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크라이나 공화국

Зелена Україна,젤레나우크라이나
Зелений клин,젤레니클린
Закитайщина,트란스케세이
녹우크라이나 공화국
30px
19171942  

Flag of Green Ukraine.png Coat of arms of Green Ukraine.png
국기 국장
독립 공화국(1917-1922),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1922-1942)
표어 Світло Світу 세계의 빛
Map of Green Ukraine.png
진한 초록색이 실질 영토, 연한 초록색이 명목 영토
수도 니콜라예스크나아무레
정치
공용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공화정
대통령 유리 글루시코-모바
Юрій Глушко-Мова,1917-1942
역사
 • 녹우크라이나 독립 시도 1917년 6월 11일
 • 연합군의 시베리아 개입 1918년 - 1922년
 •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 편입 1922년 11월 10일
 • 백일전투(白日戰鬪) 발발 1942년 1월 - 3월
기타
국교 우크라이나 정교
현재 국가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녹우크라이나 공화국(우크라이나어: Зелена Україна)은 1917년 부터 1940년까지 존속하여 아무르 강태평양 사이 러시아 극동 지역에 있었던 우크라이나계 국가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극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려운 것을 짐작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은 극동에 경제, 사회, 군사적인 자생력을 갖춘 자국민 공동체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는 자연히 자국민의 극동 이주 정책, 이른바 식민이주(переселение)로 이어졌다. 이에따라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들이 상당수 극동 지역에 이주하여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젤레니 클린의 독립 선언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는 한동안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혁명의 중심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은 극심한 혼란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극동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사실상 붕괴된 러시아 제국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새로운 국가인 '극동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처음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18년 부터는 건국을 위한 여러 회의가 열렸다. 1918년 2월부터 4월까지 세차례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고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볼셰비키 적군 세력과 대치하던 백군 사령관 그리고리 세묘노프(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1890~1957)[1]가 민족 자결을 주장하면서 젤레나 우크라이나의 수립을 지지하기도 했다.

적백 내전과 연합군의 시베리아 개입

적백내전(赤白內戰)이 본격화 되자, 녹우크라이나는 초기에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였으며, 알렉산드르 콜차크(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의 시베리아 정부(Provisional Siberian Government)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콜차크의 백색 정권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1919년 4월, 러시아 백군볼가 강에서 러시아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배했고, 백군은 점점 무너져갔다. 유럽쪽 러시아에서 위력을 떨치던 유데니츠군, 러시아 남서부에서 위력을 떨치던 데니킨군은 1919년 하반기에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흐름은 시베리아까지 퍼졌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정부는 결국 1919년 11월 14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게 옴스크를 내줬다. 콜차크 부대는 이르쿠츠크까지 퇴각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새로 집권한 러시아의 공산정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 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파병했고, 영일 동맹에 의거하여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지리적 이유로 자국에 가까웠던 시베리아에 파병하여 적군과 싸웠다. 서부 전선에서 병력에 묶여 있던 다른 연합국에 비해 직접적으로 세계 대전에 참여치 않았던 점, 상대적으로 시베리아와 지리가 가까운 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은 녹우크라이나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다.

다른 연합국의 시베리아 파병요구에 대해서는 적극적 수용론과 소극적 참여론이 있었으나, 일본 정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인된 것은 당시의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성격에 따른 영토 획득의 야심, 러일전쟁 후에 획득하지 못했던 이권의 탈취 같은 지정학적 이유를 포함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이유로서 천황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가 일본에 까지 파급을 미치는 것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군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녹우크라이나의 연합군 거처를 마련하여 러시아 적군의 대항할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 백군의 붕괴가 가속화 되는 것을 체감했던 녹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유리-글루시코 모바(Юрій Глушко-Мова) 대통령은 비밀리에 일본군러시아 백군의 눈을 피하여 러시아 적군과 접촉하여 일본군러시아 백군의 지지를 비공식적으로 철회하고 이들의 군사적 활동을 방해하는 대신 극동에 대한 이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을 요청했다. 이에 러시아 적군 측에서 혼쾌히 응해줌에 따라 유리-글루시코 모바는 녹우크라이나 시민군(Зелена Україна руше́ння)을 설립하여 러시아 적군을 은밀히 지원하기 시작했고, 시베리아일본군의 동태와 콜차크 정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제공하였다.

일본군은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베리아의 개입한 연합국 전체의 병력의 약 10배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을 개시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공간에는 러시아 적군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한 게릴라 전법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따라 일본 내에서도 철병여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는데, 시베리아 원정군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무단 이탈 하는 등의 행위가 잦아졌다. 결국 1922년 2월 25일, 콜차크 정권의 붕괴와 함께 사실상 목적을 잃은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 편입

적백내전 직후의 혼란한 러시아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은 시베리아를 비롯한 극동 지역에서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또한 일전의 유리 글루시코-노바와 비밀리에 맺은 협력안에 응하고자 녹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대한 전면적 직할 편입에서 "녹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Зелена Україна Радянський 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으로 편입되는 선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하였다. 또한, 일본의 추가적인 시베리아 개입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위해서 소련의 중공업 육성을 위한 5개년 계획(Five-Year Plan)을 녹우크라이나 형편에 맞는 녹우크라이나 4개년 계획을 도입하였고, 점차 녹우크라이나는 극동에서도 상당한 경제 강국으로 성장을 겪게 된다.

내부에서는 녹우크라이나 전국위원회(Зелена Україна Національний комітет)라는 자체적인 정치 체제를 조직하였는데, 상부 조직인 소련공산당 대회(Съезд КПСС/Congress of the CPSU)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Central Committee of the CPSU)에 영향을 받지않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특히 녹우크라이나 전국위원회는 당시 러시아 백군에 가담했던 상당수의 인물들도 참여했던 만큼 독자노선을 걷는 성격 또한 강했다. 이는 소련이 사실상 '녹우크라이나'를 소련 내 만연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난 위치로 인식하였으며, 극동 지역에 기반된 사회 양상으로 중앙에 간섭이 어려웠던 점, 일본 제국을 비롯한 극동에 당면한 국제 분쟁을 방파제로 삼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 등 다양한 이유로 녹우크라이나를 따로 분리하는 경향이 강했다.[2]

태평양 전쟁과 백일 전투

1941년 11월, 진주만 공습(珍珠灣 攻襲)을 기점으로 하여 태평양 전쟁(太平洋 戰爭)이 발발하자, 녹우크라이나는 일본 제국(日本帝國)에 침략에 대비하여 기존 녹우크라이나 시민군을 확대 조직한 녹우크라이나 인민군(Зелена Україна Народна армія)을 통해 대비코자 했다. 그러나, 녹우크라이나 인민군의 상황은 열악하여 제대로 된 보급 체계도 없었을 뿐더러 전략 전술에 대한 이해도 역시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과거 러시아 백군을 지휘했던 그리고리 세묘노프(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나 표트르 브란겔(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 등의 대다수 지휘관들 역시 제1차 세계대전(Перша світова війна) 당시의 구시대적 전략, 전술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일본 제국일소 불가침 조약(日蘇 不可侵條約)에 의거하여 녹우크라이나 점령에 대한 고민에 나서게 되었으나, 당시 관동군(關東軍)의 지휘관이었던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郎) 사령관과 요시모토 사다카즈(吉本貞一) 참모장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녹우크라이나와 소련은 엄연히 다른 국가"라는 판단하에 당시 만주국(滿洲國)에서 녹우크라이나로 국경을 넘어 지금의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일제히 기습 공격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백일 전투(白日戰鬪)에 시작이었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녹우크라이나 인민군은 패배를 거듭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주요 도심을 내주었고, 이것은 녹우크라이나가 백일 전투에서 패착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 소련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은 분개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유럽 일대에서 진행되던 대조국 전쟁(Велика війна)으로 녹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함에 따라 관동군 수뇌부와 극동 협정(極東協定)을 통해 녹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 권리를 인정하되, 과거 녹우크라이나와 맺은 소련의 이권을 보장함에 따라 제국령 녹우크라이나(Імператорська територія Зелена Україна)가 수립되었다.[3]

자치 공화국 해체

각주

  1. 백일전투(白日戰鬪) 이후에는 일본 식민 제국(日本 植民 帝國)에 의해 제국령 녹우크라이나를 통치하는 제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2. 그럼에도 녹우크라이나의 지리적 특징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부동항으로서의 가치가 높던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대한 반영구 조차를 시도했다.
  3. 사실 이오시프 스탈린백일 전쟁으로 녹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전적인 이권이 훼손된다는 점에서 분개했을 뿐, 그 스스로도 대단히 민족 억압적 정책을 펼진 인물로서 녹우크라이나에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진 권리가 침범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