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령 동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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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우홀란트 연방
네덜란드령 동인도
Hindia Belanda
Nederlands-Indië

1800년18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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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네덜란드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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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바타비아
정치
공용어 네덜란드어 (공용어),인도네시아어, 크레올어, 기타 원주민 언어
정부 형태 식민지
총독 P. G. 판 오버르스트라턴
토니 로빙크
빌럼 로데베이크
인구
1807년 어림 25,727,233명
기타
국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힌두교
통화 휠던


네덜란드령 동인도(네덜란드어: Nederlands Oost-Indië / Nederlands-Indië, 인도네시아어: Hindia-Belanda / Hindia Timur Belanda)는 1800년부터 1815년까지 니우홀란트 연방에 위치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해체 된 후 네덜란드가 1800년부터 직접 관리한 동인도 식민지로, 간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통치한 1602년~1799년까지의 기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존속기간으로 간주한다. 니우홀란트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통치기와 네덜란드 통치기를 구분한다.

대항해시대 이후 사용되던 ‘동인도’라는 개념은 좁은 의미로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 전체를 일컫었다. 넓은 의미로는 ‘서인도’ 과 대비되는 인도 자체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말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동인도 제도’ 혹은 ‘동인도’ 라고 지칭하면 현재의 니우홀란트 연방티모르 공화국을 가르키고 있다.

역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진출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하면서 여러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1602년 선구회사를 통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향신료와 사치품 무역을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1605년 포르투갈이 점유중이던 암본을 탈취하고, 1616년 반다 제도의 룬섬을 점령하였다.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9세기 중반까지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기 때문에 향신료 시장에서 육두구는 200년 가량 네덜란드-니우홀란트가 독점하게 되어 큰 이득이 되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이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구체적인 식민지 경영 방향이 마련되었다. 그 중 하나는 네덜란드 본국에 자본을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통한 식민지 경영이었다. 하지만 이는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원하던 스페인,포르투갈, 영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시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진출하고자 하는 유럽의 경쟁국들이 있었다.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쿤 총독은 현지 원주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동인도 제도의 원주민 집단 및 왕국 등을 공격하여 제압하고자 하였다. 1619년 쿤 총독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일시적으로 연합하여 가장 큰 저항세력인 반튼 술탄국을 공격하여 사실상 합병하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를 획득하고 오늘 날의 수도인 바타비아’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일시적인 연합은 잠시 이러한 확장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1623년 암보이나 학살사건이 발생하여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의 영향력을 확실시 하였다. 17세기 초 술탄 아궁의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한 자바섬 중부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비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섬을 통일 하고자 서진하였다. 수라비야를 지원하던 네덜란드 세력은 술탄 아궁 입장에서는 껄그러웠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1628,1629년 두번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바타비아를 막아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확대

1641년,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타이완섬에서 축출하였고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교류망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외에도 북술라웨시의 마나도에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솔로르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17세기 내내 티모르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는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하였고 자바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으나 이베리아계 세력을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축출하지는 못했다. 17세기 초 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육상전, 해상전 모두 패배하였고 특히 1642년 마닐라 해전에서는 우세한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함대에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역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플로레스섬 등 소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를 보유하였고, 티모르섬에서 섬의 분할을 높고 네덜란드와 대립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 역시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1643년~1644년까지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캄보디아 지역의 식민지 확보를 영영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섬에서 세력확장의 기회를 잡았고, 계속해서 외교적,군사적 성공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섬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술탄 아망쿠랏 1세의 실정으로 인해 내분이 발생하였다, 이때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결정타를 날리는 트루나자야 봉기(1674~1681)가 일어났다. 반란군에 대패하고 수도를 빼앗긴 아망쿠랏 1세는 이해관계에 덜 있는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내었고, 동인도 회사가 이에 응하여 반란군을 진압한 후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 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였다. 1680년대에는 반튼 술탄국에서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하여 승리하였고 이를 계기로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어 존속하다가 1815년 빌럼 로데베이크가 니우홀란트 연방을 수립하면서 멸망하였다. 마타람의 경우 바로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 3차례의 왕위계승전쟁을 겪으면서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서서히 뺏기다가 18세기 중반 제3차 마타람 왕위계승전쟁의 결과로 남은 영토들은 네덜란드 산하의 번국들로 분할되어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다.

17세기 후반 18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 섬에서 공격적인 확장으로 섬 전체를 사실상 장악하였다. 특히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부유한 국가들을 세력권에 편입하면서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더 강하게 행사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반튼 술탄국을 편입시키면서 수마트라 남부 람풍의 후추 처분권을 획득하였고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간섭하면서 병합하였으며,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을 병합하면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동인도 회사의 몰락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세력은 전세계적으로 상당하였으나, 동시에 영국과의 경쟁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영국은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충돌할 지점들이 많았고,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제4차 네덜란드-영국 전쟁에서 연달아 네덜란드가 패배하면서 영국의 우위가 확실해졌으며, 제4차 네덜란드-영국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1700년대 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의 등장과 주변 유럽국들과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의 침공을 받고 점령되어 1795년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프랑스 괴뢰국이 되었다. 대내외적인 압박으로 엄청난 경영난에 처한 동인도 회사는 1796년 바타비아 공화국에 의해 국유화 되었고 1799년 12월 31일 최종적으로 칙허가 만료되어 해체되었다.

프랑스 점령에 따라 영국으로 도피한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5세는 영국에 대프랑스 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규 서한으로 네덜란드령 인도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 행정관들에게 영국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인도와 동인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상당 부분이 잠정적으로 영국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동요하는 식민정부를 바로 잡기 위해 파겨된 빌럼 프레드릭은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동인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인도 회사의 잔존 세력과 식민정부의 관료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에 피터르 총독을 찾아가서 네덜란드의 식민 정부로 있기를 설득하였고. 이 결과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네덜란드 세력에 남게 되었다. 이들을 규합한 빌럼 프레드릭는 대프랑스 공동전선에 참전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루이 보나파르트가 보낸 다엔덜스의 총독 취임을 막은 네덜란드 세력들은 프랑스군과 바타비아 군의 위협에 대비하여 동인도에서 방비를 강화하였다. 당시 총독이었던 피터르 판 오버스튼레이튼은 병력과 물자의 수송을 원활하기 위해 자바섬을 동서로 관통하면서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는 약 1,000km 길이의 그로테 포스트흐트(우체부 큰길)을 건설 및 개통하였다. 이 길은 오랜 기간 자바섬의 물류 대동맥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자바 북부해안도로로 보수 및 확장되어 현재 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허나 도로 건설 과정에서 원주민 인부들을 강제로 징집하거나, 토착 세력에 강압적으로 노동력 제공을 명령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토착세력에 대해서는 무력을 사용하여 반발을 무마시켰다. 더불어 원주민 인부의 노동 환경은 극히 열악하였고, 질병 등 여러요인으로 인해 수천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1]

또한 피터르 총독은 바타비아에 군사학교를 세워 전쟁에 대비했고, 안토니오 판 디먼 총독 재직시절에 완성되어 150년 이상 쓰였던 바타비아 성체를 헐고 새로이 지었다. 바타비아의 행정 중심지도 17세기부터 쓰였던 구시가지 지역에서 벨테브레던(Weltevreden)으로 옮겨졌다. 수라바야와 스마랑에는 새로 무기 공장이 지어졌다. 1810~1811년, 자바 중부에서는 토착 귀족 라덴 롱가 프라위라디르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라덴 롱가와의 공모혐의를 산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2세를 체포한다는 명분하에 네덜란드군이 1810년 12월 욕야카르타 술탄국을 침공하여 술탄을 퇴위시키고, 아들 하믕쿠부워노 3세를 새 술탄으로 옹립하여 보호국화 하였다.

식민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자바섬의 토착세력 욕야카르타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 내부에서 반발을 샀다. 특히나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하믕쿠부워노 3세가 물러나고 다시 하믕쿠부워노 2세가 재집권하여 공공연하게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또한 이걸 수라카르타가 이용하여 욕야카르타와 식민정부간의 분쟁을 일으킬려고 하였다. 이에 피터르 총독은 자바섬의 안정화 필요성을 판단하였고, 1812년 6월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1,300명을 파견하여 욕야카르타를 침공하고 점령하였다.

피터르 총독은 반항적인 술탄을 폐위하고 하믕쿠부워노 3세를 복위시킨 후, 군권과 외교권 더불어 행정권을 빼앗아 욕야카르타를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고 욕야카르타에서 그로보간, 크두, 지팡 등 영토를 쪼개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편입시켰다. 또한 1812년 8월 18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라카르타를 침공하여 보호국화 하였다. 군사적 행위를 통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자바섬에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침공과정에서 욕야카르타에서는 1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였고, 수라카르타의 경우도 2만여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당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해체

1815년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퇴하여 네덜란드가 빈 회의에 따라 독립하였다.

  1. 1815년 출판된 빌럼 솜(William Throm)의 《자바의 정복》(The Conquest of Java)에 따르면 24,000명이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