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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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우홀란트 식민제국
남태평양 제도
Zuid-Pacifische eilanden

1919년1945년 3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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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니우홀란트 연방위임통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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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코로르
정치
공용어 네덜란드어 (공식)
오스트로네시아어
정부 형태 위임통치령
국왕
1919년 ~ 1930년
1930년 ~ 1947년
남태평양 제도청 장관
1919년 ~ 1923년
1943년 ~ 1946년

빌럼 비츠셔 2세
빌셀레스터

얀 야코프 로후선 (첫 번째)
디르크 얀 더 헤어르 (마지막)
역사
 • 베르사유 조약
 • 남태평양 제도청 설립
 • 니우홀란트의 해외영토
1919년 6월 28일
1922년 4월 1일
1947년 7월 18일
기타
통화 휠던


남태평양 제도(네덜란드어: Zuid-Pacifische eilanden, 영어: South Sea Islands)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 때까지 니우홀란트 연방의 지배 하에 있던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을 말한다. 그 범위는 미국령인 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였다. 이 섬들은 1899년부터(마셜 제도는 1885년부터)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니우홀란트의 위임통치령(국제 연맹이 통치를 위탁한 지역)이 되었다.

역사

영토확장이 필요한 니우홀란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하였다. 영국은 동남아 지역에서 독일 제국군을 봉쇄해야 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동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니우홀란트에게 영국은 아시아에서 자국상선을 호위해줄 것을 부탁해왔으며 가능하다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독일군을 맡아주기를 원했다. 이에 니우홀란트 정부는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하며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4년 니우홀란트는 독일의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되어 패전국인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이 승전국들에게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남양군도는 1919년 6월,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니우홀란트 연방에게 배분되었다. 1922년 4월에 니우홀란트 연방은 이곳에 남태평양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부의 주도로 항만시설, 해군기지, 비행장 건설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부터 니우홀란트 이주민이 크게 늘어나 자위트 퍼시픽 인터네셔널, 바타비아 인터네셔널 등 니우홀란트의 민간기업이자 준(準) 국책기업이 남태평양 제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지역이 일본에 점령되었으며 일본군과 연합군간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1944년 6월 15일 미군과 니우홀란트군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사이판에 상륙하여 탈환하였으며 동년 6월 19일 마리아나 해전이 발발, 일본 해군은 여기서 패배함으로써 사이판의 일본 해군은 섬멸되었다.

6월 말에는 대본영이 사이판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전선은 더욱 더 후퇴하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남태평양 제도의 티니안 섬 하고이 비행장에서 리틀보이를 실은 B-29를 발진하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미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로 결정되었고,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남태평양 제도는 계속 니우홀란트의 신탁통치가 이루어 지게 되었다.

태평양 제도에서의 신탁통치가 종료되면서 이 지역들은 자치정부 수립을 거쳐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로 독립하였으며, 북마리아나 제도는 주민투표에 따라 독립을 포기하고 아예 니우홀란트령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에는 일본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북마리아나 제도의 중심지인 사이판에는 괌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관할하는 영사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산업

니우홀란트에서 플렌테이션 사업을 위주로 무역업을 하던 바타비아 인터네셔널은 남태평양 총독부로 부터 사탕수수 독점권을 부여받아 사탕수수를 재배했으며, 전분, 인광, 수산물 등을 생산하였다. 총독부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바타비아 인터네셔널은 세계상품인 설탕의 주요 생산지가 될 수 있었으며 해상 무역까지 전담하면서 이 시기 가장 성장하게 되었다. 남태평양 총독부, 니우홀란트 정부가 바타비아 인터네셔널와 함께 추진한 '남태평양 개발사업'에 의해 니우홀란트의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사탕수수, 카사바 재배 및 무수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열악한 음식과 주거환경, 무더위로 인해 들의 생활은 참혹했으며, 이때문에 1919년에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