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젠스어: Nellyzar Konársy
메번스어:Regname Nellyzaar
넬리자르 왕국
국기 국장
표어 Király, partsa ez konársy
여왕이여, 왕국을 지켜주소서
국가 "여왕이 보고계신다."
Király figsey.

넬리자르의 위치
수도 베르테스트Vértest
정치
공용어 비젠스어, 메반스어
여왕
Király
클로뢰시 아제른 페멜사크
Clorölésh Azérn Fémélsák
섭정
Kormázáök
미벨른 아룰뤼
Milvérn Alulü
역사
왕정복고 C.785년 4월 32일
 • 멜버프 조약 체결 C.787년 5월 12일
 • 미벨른 정권 수립 C.793년 2월 8일
지리
면적 약 43,454 ㎢
인구
C.790년 어림 약 2,234,000 명
경제
통화 코로뉘(Kórónü)

넬리자르 왕국(비젠스어: Nellyzar Konársy 넬리자르 코나르시)은 C.785년에 건립된 국가로서 넬리자르 국민공화국(Nellyzar Embéréközsasá)이 넬리자르 국민군을 지휘했던 이젠타 알케자(Ezénta Alkezá)가 이끄는 넬리자르 왕정복고 세력이 넬리자르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소멸됨에 따라 당시 로바뢰-페멜사크 왕가(Házel-Lovárö-Fémélsák)의 클로뢰시 아제른 페멜사크(Clorölésh Azérn Fémélsák)를 여왕으로 추대하고서 입헌군주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국호

국명인 넬리자르(Nellyzar)는 과거 중부 오렌타(Közép-Oréntá) 지역에서 존재했던 네르질 왕국(Nerzil Konársy)에서 유래되었다. 네르질 왕국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하였던 넬리자르인이 주체가 되어 수립되었다는 것에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자 넬리자르 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헤뤼 빌제바흐(Aherü Vilzébáh)가 국명으로 정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이후로 위 명칭이 정착하게 되었다.

역사

넬리자르의 역사
Nellyzar Történem
고대
Pősia
중세
Középri
근세
Mödepri
현재
Lorserű
네르사트비아
Nersatvia
네르질 왕국
Nerzil Konársy
헬스마르틴스 제국령
Helsmartins Heladosászá
네르엘 공국
Nerel Regség
넬리자르 민주공화국
Nellyzar NéKözsasá
넬리자르 국민공화국
Nellyzar Embéréközsasá
넬리자르 적색정부
Pinoskomány
넬리자르 왕국
Nellyzar Konársy

협상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굴욕적인 트룬 조약(Trianoni Trun)을 체결하면서 상당수의 영토와 인력을 잃은 넬리자르 민주공화국(Nellyzar NéKözsasá)의 국내 정세는 막연하였다. 패전에 책임을 지고서 민베르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한 뒤, C.783년 10월 28일에 베르테스트(Vértest)에서 국민 의회가 형성되고, 그 의장에 메빌르 카를레스(Mervir Cárlés)가 선출되었다. 그는 전쟁 이전부터 넬리자르가 협상 전쟁에 참가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반전주의 입장을 대변하던 인물이었다.

카를레스 의회 정부는 곧 국내적, 국외적인 위급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였고, 그는 종전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후 넬리자르 내에 소수 민족에 대해서 완전한 자치권을 약속하였으나, 상황은 넬리자르의 양보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 소수 민족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치가 아니라 독립 그 자체였다. 넬리자르의 영토가 더욱더 축소되는 것은 명백할 수 밖이 없었다.[1]

메빌르 카를레스는 곧 민주적인 선거법, 토지 개혁의 실시를 비롯한 각종 정책이 발표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공산당에서 극우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당이 결성되었는데 결정적으로 C.784년 1월 20일에 넬리자르 국민공화국의 건립을 선포하면서 이전에 넬리자르 민주공화국이 기존의 경직화, 구시대적 한계를 드러내던 과도 공화정의 시도였다면 국민공화국의 궁극적 목적은 "넬리자르인들의 근대적 민족 민주국가 수립"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에서 큰 변혁을 겪었다.[2]

그러나 카를레스 내각은 극좌 · 극우파를 동시에 억압하면서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베르테스트의 수많은 실업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시위를 막지 못하였다. 또한, 약속한 토지 개혁의 실시는 그 복잡한 절차 때문에 효과적인 결실을 보지 못하면서 점차 내각의 구심점이 와해되고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농민들은 무질서와 폭력으로 자본가들의 대토지를 몰수하였고, 도시에서는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무분별한 국내 정세에 이어 대외적인 새 충돌이 생겨났다. 종전 중립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승전국들은 넬리자르로부터 영토적 희생을 강요하여 왔다. 승전국의 이 같은 강요에 격분하여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게 된 넬리자르의 극좌파는 혁명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극좌파들의 정치적 집단이었던 적색동맹(Pinosvetség)은 카를레스 내각의 사퇴를 종용하고서 혁명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 과도 정권은 기업들을 모두 국유화하고 금융 기관, 교육 기관도 국유화하였다. 이러한 과도 정권의 과격한 정책은 토지 개혁 부문에서 농민의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인민집단적 농장의 건설을 목표로 한 과도 혁명 정부는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지 않았다. 토지를 갈망하던 농민은 과도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점차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민중의 대변자로서 선언한 구체제 인사들과 넬리자르 국민군은 대대적인 왕정복고를 통한 "구체제 민주정권으로의 이양"을 내걸고 전국에서의 민중 봉기를 종용하면서 과도 혁명 정권은 사실상의 소멸을 인정할 수 밖이 없었고, 이에 국민군 지휘관의 이젠타 알케자가 후임 정권으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왕정복고 및 근대적 입헌 정치를 통한 민주 자유 국가 수립을 내걸고 클로뢰시 아제른 페멜사크를 여왕으로 추대하고서 왕국의 재성립을 선언하였다.

C.787년, 이젠타 알케자의 과도 내각이 멜버프 조약(Trianoni Mélbúrpsh)을 통해서 사실상의 영세 중립국을 보장받을 것을 인정받게 되면서 그동안 대외적인 전쟁 위협에서 두려움을 느끼던 민중들은 호응하였다. 그러나 C.793년에 발생한 사리에타 총격 사건으로 이젠타 알케자를 비롯한 다수의 과도 내각 인사들이 피살됨에 따라 극도의 정치적 혼란이 예상되었으나, 사실상 과도 내각의 2인자였던 미벨른 아룰뤼(Milvérn Alulü)가 새로운 섭정(Kormázáök)으로 취임하면서 안정화를 되찾게 되었다.

사회

넬리자르는 자살률이 굉장히 높아 거의 오렌타 지역에서 최상위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이후 바르벤(Varben)이 자살률 최상위로 등극하게 된 뒤, C.800년대 이후로는 점진적으로 자살률이 감소하여 C.800년대 들어서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아무튼 왕국 성립 이후 초기까지는 자살률이 매우 높아서 타 오렌타인들에게 전반적으로 우울한 나라라는 관념이 자리잡아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3]

또한 협상 전쟁밀렌시 전투(Battle of Milensi)[4]로 인하여 가뜩이나 적은 성인 남성 인구는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으며, 현재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도 인구의 다수가 여성의 비율이 1:7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으며, 정부 주도의 강력한 성별 통제 정책도 실시되고 있으나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이때문에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인식이나 권리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고 있으나 점진적으로 쟁취하게 된 것이 아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진행된 형태인지라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안고 있다.

종교

대부분의 넬리자르인들은 네슈트 정교회(Neshut Orthodox)가 우세한 편인데, 이는 과거 넬리자르 독립전쟁(Nellyzar Forralmi Hárú)에서 재정과 인적 지원을 담당하던 이들이 넬리자르에 위치했던 네슈트 교구들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독립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종주국이었던 헬스마르틴스 제국(Helsmartins Heladom)의 탄압과 학살을 당하면서도 고난과 도덕성을 지켜냈다는 인식 덕분인지 사회적으로 성직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크다.

그럼에도 현재 종교계의 현실은 냉담하기만 한데, 지나친 세속화와 종교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종교인을 자처할 뿐, 제대로 된 교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건물과 문화재들이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명목상 신자 수도 계속 줄고 있고 교리 교사, 신학자 등 교회의 일꾼들도 크게 모자라기 때문에 수많은 난점을 안고 있다.

참고로 네르질 왕국의 초대 국왕인 베르뉘누스 1세(Vérnünus I)가 네슈트의 성자로서 인정받음에 따라 현재 수도인 베르테스트의 그를 기리는 성 베르뉘누스 성당이 있다.

그외에 아르헨 성공회(The Arhenian Church)가 네슈트 정교회의 뒤를 이어 두번째로 많은 신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신학적 성향과 다르게 역사적 이유로 세속적 윤리에 대한 관점이나 정치적 스탠스는 생각보다 반공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탓에 중앙집권적 성향이 강한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정부 지원을 받는 탓에 친정부적인 정치 성향을 띄고 있기에 여당의 독주 정치에 지지 기반으로서 하나의 주축으로 인정받고 있다.

각주

  1. 유일하게 독립을 원치 않았던 곳이 바로 넬리자르 왕국의 월경지인 코스탄츠(Cóstánz)이다.
  2.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구체제의 지도적 정치가들이 '반혁명 정부'를 위시한 넬리자르 국민군(Nellyzar Embéré Hadseg)이라는 일종의 사병 집단의 형성에 도움을 주어 공화정 붕괴에 기여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3. 사실상의 섭정의 일인 독재 체제의 구축과 함께 선거 환경이 여당에 매우 유리해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재 요소가 산재된 국가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4. C.786년, 이르지엔의 북부 도시였던 밀렌시(Milensi)에서 넬리자르 왕립군이르지엔 국경부대간의 총격전을 의미하며, 이 전투로 넬리자르는 약 3만 명에 달하는 성인 남성이 희생이라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