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 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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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의 역대 대통령
신센 시대
신센 막부 역대 쇼군
1대 2대 3대 4대
나가야 쿄타 오토리 아시스케 타가와 미에나리 오누치 시다요리
난세이 시대 역대 대통령
나가야 쿄타
(일본어: 長屋巨多)
長屋巨多.jpg
나가야 쿄타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나가야 쿄타
(長屋巨多)
주요 직책 타이난 공화국 대통령 大統領
타이난 왕조 민정대신 民政大臣
생몰연도 1826년 3월 10일 ~ 1891년 6월 23일
임기 기간 타이난 공화국초대 대통령
(1872 ~ 1877)

나가야 쿄타(일본어: 長屋巨多)는 타이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타이난 왕조 당시에는 민정대신을 역임했으나, 공화파와 함께 타이난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별명이었던 군주 대통령(君主大統領)[1]으로도 불리는 경우가 많다.

초기 이력

막신(산센 막부의 가신)이었던 나가야 무치타로(長屋笞太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1년에 츠키센 개항(月串 開港) 이후 해양 기술과 선박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져서, 선박을 수리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19살때 홋카이켄(北海縣) 해안가를 일주하기도 했다. 이후 난카이 왕립대학에 해양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로서 평가받던 카가 아시타루를 만나기도 했다.[2]

1857년에는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네덜란드에서 5년간 포술, 항해술 등을 배웠다. 유학 생활 중 국제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서양 서적들을 번역하면서 서양식 병학과 사진술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이러한 기술을 눈여겨 보던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민정대신으로 발탁하였고, 그는 근대적 토지 증명서인 "치분쇼"(土文書)를 처음으로 실전에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이난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서양에서 넘어온 공화 사상이 타이난 전역에 팽배해지고 있었으며, 칸시마 해전(喚島 海戰)에서 대패하자 모든 책임을 당시 조정에 떠넘기게 되었다. 조정은 급변하는 정세를 조율하기 위하여 애썼으나, 오히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이면서 근왕파와 공화파 양쪽에서 지지를 잃고 말았다.

나가야 쿄타는 과거 카가 아시타루를 통해 만났던 오토리 아시스케를 통해 공화파의 지도자가 될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했으나, 이미 조정에 대한 민심과 지식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여러 번 설득 받은 뒤에야 비로소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자유에 맞서 살고, 침략에 맞서 죽자.(自由と一緒に住んで, 侵略にマッソ死ぬと。)"라는 발언을 통해 공화파를 단숨에 휘어잡기 시작했고 근왕파와 조정에 맞서 '만민이 평등한' 공화국(共和國)을 세울 것을 결의했다.

공화파의 지도자로서

당시 막부의 통치자였던 쇼군, 미나미 도요노부(南豊喜)는 상황을 혁파하기 위하여 일련의 개혁 정책을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실패나 무위로 끝을 맞이했으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강력한 "퇴양수국"(退洋守國)을 정책을 외치면서 츠키센 개항 당시에 열렸던 항구들을 모두 폐쇄하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3] 이에 조정(朝廷)도 공고한 전제 군주체제의 잔재를 유지시킬 필요성이 있었기에 막부와 뜻을 같이하였다.

공화파와 반 막부 세력[4]은 미국, 영국과 같은 서양 세력들과의 독자적인 교류를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수입된 신무기를 가지고 융장군(戎裝軍)이라는 무장 집단을 결성시켰다. 나가야 쿄타는 융장군의 총지휘관으로서 반 막부 연합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만민정권"(萬民政權)의 수립을 요구하며 막부의 해체를 요구하면서 군사 동원을 일으키려 하자 막부-조정군 역시 서양에서 수입한 근대적 무기로 대항하고자 했으나,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밀리는 양상이 점차 벌어지자 무력을 통한 항전을 포기하고 마침내 1871년, 난세이켄(南背縣)에서 극적으로 만나 도요노부가 쇼군직을 내려놓고 막부를 해체할 것을 결의하면서 반 막부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조정은 야마다 사다이츠(山田定逸) 테이쿤을 중심으로 절대 군주제 수립을 위한 묵언 항쟁이 시작되었다. 반 막부 세력 중 일부 역시 이에 가담하여 "테이쿤을 중심으로 한 왕정 체제를 유지하자."(帝君を中心とした王政体制を維持しよう。)라는 말이 공고연히 퍼져나갔다. 위기감을 느낀 쿄타와 공화파는 단숨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신센의 기습(新川の奇襲)을 일으켜 야마다 사다이츠를 볼모로 하여 테이쿤에서 내려 올 것을 강압하였고 이에 사다이츠는 "왕정 폐환에 대한 결사문"을 읽음으로서 마침내 조정-막부의 폐막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주도권을 잡은 공화파는 왕정 복환을 요구하는 세력들을 융장군으로 탄압하였고, 1872년에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단언하면서 제1대 타이난 대통령 선거를 치루어 나가야 쿄타가 초대 대통령이 됨에 따라 완전한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추진하는 데 성공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미국의 공화제를 모티브로 하여 각각 상의원(上議院)과 하의원(下議院)을 개설하여 양원제를 추진하였고, 잔존 반 공화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카이몬 전쟁(開門 戰爭)을 일으켰다. 이에따른 토벌령을 발포하여 치안 및 준군사조직이었던 신텐구미(新天組)를 통한 과도적 정권 이양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도입하였다. 또, 개항으로 인한 기존 도매 체계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회송법(回送法)을 제정하여[5] 주요 수출품을 공화국의 거점지로 하던 난세이 도(南背部)[6]를 경유해 항구로 발송토록 할 것을 법으로 제정해 놓음에 따라 수출품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공장제 수공업(메뉴팩처)가 득세할 수 있었고, 이로써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이 가능해졌다.

또, 교육령(敎育令)을 발포하여 근대적 의미로서의 교육 체계를 활성화토록 기여하였고, 교육 과정에서 외학(外學, 영어-네덜란드-포르투갈어 등 외국어를 통틀어 이루던 말)의 교육을 필수 과정으로 편입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 작업을 다지기 시작했다. 또, 포루토가루 풍세서(ポルトガル 風世書)를 번역할 것을 지시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일에 나서기도 했다.

1877년, 헌법으로 정한 5년 단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후임 정부에서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이른바 "걸어다니는 자문기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한편,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오가사와라 제도를 영유권으로 포함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고 "남만의 오지에서 벗어나 서쪽을 꿈꾸자."(南蛮の奥地から脱して西を夢見てみよう。)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사후와 평가

1891년, 노년의 나이로 풍토병에 걸려 숨을 거둠에 따라 국가장을 치루었고, 현재는 타이난 왕립공원에 이장되었다.

타이난 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지금의 왕정이 복고된 타이난에서도 이 시기를 좋게 보는 측면이 많은 만큼 의외로 나가야 쿄타의 인지도나 평가는 후하게 쳐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개혁주의자로서 일본과 함께 거의 제국주의를 표방할 것을 주장했을 정도로 근대화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만큼의 성과를 거두어 내기 위해 노력했기에 학계에서도 쿄타의 평가는 과장이 될 정도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각주

  1. 이는 그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을 잘 드러내는 별명이기도 하다.
  2. 특히 이 만남은 그에게 공화주의에 대한 이념에 동경을 가지는 계기를 가져왔다고 학계에서 추측하고 있다.
  3. 서양 사상과 문물의 침투는 그동안 공고했던 막부 체제를 부정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한 반 막무 세력들의 결집을 유도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 왔다.
  4. 공화주의를 이념적 사상으로 여기지는 않으나,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화파와 뜻을 같이 했으며 이들은 테이쿤(帝君)을 중심으로 한 절대 군주정을 실현시킬 것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만인이 평등한 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이들도 있는 등 다양한 군상이 밀집하여 있었다.
  5. 초기의 타이난 공화국은 의회에서 결의된 조약이나 법문을 대통령이 승인하는 형태였다. 또, 대통령은 이러한 법률안을 의회에 동의를 받아 곧장 선포할 수 있었고, 이마저 선포할 여력이 안될 시에는 대통령령(大統領令)을 발포할 수 있는 등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미하였다.
  6. 명목적 수도는 여전히 신센이었다. 이후 5대 대통령인 다카우에 미노루(高上実縷)가 취임한 뒤 수도를 난세이 도로 이전함에 따라 난세이 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