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다이모니아 제국의 역사에 관한 문서이다.

다이모니아 왕국

건국 신화

다이모니아 제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그 근간에 깔려 있는 신화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다.

왕국은 여러 명망 있는 귀족 가문에서 돌아가며 왕을 배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중 특히나 뛰어났던 가문[1]인 메넬라오스 가문이 한순간 왕가를 독점하였다.[2]

당시 권력을 독점한 인물은 아스테리오스 메넬라오스[3]인데,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정보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화적 이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당시 신격과 동일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아스테리오스라는 동명의 신이 다이모니아 신화에 실존하는데 해당 신을 초대 군주와 동일화하여 숭배하는 지역이 있는 것으로 그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건국

다이모니아 섭정국

공위 시대

다이모니아 제국

전제정

2차 다이모니아 섭정국

원인

황제 테오도루스 1세는 전제정으로 인해 제국이 문제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는데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민중의 뜻이 아닌 하늘의 뜻에 따르게 된 것.
  2. 서민들과 괴리된 황제가, 실제와 괴리된 신앙에만 빠지게 된 것.
  3. 유능함과는 무관하게 군왕이 될 수 있는 것.


이에 따라 전제정에 대한 개혁을 시행하였는데, 황가와 귀족층의 반발로 인해 개혁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결국 마무리짓지 못하고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4]

이러한 연유에 따라 테오도루스 사후 제국의 정치계는 복잡한 정세에 빠져들었는데, 진행되다 만 개혁의 진행 사항이었다. 미리 점지된 개혁을 진행할 후계자로 테르만티우스가 꼽혔으나, 이민족 출신의 테르만티우스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다. 법적으로 명시된 메넬라우스 황가의 권리에 대하여, 귀족이어야만 제위에 오를 수 있다는 조항은 폐지되었으나 다른 가문에 대한 제한은 철폐되지 않았다.

비상시국에 한하여, 제위를 계승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다른 인물이 제위에 오를 수 있다는 조항은 있다. 그러나 테오도루스 황제에게는 열 살 난 자식인 요하네스가 남아 있었으므로 그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했다.

테르만티우스 섭정

당시 제국에 가장 큰 위협은 엘리우스라는 인물과 미래주의로, 구시대적인 산물의 붕괴와 신문물의 도입이 격렬하게 주장되었다. 테르만티우스는 테오도루스의 영향을 받아 점진적인 개혁을 옹호하는 온건파로, 국가의 체계를 발전시켜 가능한 많은 이들이 개혁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5][6] 이에 대해 테르만티우스가 개인적인 권력을 탐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가능성은 적다.

테르만티우스는 미래주의에 대하여 훌륭하게 대처한 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장 큰 정적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엘리우스에게 가해진 파문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치 요인으로 데려와 아군으로 삼았다.[7] 이로 말미암아 제국은 시민의 지지를 강력하게 받을 수 있었던 동시에, 당연한 호민관 자리가 시민을 위해 소리 내는 것을 가로막던 이전 시대에 대해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테르만티우스의 대표적인 공적은 정치에 있지 않다. 그는 훌륭한 군인으로 유명했다. 다이모니아 제국의 정치는 군인 출신이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그는 군인 출신으로 그러한 관습법을 명백히 없애는데 노력하였으나, 그 자신은 승전과 개선식을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이는 테오도루스 1세의 계산에 따르는 것도 있었는데, 황제의 후계자로 적절한 것은 시민의 지지를 받는 것이라 보았던 그는 테르만티우스 등, 개혁파인 일반 시민, 이민족 등 출신의 능력이 특히 출중한 인물들에게 공적을 쌓아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테르만티우스는 섭정에 오르기 이전에 이미 많은 군공을 세워 제국을 대표하는 장군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의 극초기 패전으로 유명한 가이사릭시아 토벌전은 귀족들에 대한 믿음을 떨어트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당시 가이사릭시아는 테르만티우스가 출신한 민족국가로 다이모니아 제국의 조공국 혹은 속국의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제국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황제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싸움이 미친 영향에 대응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테르만티우스의 대응은 훌륭했다고 기록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평소 이민족 장군에 대해 적대감을 표하던 클라우디우스의 기록에서까지도 교차검증되었다. 권력자로 등극한 이후 많은 정치적 압박을 받았던 테르만티우스는 최대 일만의 정병을 징병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삼만의 가이사릭시아 보조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가이사릭시아 보조군은 최전선의 방어 병력으로 출중한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이모니아 제국군은 신대륙 식민지와 각 지방에 분산되어 숫자도 적은 동시에 테오도루스 1세 집권 과정에서 있었던 내전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9]

놀라운 일이지만, 초기에는 테르만티우스의 군이 우세하였다. 문제는 테르만티우스의 능력에 있지 않았다. 섭정은 충분히 그 적고 약한 군사로 반군을 제압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너무 많은 정적을 두었다. 1차 전투 후, 여러 회의 전투를 진행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적들은 테르만티우스의 움직임을 읽듯이 움직였다고 한다.[10] 테르만티우스는 배신자가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당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므로 가이사릭시아의 국가원수인 제 아비와 협상을 하여 그들의 자치권을 확장하였다.

귀족들은 이를 호재로 여기고 활용하려 했다. 테르만티우스가 가족애에 휩쓸려 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다는 것은 그들이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는 명분이었다.[11] 당시 귀족들은 유언비어를 시민들 가운데에 퍼트리고 수도로 귀환하는 테르만티우스를 미리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귀족들의 편이 아니었다. 테르만티우스에게 가장 큰 행운이 이때 나타났다. 귀족들의 사병들마저 징병해 활용하던 테르만티우스는 특정 부대의 병력에서 자료와 맞지 않는 인력 사항을 발견한 것이다. 해당 부대의 사령관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실책이라고 하였으나, 테르만티우스는 해당 부대의 귀족을 반란군의 수괴로 선언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가이사릭시아의 섭정[12]이 평화조약의 대가로, 늦게나마 해당 귀족과 내통한 증거를 대왔기 때문에 반전되었다. 이후 많은 군인들이 자수하면서 증거는 확증으로 발달했다.

테르만티우스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보력을 총동원해, 수도로 돌아오기 전에 해당 귀족을 자극했다. 소문을 창작하고 접하는 정보를 통해, 자신이 한 일이 들켰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13] 곧장 자신의 사병들을 활용하고자 한 귀족에게 테르만티우스는 그 귀족의 사병에게 전투를 명령하였는데, 병력은 테르만티우스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가 이끌고 있던 파벌인 반개혁파 귀족들 일부가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같은 파벌이라는 점과 작은 증거들로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현재 연구에 따르면 당시 파벌 대부분은 확대 해석으로 심문을 당한 것이다.

해당 사건은 제국이 부흥할 수 있는 터전을 개발한 긍정적 양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제국의 지배력의 약화와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이모니아는 연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더욱이 독립적인 군사연합체의 부재는 테르만티우스 사후 가이사릭시아와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제국의 군사력을 직접 투사하여 방어하여야 하도록 이끌었다.

테르만티우스 시대에 즉시 발생한 반란도 만만치 않았는데, 테르만티우스에 의해 수많은 군벌 귀족들이 숙청된 이후, 경계의 약화를 틈탄 변경국가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사병들을 해체하고 신병을 교육시키는 동시에 식민 지배의 악화로 인해 군비 소모가 막대하며, 다이모니아가 경제적으로도 외세에 의해 붕괴해가고 있었다. 테르만티우스는 붕괴하는 제국 경제 상황에서 수탈되는 방향성을 조절하여 제국 부흥의 여지를 남기고자 황제의 영토에서 산출되는 금을 활용해 빚을 해결하고 군사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신기술의 도입은 지방 정권에 비해 극소수의 병력으로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지방 정권에서는 무작정 징병하고 보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14]

제국에서는 정규군을 편제하는 반면, 지방 정권에서는 정비되지 않은 행정 처리 등으로 인해 군인을 수적으로 불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예군인 제국군이 다양한 전술로서 승리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전황에 대하여 사십만의 반군 세력에 맞서는 일만 정규군의 싸움은 테르만티우스의 병력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테르만티우스가 가진 신전략에 대한 높은 이해도에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은이들과 같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또한 숙청당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는 것인데, 해당 사건으로 인해 테르만티우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 요하네스는 이제 막 성인이 되어 황제의 권환을 되돌려 받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르만티우스는 황제가 교육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권한의 일부분에 대한 제한을 확정시켰다. 더욱이 노바 다이모니아 총독부는 황제 개인의 소유지로 그 재산권은 황제에게 귀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테르만티우스는 거리낌 없이 다이모니아 제국 공공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하여 활용했다는 데 있다.[15][16] 황제는 이에 큰 불만을 품었으며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있음에도 테르만티우스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때 황제가 정말로 개인의 사욕을 위했는지, 테르만티우스의 타락을 염려하여 제국을 정상화하고자 했던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황제는 황가의 스승 아래에 수학하였으므로 전제정을 옹호하고 구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는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방어하고 있던 것은 테르만티우스라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였던지, 황제로서는 테르만티우스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께서 하시는 것에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라.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황제가 되겠다며 나온 이들은 얼마나 많이 있었더냐.

그들 중 성공한 이가 몇 명이나 되었지?

비단 성공한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대체 어떤 인물이 제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느냔 말이야.
테르만티우스

군인들은 테르만티우스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고 새 황제로 그를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지도자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테르만티우스는 황제에게 사죄의 편지를 적어 보내고 스스로 궁정에 출두해 사형을 받아들였다. 이후 병력들은 가이사릭시아로 넘어가 제국을 공격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신성 다이모니아 제국은 당시 병력들을 중심으로 가이사릭시아의 섭정 일데리우스를 황제로 추존하여 세워진 국가이다.

내전기

테르만티우스는 제국의 내전을 우려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했으나, 병사들은 그의 환상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테르만티우스 사후, 황제 요하네스는 편집증적인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테르만티우스의 개혁으로 인해 황제를 저지할 수 있는 인물은 민중들밖에 없었다. 민중은 친 테르만티우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황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매한 민중들이 권력을 잡는다는 것에 굉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짐은 제국의 정당하고 신성한 황제이다.

각지에서는 반군이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내고 있으나, 그들을 따를 이가 없음을 알고 있노라.

테르만티우스가 백성을 위해온 마음은 훌륭하지만, 그는 허황된 망상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루어갔도다.

결국 반역을 일으켜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짐은 그의 애민 정신을 본받아 배워왔고 이를 잃지 않을 것이다.

신민들이여, 짐은 그대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요하네스

완곡한 어법으로 시민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회수하고 전제적인 정치를 다시 펼칠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요하네스는 당시 그의 지지를 확고화하기 위하여 각지의 고위 군사령관에게 메넬라우스의 여성 친척들을 결혼시키고 그들을 귀족으로 격상하여 빈 자리를 채웠으며, 그들을 각개 메넬라우스 왕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급격히 강화된 귀족의 권력은 그들의 권력 기반인 군권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중앙 집권화된 군대가 다시 파편화되는 문제를 불러왔고, 황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왕관을 섭정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리미니우스 섭정

대재앙

노바 다이모니아 제국

각주

  1. 이 뛰어났다는 말을 해석할 때, 일반적으로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2. 신화에 따라서는 초대 왕이라고 하지만, 이전 기록에서 족장이라는 것과 큰 권위의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정적을 깎아내리는 의도인 것 같다.
  3. 다이모니아 왕국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초대 왕과 이름이 같은 군주의 때에 국가가 멸망한다고 전해진다. 아스테리우스 6세에 제국은 본토를 떠나고 말았으니 신화의 내용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테오도루스 1세의 부인인 에우도키아의 사주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제국의 전통에 따라 어린 자식이 제위에 오르게 되면 부모의 섭정이 존재하고, 전통적으로 집안의 어머니는 큰 대우를 받아왔는데, 여지껏 당연시되었던 제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5. 이에 대해 추가적인 의견이 있는데, 급진적인 개혁이 이뤄진다면 국가가 내전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귀족들은 구시대적인 산물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권위는 혈통에 따르는 것인데, 미래주의적인 사조에 따르자면 그것을 분명한 구시대로 보고 청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6. 황제인 요하네스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도 없으나 황제의 어머니인 에우도키아 또한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7. 이에 대해 제국의 미래를 팔았다는 의견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신대륙의 다이모니아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가설을 지지한다.
  8. 테르만티우스는 극렬한 친메넬라우스 인사로, 황가에 깊은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황가의 명예를 떨어트리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실질적으로 시민들에게 있어서 인민의 황제나 다름없는 위치에 오른 것은 틀림없다.
  9. 반론으로는 에우게니오루스 황제의 병력의 충성심이 부족하였을 것에 따라, 생존한 인원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이 경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첫째로 에우게니오루스 황제가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병력을 소모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 다이모니아 군에서는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충성심과 별개로 해당 전투에 진입한 이상 목숨을 걸었을 것은 확실하다. 단, 해당 전투에서 생존자가 기록에 일부 남아 있지만, 그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0. 섭정이 그렇게나 쉽게 움직임을 읽힐 사람도 아닐 뿐더러, 당시 진군에 관련된 정보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11. 귀족들이 실제로 사주하지 않았고 테르만티우스가 이러한 귀족들의 행동을 유도하고자 했다는 학설이 있다.-<테르만티우스는 진정으로 다이모니아에게 순수하게 충성을 다하였는가?> 율리우스 메넬라우스
  12. 서방에서는 국가 원수가 전제적이지 않은 경우 섭정을 사용하였다. 이는 섭정 시대의 영향이다.
  13. 다만 당시에 비 개혁파 인사들이 숙청당하면서 반 테르만티우스 인사는 역사를 남길 수 없었으니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14. 이를 뒷밤침하는 증거로 가이사릭시아에서는 다이모니아와의 평화 조약 이후, 독자적인 외교권을 획득하고,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국력을 발달시켰는데, 그 결과 주변 약소 세력들을 짓누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이는 다이모니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명예와 함께 이후 제국의 반란 때에 테르만티우스를 도와 참전한 것을 토대로 제국의 독립 지방 정권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15. 이를 바탕으로 테르만티우스를 개인의 사욕에 집중했다는 의견이 당시에 존재하였으나,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모든 종류의 봉급을 거부하고, 개인의 장원만을 활용해 생활을 유지했으며, 대부분의 노예 또한 해방하고 군인으로 활용하였다. 심지어 지주를 탄압하는 정책을 통해 소작농의 권리를 보장할 때, 누구보다 강한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스스로의 이득을 최소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16. 심지어 계산 끝에 생활 유지에 불필요한 재산은 전부 처분하고 국고에 기부하여 제국을 유지하는데 쓰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