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관식
盧寬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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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9년 2월 11일(1919-02-11) (105세)
해성국 해성국
사망 1998년 추정
국적 해성국 해성국
직업 물류회사 기사
소속 해성 물류회사

노관식(중국어: 盧寬湜)은 해성국의 해성 물류회사 기사이자 초대 명예시민상의 수상자이다. 7.14 학살 당시 첨관인 출신의 기자였던 오리쿠치 마키와 함께 해성 행정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해성 공화국에 추악한 진실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한 위인이기도 하다. 그의 노력으로 해성 공화국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며, 왕정복고의 태동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생애

그의 정확한 생애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해성 노씨 출신임에도 별다른 본가와 접점이 없었기에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다가 물류회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일본어를 잘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에 따라 오리쿠치 마키와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물류회사의 운전기사로서는 의외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오리쿠치 마키와의 만남

1976년 7월 14일 오후, 오리쿠치 마키가 7.14 학살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시도하자, 선뜻 응하였다고 한다.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잘하는 편은 못되었다고 하며, 학살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대학생들의 평화 시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오리쿠치 마키가 대학생 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나서자, 이를 말리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진압군이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던지면서 무력 진압을 강행하자, 마키와 함께 급히 어느 건물에 숨었다가 도망치듯이 나온 뒤에, 트럭에 탑승하였고 인근에 숙박집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마키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러한 참상은 듣도보도 못한 일이라고 횡설수설하였다고 한다.

7월 15일 오전, 마키와 함께 취재를 하던 도중에 사복과 곤봉 및 방패로 무장한 내부 조사단에게 발각된 뒤 잡히게 되면서서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마키의 말로는 온 몸에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고 피투성이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대학생들과 마키의 도움으로 내부 조사단에게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날 내내 부상을 입은 시위대들이 몰려있는 지하 구호소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 날 만큼은 마키도 취재를 접었다고.

7월 16일, 어느정도 회복한 노관식은 마키와 함께 시위 참상을 알리기 위한 취재에 본격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으며, 오후부터는 마키의 테이프를 내부 조사단과 진압군, 감식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자 통에 숨기는 등에 치밀한 작전을 짰다고 한다. 다행히 마키를 안전하게 공항까지 데려다 주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마키에게 다음에도 또 이 곳을 방문해 달라는 약속을 받고는 더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망

1978년 무오복벽 이후 마키는 다시 해성국을 여러 번 방문했으나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해성 노씨측에서도 해당 인물을 수사했으나, 그런 인물은 없다고... 전했으나 1998년, 노관식이 암 투병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종친회에서 공식 발표하면서 마키측에게 해당 사실을 따로 통보했다고 한다. 죽기 전 노관식은 "마키가 나를 찾는다면 나란 사람은 없게 하라."라고 했으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종친회에서는 노관식 스스로가 이슈화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7.14 학살 이후에는 물류회사에서 해고된 뒤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종친회에서 표명했으며, 종친회가 도움을 주려하자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사후

해성 노씨 종친회 측에서는 노관식을 가문을 빛낸 위인으로서 추대하였으며, 해성국 측에서도 충현원으로 시신을 안장한 뒤, 흔히 "노관식상"이라고 불리는 명예시민상의 초대 수상자로서 그를 지명하였다. 해외에서도 그와 마키의 일화가 전해지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대한민국 측에서는 5.18 당시의 힌츠페터와 김사복의 관계와 비슷한 일화라고 하며 적극 소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