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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대한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광복 이전의 한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큰 헌법 변경이 없었던 관게로 신탁통치기 조선 (조선과도정부)과 좌우합작 체제 (여운형 내각 - 장면 내각), 냉전 체제 (박정희 내각 - 김종필 권한대행 체제), 자유화/해빙 체제 (김철 내각 - 노무현 내각), 현대 (노회찬 내각 - 유승민 내각)[1]으로 나뉜다.

신탁통치기 조선

해방 직후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영호남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애 국민당과 공산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서 부터 병탄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가 실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반공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조선에 대부분, 특히 공업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북부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 방어선에 구멍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영호남 지역의 농업생산량이 조선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현대사회 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었보다 소련군의 조선 점령 장기화는 조선의 공산주의 확대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우선 미국은 소련에 조선의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했는데, 일단 공동통치가 현실화 된다면 미소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됨으로 소련이 자신들의 뜻대로 조선을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수 있고 무었보다 조선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초기에는 소련이 반대했으나 미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소련보다 훨씬 일찍 참전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명분을 쥐고 흔들자 소련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몰락작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핵보유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본듯이 명분에서도 밀렸기 때문에 4개국 공동 신탁통치를 승인하고 만다. (이 당시 미국대표는 "우리는 수데텐과 유고슬라비아의 해안가를 당신들의 노고의 대가로 넘겼는데 당신들이 점령지라는 이유로 조선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내륙국으로 만들겠다."라고 발언하여 소련측 대표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내의 온건 좌파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신탁통치기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당시 조선에는 크게 4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친소적/급진적 공산주의자 (조선 공산당), 민족주의적 온건 사회주의자 (조선인민당), 친중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친미 민족주의자 (한국 민주당, 독촉)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중 양대 민족주의자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자 세력을 포섭하기로 한다. 일단 미국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온건 좌익 세력을 포섭하기위해, 그리고 지방 행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임시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을 재의했다. 소련은 당연히 찬성했고 중국과 영국도천조국 눈치를 봐서 수락했다. 그리고 조선 과도 민정정관 (임시 행정부 수장)에 여운형을 않혔으며 우익 세력보다는 적지만 어느정도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행보는 한민당등의 극우세력을 자극시켰고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실적으로 지지율이 조선인민당의 발끝에도 못미쳤던 그들이기 때문에 군정당국은 그들의 반발을 상큼하게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우익 민족진영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민족주의 정당에 지원을 해주고 이후 과도 입법회에서 차기 국명을 정할때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지지하는등의 노력을 했다. 소련또한 이런 미국의 행보를 두고보지 않았고 공산당에 지원을 쏟아붙고 좌익단체의 통합을 장려하는등 조공 몸집불리기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46년 조선 과도입법위원 선거에서 친미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32%를 차지하고 (독촉 16%, 한독당 15%, 한민당 1%) 조선인민당이 기나긴 타협끝에 한독당, 김원봉의 신민당과 단일화하여 임시민정장관으로 선출되고 독촉과 조공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당시 이승만은 "나는 좌익세력이 싫지만 지금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고 김구 또한 "좌익 세력이 민족국가와 자주대한(즉 소련에게 예속되거나 소련의 자치공화국이 아닌)을 지지한다면 그들과의 단일정부 구성도 가능하다."라고 발언하몄으며 김원봉도 "남북조선이 통일정부를 구성 할 수 있다면 좌우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라고 말하며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46년 개회한 조선 과도입법회

과도 입법회가 46년 5월중에 개회하자 과도입법회 내에서 여러 토론이 오갔고 심할때는 의회폭력까지도 발생했다. 드라마 '야인시대'나 그 이외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직후를 묘사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여려 정당, 정치단체등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공격, 습격하는 일도 흔했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초기에 총기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백의사, 민청, 조선청년전위대 등의 여러 단체가 무장하여 사회혼란이 가중되자 과도 입법회는 총기 금지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으나 실질적으로 잘지켜지지 않았고 경찰력의 부제로 조선 주둔 미군이나 소련군의 규모가 점점 가중되자 이것이 조선의 대한 미소양국의 영향력 중대와 치안/민생불안, 그리고 정치갈등을 더 심화 시킬수도 있다는 이유로 여러진영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연정붕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하자 여운형, 안재홍, 조소앙등의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정지속, 통일민족정부수립을 내새우며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조선인민당과 한국독립당 중도파 중심의 정치운동이였으나 점차 한독당내의 중도파가 몸집을 불리며 김구 당주석이 공식 참여를 선언하고 영미의 지지선언으로 독촉또한 참여를 결정하며 통일정부수립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후 조선신민당도 참여를 선언하며 한민당, 조공을 재외한 모든 주요 정파가 참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한민당은 독촉의 참여 결정이후 성명을 발표, "좌우합작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치욕스러운 행위이며 독촉의 참여는 애국세력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조공과 소련 또한 "좌우합작은 조선을 삼키려는 미국의 계략"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행위는 양당과 소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행위였을 뿐이다. 좌우는 번목을 번복하면서도 통일 국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8년 6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재헌 국회와 (재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였으며 참의원과 민의원 중 민의원만 소집 됨) 여운형을 총리로 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의원내각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좌우합작체제

여운형 내각

1948년 9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1948년 9월 13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내각이 조직되었으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냉전이 막 시작되려는 시기였고 신생 정부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했던 미국은 저 멀리 태평양 너머에 위치해 있었으며 중국또한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여운형 내각은 국가를 안정화 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쏟아부었으나 정치, 사회적 혼란과 극심한 좌우대립 그리고 기타등등 여러 요인에 의해 지체되고 있었다. 심지어 독촉의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 확대를 외치며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북방의 소련과 조공의 영향력이 나로 커져가는 중 이였다. 그러던 와중 동년 11월 1일에 북일본 공산정부가 수립되자 조공은 "북부 일본에 사회주의 형제국가가 수립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며 조선은 사회주의 신일본과 함께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11월 26일에는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무산계급 독재국가를 세워야 한다."라고 국체를 부정하는 발언까지 하자 정부내 좌우 인사들이 합심해서 조공을 불법화 시켜벼렸다. 소련은 이런 조치에 매우 반발하였고 박헌영 위원장은 "민주주의는 종말했다."라고 말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한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기를 잡아 칭하이성 서부로 공산군을 몰아내고 있었고 미국이 1947년 부터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을 지원하자 소련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스탈린은 조선공산당에 무기를 지원해주고 결국 1949년 1월 7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내전당시 평안북도 지역의 국군 진압군

1949년 1월 7일, 아직 대통령 권한 확대와 독촉 분당으로 인한 후유증이 한국 정계에 남아있을 무렵 나선과 청진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이 혁명을 선언하고 자체적인 정부수립을 선언한다. 이들은 조선인민사회주의공화국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부르주아지들이 세운 영미 제국주의자들과 중국 장개석 역적패당들의 괴뢰정권"이라고 폄하하며 이'불법정권'을 타도할 것울 천명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쿠데타였다, 여운형 국무총리는 "조선공산당의 쿠데타는 우리 민족에 대한 반역."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음모."라는 식으로 쿠데타를 경멸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초기 조선공산당의 산하 단체인 조선인민혁명전선이 사보타주를 일으키고, 허약했던 국군덕에 공산반군은 점차 세력을 넖혀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공산반군의 세력은 확대 되었고 이후 회령, 경흥, 무령 등으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1월 중순쯤에는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중국에서 의용군을 파병하면서 어느정도 반군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던 그때, 북일본 또한 의용군을 파병하면서 (북일본 정부는 "인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공식 발표) 전선은 다시 교착되기 시작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주일미군이 파병되고 중국이 증원군을 보내면서 결국 조공 주요인사들이 대거 소련으로 망명하며 끝이 났다. 당시 계절이 겨울이였고 부실했던 국군의 장비와 장기전으로의 확대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으며 그래서 흔히들 이 사건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이사건으로 인해 조공등 강경 좌익 세력은 한국에서 세를 잃게 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 반공주의가 뿌리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사태는 미국, 중국 그리고 서유럽권 국가들에 매우 큰 충격을 줬다, 그들은 소련이 자국 내의 공산당과 결탁하여 자국의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방권 전체에 매카시즘적 분위기가 넘쳐나게 만들었다. 한편 이런 매카시즘적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가자 한국은 의외의 수혜를 받게 되었는데 초기 미국의 냉전시 아시아 정책은 중일 양국을 기초로 하였으나 도미노 이론이 급부상 하며 미국이 한국에 엄청난 지원을 넣기 시작했고 그 지원으로 여운형 내각은 국가경제의 기반을 다져놓기 시작했다.

퇴임사를 낭독하는 여운형 총리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반도에 남기고 끝났다. 한국 내전 이후 서구권의 반공 우익정권은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 내각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여운형 내각을 지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조선이 도미노 이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엄청난 원조를 쏟아부었다. 여운형 내각이 처음으로 한 일은 토지개혁이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이 농민들에게 있다 생각한 여운형 내각은 유상몰수 무상문배를 기초로 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원조받은 돈으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농민들은 여운형 내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공업 육성계획안을 발표하며 반도 산업화의 첫 삽을 떴다. 방직 산업, 소비재 공업을 기초로 경공업을 육성하여 민생경제를 부흥시키고 국민생활을 이전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또한 당시 남는 인력을 소비재 생산 전선에 투입하여 실업률을 줄이고 소비재를 싼 값에 풀어 물가를 안정시켰다. 농업면에서는 곡물 수매제를 실시하여 농업의 부흥과 식량생산의 안정화를 꾀했으며 농업증산 3개년계획을 실시하여 국가안정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우익세력과의 지속적인 연정을 통한 국민통합을 도모했다. 1950년 6월 30일 여운형 총리는 퇴임사를 낭독했다. 한국 현대사를 풍미한 거인의 퇴임식에는 수백, 수십명의 인파가 몰렸다. 여운형 총리는 퇴임식에서 "나는 운이 참 좋은사람이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 그리고 웃고있는 인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퇴임사를 낭독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는 성공적으로 임기를 끝마쳤다. 여운형 총리 퇴임 직후 7월 3일에 총선거가 실시되고 또다시 인민-독립-신민 연정이 선포되면서 조소앙이 총리에 취임했고 이렇게 정식으로 여운형 내각이 끝나고 조소앙 내각이 출범하며 대한민국은 세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조소앙 내각

취임 당시 조소앙 총리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조선인민당과 한독당 내의 중도파가 크게 약진했다. 우선 불법화된 조공의 빈자리를 인민당이 채웠고 대통령제 논란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던 독촉과 한민당의 빈자리를 중도파가 매꿨는데 한독당 중도파의 수장인 사민주의 성향의 조소앙이 인민당과 합의하여 제2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조소앙 총리는 기존의 좌우합작정부를 유지시킴과 동시에 합작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중립화 정책을 발표,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런 중립화, 평화주의 정책은 1951년 일본 내전이 일어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내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중국, 한국, 베트남등의 아시아 국가에 경제지원을 대가로 파병요청을 하였고 중국 또한 아시아 동맹국들의 참전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던 한국에서는 많은사람들이 "침략자 왜놈들 전쟁에 우리가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의 日자만 나와도 분노를 표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 갑론을박이 오갔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여운형 내각의 경제부양 정책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뒀을 지언정 아직 후진국 신세였던 것은 맞았다. 결국 민의원에서 찬성 152표 / 반대 133표 / 기권 15표로 참전이 결의되었고 당시 참의원에서도 승인을 받으며 공삭적으로 참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물론 전국에서 반전 여론이 일었고 시위, 폭동등의 형태로 반대의견이 표출되었으나 결국 약 4000여명의 군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조소앙 총리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내각 불신임 까지도 거론되었으나 반대 173표로 부결되었다. 한편 일본내전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가는 군수물자의 생산과 수송을 원할하게 하기위해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와 합작하여 군수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이 당시 군수공장들과 미국의 지원금이 이후 경제계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53년 조소앙 총리는 퇴임 의사를 밝혔고 8월 15일 퇴임식이 진행되었다. 이후 3대 총선에서도 제3차 좌우합작내각이 성립 됨으로써 조봉암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조봉암 내각

2차 반민특위 당시 조리돌림 당하는 친일파 노덕술

1953년 인민당 소속 조봉암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한 일은 새로운 경제계획 설계였다. 일본내전 참전의 대가인 미중양국의 지원과 전쟁당시 지어졌던 군수공장들을 바탕으로 해서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을 계획, 실행한다. 이 계획은 자립경제 확립을 목표로 하며 자유경제체제에서 사회공공투자에 집중적 지원을 하는 방식의 간접적 조정 정책을 담고 있다. 조봉암 총리는 농업국가였던 한국을 공업화 하기위해 경공업, 특히 소비제 공업에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부었다. 또한 섬유산업을 발달시켜 품질좋은 한국산 섬유를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에 싼값에 돈을받고 파는 등 경제적 밑천을 쌓는일에 집중했다. 또한 농업에도 상당한 양의 투자를 하여 농업 생산량의 증대와 설비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맘때 부터 곡물수매제가 실시되어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상당히 높아졌고 국민생활수준 또한 개선되어 개발도상국 중에서는 상당이 잘사는 축에 들게 되었다. 한편 국민소득 증가와 함께 인구 성장률도 가파르게 올라가 1백만 호 주택건축 10개년 계획등이 계획, 실행되었다. 또한 국토종합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기반시설 확충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그의 업적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평가받는 대규모 친일파 청산을 추진하게 된다. 원래 초기 여운형 내각때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설치했고 이전 조소앙 내각때 까지도 친일파 청찬에 꽤나 적극적 이였으나 내전과 일본전쟁 참전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고 기초 경제에 상당한 양의 국고를 투자하면서 친일파 청산에 필요한 돈이 부족해지자 반민특위는 사실상 유명무실 해졌고 이후 묻혀버렸으나 조소앙 총리의 '민족 반역자 처벌 및 정제계 개혁명령'을 통하여 제2차 반민특위 (정식 명칭 : 민족 반역자 처벌 이행기구/民族 反逆者 處罰 履行機構)를 설치하여 친일 인사 청소에 나섰다. 당시 수많은 친일파들이 대궐같은 집에서 끌려나와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로 '나는 반역자 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사진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할 것 없이 모든 신문의 제1면을 단독으로 차지했다. 물론 당시 정제계에 친일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으므로 어느 정도 후폭풍이 있기도 했으나 그 효과는 매우 긍정적이였다. 당시 조봉암 총리의 지지율이 98%를 웃돌고 있었으니 말을 하지 않아도 얼마나 그 열기가 뜨거웠는지 알것이다. 또한 인민당의 지지율도 덩달아 급상승해서 이후 제3대 대선에서 좌우합작 후보인 김구 전 내무부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조봉암 총리는 안정적으로 1956년까지 임기를 끝내게 되고 이후 한독당 출신의 안재홍이 총리에 오르게 된다.

안재홍 내각

제1차 안재홍 내각

취임식 당시의 안재홍 총리

1956년 치뤄진 민의원 선거와 동시에 치뤄진 참의원 선거와 함께 한독당 소속 안재홍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안재홍 총리는 취임 직후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게획을 수립, 불균형성장론을 채택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불균형이란 흔히들 생각하는 불균형이 아니라 중요산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따라 비료, 시멘트, 철강, 정유, 전력 부문 개발이 최우선순위에 들게 되었다. 최우선 순위 품목들을 비료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비료는 당연하게도 농업을 위해 우선 순위에 포함되었다. 여운형 내각 이래 역대 내각들은 모두 농업 생산량 증대와 생산량의 안정화를 최우선 과제나 혹은 그에 준하는 정도의 우선 순위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해방 직후부터 60년대 초반 까지도 인구의 40%가 농업으로 먹고사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구의 40% 이상이 농사로 먹고 살아도 농업 생산량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거름의 부재였다. 당시에는 화학 비료가 없었고 화장실, 가축들의 변과 지푸라기등을 섞어서 비료를 만들었는데 변이라는 게 양이 한정되있고 무엇보다 비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숙성시켜야 했다. 안재홍 내각은 이런 거름의 단점을 없에고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비료 제조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당시 지어진 대표적인 비료공장으로는 충주 비료공장이 있다. 이러한 비료 생산으로 인해 1950년대 후반 농업생산량은 거의 1.8배 가량 껑충 뛰게된다. 다음은 시멘트 인데 당시 한국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한 수준이였다. 시골은 두말할 것도 없고, 도시도 조금만 외곽으로 나간다면 논밭과 초가집이 보이던 시대였으니 말할것도 없다. 그런 이유로 강원도 -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시멘트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전국적으로 집들을 갈아엎고 다시짓는 대규모 재건축 사업을 할 만큼은 되지 않았으나 (이러한 대규모 재건축 사업은 이후 박정희 내각에서 주도한 새마을 운동때에나 실현된다) 서울, 부산, 인천등의 주요 대도시에서는 상당히 많은 양의 기반시설들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만들어서 전국적인 도로 재정비 사업에 투자하는 등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번에는 철강이다, 사실 안재홍 내각에서 가장 실적이 적은 분야인데 비료, 시멘트, 전력 수급에 밀려서 비교적 많은 양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당시 국내에는 60년대 후반 포항제철 (현 포스코)를 설립하기 이전까지는 대규모 종합 제철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는 철광석 채굴량을 늘려 수출한 뒤 가공된 철을 다시 역수입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유 사업또한 그렇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는데, 애초에 당시 한국에서는 석유 채굴을 시작하기 전이였고 (이후 장면 내각이 되어서야 북부지역에서 석유채굴이 시작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미 믿음직한 대형 정유사를 내버려두고 동방의 신생 개도국에 정유를 맡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유 사업도 해외 유학을 통한 기술자 양성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전력 사업이다, 전력사업은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한국의 전력 생산량을 높이는 사업으로 당시 전국에 수많은 발전소가 세워져 전력 생산량을 2.7배 가량 높일 수 있었다. 이렇게 주요 5개 품목의 성과를 살펴 보았다. 당시 불균형성장론 채택으로 대한민국은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었으나 이 정책은 매우 명암이 두렸한 정책이였다. 바로 소외받은 기타 산업들과의 격차가 심각할 정도로 벌어져 버린 것이다. 또한 위에 나온 성과들 대부분이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와 시골간의 격차가 벌어지자 비난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국 3년만에 내각이 총사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다시 치뤄진 총선에서도 경제 개발 성과에 만족한 다수 국민들의 여론으로 안재홍 총리가 재집권 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제2차 안재홍 내각

1959년 제1회 노동절 행사

1959년 동시에 치뤄진 민의원 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한독당 - 사회당 연정이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고 안재홍이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지난번 실각의 원인이 불균형성장론 채택으로 인한 산업 격차 증대와 시골 지역의 소외였기 때문에 때문에 이번에도 불균형성장론을 채택을 하되 타 산업과 시골지역에도 간헐적인 투자를 하는것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한편 당시 해방이후 낙후되어있던 산업시설과 많은 노동자의 수, 즉 수요(일자리)는 적은데 공급(노동자)는 많아지니 당시 노동자들의 복지는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이런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고 이전의 조봉암 내각시기에 어느정도 개선이 이뤄지고 복지정책도 민의원에 상장되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정부도 국민도 빈곤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금의 문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안재홍 내각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지정하고 (물론 현재보다 훨씬 적다) 현재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전신이 되는 복지법을 통과시켰다. 물론 나라도 돈이 없던 시절이니 현재보다 적은 양의 지원인것 또한 사실이지만 당시의 저소득층에게는 이만해도 감지덕지한 것이였다. 그리고 노동 3권을 최초로 헌법에 삽입했는데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친노동자 정책은 공산주의-사회주의적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미국이나 중국 언론에서는 '한국이 공산화 되고있다!', '안재홍 총리는 공산주의자인가?'라는 내용의 자극적인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으며 당시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실제로 "한국의 좌경화가 우려스럽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재홍 정권은 이런 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1959년 5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제1회 노동절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 1961년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총)을 출범시켰으며 노동자를 비롯해 하류층의 복지에 힘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정책이 안재홍 총리의 본심이 아닌 사회당과 당내 좌파의 합작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낭설이 있는데, 분명 이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안재홍 총리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이후 안재홍 내각은 임기를 다 채우고 62년에 민의원 선거가 열렸으며 한독당의 장준하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장준하 내각

1962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1962년 치뤄진 민의원 선거에서 당권을 잡은 한독당 우파의 대표격인 장준하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장준하 국무총리는 반공주의자 였기 때문에 철저한 친중 반소 정책을 취했으며 '공산권에 대항하는 강한 군대'를 표방했다. 이런 풍조는 1962년 10월 16일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나면서 더 강해졌다. 제1차 국군 현대화 사업을 통해서 기갑 병력을 증강시켰고 육군의 포병 전력또한 대규모로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17km 한소국경은 수많은 국경경비대로 빼곡히 매꿔졌으며 포와 기관총이 배치되었다. 또한 한중월 3국 방위조약 강화를 추진하여 합동 군사훈련의 규모를 점점더 키워나갔다. 또한 해군의 미사일 전력 증강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 국방부가 포방부 소리를 듣는 것은 이때의 영향이 강하다. 징병제 시도까지도 있었으나 연립 여당인 사회당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되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이후 박정희 정권 시기 자주국방 계획의 토대가 된다. 물론 이런 군사력 증대에 반발하는 국가들도 상당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초기 한국이 독립 할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징병제를 실시하려고 하자 반대한 경력이 있었고 당시에도 한국의 과도한 무장은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며 이 시기가 미중분쟁이 가시화 되던 시기이기 때문에 중국의 동맹국이였던 한국의 군사력 증가에 크게 달가워 하지는 않았다. 남일본 또한 전통적인 앙금과 미국과 비슷한 이유로 인하여 한국의 군비증강에 반대했다. 소련의 경우는 한국과 대립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비증강에 반대했으며 극동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반대성명을 내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강화된 냉전 분위기는 이런 주장을 묻히게 만들기 충분했고 사회당도 군비증강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며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인도 - 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이 패배하고 중국군이 인도 국경에 군을 파병하며 긴장감이 고조되자 미국이 더이상의 군비 증강을 자제하라는 요구를 아시아 국가들에게 요구한다. 장준하 총리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결국 압박에 못이겨 사퇴하고 비교적 온건파인 장면이 1965년 총리가 된다.

장면 내각

평양 테러로 인해 전소되는 구 평양시청

군비확충으로 인한 미국등 서방의 압박으로 인해 장준하 국무총리가 사퇴하고 한독당내 친미파로 분류되는 장면이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장면총리는 서방의 압밥을 의식하여 군비증강에 제동을 걸었으며 장준하 총리 재임기에 잠시 주춤했던 경제성장을 다시 밀고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장면 내각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는데 이 정책은 기존 중국에 상당부분 의지했던 경제를 미국, 서유럽등으로 확장시켜 친중 일변도의 정치와 경제를 다각화 시키려는 의도로 계획되었다. 즉 경제를 위하여 굳이 중국에만 메달리지 않겠다는 정책이였다. 중국은 불편해하는 눈치였으나 엄연히 독립국이였던 한국을 건들이는 것은 내정간섭 이였기 때문에 불편한 눈치만 주었지 따기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도한 공산권 관련 정책도 이전 장준하 내각때 보다는 우호적으로 변하여 한소국경의 군병력을 상당수 철수시켰다. 물론 조공 잔당들은 계속해서 때려잡았으나 소련은 묵인했다. 그러나 이런 유화정책은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는데 바로 1967년 평양 테러 때문이였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장면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자 제6차 조선공산당이 구 평양 시청 (현 평양 테러추모공원)과 평양직할시 중앙공원 (현 평양광역시 시민의 공원)에서 일으킨 테러로 이로인해 테러리스트 제외 993명이 사망했으며 특히 당시 평양을 방문한 평양직할시 국회의원 3명과 채병덕 부시장, 그리고 장면 총리가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사망하며 대한민국의 정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평양시내에는 경비계엄이 선포되었으며 평안남도 전체의 군부대에는 경계령이 선포되었다. 이 초유의 사태로 인해 전국의 반공주의적 분위기는 크게 증가하였으며 특히 테러의 당사자였던 평양시민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는 한독당, 사회당 할 것 없이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소련과의 국경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한국의 우방국이였던 중국또한 반공 선언을 발표하였고 공산권의 수장이였던 소련조차도 애도성명을 발표, 자신들이 이번 사태와 무관함을 설파하였다. 한편 이렇게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간을보던 군부는 5월 16일 박정희 중장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의 관심이 한국으로 쏠리자 박정희 중장과 국가혁명위원회는 혁명공약 및 헌정보호선언을 발표하며 기존 정치인들의 신변보호와 민주정치의 지속을 선언하였다. 결국 민의원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박정희를 총리로 선출하면서 좌우합작 체제가 종결되고 냉전체제가 시작되게 된다.

냉전 체제

제1~2차 박정희 내각

새마을 운동당시 길을 닦는 농민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내각은 생각보다는 기존 정치권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헌정 중단기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는 않았고 (대략 3달) 당시 평양 사태로 인해 반공주의가 하늘을 찌르던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기성정치권과 일부 타협하여 연립정부를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당시 박정희 내각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대일 수교 및 청구권 협상에 관하여 남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야권 및 학생들의 자유주의 운동으로 실각하였다. 그래도 기독민주동맹[2]과의 연정과 농민들의 지지로 재집권에 성공한 민주유신당 박정희 내각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 현대화를 추구하며 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動)정신을 표방하였다. 새마을 운동은 초가집을 없에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기, 농기계 보급, 비포장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 새마을 지도자 양성, 이외의 여러 교육등이 그 내용이였다. 물론 새마을 운동은 여러 전통문화가 일부 손상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으나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이는 민주유신당 정권의 재집권을 불러온다.

제3~4차 박정희 내각 (김종필 권한대행 체제)

1973년 포스코 (당시 포항제철) 준공식

1972년 민의원 선거로 다시 집권한 박정희와 민주유신당은 신개발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정책은 기존 농업과 경공업에 치중되어 있던 경제를 중공업 위주의 체제로 바꾼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였다. 기존의 새마을 운동은 지속하되 중공업에 대한 투자의 비용을 늘리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은 박정희 내각은 즉각 포항 제철 설립에 박차를 가한다. 물론 이 공사에 대일 청구권 비용이 상당수 들어갔다는 사실이 들어나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국내 최초의 대형 제철소라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지지를 표명했고 당시 박정희 내각의 지지율은 80%를 상회했다. 또한 대대적인 중공업에 대한 투자로 경제 성장률 연 10%를 달성하였으며 국민소득이 2배로 뛰는 일명 한강의 기적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총리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면서 총리 권한대행이 된 김종필 권한대행은 기존 박정희 총리 만큼의 정부 장악력과 지지율을 가지지 못하였고 결국 이후 치뤄진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유신당이 제3당으로 몰락하며 냉전체제가 종결되고 해빙 체제가 시작되게 된다.

해빙 체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1979년 치뤄진 민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김철 총리를 필두로 거국 내각이 구성되어 해빙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였으며 기존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1997년 제2기 김영삼 내각 당시 동아시아발 경제위기가 전세계로 번지며 일명 일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경제위기와 불경기를 격게 된다. 그러나 이회창 총리의 경제부양 정책과 김대중 총리의 경제개혁으로 경기는 다시 어느정도 회복되게 된다.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며 한국의 부활을 세계에 알렸고 2003년에는 노무현 총리가 황색 돌풍을 일으키며 참여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67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내각 이후로 제3당 출신이 총리가 되는 사상 초유의 정치 이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노무현 총리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통해 큰 지지율을 얻었으나 이후 건강을 이유로 사회당 노회찬 총리가 2009년 집권하게 된다. 정확히 40년 만에 좌파 총리가 집권하며 공식적으로 해빙 체제가 끝나고 현대 한국이 시작된다.

현대

현대 한국은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으로 G20과 OECD, G7등의 회원국이며 선진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재자리를 지키고 있다.

각주

  1. 해빙 체제와 현대 한국은 민국 38의 한국 설정상 교과서 등에서 하나의 시대로 묶는경우가 많다.
  2. 조선민주당과 자유당 탈당파가 합당하여 생긴 기독교 민주주의 우파 정당으로 이후 이 정당의 평양 지부인 평양 기독회만이 떨어져 나와 현재의 평양 기민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