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쿠데타 (우리들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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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52년 3월 장제스국민당 우파와 군부를 등에 업고 일으킨 군사 반란. 이로인해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쑹칭링등 공산당국민당 좌파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했으며 장제스의 1인 독재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배경

저우언라이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염증

저우는 자신이 추진할 사회주의 정책에 큰 반발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국민당 중도파를 설득하여 어느정도 적정한 민생안정의 선에서 소극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다만 쑨커등 일부 중도파들도 집단농장이나 성장 없는 분배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하기는 했다.
저우언라이는 유사시 공산당을 방어할 수 있도록 이른바 ‘명예 사업’을 내세운 숙군 작업을 실시해 중일전쟁때 활약한 원로 장성들을 제대시킨 뒤 국민당이나 공산당에 입당시켜 민간 정치로 나오게 만들거나 은퇴시키고 그자리를 젊은 좌파 장교로 채웠다. 또한 비밀리에 군을 장악하기 위한 좌파 장교들의 비밀모임 ‘적군회’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다른 장교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적군회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장교들을 감시하는 소련의 정치장교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조직은 ‘명예 사업’으로 인해 장성들이 은퇴한 후에 결성되었고 군에 밝은 인사들 마저 축출당한 뒤였기에 국민당은 물론 일부 공산당 인사들도 알 수 없도록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일부 젊은 장교들은 물론 일반 지식인 계층과 시민들마저 점차 늘어나는 계급투쟁, 노동쟁의, 사회주의 이론과 구호, 선전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하나둘 저우언라이와 공산당의 활동을 비판하거나 외면했다. 또한 반적군 장교들은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에게 적군회의 정체와 활동 상황을 알렸다.

국민당 우파의 입지 불안

국민당 좌파는 저우언라이의 정책과 그의 국공합작체제를 찬성하였고 그의 집권을 물심양면 도왔다. 중도파 또한 저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쑨원의 유훈이 국공갈등의 소멸이었고, 또한 저우가 자신들 또한 등용할 것을 기대하며 그의 집권에 어느정도 찬동했다.
반면에 국민당 우파는 저우의 정책은 물론 그의 사상, 집권등을 모두 비판했으나 이로 인해 1950년 당대회에서 15인의 중앙위원중 단 2명만을 배출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후한민등 국민당 우파 세력은 외유를 떠나있던 장제스와 비밀리에 접촉했고 그에게 중국으로 돌아와 당권을 장악하라며 설득했다.
게다가 상기한 군권장악 시도로 인해 중도파들 마저 저우언라이에게 의심을 품게되었고 국민당 우파의 주장에 어느정도 찬성하기 시작했다.

전개

저우언라이의 실각과 쑹자오런 대행 체제

이러한 배경으로 1953년 1월 21일,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는 입법원에서 행정원장 불신임 투표를 진행하여 압도적인 찬성표로 저우언라이를 몰아내고 쑹자오런 대행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좌파를 이용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적군회와 친공산당 정치인, 국민당 좌파와 일부 중도파들을 설득해 자신이 다시 정권을 잡은 뒤 입법원을 해산시키고 다시 선거를 치룰 계획을 짰다. 그러나 이것이 저우의 헛된 바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월 쿠데타

1953년 2월 장제스는 중국으로 돌아왔고 즉시 군 인사와 우파 정치인들과 상의해 정권 장악 시도를 모의했다. 우선 장제스는 경정서장(경찰청장)과 옌시산등 옛 군 장성을 포섭해 반체제 혐의로 저우언라이와 쑹칭링등 좌파 인사와 적군회에 소속된 장교들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당부했다.
3월 2일, 저우언라이가 정부전복 기도 및 반체제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후 고발된 적군회 소속 장교들도 줄줄이 헌병에 의하여 체포됐다.
3월 7일, 장제스와 옌시산 그리고 반적군회 장교들은 난징 주둔 사단 두 곳을 이끌고 총통부를 포위하여 탕성즈 총통의 신병을 확보했고 놀란 탕성즈 총통은 난징과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그 계엄군이 이미 자신의 관저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을 알아 차렸다. 3월 8일 아침, 장제스는 자신은 반체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체제 행위를 하려고 하던 세력을 축출하여 중화민국의 헌정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공표했다. 아울러 4월 7일을 기해 모든 계엄령이 해제될 것이며 그 기간동안 계엄군에 대한 어떠한 적대행위도 반체제 행위로 규정하고 엄벌하겠다는 '호헌 10개조'를 발표했다.
3월 13일, 쑹자오런 행정원장 대행이 국민당 중앙위원회의 요구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옌시산이 선출되었으며 국민당은 3월 20일 긴급 당 대회를 열어 중앙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소수의 대의원만 참여하여 열린 긴급 국민대회에서 탕성즈 총통의 사직서가 수리되었고 후한민의 총통 대행을 선출하였으며 정식 정부총통 선거의 한시적 연기[1]를 의결하였다.
3월 20일, 국민당 당 대회에서 국민당 우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장제스 집권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국민당 중앙위는 장제스를 행정원장으로 추대했지만 장제스는 그것을 거절했고 대신 국방부장 자리에 앉았다. 앞서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임시약법을 공포하여 헌법을 중지시키고 국방부장에게 총통의 군통수권을 부여했다.
4월 초에 들어서 전국 각지의 적군회 장교와 쑹칭링등 국민당 좌파 인사의 신병이 모두 확보, 체포되었고 4월 2일 취임한 장제스 국방부장의 명령으로 계엄이 해제되면서 쿠데타는 성공하여 끝이 났다.

결과

국공연립정권 붕괴와 공산당의 몰락

저우언라이가 닦아놓은 국공연립정권은 붕괴되었고 쑨원이 주창한 국공합작은 사실상 끝이 났다. 5월 20일에는 옌시상 행정원장 대행이 ‘초공’을 선언하면서 공산당 인사에 대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공산당 국민대회 의원들과 입법위원들은 전부 장제스가 이끄는 헌병대에게 구금되었다. 저우언라이는 난징을 가까스로 탈출하였지만 상하이에서 체포되었고 타이완성의 자이로 추방되어 삼엄한 경비 속에서 유폐되었다. 왕밍이나 리리싼등 유력 인사들도 모두 산간 벽지로 뿔뿔이 흩어져 유배되었으며 이로써 공산당은 기나긴 침체기에 돌입하게 된다.

1953년 6월경부터 1954년 12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아직도 군에 남아있던 소수의 적군회 소속 군사들이 중앙정부에 불많이 많던 몇몇 유력 군벌들과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킨뒤 닝샤성정부를 장악하자 고무된 왕밍과 저우언라이는 타이완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반란군들은 모두 중앙 군대에게 진압되었고 반란 혐의로 왕밍이 3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공산당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적군회, 공산당 인사들은 신분을 숨기거나 밀항하여 타이완과 홍콩 각지로 흩어졌고 공산당은 간신히 그 명맥만 유지하게 되어 1976년 민주화 이후 공산당이 복권되었을 때도 통합에 아주 큰 걸림돌이 되었다.
  1. 명시적으로만 ‘한시적’이었지 실제로는 선거 실시 기간을 정하지 않았기에 사실상 무기한 연기나 다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