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독일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고대

기원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발트해 연안 지역에 머물던 게르만족은 기원전 2세기경 남하를 시작하여 기원전후 무렵 선주민이었던 켈트족들을 몰아내고 라인강과 도나우강까지 진출했다. 로마에서는 이 땅을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50년경 갈리아 정복에 나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최초로 접촉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으나 게르만족의 호전성과 게르마니아의 울창한 숲을 이용한 게릴라 전투의 위험성을 깨닫고 곧 포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필적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자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게르마니아 전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라인강의 경계를 엘베강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은 로마 제국 역사를 통털어 최대의 정복 사업이라 할 만했는데, 무려 11개 이상의 군단이 투입되었다. 기원전 9년 시작된 게르마니아 정복은 기원후 4~5년경 엘베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기원후 9년 벌어진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이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참패를 당한 로마 제국은 이내 라인강 건너로 물러나고 만다.

이로써 게르마니아는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서 유일하게 로마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게르만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종교(북유럽 신화 및 아리우스파 기독교)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토이거부르거 숲의 전투의 승리를 오늘날 독일 정체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19세기 독일 통일 이후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태동한 역사관일 뿐이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세까지 독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19세기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크게 재부각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히 존재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세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 개념이 희박했고, 종교로서 기독교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중요했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라면 언어가 다른 것에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교황이 있는 로마를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여겼고 매우 중시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세 시대 독일인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10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과정에도 이러한 측면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중심, 로마 중심의 세계관은 중세 시대에 한정된 세계관일 뿐이며, 그러한 중세 시대조차도 게르만이라는 민족 의식은 분명히 존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5세기(1485년) 국명에 '독일 민족'을 추가하여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국호를 고쳤다. 중세 말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네덜란드 태생이자 스페인 국왕이었음에도 '숭고한 게르만'을 들먹거릴 정도였다. 아르미니우스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정체성의 기원으로 본 사람들은 이미 19세기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여긴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르미니우스라는 라틴어 이름을 헤르만이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처음 부른 것도 루터였다. 무엇보다도 고대 시대에 벌어진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군에 굴복한 게르만 부족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나아가 그들은 폭압적인 식민 통치를 하던 로마인들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게르만족은 수많은 로마군 포로들을 생포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은 포로 교환을 통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포로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부려먹거나 외국에 노예로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이나 노예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로마인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포로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는데 로마인에 대한 게르만인들의 적개심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나중에 복수를 위해 게르마니아로 재출병한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 도착하여 시체들이 나무에 박혀 있는 잔혹한 장면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복수를 포기하고 시신만 수습하고 돌아갔다.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저술한 유명한 게르마니아에 당시 게르만족의 특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게르만인들은 호전성과 복종심, 일부일처제, 혼전순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타키투스가 바라보는 게르만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귀한 야만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 제국 말기인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훈족의 압박 등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인 481년 클로비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다.

중세

독일사의 중세는 일반적으로 중세 초기(Frühmittelalter), 중세 전성기(Hochmittelalter), 중세 후기(Spätmittelalter)의 세 시기로 분류된다. 이 세 시기를 나누는 기준점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중세 초기 - 서로마 제국 해체(476) 혹은 카를 대제의 대관(800) ~ 잘리어 왕조의 시작(1024) 혹은 하인리히 3세의 사망(1056) 중세 전성기 - 잘리어 왕조의 시작(1024) 혹은 하인리히 3세의 사망(1056) ~ 대공위시대 중세 후기 - 대공위시대 ~ 막시밀리안 1세의 즉위(1493)

프랑크 왕국 시절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세워진 프랑크 왕국(481~843)은 게르만족의 최초의 국가 정치 체계였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에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 독일 중서부 지역에서 일어나 점차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는 서부 프랑스와 남서 독일의 슈바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인 531년에는 다른 게르만족 국가인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특유의 분할 상속제 때문에 여러차례 왕국이 분열되었다가 재결합되기를 반복했다. 이후 751년 궁재 피핀이 국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메로빙거 왕조가 끝나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카를 대제 때 활발한 영토 확장으로 프랑크 왕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작센, 바이에른, 롬바르디아 등이 이때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정복 사업과 문화 정책 면에서 큰 업적을 세운 카를 대제는 800년에 그동안 공석이었던 서로마 황제 자리에 대관하여 로마 제국의 명맥을 계승하였다.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베르됭 조약). 이때 루트비히가 차지한 동쪽 지역(현재의 독일 지방)이 동프랑크 왕국이 된다. 훗날 프랑스로 이어지는 서프랑크에 비해 동프랑크는 카롤루스 대제 때 새로 병합된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각 공작령들의 독립성이 강했고 이는 독일 분권주의의 기반이 된다.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각 부족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이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카롤링거 왕조 마지막 국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작령인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했고 이들을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라고 한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재위 900~911)이 어린 나이에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동프랑크 공작들의 회의를 거쳐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재위 911~918)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1세 시절 왕국 내 각 부족 공국들의 자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콘라트 1세 역시 후사 없이 죽는데,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당대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재위 919~936)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작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던 경쟁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 슈바벤 공작이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결국 하인리히는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이권과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협상을 통해 공작들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아 919년 국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와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하인리히 1세부터 독일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하인리히 1세는 '독일국'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자신을 '독일인(게르만인)들의 왕'이라고 불렀다. 하인리히는 왕국의 결속력을 강조했으나, 아르눌프의 바이에른 공국 등은 사실상 별도의 왕국과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렸다. 공작들은 자치권의 확대를 추구했지만 프랑크 왕국 시절과 달리 더이상 왕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편 콘라트 1세 이래 공작들의 동의를 얻어 국왕으로 선출되는 관례는 이후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하는 관례로 이어지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이 된(936년) 그의 아들 오토 대제(오토 1세)는 962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아직 정식 명칭은 '(로마) 제국'Imperium이었지만)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른바, 독일 제1제국)은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단일 민족 국가로 변화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대 시대로부터 이어온 게르만족의 전통이 기인한 바가 컸다. 고대 시대 게르만족은 하나의 정치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뉜 가운데, 특유의 종사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이 발전하여 중세 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중간에 프랑크 왕국 시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로 로트링겐, 프랑켄, 슈바벤은 비교적 초기에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작센, 바이에른이 프랑크 왕국에 포함된 것은 카롤루스 대제 때의 일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곧 왕국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서쪽 일부를 제외한다면 독일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 시기는 실질적으로 반세기 정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동프랑크 왕국 시대로 이어지자 반세기 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던 5대 공작령이 독립성을 강하게 유지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자 5대 부족 공국들의 힘이 강해졌고, 다음 왕들은 줄줄이 5대 제후들의 승인을 거쳐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을 구성하던 5대 공국은 차츰 분할 상속과 분쟁들을 통해 수없이 쪼개지게 되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분할 상속의 관습이 있던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서쪽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서부 독일은 수없이 많은 소규모 영주국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시기가 짧았던 동부 독일은 분할 상속이 적용되지 않아 비교적 큰 규모의 공국과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 때문에 동부 독일에서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작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의 대공국과 왕국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흘러가면서 황제의 실권이 점차 약화된 것도 제국이 수많은 영주국으로 쪼개지던 추세와 궤를 같이 한다. 황제의 실권은 현실적으로 그가 세금을 징발하고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직영지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작센 왕조들의 황제들은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작센 공국에 기반하여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센 공국은 빠른 속도 분할되어 갔다. 게다가 초기에는 어떠한 제후들에게도 속하지 않은 황제 직영지가 있었는데, 그런 황제 직영지도 점차 소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정체성을 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제국의 황제는 독일 내부의 강력한 지방 귀족들을 제압하지 않은(못한) 채, 그 정체성을 이탈리아에서 찾고 이탈리아를 차지하여 그 정치적 토대를 두려고 하였다. 독일의 민족적 신화가 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등을 거치며 황제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결국 누구도 황제로 선출되지 못한 대공위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직후에는 스위스 아르가우 일대에 조그마한 땅을 가진 듣보잡 합스부르크 출신의 루돌프 백작이 선출되면서 황권이 다시 한번 약화되었다.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금인칙서가 반포되었다. 카를 4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의도에서 금인칙서를 제정했으나, 유력 제후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황권을 일부 양보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황권을 약화되고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제국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중세 성기에 한자동맹 등 상업이 융성하던 독일은 1450년 무렵부터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독일 민족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에 대한 탐구로 게르만인상을 독일인상으로 대입시켰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같은 책에서 등장한, 로마인들이 그려낸 게르만인을 독일인과 동일시하였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마르틴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인문주의자들이 그려낸 독일인상은 개신교와 연결이 되었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탈리아인(또는 프랑스인)과 대비되었다. 따라서 민족적인 대립 구도가 발생하였고 독일 민족의 초기 형태가 형성되었다.

근대 초기

막시밀리안 1세와 제국개혁 (1495 ~ 1517)

1493년 프리드리히 3세가 50년 가량의 긴 치세를 끝마치고 사망하면서 즉위한 막시밀리안 1세는 독일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에 위치한 황제로 평가된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와 저지대 지방을 획득한데 이어 당시 떠오르던 에스파냐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기 기반을 닦은 인물로 유명한데, 신성 로마 제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통합하고자 한 제국개혁(Reichsreform)을 실시하여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495년부터 시작된 막시밀리안 1세의 제국개혁은 제국 내 최고재판소 설치 및 제국관구(Reichskreis)의 설치 등으로 대표되는데, 소기의 목적이었던 제국의 중앙집권적 통합에는 실패하였으나 향후 나폴레옹에 의해 제국이 해체되기까지 근 300년 동안 제국이 유지되는 근간을 마련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막시밀리안 1세는 1508년에 최초로 교황의 대관 없이 대관식을 치룬 황제가 되어 중세 후기부터 이어져 오던 세속권력의 종교권력에 대한 우위를 확실시하였다.

종교개혁과 교파 시대 (1517 ~ 1618)

16세기에 접어들어 신성 로마 제국은 마르틴 루터의 등장과 함께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1517년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와 함께 시작된 종교개혁은 전 유럽 세계를 구교와 신교로 갈라놓았는데,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유럽 내에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으나, 이는 결국 독일 내에서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독일 농민전쟁(1524-1526)과 구교 제후 및 신교 제후 간의 전쟁인 슈말칼덴 전쟁과 같은 일련의 전쟁들을 유발하였으다.

카를 5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상속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세계 제국을 이룩하려 애썼으나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 권위가 지속적으로 추락하였다. 결국 이러한 종교전쟁의 끝에 결국 1555년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 하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으며, 군주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관철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30년 전쟁이 벌어지는 1618년까지의 시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 내 제후국에서는 교파(Konfession)를 중심으로 국가 권력의 강화 및 사회적 규율화(Sozialdisziplinierung)가 이루어졌고, 이 시기를 흔히 교파 시대(Konfessionelle Zeit)라고 부른다.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의 종교 정책은 비교적 관대했으나, 막시밀리안의 아들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점점 현실을 외면하였고 이로 인해 종교적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루돌프 2세의 긴 치세 동안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결국 160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주도 하에 작센, 브란덴부르크와 같은 신교도 세속 제후들은 프로테스탄트 연합(Protestantsiche Union)을 결성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1609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의 주도 하에 마인츠, 트리어, 쾰른과 같은 성직 선제후들은 가톨릭 리그(Katholische Liga)를 결성하였다.

30년 전쟁 (1618 ~ 1648)

루돌프 2세의 후계자 마티아스는 제국 수준에서 개신교와 타협을 모색했던 총리 멜히오르 클레슬에게 자신의 정부를 대부분 맡겼다. 또한 합스부르크의 세습 지역에서는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 및 교파화 과정이 강화되었는데, 특히 1617년 마티아스의 추정 상속인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가 선출되었던 보헤미아에서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에 보헤미아의 신교 귀족들이 황제가 파견한 두 명의 제국 의원을 창 밖으로 내던지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벌어졌고, 이와 함께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후 독일은 30년 간의 전화로 몰아넣는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마티아스 황제가 사망한 후 1619년 신교 연합의 지도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에 새로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가톨릭 리그의 군대와 함께 보헤미아로 진격하였고, 보헤미아군은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프리드리히 5세가 지배하던 팔츠 및 오버팔츠 지방을 점령했으며,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의 선제후 자리를 얻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인 보헤미아-팔츠 전쟁은 가톨릭 및 합스부르크 진영의 승리로 끝났는데, 1625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홀슈타인 공작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는 틸리 휘하의 제국군과 보헤미아의 귀족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였고, 가톨릭 세력은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와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의 크게 증가한 권력을 우려하여 1630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였다.

보헤미아-팔츠 전쟁과 덴마크 전쟁을 연이어 승리로 끝낸 가톨릭 세력에게 가장 큰 위기는 163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참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독일 남부까지 멀리 침투하였고, 틸리 백작이 전사하는 위기 속에서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복권시켰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가 전사하고 1634년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하는 일련의 사건을 거친 후 1634년 뇌르틀링엔 전투의 승리 후 황제군은 다시 한 번 승기를 잡았고, 1635년의 프라하 화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자 한 가톨릭 프랑스가 신교 측에 합류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급변하였다. 이후 전쟁은 프랑스-스웨덴 동맹과 에스파냐-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세력의 대결 양상으로 흘러갔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1637년 선출된 새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1642년부터 계속된 평화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고,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에는 소규모 기사령과 주교령을 포함한 총 382개의 제후국들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며 땅에 떨어졌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위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확인하는 제국 의회의 주권과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재차 강화될 수 있었다. 황제의 권력은 프라하 화약 당시에 비해 제한되었지만 황제의 영지와 협력한 적극적인 제국 정치는 여전히 가능했다. 또한 종파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었으며,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 역시 폐기되었다.

무엇보다도 30년 전쟁은 독일사에 있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제국의 많은 부분은 황폐화되었고, 전쟁 전 1,600만에 이르렀던 독일 지역의 인구는 1/3이 줄어들어 한세기 지난 1750년경에야 전전 인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전체 인구의 10% 가량이 사망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30년 전쟁은 독일사에서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전쟁이었다.

바로크 및 계몽 시대 (1648 ~ 1789)

30년 전쟁의 종결 이후 독일 제후국들은 통제된 경제 및 사회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30년 전쟁의 파괴와 인구 손실에 대응하였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대형 제후국들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및 중상주의 정책의 영향을 받아 신분제 의회의 권력 제한 및 재정 및 군사 분야에서의 관할권 장악으로 특징 지어지는 초기적인 형태의 근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초기 근대 국가의 경우 군사력과 같은 폭력의 독점 및 관료 체제 정비를 통해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전쟁 기구로 거듭났고, 17세기와 18세기 유럽사에서 지속된 국가 간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이후 프로이센 왕국으로 성장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이러한 초기 근대 국가 체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정비한 국가였다. 30년 전쟁 중인 1640년 즉위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30년 전쟁의 상처를 재건하는 동시에 브란덴부르크의 국가 체제를 완비하여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1세 대에 이르러서는 1701년에 프로이센 국왕 직위를 획득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다만 현재의 역사가들은 1648년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유명무실한 체제에 불과하였다는 종래의 통념을 부정하고 있으며, 1648년 이후 국제적으로 제국의 체제는 내부 정비를 넘어서 점차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데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국 내 영방 국가들의 내부 통제력은 흔히들 불리는 '절대주의'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였으며, 국제적 주권 역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등하게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게오르크 슈미트와 같은 역사가는 상호 보완적 제국-국가(Komplementärer Reichs-Staat)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초기적인 근대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고, 영방 국가들은 제국을 잠식하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오히려 제국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이들은 근대 초 독일에서 나타나는 초기적인 형태의 민족 의식에 주목하면서 '구 제국(Altes Reich)'이라고 불리는 근대 초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 국민국가의 원형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념에 대해 반대 의견 역시 만만찮으며 하인츠 쉴링과 같은 반대자은 부분 근대화 제국 체제(Teilmodernisiertes Reichssystem)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제국을 근대 국가로 여기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제국이 근대적 성격을 어느 정도 띄고 있었음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절대주의 시대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30년 전쟁에서 18세기 후반부까지의 독일사를 바로크 시대 혹은 계몽 시대와 같은 표현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편 레오폴트 1세의 긴 치세 동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다. 레오폴트 1세는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를 일부 독일 제후와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원으로 격퇴해내면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쳤고, 루이 14세의 팽창 정책에 대해서는 1688년에서 1697년까지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을 통해 대응하였다. 레오폴트 1세의 후계자인 요제프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면서 밀라노 공국과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병합하였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레오폴트 1세와 요제프 1세 시기를 거치며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열강으로 떠올랐다.

프로이센은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적극적인 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유산을 계승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 카를 6세의 사망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가 단절된 것을 노려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문제삼으며 슐레지엔을 침공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을 거치며 슐레지엔을 완전히 병합하고 폴란드 분할을 통해 크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위를 오스트리아에 버금가는 양강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1789 ~ 1815)

근대 독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19세기, 특히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및 해방전쟁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여겨진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대역사가 토마스 니퍼다이는 자신의 19세기 독일사 3부작의 첫권 문장을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Am Anfang war Napoleon)으로 시작함으로써 이를 명료하게 표현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초기에 독일에서도 자유, 평등, 박애, 인권 선언, 권력 분립에 기초한 헌법을 중심으로 열렬히 환영받았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급진화는 빠르게 이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로 이어졌고 혁명적 프랑스를 탈출한 망명 귀족들은 국외에서 반혁명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필니츠 선언을 통해 프랑스 왕 루이 16세를 위한 군사 개입을 위협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연합군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군사적 성공과 정치적 능력을 통해 공화국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로 칭하였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독일의 정치 상황을 재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우선 1801년 라인강 좌안 전체 지역을 프랑스에 합병하고 독일 제국 영지에 대한 배상 청구를 초래한 뤼네빌 조약을 통해 '독일의 중재자'가 되었다. 이어 1803년에 주교령을 폐지하는 세속화(Säkularisation)와 군소 제후령의 통합하는 중재(Mediatisierung)를 골자로 하는 제국대표단 주요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300여 개에 달하던 제후국들을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게 이득을 본 것이 뷔르템베르크와 바덴이었고, 프로이센과 바이에른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된 직후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지를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는데, 이는 이 즈음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가 유명무실한 지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였고, 1806년 라인 동맹을 설립한 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동프로이센으로 피난을 갔고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함으로서 제국의 1000년 가까운 역사 역시 종언을 고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라인 동맹에선 프랑스 모델의 민법이 도입되었고, 프랑스 헤게모니의 도구가 되었다. 틸지트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엘베강 서쪽의 모든 영토와 폴란드 분할로 얻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고 국토가 거의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굴욕은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국가적, 민족적 대각성 및 개혁을 촉구하였고, 슈타인 남작과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국가 개혁에 돌입하였다. 초기에 슈타인이 주도하다 나폴레옹에 의해 그가 축출된 후 하르덴베르크가 이어받은 프로이센의 개혁은 행정개혁과 재정개혁, 조세개혁, 농지개혁 및 길드 특권 철폐와 같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졌고 또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주도한 군대 개혁, 빌헬름 폰 훔볼트의 교육 개혁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특히나 훔볼트의 교육 개혁은 '연구와 교육의 통합'이라는 근대적인 대학 체제의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9세기 독일의 학술적 부흥을 예비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더 나아가 이후에 열강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은 독일을 주로 육군을 위한 군대 모집 기지로 취급하고 재정적, 경제적으로 착취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는 프랑스 점령 세력에 대한 적개심 및 증오가 점차 대두하였고, 대륙 봉쇄령 이후 밀수에 대한 군사적 탄압은 국민의 분노를 더욱 고조시켰다. 1813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후 시작된 독일의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은 이러한 민족 감정을 매우 고취시켰고, 독일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독일의 해방전쟁은 1812년 12월 30일 프로이센의 장군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이 몇 주 동안 머뭇거리던 왕의 명령 없이 타우로겐 협약을 체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렇게 재결성된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1813년 2월 말에 공식화되었고, 이는 최후의 대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는 1813년 8월에야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참전했지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그의 패배에 기여하였고, 라인 동맹의 국가들도 나폴레옹을 포기하면서 그해 말까지 독일 전역이 해방되었다.

독일 연방의 성립과 3월 전기 (1815 ~ 1848)

빈 회의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나폴레옹 이전 시대로의 복고에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일으킨 변화는 너무나도 강렬하였기에 완전한 복고는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은 독일에서도 이전의 분열과 나폴레옹 시대의 유산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서 독일 연방이 출범하였는데, 이는 연방 국가가 아니라 41명의 주권 국가로 구성된 국가 연합이었고 유일한 공통 기관으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열리는 상설 사절 의회인 연방의회(Bundestag)가 존재했다. 독일 연방에는 하노버 왕국의 영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네덜란드, 홀슈타인의 덴마크 같은 외국 군주들도 포함되었던 반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은 연방 외부 지역도 통치하고 있었다.

빈 회의 결의안의 강력하고 복고적인 성격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주도한 신성 동맹에서 특히 분명히 드러났다. 독일 내에서는 두 주요 열강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서 이러한 복고 노선을 주도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국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해방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의용군들은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시작된 정치적 자유주의 운동은 학생 형제회인 부르셴샤프트가 주도하였고, 1817년의 바르트부르크 축제를 통해 표출되었다.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은 경찰 국가와 봉건 사회에 반대하여 국가 통합과 헌법상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표명하는 공공 시위을 벌였다.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고 자유주의적인 전통이 발전하였던 남독일의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입헌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헌법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르셴샤프트를 조롱하고 독일 대학교에서의 자코뱅적 경향에 대한 보고서를 러시아 정부에 제공한 보수주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신학도인 카를 루트비히 잔트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보수 세력을 긴장시켰고, 이는 1819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주도한 카를스바트 결의으로 이어졌다. 이 결의안은 부르셴샤프트의 금지, 반국가 교육에 대한 대학의 감시, 인쇄물에 대한 광범위한 검열 및 독일 연방 내 "제멋대로이거나 혁명적인 회원국에 대한 집행 권한"이 포함되었다.

반동적인 카를스바트 결의 이후 독일인의 삶은 내향성, 예술 숭배, 학술 활동과 같은 광범위한 탈정치화 경향으로 이어졌다. 지하에서 정치적인 저항을 유지하거나 이론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시민들은 가정과 가족의 사생활에 더 헌신하였다. 비더마이어(Biedermaier)로 불리는 이러한 비정치적 경향은 소박함, 관리 용이성 및 아늑함으로 대표되어,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두드러졌다.

이러한 반동적 경향은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이 유럽 ​​전역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역시 이 시기부터 이른바 3월 전기(Vormärz)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1832년의 함바흐 축제에서 다시 한번 자유와 화합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붙타올라 군중의 환호와 검은색, 붉은색, 금색 깃발 아래 통일된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독일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졌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저항 역시 대두하여 하노버 왕국에서는 국왕의 헌법 개악에 대한 반발로 괴팅엔 대학교의 일곱 교수가 항의 서한을 발표한 괴팅엔 7교수 사건(1837)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라인강 좌안의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야심에 의해 촉발된 1840년의 라인 위기에서 시민과 정부는 민족적 자기 주장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아울러 시민 계급의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요구에 더하여 포어메르츠 시기 독일 연방은 사회경제적으로도 불안을 겪기 시작하였다. 1815년에서 1848년 사이에 독일 연방에서는 인구가 2,200만 명에서 3,500만 명으로 59%나 증가하였으나 농업 생산의 증가는 이를 상쇄하지 못하는 맬서스 트랩에 봉착하였고, 이는 극심한 빈곤(Pauperismus) 문제를 초래하였다. 1845년부터는 감자 마름병과 농작물 실패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던 슐레지엔에서는 직조공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산업화와 독일 통일 (1849 ~ 1871)

3월 혁명 이후부터 독일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 통일을 둘러싸고 프로이센과의 오스트리아의 경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는데, 독일사에서는 이 시기를 흔히 제국 창건기(Gründerzeit)라고 부른다. 1848/49 혁명의 실패 이후 독일 연방은 재건되었고 독일은 다시 반동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 이 시기에 독일의 산업혁명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있어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 하에 성립된 독일 관세동맹은 단일한 경제 지대를 구성함으로서 산업화를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을 제공하였고 아울러 구성국들을 미래의 정치적 이해에 있어서도 함께 묶이도록 만들었다. 산업 성장은 대규모 자본 유동과 개선된 운송 및 통신으로 열린 대규모 시장에 의해 촉진되었고, 활발하게 추진된 철도 시스템은 산업화 과정을 가속화하였다. 또한 세기 중반부터 주식 은행은 산업 및 무역 자금 조달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산업화에 의해 촉발된 구조적 변화는 여러 면에서 오스트리아보다 프로이센에서 더 역동적이었다. 프로이센에서는 높은 인구 증가 외에도 산업 발전에 따라 고용 상황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주하였던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인구의 60% 가량이 농업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입지 상으로도 석탄과 철광석 조달에 불리했고 농업 생산력 및 구매력도 현저히 낮았기에 경제적으로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865년경까지 오스트리아 외교는 독일에서 최소한 동등한 지도자 역할을 하려는 프로이센의 야망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혁명 실패 직후 작센과 하노버를 끌어들여 프로이센이 이끄는 소독일적 연합인 에어푸르트 연합을 결성하여 독일 통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려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일 연방을 복구하고자 하였다. 결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압박으로 프로이센은 1850년 올뮈츠 협약에서 프로이센은 군사적 충돌을 자제하고 오스트리아를 의장으로 하는 독일 연방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관세 동맹 가입은 프로이센의 반대에 부딪혔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외의 제3 독일(Dritte Deutschland)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였기에 실패하였다. 또한 크림 전쟁과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의 롬바르디아 상실과 같은 대외 문제에서 프로이센의 비토에 직면했을 때 독일 연방의 의장직이 오스트리아의 대외적 지위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편 프로이센에서는 1859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사망 이후 즉위한 왕태제 빌헬름 1세는 신시대(Neue Ära)를 선포하면서 반동 체제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세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곧 군제 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독일 진보당(Deutsche Fortschrittspartei)를 결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의회 과반수를 장악하였다. 프로이센 헌법갈등(Preußischer Verfassungskonflikt)라고 불리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빌헬름 1세는 강경 보수파로 잘 알려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대처하고자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동의 없이 군제 개혁안을 강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철혈 연설을 남겼다.

이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은 본격적으로 독일 통일을 둘러싼 전쟁의 시대로 접어든다. 우선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덴마크에 대항한 독일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덴마크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전후 처리에서 처음에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을 공동으로 관리하다 1865년에 홀슈타인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슐레스비히가 프로이센령으로 귀속되었다.

여기서 1866년 초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 프로이센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홀슈타인 문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의 동맹과 나폴레옹 3세의 중립을 보장받은 반면 오스트리아는 동맹 독일 국가들로부터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전쟁 개시 7주만에 오스트리아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쟁의 결과 독일 연방의 최종적 해산과 프로이센 지도 하의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사에 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기를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헌법갈등 이후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적대자였던 독일 진보당 역시 전쟁의 승리 이후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출현하면서 분열하였고, 이는 이후 몇 년간 독일 정계를 주도하는 민족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친비스마르크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어 1866년 9월 26일 헌법갈등 당시 초법적 예산안 처리에 대한 사후 승인법 혹은 면책조항(Indemitätgesetz)이 통과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정치 구조와 경제 및 기반 시설 정책과 같은 많은 면에서 후에 세워질 독일 제국을 예견하거나 목표로 삼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우위가 보장된 상원 연방참사원, 프로이센 수상과 외무장관의 겸하는 수상 비스마르크, 입법 및 국가 예산에 관한 의사 결정 기관인 하원 제국의회라는 정치적 체제는 독일 제국과 동일했다. 남부 독일 국가들은 세계 시장과의 연결에서 본질적으로 프로이센 철도와 수로의 사용에 의존했으며, 관세동맹과 중앙집권적 입법은 북독일연방 회원국의 경제적, 법적 틀을 표준화했다. 또한 북독일 연방의 의회선거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25세 이상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향후 독일 제국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은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이였다. 북독일 연방 결성 이후 프랑스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의 중립 대가로 요구하였던 룩셈부르크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이 지명된 것은 갈등을 격화시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엠스 전보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촉발했다. 이렇게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마침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남독일 국가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건국되었다. 그와 더불어 프랑스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알자스-로렌의 할양과 함께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도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독일 제국 성립 당시 프로이센과 더불어 규모 있는 제후국이었던 작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와 자유도시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에 대해서는 유보권(Reservatrechte)이라는 이름의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들은 주류세와 우편 및 철도 부문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비스마르크 시대 (1871 ~ 1890)

1871년 3월 3일 첫 번째 독일 제국의회 선거가 치러졌는데, 독일 제국의 정당 정치는 1848/49 혁명 이후 형성된 보수주의, 우파 자유주의, 좌파 자유주의, 카톨릭주의, 사회주의의 5당 체제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19세기에 조직적인 방식으로 처음 등장한 자유주의자들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 사회, 즉 자유주의 헌법을 가진 국민 국가에서의 자유와 민족적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대두한 우파 자유주의의 민족자유당은 프로이센 군대를 위한 예산 편성에서 비스마르크의 반의회적 노선에 대한 태도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당과 구별되었다. 보수당은 군주, 정부, 농촌 지주, 교회, 군대, 귀족의 특권을 새로운 헌법 질서에 따라 옹호했다.

한편 페르디난트 라살이 독일 노동자 협회(ADAV)를 설립한 이래로 늘어나고 있던 산업 노동자들의 이해 관계는 보통 선거의 시행과 국가 제도 구조 내의 권력 증대를 통한 생활, 노동 및 임금 조건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후 ADAV는 1875년 고타 통일당 대회에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이끄는 사회 민주 노동자당(SDAP)와 통합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탄생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는 응집력 있고 성장하는 정치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인민당인 중앙당의 존재는 개신교도가 주류를 차지하며 부분적으로는 세속적인 독일 제국 사회에서 소수 입장의 가톨릭 신자를 대표하는 데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제국의 정치 체제에서 비스마르크의 입지는 빌헬름 1세의 신뢰와 더불어 비스마르크 자신의 독일 의회 내 파벌을 다루는 정치력을 통해 구축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안정과 근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위계질서의 보존에도 관심을 가졌고, 근대화에는 무엇보다도 경제 시스템의 표준화 및 자유화, 전국적인 무역 및 설립의 자유, 법률 시스템의 표준화, 행정 개혁 및 행정 관할의 도입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는 문화투쟁(Kulturkampf)로 알려진 가톨릭 교회 탄압 정책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가톨릭 교회의 제국 입법, 특히 교회 강단에서의 정치적 선동 금지, 성직자 학교의 폐쇄 및 강제적인 시민 결혼의 도입과 성직자에 대한 국가 혜택의 폐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1873년까지 건국 붐(Gründerboom)의 경제 호황에 기여한 프랑스 전쟁 배상금이 모두 소진된 후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불황 시기에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재정 구조 개혁 및 보호관세 도입과 같은 좀 더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정책이 민족자유당을 분열시키면서 비스마르크의 지지층은 좀 더 보수적인 정당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878년 빌헬름 1세의 암살 미수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체제의 위협으로 여겨졌던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사회주의자법(Sozialistengesetz)을 제정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비스마르크 지지 세력이 승리하면서 이후 1890년까지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탄압받았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탄압과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건강 보험(1883), 사고 보험(1884), 연금 보험(1889)을 포함하는 사회 입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제국 내 소수자 그룹을 제국의 적(Reichsfeinde)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탄압하고자 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탄압 대상이었던 가톨릭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단결시켰고, 오히려 이들이 광범위한 지지층 동원에 성공하면서 고도로 정치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문화투쟁의 결과로 중앙당은 제국의회의 의석 수 1/3을 고정적으로 먹고 가는 주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고, 사회민주당의 경우 빌헬름 시대에 접어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2년에는 제국의회 원내 1당으로 떠올랐다. 이는 또한 그가 도입한 보통 선거제가 촉발한 대중 정치의 성장과 맞물리고 있었는데, 보통 선거제의 도입이 농민 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보수 세력을 위한 것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는 그가 의도했던 구도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편 1873년 이후 지속되었던 전유럽적인 경제적 하강세는 사회적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이익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 증가와 이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배제 경향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및 카톨릭에 대한 적대감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 경향도 포함되어 우익 세력들은 반유대주의 정당을 결성하고 반유대 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정치화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반유대주의 경향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온건한 편이었으나, 반유대주의 세력이 정당의 성장과 같은 정치화 현상은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1879년 보수적 역사가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유대인을 비난한 논설로 촉발된 베를린 반유대주의 논쟁을 시작으로, 1880년 궁정 설교자인 아돌프 슈퇴커는 유대인들이 "독일 민족의 삶에 대한 위험"이라고 선언하였고, 이듬해 오이겐 뒤링은 인종, 관습, 문화의 문제로 유대인 문제라는 반유대주의적 서적을 출간하였다.

외교적 측면에서 비스마르크는 1875년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독일에 맞서 공조한 전쟁 위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방어 동맹을 의존하면서도 러시아와는 1887년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맺어 동맹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이러한 탄력적인 평화 정책을 통해 항시적인 적국인 프랑스를 견제하고 유럽의 중앙이라는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독일의 입지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1884년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 시작된 독일의 식민주의 정책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영향력 범위를 두고 서로 대립하고 있던 곳에서 탄자니아(동아프리카), 나미비아(남서아프리카), 카메룬 및 토고(서아프리카) 및 미크로네시아 등 일정 부분 영역을 획득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는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식민지는 비스마르크의 정치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독일의 식민지는 긴급 상황에서 방어할 수 없었지만 독일 제국을 예측할 수 없는 충돌에 연루되도록 위협하였다.

빌헬름 2세 시대 (1890 ~ 1914)

1888년 빌헬름 1세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였는데, 자유주의적 정치 사상에 가까웠던 그는 제위에 오른지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그 해에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제위에 오르는데, 독일사에서는 1888년을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라고 부른다. 빌헬름 2세는 공개적으로 개인 통치(Persönliche Regimemt)를 주장하며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에 대해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결국 사회주의자법에 대한 황제와 비스마르크 간의 의견 불일치는 1890년 비스마르크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이후 레오 폰 카프리비(1890-1894),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1894-1900), 베른하르트 폰 뷜로(1900-1909),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1909-1917)의 네 수상이 이어서 집권한 빌헬름 2세의 친정 시대가 개막하였다.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 빌헬름 2세와 카프리비 내각은 신노선(Neuer Kurs)을 외치며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 격화되었던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고, 농업관세 인하, 사회주의자법 폐지 및 사회 정책 강화, 세제개혁 및 군대예산법 개혁과 같은 정치,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카프리비 내각은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 개혁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까지 시도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보수당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카프리비는 중앙당의 지원을 얻고자 카톨릭 학교에 지원금을 주는 교육법을 제정하려 하였으나 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반발까지 불러와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카프리비는 황제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1894년 사퇴하였다.

카프리비의 사퇴와 함께 신노선 정책은 중단되었고, 빌헬름 2세 역시 사회민주당의 약진에 크게 놀라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도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카프리비의 후임이었던 바이에른 출신의 호엔로헤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빌헬름 2세의 개인 통치에서 배제되었고, 빌헬름 2세의 정치는 점차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 후작과 외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 같은 총신들이 중심으로 떠올랐다. 점차 권위주의적 성향을 내보이던 빌헬름 2세는 이 시기 사회민주당을 겨냥하여 전복법안(Umsturzvorlage, 1894), 투옥법안(Zuchthausvorlage, 1899)와 같은 일련의 반동적인 법안들을 입법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과 중앙당, 사회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반동 정책들의 좌절은 독일 제국 정치에서 제국의회의 역할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00년 호엔로헤의 사임 이후 빌헬름 2세의 총신이었던 뷜로가 총리직에 올랐다. 뷜로 내각은 보수당과 민족자유당을 중심으로 중앙당을 회유하고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 논쟁을 유발하여 분열을 유도하는 등 지지세력을 통합하는 결집정책(Sammlungspolitik)을 추진하였다. 이 결집정책의 핵심적 수단이 세계 정책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및 건함 정책이었고, 이를 통해 급성장하는 사회민주당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1907년 제국의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족 학살 사건을 두고 벌어진 제국의회 선거에서 잘 드러났는데, 뷜로 정권은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에 대항하여 보수당, 민족자유당, 좌파 자유주의 정당을 규합한 뷜로 블록(Bülow-Block)을 구성하였고 이러한 선거 동맹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뷜로 내각 후기에 이르러 빌헬름 체제는 통치자인 빌헬름 2세의 과시적이고 경솔한 태도와 맞물려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 빌헬름 체제는 오일렌부르크 스캔들과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과 같은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위신이 실추되었고, 빌헬름 2세의 통치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세계정책 및 건함 건설 정책으로 대표되는 팽창 정책은 영국과의 대립을 격화시켰으며, 모로코 위기와 같은 대외적 위기를 겪으며 독일은 외교적으로 점차 고립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빌헬름 2세 정부의 권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이러한 위기 속에서 수상 뷜로는 점차 황제의 신임을 잃어갔고, 1909년 세계정책으로 인한 무리한 지출이 초래한 재정 위기에 봉착하면서 제출하였던 직접세, 소비세, 상속세 인상 등의 재정 개혁 법안이 보수당과 중앙당의 반대로 부결되면서 뷜로는 사퇴하였다. 뷜로의 후임자인 베트만홀베크는 당시 거세게 제기되고 있던 정치 개혁 요구에 대응하여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시도하면서 또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191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으로 떠오르고 1913년에는 차베른 사건으로 인해 제국 역사 상 최초로 수상의 불신임안이 통과되는 등 베트만홀베크 내각 역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한편 빌헬름 시대의 독일 제국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늦어도 1890년부터 독일의 경제 발전은 "독일 최초의 경제 기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현저한 성장 국면으로 돌아갔으며, 대규모 화학, 전기 공학 및 기계 공업과 같은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기록하여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하였다. 독일은 1913년 세계 산업 생산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무역에서도 영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과 별개로 세기전환기(Jahrhundertwende)로 불리는 빌헬름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세기말(fin-de-siecles)로 불리는 19세기 후반부 유럽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양가감정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급속한 국력의 성장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산업화가 가져온 급격한 사회변화가 초래한 노동 문제 및 도시 문제와 같은 각종 사회 문제(Soziale Frage)에 봉착하면서 이에 대해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감정은 학문 및 예술 분야에서도 반영되어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과 데카당스 문학, 미술 등이 유행하였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동부에서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슐리펜 계획과 관련된 서부에서의 진격이 1914년 9월부터 참호전에서 중단되면서 독일은 많은 손실을 입었고 전선은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 정부는 1916년 8월부터 사실상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휘하의 최고 육군 사령부(OHL)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고, 황제와 내각은 이들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군의 상황은 1918년 여름에 이르러 점점 더 지속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18년 9월 말 OHL은 정치 책임자들이 즉시 정전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전환은 10월 개혁으로 이어지며, 이를 기반으로 의회 정부가 처음으로 구성되었지만 이들은 전쟁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은 1918년 10월 28일부터 11월 9일까지 의회 군주제 체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이러한 개혁을 거부하고 베를린을 떠나 OHL에 합류하는 오판을 저질렀으며, 휴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해군 참모부는 영국 해군에 대한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빌헬름스하펜과 킬의 선원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킬 군항 수병들의 반란은 독일의 군주제를 폐지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11월 혁명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대 독일

베를린 휴전협정 ~ 민주화 이전

베를린 휴전협정 이후 히틀러 휘하의 독일은 알자스-로트링겐에서 폴란드 동부에 해당하는 대영토를 확보해냈고, 영토 내 독일인을 제외한 타 민족들에게 강력한 탄압을 가하며 독일인으로 동화시키는데에 성공했다. 또한, 1945년 2월 10일 인류 최초로 보튼헬름에 핵실험을 성공시킴에 따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히틀러 휘하의 독일은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비대한 국방군의 지속적인 대군비 지출을 비롯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로 인해 경제가 붕괴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히틀러는 슈페어와 경제계의 저명한 인사들을 불러모아 경제적 개혁을 주문한다. 이는 초기 5년 동안은 큰 성과가 없어 보였지만, 지속적인 부정부패 퇴치와 국방군의 기계화를 통한 군비 축소 등의 대대적 경제개혁은 곧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독일의 경제는 나락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 히틀러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경제적 개혁 성공의 공로를 들어 슈페어를 차기 총통으로써 지명하였고, 히틀러가 1963년 사망하자 그는 대게르만국의 제2대 총통으로써 군림하기 시작했다. 정권 초기, 그는 보어만, 괴링, 하이드리히, 힘러 등의 과거 히틀러 정권의 권력자들에 의해 공격당하며 불안한 정권을 이끌어왔으나, 곧 그들의 세력권을 숙청하고 심지어는 그들 자체도 숙청을 서슴치 않으며 반대세력을 뿌리뽑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정권이 안정되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의 경제체제 변화를 단행하기 시작했고, 또한 정치적 개혁도 서슴치 않았다.

민주화 ~ 현재

1967년 10월 17일, 그는 1964년에 시작된 정치계와 경제계에서의 대대적 개혁의 완전한 완료로써 독일의 민주화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의 경제체제 변경을 선포하였으며, 새로운 국가인 대독일연방을 건국함과 동시에 대독일연방 제1대 대통령으로써 취임했다. 그리고 1968년 2월 15일, 독일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는데에 성공하였으며, 이로 인해 독일의 항공우주 기술력이 미국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것이 세계에 밝혀지며 세계인은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1997년 6월 22일, 러시아와 집단안보조약기구를 창설하며 신냉전 분위기가 형성되는듯 했으나, 세력을 경제적 협력 수준으로 유지하고 미국과의 관계도 어느정도 유지하며 신냉전 분위기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은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일본을 뛰어넘는 경제대국으로써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경제력 3위, 군사력 2위의 초강대국으로써 군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