 이내 노동자들을 저지하는 것을 그만두고 투항한다.

교토 코뮌의 성립

교토 전역으로 퍼진 총파업으로 인해, 키류 모에카는 라운더가 양지로 나와도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비어 있던 폐건물들을 점거한 뒤 교토 코뮌을 선포했다. 교토 민중들의 투표를 통해 코뮌 위원회를 선출할 것이며 그 공백 동안만 라운더가 권력 공백을 채울 것을 명확히 하였다.

교토 코뮌의 위기

내부 노선 갈등

키류 모에카를 위시한 대다수 라운더 조합원은 사회주의 성향이었으나, 코뮌 위원회 투표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선출되었다. 특히 선출된 무정부주의자 중의 한 명인 오카베 린타로는 이전부터 라운더의 조합원으로서 모에카와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모에카는 위원회가 성립되었으므로 라운더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자들만 추방한 채 계속 사회주의자들의 비밀조직의 형태로 온존해 있었다. 코뮌 위원회 내에서 졸지에 소수파가 된 사회주의 세력은 특유의 강력한 조직력으로 무정부주의 세력을 축출해낼 계획을 지속적으로 꾸몄고, 오카베를 필두로 한 무정부주의 세력 또한 비밀리에 사회주의자들에게 사용할 목적의 사제 무기들을 제작하였다. 코뮌 말기에는 두 세력은 통합된 지휘 체계 없이 독자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실수인 척 상대 세력을 공격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경찰의 진압

이러한 내부 갈등에도 코뮌은 한동안 유지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교토의 경찰이 코뮌에 투항하여 코뮌을 강제로 해체할 막강한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방의 경찰력들이 규합되어 교토 코뮌을 압박하자 코뮌군은 번번이 패하였다.

최후

1월 13일을 기점으로 교토 코뮌은 이미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고 위원회 청사 및 인근 지역만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는 상태였다. 모에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라운더를 움직여 무정부주의자들을 대거 축출할 계획을 세우나 미수에 그치게 된다. 경찰은 코뮌 위원회 및 협조자들을 물색해 체포하고, 교토 코뮌은 14일 키류 모에카가 탈출 도중 총살당한 뒤 완전히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