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우시레타 백작령
Graafschap Nieuwsireta
1736년1795년
국장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주 (1736년 ~ 1795년)

니우시레타 백작령 (1700년대)[1]
수도 니우실바흐
정치
공용어 네덜란드 어, 사모아 어 등등
정부 형태 봉건제 (사실상 단일국가)
백작 모험백 윌리엄 (1736 ~ 1765)
침묵백 윌리엄 (1765 ~ 1795)
역사
 • 설립 1736년
 • 미와탕기 조약 체결. 1744년
 • 시레타 내전 발발. 1789년
 • 왕정 독립 선언. 1795년
기타
국교 가톨릭교회
개신교
(사실상 종교적 자유 허용)
현재 국가 보르지아


니우시레타 백작령(네덜란드어: Graafschap Nieuwsireta)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유일한 독립주(Onafhankelijke staat)였으며, 시레타 섬에 위치한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령이었다.[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원이었던 윌리엄 위셔트시레타 섬사모아 제도를 발견하여 선원들과 함께 상관을 설치한 뒤 영구적 정착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오세아니아의 3대 유럽 사회(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보르지아) 중 하나이며, 독립된 서구 사회를 유지하였다.

백작령의 성립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밀리면서 경제적인 혼란을 겪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불안정한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동인도 회사의 무역지를 확장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을 대신하는 중계 무역지를 찾기 위해 윌리엄 위셔트를 중심으로 한 개척 함선을 파견하였고, 이에 윌리엄 위셔트가 4년에 걸친 항해 결과, 시레타 섬사모아 제도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둔다. 윌리엄 위셔트는 선원들을 대표하여 시레타 섬의 상관을 설치하고 원주민 사회와의 평화로운 교류와 접선을 시도했고, 이것이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교역지 확장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닌, 이상향 건설을 꿈꾸고 있던 윌리엄 위셔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이주민 사회를 건설했고, 원주민 사회와의 협의를 통해 공존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다가 1736년, 일부 선원들을 네덜란드 본토로 귀국시켜 니우시레타 주의 수립을 인정하는 안을 보냈고, 네덜란드의 연방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내어 윌리엄 위셔트가 독립주를 세우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그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였다.[3]

미와탕기 조약과 윌리엄 암살 사건

1744년, 윌리엄 위셔트는 원주민 사회와의 동등한 조건에서의 조약 체결을 요청했고, 이것이 협의되어 원주민 사회의 독립과 자치를 보장하는 대신 니우시레타 독립주의 보호를 받는 다는 내용이 담긴 조약문을 지금의 니우아르반 주 지역인 미와탕기 지방에서 상호간 서명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와탕기 조약이다. 미와탕기 조약은 당시 팽배했던 백인 우월주의와 식민 사회에 모습에서 탈피한 상호 동등 관계에 기반된 평등 외교로서의 기조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나아가 시레타 섬 전역에 평등주의와 반인종주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4]

그러던 1965년, 이상향을 건설하는데 박차를 가하던 윌리엄 위셔트가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던 발타자르 스탠퍼드라는 청년에게 암살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윌리엄 위셔트의 사망은 원주민과 이주민 사회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들 사이를 조율하던 중재자가 없어짐에 따라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해지는 악영향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폭발하게 된 것이 바로 시레타 내전이다.

시레타 내전과 니우에브레데 편입

발타자르 스탠퍼드의 행동을 '의로운 희생'으로 여기며 그를 추종하던 집단인 백인 사회(Witte Samenleving)는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릴 것을 결의하고 백작령을 붕괴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희망하면서 1789년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윌리엄 2세와 그 일가가 거주하는 니우아젠타 궁을 포위하고서는 백작 일가를 볼모로 잡았고, 기존의 평화 공존 사회를 지지하던 백작파는 원주민 사회와 결탁하여 대항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백인 사회가 이끄는 용병 집단이 큰 우세를 떨쳤으나, 오노네 지다 남작이 이끄는 대항군이 미와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에 따라 내전을 끝을 맞이하게 되었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등 내전 직후에 오노네 지다의 남작 정권(Het regime van Baron)이 성립되어 일식적인 공포 정치가 수립되었다가 1791년에 백작에게 권력을 재이양하면서 공포 정치는 막을 내렸다.

한편, 1786년에 탐험가였던 제라르 코엔이 시레타 섬 동쪽에서 일련의 제도들을 발견하고서 '새로운 평화'라는 뜻의 니우에브레데를 발견하였고, 이후 니우시레타와 구별되는 백작령의 영지로서 구분 짓게 되었다.[5] 니우에브레데는 위셔트 왕국 수립 이후에 왕실령으로서 존속하게 되었으며, 본토를 다스리는 시레타 국왕 직과 명목상 니우에브레데를 다스리는 니우에브레데 영주 직이 구분되었다가 현재에 이르러 위셔트 왕가의 수장이 가진 일련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

왕정의 수립과 백작령의 해체

미국 독립전쟁에 프랑스가 참전하자, 네덜란드 공화국은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친프랑스, 친 미국 성향의 애국자당(공화파)은 친영적이었던 오라녜파에 반발하여 1783-1787년 동안 여러 차례 봉기했다. 공화파가 주요 도시를 차지했지만 오라녜파는 프로이센의 도움으로 통제권을 되찾아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고, 1795년 네덜란드 망명자들과 함께 프랑스 공화국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공화주의자들은 빌럼 5세를 추방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려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렸고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니우시레타 백작령은 이러한 본토 상황을 눈여겨 보고 있었고,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독립파들은 먼저 백작 일가를 설득하여 니우시레타의 독립을 선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윌리엄 2세는 니우시레타의 독립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았다. 결국 독립파와 백작 일가의 갈등은 윌리엄 2세 백작이 왕위를 아들인 데이비드 위셔트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니우에브레데로 잠적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서 막을 내렸고, 독립파는 새로이 법률을 제정하고 원주민 사회와 협의를 통한 연방제 형태의 국가 수립을 추진하였다. 1795년, 니우시레타의 네덜란드 공화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독립파들과 이를 이끌던 빌 밸런스는 니우아젠타 궁 앞에 설치된 단상 위에 나서서 독립 선언을 외치면서 위셔트 왕국이 수립하게 되었고,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의 탈퇴를 발표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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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굵은 붉은색으로 칠해진 부분인 백작령의 실질적 관할 지역이며, 아래의 사모아 제도는 명목상의 통치 지역이다.
  2.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가 형식적으로 니우시레타 독립주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네덜란드 연방의회에서 백작 작위와 독립주를 승인했던 형태였다.
  3. 니우시레타의 소식을 들은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을 비롯한 이들은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찾기 위하여 이주를 거듭하였는데, 이러한 풍조는 초기 미국 사회가 건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4. 이것이 나아가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식민제국들이 오세아니아의 자립권과 자주권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로 하여금 범-오세아니아 주의(Pan-Oceaniasim)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
  5. 한편 제라르 코엔은 위와 같은 탐험 실적을 인정받아 초대 니우에브레데 총독으로 승진하였다.
  6. 이때 영국으로 망명했던 빌럼 5세 일가는 니우시레타로 망명 갈 것을 요청했으나, 빌 밸런스는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여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