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달마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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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달마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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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국가 최후의 달마티아인

국가 위치
수도 누아스플라토
최대 도시 누아비클레아
정치
공용어 달마티아어,이탈리아어,크로아티아어
역사
정부수립  
 • 누아달마타로의 대탈출 1795년 3월~1799년 8월
 • 누아달마타 자치정부 수립 1802년 5월 20일
 • 누아달마타 공화국 수립 1822년 8월 9일
지리
면적 4,168km2 ()
시간대 CET (UTC+1)
DST CEST(UTC+2)
인구
2017년 어림 3,158,906명
경제
명목 32,908$
HDI 0.897 (2014) 2016년 조사)
기타
ISO 3166-1 DL, DLM
도메인 .dl



누아달마타 공화국(언어 오류(dlm): Núadalmata Ripubblica 누아달마타 리푸블리카, 이탈리아어: Nuovo-dalmazia Repubblica 누오보-달마치아 레푸블리카)는 슬로벤슈치-흐르바츠키-보스나 연방의 바로 옆에 위치한 누아달마타 군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국민 다수가 17세기` 말~18세기 초 혁명정국에 혼란한 상황을 피하고자 피난하여 정착한 달마티아인의 후손이며, 그 영향으로 라틴계 민족에 로만스어군의 달마티아어를 사용하는, 남동유럽에서 유이한 라틴계 국가가 되었다. 이들은 특성 상 자치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식으로 출발하였다.


지리와 기후

아드리아해 한복판에 있는 누아달마토 도서군에 있으며,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 일대가 지반 침강으로 인해 지금과 같이 되어, 동쪽에 면한 해변의 대부분이 절벽이므로 서부 해안 도시를 제외하고는 동부에서는 누아비클레아, 누아스플라토 등의 몇몇 해안 도시만이 항구 기능을 할 수 있다. 이런 위치 때문에 지중해성 기후를 띄며, 그때문에 여름에 건조하면서 엄청 덥지만, 겨울엔 따뜻하면서 비가 많이 온다.


역사

누아달마토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누아달마토는 달마티아와 한 뿌리에서 나온 지역으로서, 본래는 달마티아의 일부로 간주되던 아드리아 해 한복판의 무인도 제도들이었다. 또한 상기한대로 달마티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해 세웠으므로, 달마티아에서 떨어져 나왔다 간주해야 한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달마티아와 한 뿌리로

달마티아의 이름은 기원전 1천년에 경 아드리아 해 연안 동부 지역에 살았던 '달마태'라고 불리는 어느 일리리아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달마티아는 로마 공화국이 네레트바 강 남쪽에 보호국을 설립했을 때와 기원전 4세기와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0년, 기원전 168년) 사이에 일리리아 왕국의 일부였다.

"달마티아(Dalmatia)"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 후반과 기원전 1세기 전반 즈음에는 크르카 강과 네레트바 강 사이의 동부 아드리아 해 연안 지역, 현재의 누아달마토 공화국의 강역에 해당하는 누아달마토 도서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정의하고 있었다. 로마의 일리리쿰(Illyricum) 속주가 기원전 32-27 년경 공식적으로 설립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로 천천히 통합되었으며, 기원후 9년에 달마티아인들은 마지막으로 판노니아인과 함께 일련의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침내 패배해 멸망되었고 10년에 일리리쿰 속주는 판노니아와 상 달마티아(달마티아 수피리오르), 하 달마티아(달마티아 인페리오르)의 두 지역으로 나뉘어 모든 정복지를 커버하기 위해 내륙 지역으로 퍼졌는데, 이때 달마티아 속주의 영역은 디나릭 알프스와 동부 아드리아 해안 대부분에 해당했다.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 (Theodore Mommsen)은 자신의 저서인 『로마 제국의 지방』에서 모든 달마티아가 4세기에 완전히 로마화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그 시대의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한 결과 로마화 과정이 다소 선택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해안과 내륙의 도시 중심지는 거의 완전히 로마화 되었지만 시골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일리리아 인들은 강력한 전파 과정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일리리아어)를 계속 사용하고, 자신의 신과 전통을 숭배하며, 일부 경우에만 로마 행정과 정치 구조에 적응한 사회 정치 부족 조직을 따랐었고,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서로마 제국이 붕괴했을 때, 이 지역은 고트족 통치자인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르 대왕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달마티아를 서기 480 년에서 535 년까지 통치했는데, 535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원정에 의해 동로마(비잔틴) 제국에 정복, 일단은 로마의 강역으로 회복되었다. 비잔틴 제국도 일단은 로마였기 때문이다.


달마티아의 중세시대는 인근 강대국들 사이에서 약해지는 비잔틴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나중에 헝가리와의 동군연합(同君聯合)), 보스니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달마티아를 놓고 3파 각축전을 벌이던, 격렬한 경쟁의 시기였다. 당시 달마티아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충돌하고 농촌 배후국(자고라)을 통제하지 않고 도시 국가와 같은 기능을 하는 해안 도시로 구성되었다. 민족적으로, 달마티아는 로마의 한 속주로 시작하여 독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라틴계(로만스) 문화를 가지고 달마티아어와, 달마티아인이라는 민족, 달마티아 문화를 형성한다.


중세 초기에 비잔틴령 달마티아는 639년 지역 중심지 살로나를 파괴한 아바르 족의 침략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이 사건은 살로나인에 의해 스팔라툼(스플라토, 스팔라토, 스플리트)인근에 있는 디오클레티아인 공간에의 정착을 허용하여 도시를 세웠고, 이는 라구사(라귀아, 두보로브니크)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이런 아바르 족의 대규모 침략은 슬라브 남부의 대규모 이주로 이어졌고, 결국 서기 925년 경, 토미슬라프 공작은 크로아티아 왕국을 세우고 그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자클루미아로 확대했으며, 그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확장되기 전이자 갓 출발한 라구사 공화국만이 존재하는 달마티아를 크로아티아 왕국이 차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의 동맹국인 크로아티아 왕은 달마티아의 수호자 지위를 받았으며 사실상 초기 중세 달마티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중세시대가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크로아티아는 1102년 헝가리, 슬로베니아 등과 동군 연합을 맺고, 라구사 공화국이 성장하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달마티아로 확장해 들어올 때를 노리며,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달마티아에서 권력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없었고 마침내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해 서쪽으로 무력화 되었으며, 따라서 이 두 진영은 달마티아 지역의 투쟁에 관여하여 균형이 바뀌도록 유도하며 간헐적으로 달마티아 지역을 통제했다. 에메릭 왕의 통치기간 동안, 달마티아의 도시들은 조약에 의해 헝가리에서 분리되었으며, 도시국가를 만들거나 베네치아 공화국에 흡수되었고, 이는 달마티아에서 헝가리 통치의 일관된 기간이 1241년 몽골 제국의 헝가리 침공으로 끝나면서 본격화되었다. 몽골 제국의 군대는 봉건국을 심하게 손상시켜, 그 결과로 같은해 벨라 4세는 달마티아에서 클리스 요새의 남쪽으로 피신해야 했을 정도이다. 그 뒤 몽골인들은 다음 타깃으로 달마티아를 지정, 몇년동안 달마티아 지방의 도시들과 라구사 공화국을 공격했지만 결국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때마침 겹친 칭기즈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 제국의 군대는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달마티아에서도 몽골 제국의 군대의 공격을 면한 코토르는 그로 인해 소금 거래의 주요 도시가 되었으며, 이 지역은 공격적인 법 집행으로 악명 높은 세르비아 황제 현명공 두챤의 통치하에 14세기에 번성하여 특히, 코토르 만을 사업하기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1389년 보스니아 왕국의 창시자 인 트브릇코 1세는 코토르와 시베니크 사이의 아드리아 해 연안을 통제 할 수 있었고, 심지어 리예카와 그 자신의 독립 동맹국 인 라구사 공화국까지의 달마티아 해안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이는 헝가리와 베네치아가 1391년 트브릇코 1세의 사망 후 달마티아에 대한 각축전을 계속하면서 일시적인 안정기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 결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국 전체는 왕위 계승전을 벌이며, 이로 인한 20년간의 내전이 계속되면서 점점 내부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나폴리 왕국의 앙주 왕가와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왕가. 전쟁 중에 패배한 경쟁자 인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 (Ladislaus of Naples)는 달마티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10 만 두카트에 팔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달마티아 진출은 이로서 완료되었으며, 그 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는 훨씬 더 중앙화 된 공화국이 1420 년까지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를 제외한 모든 달마티아를 지배하게되었으며, 377년(1420-1797)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구사 공화국 아래에 놓인 통치가 나폴레옹의 베네치아 공격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이 몰고 온 전화, 누아달마타 도서군에 핀 공화국의 꽃

나폴레옹은 프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종료를 선언하면서 전 유럽을 제패할 패권으로 부상할 준비를 하였고, 그 결과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며 온 유럽이 전화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로서 북부 이탈리아와 서부 독일을 파죽지세로 밀고 간 나폴레옹은 1797년 베네치아를 함락시키며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이윽고 1803년 프랑스는 라구사 공화국까지 멸망시켰다. 그 사이에 수 만명에 달하는 달마티아에 살던 베네치아와 라구사의 유민들이던 라틴계 달마티아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이때까지 무인도 투성이이던 누아달마타 도서군 일대로 피난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에 걸친 달마티아인의 피난이 끝나고, 그 결과 누아달마토는 수 년만에 무인도 도서군에서 약 6만명이 사는 하나의 지역으로 변했다. 이들은 피난을 오면서 왕과 같은 구심점이 없이 급속도로 사회를 조직해야 했기에, 주민 자치를 필두로 한 민주적 문화가 발달했으며, 도시는 목조 건물과 석조 건물이 섞였지만, 목조 건물들이 훨씬 많을 정도의 빠른 가건물 구축이 이뤄지고, 1802년 이들 주민 자치의 대표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그와 동시에 누아달마타 도서군 일대의 달마티아인이 누아달마토라는 하나의 국가 정체성을 사실상 형성하며, 달마티아인의 민족성과 달마티아어를 화려하게 부활시킴에 이르면서, 나폴레옹의 정복욕을 충족하기 위한 프랑스의 침략을 그때마다 물리쳐냈으며, 나폴레옹 전쟁이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의 반 나폴레옹 전선 형성 및 승리로 종전하며 끝난 이후, 1815년 빈 조약으로 누아달마토 일대는 독립국가로 인정받는다. 그 이후 누아달마토의 주민들은 강력한 중앙 집권의 공화국을 원했으며, 이는 당대 절대왕정으로의 역행의 분위기와 함께, 누아달마토 자치정부의 정파 간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그러나, 여전히 주민 절대다수는 공화국 수립을 바랬으며, 이에 1822년 의회 선거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누아달마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와 동시에 발트 공화국의 정착과 함꼐 유럽의 봉건적 반동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1829년 그리스 독립 전쟁, 1830년 벨기에 독립 혁명 및 프랑스 8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봉건적 반동 질서의 종료가 임박해오고 있었다.

근대, 서유럽의 변방

결국 1848년 혁명으로 유럽의 봉건적 반동 질서는 종료,이에 누아달마타 공화국은 1849년 세계 최초 여성 참정권을 이룩하였고, 이 즈음 1848년 유럽 혁명의 여파로 인해 누아달마타 공화국으로 소수 이탈리아인과 소수 크로아티아인의 도래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에 누아달마타 공화국에서는 관대하게 시민권을 주었으나, 이탈리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국가 전복을 노리려고 하였다. 이에 누아달마타 공화국에서는 헌법수호를 위해 달마티아인 위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1차대전이 끝나기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1차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략에 대해 상륙거부를 성공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누아달마타 공화국은 이를 통해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금 얻어 20년의 짧은 전간기동안 고속 성장을 구가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평등 요구에 즐을 날리면서 달마티아인 우대 정책을 대놓고 이어,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시정 요구를 무시했으며, 결국 2차대전에서 알바니아와 함께 이탈리아의 침략 타겟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의 경험을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또 다시 상륙거부를 실시하고, 전 국토 요새화를 성취함에 이어 국운뿐만 아닌 달마티아인의 민족운을 건 결사 항전을 지속하여 추축국 세력이 가장 넓은 점령지를 지녔던 1941년 12월에도 영국과 함께 무너지지 않은 나라로 유명했다. 결국 1943년 말에서 1944년 중반까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연합군과 손잡고 양면에서 해상수송 중 전투 및 돌진을 통하여 시칠리아 전투의 연장선인 아드리아 해 해전을 벌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까지 송두리째 뒤집었다.

이로 인한 연합군 참전으로 인해 전후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아내고 마셜 플랜까지 받아낸 누아달마토는 공산화를 가까스로 비껴갔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고도경제성장을 겪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구 폭증으로 인한 문제가 불거져, 유고슬라비아와의 협의를 통해 달마티아 지역에 달마티아인을 역이식(!) 시켜버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구는 300만명 선을 전후하여 정체상태로 유지되고 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고도경제성장이 멈추고 장기 침체 상태에 들어가며, 결국 3만 달러대의 선진국이 되는 데에도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