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인민공화국

MMMD.png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내용은 대동아인민공화국의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이 작성한 공식 설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편집을 시도하시면 반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수정 가능 여부를 문서 작성자에게 문의하여 주십시오. 다만 단순 오류 및 오타의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大東亜 (だいとうあ) 人民 (じんみん) 共和国 (きょうわこく)
대동아인민공화국
Энкайто Наро́дный Республика (ЭНР)
People's Republic of Enkaito (PRE)
국가 인터내셔널가
(영어: The Internationale)
표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어: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세계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지상낙원
(일본어: 世界で唯一の社会主義地上の楽園)
수도 미야타마 도
최대도시 카미카와 부
역사 - 엔카이토 공화국 수립 1949년 3월 17일
- 10월 철혈공산혁명 1952년 10월 22일
- UN 가입 1977년 8월 18일


인문 환경


인구 민족 구성 일본인 90.5%, 러시아인 8.5%, 기타 1%
공용어 일본어, 러시아어
공용 문자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자, 키릴 문자
문해율 99.43%(2019)
종교 무신론 83.2%, 기타 16.8%(2019)
군대 소비에트 대동아인민공화국 국군
세부
군대
육군 소비에트 대동아인민공화국 육군
해군 소비에트 대동아인민공화국 해군
공군 소비에트 대동아인민공화국 공군
기타 국가보안부


하위 행정구역


행정
구역
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정치


정치 체제 민주집중제, 제한적 다당제, 양원제, 사회주의, 단일국가
민주주의 지수 5.99 (혼합체제)
국가
원수
대통령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주석 겸임)
후루타카 하나코 (2018 ~ )
정부
요인
각료평의회 주석
(국무총리에 해당)
야나기사와 시게루 (2017 ~ )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부주석 겸임)
타마노시마 죠이치 (2012 ~ )
여당 대동아공산당


경제


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
명목
GDP
전체 GDP 421,140,000
GDP
(PPP)
전체 GDP 482,901,000
외환보유액 5,958억 4,200만$(2019년 2월)
신용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A-
화폐 공식화폐 대동아 엔 (EKY)


코드와 단위


ccTLD .ea, .東亜
국가 코드 BHP
국제 전화 코드 +87
단위 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10
도량형 SI단위
날짜형식 yyyy-mm-dd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 (좌측통행)


외교


un un 가입 1977년 8월 18일
un 회원국
승인 여부

동북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공산사회주의 국가.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동쪽으로는 태평양을 끼고 북아메리카, 남쪽으로는 욱일민주공화국 (旭日 (きょくじつ) 民主 (みんしゅ) 共和国 (きょうわこく))[1]과 접해있으며 서쪽으로는 일본과 접해있다.

1912년 엔카이토 제국 (沿海島 帝国)이 일본에 병합되고 1945년 미군이 엔카이토 전역에 진주하면서 독립했으나 이후 공산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 이것이 현재의 대동아인민공화국(大東亜人民共和国, People's Republic of Enkaito)이며 또는 영문명칭처럼 독립 당시 명칭 그대로 엔카이토 공화국 (沿海島 共和国)이라고도 불린다.

1951년 한국전쟁을 돕기위해 엔카이토 내의 미군이 대부분 철수하면서 엔카이토 공화국의 안보에 심각한 공백에 발생하고 연이어 발생한 9월 피의 월요일 사건 (9月血の月曜日事件)으로 좌우익 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수많은 적색·백색테러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때를 틈타 소련을 등에 업은 엔카이토 공산당이 소련군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아 10월 철혈공산혁명 (10月鉄血共産革命)을 일으켜 기존의 엔카이토 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대동아민주공화국을 수립하며 공산체제로 전환했다. 시즈카고젠 미네노부 초대 서기장부터 냉전시기 소련의 극동지역 우방으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고 소련의 극동지방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지자 거듭된 민중봉기로 체제가 흔들리게 되고 이에 후루타카 타케토 대동아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부주석이 후루타카 카즈오 대동아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주석 겸 대동아공산당 서기장을 대신하여 발표한 1992년 적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대국민담화 (1992年敵から国家と民族を守るための対国民談話)를 통해 10년 내 민주주의 체제로 유턴할 것을 선언하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잠시나마 안정화시켰다.

하지만 2000년 후루타카 타케토 대동아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주석 겸 공산당 서기장 겸 민주국가임시행정위원회 (民主国家臨時行政委員会) 위원장이 자신이 했던 대담화를 뒤집어버리고 미야타마 친위쿠데타 (宮玉都 秦威クーデター)와 모리사카현 민주연맹 학살사건 (森阪県民主連盟虐殺事件)을 일으키며 민주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후 헌법에서 후루타카가의 세습을 수정불가로 명시하고[2]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본인이 2002년 대통령에 직접 취임하면서 대동아민주공화국은 대동아인민공화국으로 껍데기만 새롭게 재탄생하였다.

수도는 미야타마 도 (宮玉都), 최대도시는 카미카와 부 (神川 府)이며 현재 국가원수는 대동아공산당의 서포트를 받는 후루타카 하나코[3] (古高 羽名子/Furutaka Hanako) 대통령 겸 대동아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주석이며 정부수반은 국무총리인 대동아민주신민당 소속 야나기사와 시게루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부수반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자 대동아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부주석인 타마노시마 죠이치 (Tamanoshima Joichi/玉乃島 恕一)이다.

2017년에 이르러 최고회의의 하원인 민족회의에서 공산당이 아닌 민주계 정당인 대동아민주신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대동아인민공화국 최초의 민주계 정당소속 국무총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대동아인민공화국은 대동아공화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이자 소련의 후계국가이자 이 세계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의 관계도 껄끄럽다.

정치

대동아인민공화국은 양원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소련의 방식처럼 하원 가결 후 상원 가결의 방식을 거치는 양원제에 부합되지 않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하며 공화국회의의 권한이 월등히 강하다.

현재 대동아인민공화국은 최고회의 하원에 한해 제한적 다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상원인 공화국회의는 공산당원만이 피선거권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의석이 대동아공산당에 배정되어있지만 하원인 민족회의는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기 때문에 대동아공산당, 대동아민주신민당, 가톨릭자유민주당, 민주주의보수연합, 총 4개의 원내정당이 존재한다.

문화

경제

대동아인민공화국은 지난 30년 넘게 약 5%에서 10%의 고른 성장률을 보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경제국이다.

외교

대동아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의 국가와 수교한 국가들을 수교국 (Diplomatic relations)- 상호보완적협력관계 (Complementary Cooperation)- 선린(善鄰) 우호관계 (Friendly Relationship)- 특별 동반자 관계 (Special Partnership)- 포괄적 동맹 관계 (Comprehensive Partnership)와 미수교국은 비수교국- 비수교특수협력우호관계로 분류한다.

특이한 점은 현재 같은 공산사회주의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0년 소련 붕괴 직후부터 최하등급인 수교국으로 하향조정분류되어 있고 체제가 다른 욱일민주공화국(2000년)이나 대한민국(2007년), 미국(2015년)은 특별동반자관계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는 수교는 맺었지만 위 세 나라와는 달리 상호보완협력관계로 분류되어 있다.

동한관계

대한민국(남한)과 대동아인민공화국의 관계는 자본주의-공산주의 간의 이념대립과 한국 전쟁 말인 1953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대동아인민공화국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처럼 점차 누그러져 갔으며, 대한민국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1년 2월 대한민국-대동아인민공화국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1년 3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동북관계

동미관계

동러관계

동일관계

1957년에 소련을 따라 동-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일제강점시기 일본의 만행에 대한 청구권 관련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중관계

당초에는 중국을 특별우호국으로 분류하는 등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중국 간 관계가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사상적인 대립 같은 복합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대동아인민공화국도 소련을 따라 중국과 대립하였고 수교국으로 하향조정분류하였다.

그 뒤로부터 중국간의 대립은 약하게나마 이어졌으며 2017년 대동아인민공화국 정부가 가톨릭, 개신교에 이어 불교에 종교의 자유를 승인하면서 후루타카 타케토 대통령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을 공식초청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동중관계가 상당히 삐꺽거리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대동아최고회의 상무위원회 부주석인 타마노시마 죠이치가 대만을 방문하여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비수교 특별협력우호관계에서 상향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밝히면서 같은 체제의 중국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더구나 정부의 공식적인 표명은 없었지만 공화국회의와 민족회의에서 홍콩시민 지지 결의안[4]공화국 거주 홍콩시민 보호법이 통과되어서 중국과의 관계는 가시밭길을 걷고있다.

2019년 11월 10일 미야타마대학 문학부 건물 앞에서 경찰이 홍콩유학생·대동아인민공화국 대학생들과 중국 본토 유학생들의 패싸움을 제지하던중 중국 본토 유학생에게 실탄을 발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서 중국 본토 유학생들만 부상을 입었는데 대동아인민공화국의 반중정서를 감안하면 경찰측에서는 의도적으로 발포한 듯하다.

주동 중국 대사관이 사건 직후 미야타마대학과 내무부에 항의했으며 대동아인민공화국 내무부 측은 하루 뒤 피해보상과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겠다고 짧막하게 통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동아인민공화국 대학교 내에서 대동아인 - 중국인 간에 홍콩 시위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동아 청년층에서 반중을 넘어서 혐중 감정이 극에 달했다.

사건이 발생한 미야타마대학 외에도 각 대학들의 반중을 넘어선 혐중 감정으로 후루타카인민대학, 후쿠모토 소비에트국립대학, 모리사카대학을 위시하여 총 96개의 전국 국·사립대학이 연합하여 반중 대학생 총연합회를 결성했고 본격적으로 대동아인과 중국인 간 무력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종교

대동아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가톨릭에 대한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1년 뒤 개신교에 대한 자유화가 승인되었다. 이후 2010년대 들어서 불교에 대해서도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종교의 자유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각주

  1. (또는 난카이토 공화국(南海島 共和国)이라고도 한다.)
  2. 제1장 제1조 1항에 "대동아인민공화국은 후루타카가의 정통성을 지닌 대통령이 국민의 보도를 받아 본헌법의 조항을 준수하며 통치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제2항에 "이 헌법의 조항을 변경할 수 없다."라고 헌법을 고치지 못하게 아예 못박아놓았다.
  3. 2003년생으로 아직 미성년자라 정식 당원은 아니다.
  4. 대통령인 후루타카 하나코가 최고회의 상무위원회 주석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부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