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통일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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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한민국(통일세계관) 국기.png 제목 없음-1.png
국기 국장
표어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국가 애국가
한국 지도.png
수도 사울특별자유시
정치
공용어 한국어(국어/國語)
대통령 문재인
국무원 위원장
국민대표회의 의장
대법원장
이낙연
정세균
김명수
역사
건국  
 • 개국기원 BC. 2333년 10월 3일
 • 3.1혁명 1919년 3월 1일
 • 임시정부 수립 1919년 4월 11일
 • 국군 창설 1940년 9월 17일
 • 임시정부 환국 1945년 8월 18일
 • 과도정부 수립 1946년 1월 1일
 • 대한민국 헌법 제정 1948년 9월 11일
 • 대한민국 독립 1949년 3월 1일
지리
면적 223,348km²
시간대 한국표준시 (UTC+8.5)
인구
2017년 어림 약 87,000,000명
2016년 조사 86,851,535명 (위)
인구 밀도 308명/㎢ (2016년)
경제
GDP(PPP) 2016년 어림값
 • 전체 $4조 1000억
 • 일인당 $48,083
명목 $3조 3000억
통화 대한민국 원 ()
기타
도메인 .kr
국제 전화 +82


개요

대한민국(大韓民國/Republic Of Korea/한국)은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해성국과 마주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봉래국, 북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대도 연방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자유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화는 무궁화, 국가는 애국가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대한민국 원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동년 4월 11일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임시헌장과 임시정부를 만들어 반포하였다. 2차 세계 대전에 즈음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는 한국광복군을 창군하여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국제 사회를 향한 독립 외교를 바탕으로 1945년(대한민국 27년) 환국, 과도 정부 기간을 거쳐 1949년(대한민국 31년) 3월 1일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1950년(대한민국 32년)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무장 공산주의 단체를 중심으로 경인공란이 일어났으나 이듬해 7월 27일 진압되었고, 이후 1952년부터 경제개발 3개년 계획과 농촌근대화운동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경제 개발을 이루어내어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2017년(대한민국 99년) 현재 국가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며 행정부 수반은 국무원장 이낙연이다.

국호

대한민국의 국호 중 한(韓)은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나라 이름인 한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통틀어 삼한이라 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하여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근대국가로서 대한(大韓)이 국호에 적용된 것은 1897년 광무 원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부터이다.

여기에 민국(民國)이란 명칭을 더한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대한민국 원년)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원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에서 새로운 독립민주국의 국호를 정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한 나라를 대한으로 다시 흥하게 하자"는 논리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제안하였고, 이 제안이 임시의정원 의원들의 호응을 받아 독립국의 국호로 정해졌다. 이 명칭은 1945년(대한민국 27년) 임시정부의 환국 이후 과도정부의 명칭으로 이어졌고, 1948년(대한민국 30년) 9월 11일 제정된 헌법에서 공식 확정되었다.

역사

근대 이전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70만년 전으로 추정되며, 현생 인류는 구석기시대였던 기원전 2만 5000년 경부터 한반도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예상된다.

한반도 일대에 등장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록했고, 동국통감은 그 시기가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연호와 함께 간간히 사용되는 연호인 단군기원은 동국통감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 멸망한 이래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의 부족국가가 한반도에 우후죽순 들어섰으며, 이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로 이어졌다. 이중 신라가 676년 삼국통일을 이루어 통일신라를 형성했고, 한반도 북부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가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며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 10세기 초 고려가 개국되어 단군 이래 최초로 한민족 단일 국가를 이룩하였고, 이는 14세기 말 이씨 조선으로 이어진다.

근대 한국의 뿌리는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이다.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고치고 환구대제를 치러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이후 1899년 최초의 근대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발포되었고,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제국, 덴마크 등과 수교하였다. 광무개혁을 통하여 신식 군대를 설치하였고 철도 부설, 신학교 개설, 근대적 토지 제도 도입 등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07년 정미7조약, 1909년 기유각서 등을 거치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차례로 강탈하였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하였고 자주독립의 근대국가 수립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3.1혁명과 대한민국 건립

1919년(대한민국 원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민족적인 만세항쟁을 거행하였다. 이 항쟁은 고종의 장례식과 맞물려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함과 동시에 새로운 한국 민족의 국가 수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제시했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을 두고 '만세 소요사건' '만세폭동'으로 묘사했으며, 중국과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3.1 혁명운동' '3.1혁명' 3.1항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현재 이 사건을 부르는 명칭은 3.1 혁명이다.

독립선언의 주역, 민족대표 33인의 모습

독립 선언 이후 국외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원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 반포하였다.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성립 선포는 4월 13일에 이루어졌으며, 동년 9월 11일에는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형태로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와 통합하였다.

임시정부는 원년 9월 11일 통합 정부 수립과 동시에 임시헌법을 제정하였고, 연통제과 교통국을 활용하여 국내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외교를 펼치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에 여러 창립 요인들이 임시정부를 탈퇴함에 따라 임시정부는 한민족 대표 정부의 위상을 한동안 잃고 위축되었다.

1930년대 이후 대한민국

1931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차원의 독립운동의 활로를 확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였고, 그 단원 중 한 명인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가 성공하면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이었던 장개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한편 1920년대 임정 내의 민족주의 vs 사회주의 대립으로 독립 전선에 생긴 공백을 만회하기 위하여 1935년부터 민족유일당 운동 및 연립 정부의 구성을 추진하게 된다. 1939년 여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을 위시로 하는 좌파 독립운동 단체와 임시정부 내의 정당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좌우 연립 정부 구성을 위해 원탁 회의를 열었으나, 일부 좌파 단체의 이탈로 좌우합작이 결렬되고 만다.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임정 내 3당은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는 개헌을 통해 기존의 집단지도체제를 주석 1인 영도 체제로 바꾸었고, 같은 해 9월 17일 지청천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는 한국광복군(Korea National Army)가 창설되었다. 1941년 11월 28일 조소앙이 창시한 삼균주의(三均主義) 사상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건국강령이 반포되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적 기회를 각인에게 고르게 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농지 분배를 통하여 경제적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비 수학을 통해 교육을 받을 기회의 균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3대 헌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일제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사회주의 계열 무장독립운동세력인 조선의용대와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이에 임시정부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19년 만에 좌우를 아우르는 전민족적인 망명 정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같은 해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의 좌익 계열 정당도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1944년 5차 임시헌법 개정을 통해 의정원과 내각에 진출하였다.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는 만주, 하북성 일대의 조선독립동맹, 소련의 88여단과 접촉하여 통일독립전선을 구축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외교와 독립전쟁 참전

1943년 카이로 회담 직전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식민지의 독립이 전후 인도 제국의 독립 의식 고취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미국 FDR에게 특사를 보내어 전후 한반도를 신탁통치 구역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임정도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독립의 아버지, 백범 김구

이에 주석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해줄 것을 당부했고, 장제스는 이를 약속하였다. 이후 카이로 회담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로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임시정부가 수행한 독립 외교의 진가는 1945년에 드러났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2차 대전의 승전국 반열에 오를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일환이 바로 국제연합 창설 회의에의 한인 대표 파견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하여금 한국인 대표가 유엔 창설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끔 요청했고, 한인 대표로 당시 부주석이었던 김규식 박사, 조소앙 외무부장, 정한성 외무차관을 한인 대표로 선출했다. 당시 한국인의 유엔 총회 참석 의향을 접한 미 국무성은 한국통(通)으로 알려진 매큔으로 하여금 미주 내 한인단체를 통합한인위원회로 통합, 임시정부 파견 위원과 함께 유엔 총회에 참석할 것을 구미위원회에 지시했고, 구미위원회가 이 지시를 수용, 동년 4월 한인 대표가 유엔 창설 회의에 파견됨으로써 2차 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의 독립국 재건 약속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한국 임시정부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임시 조직임을 공인받게 되었다.

한편 한국광복군은 임팔 작전에 9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공작 활동을 수행하였고, 1945년 3월 무렵부터는 미국 OSS와의 합동 훈련을 통해 서울 진공 작전을 기획하였다.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은 C-47에 OSS대원 몇과 특수요원 8명을 탑승시켜 서울에 파견했고, 내지에 일본의 패망과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 사실 등을 공포하였다.

임시정부 환국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환국 이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접촉하여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 설치돼 있는 인민위원회를 바탕으로 내지의 경찰권과 행정권을 인수할 계획을 수립한다.

1945년 9월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진주하였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 유엔 창설 회의에서 한국 독립이 보장되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임시정부가 유엔 창설 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인 대표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는 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미군정과 소련군정을 최소화하하고 임시정부가 독립국 재건을 주도하게끔 한다는 결정에로 합의를 보았다.

1945년 11월까지, 한반도에 일시로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치안 유지 하에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속속 환국하였고, 독립민주국을 건설하고자 한 계획을 현실로 옮기고자 국민대회준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5년 12월 30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한반도 내 주요 정당과 지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임시국민대회가 개회하였고, 주석에 김구를, 부주석에 여운형을 옹립한 대한민국 과도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31년 현 독립기념관 광장서 거행된 정부 수립 기념식

과도 정부에서는 농지개혁법을 실시하여 기존 지주의 농지를 유상매수, 무상분배(일부 유상분배)하였으며, 문자보급운동과 국민의무교육제를 실시하였다. 한편 과도 정부 기간 동안 가장 큰 화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이었는데, 과도 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지시로 1946년 3월 1일 반민족행위자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총 8000여 명의 악질 친일파를 조사, 체포했고, 박정양, 노덕술을 비롯한 300여 명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외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그 반역 행위의 경중에 따라 금고형에서 최대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며, 이들은 본인들은 물론 최대 3대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일제가 남기고 간 주요 산업 시설과 기업소를 국유화하거나 한국인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1948년 7월 17일 한국 역사상 최초의 보통 선거인 7.17 총선거가 실시되어 총 300석의 국민대표회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국민대표회의는 1948년 9월 11일 의회정부제와 삼균주의를 주 골자로 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헌법 제정 직후 대통령 및 국무원장 선거을 실시했고, 합의추대로 대통령에 백범 김구 선생을, 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국무원장에 몽양 여운형 선생을 선출했다.

1949년 3월 1일 서울특별자유시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국민대회가 거행되었고, 이날 정식으로 대한민국이 독립하였음을 선포하였다.

정치

상위항목 : 대한민국 헌법 (통일세계관)

대한민국은 1948년(대한민국 30년) 9월 11일 제정된 헌법에서 국체를 민주공화국으로, 정부 형태를 의원내각제를 기반에 둔 대통령제로 규정하였다.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며 주요 실권을 장악한다. 임기는 6년이다. 대통령의 선출은 국민대표회의 대의원들의 무기명 단기식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행정부 수반은 국무원장이다. 국무원장은 대통령이 지목한 자를 국민대표회의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며, 국회의원 및 국무원 기타 직위와 겸직할 수 있다. 국무원장은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행정각부를 총괄하며, 대통령과 국회를 서로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의미 때문에 국무원장은 대체로 국회의원 출신이 맡으며, 대체로는 여당에서 임명되는 편이다.

입법권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바, 국민대표회의(이하 국회)에 속하고, 행정권은 국무원에 속하며, 사법권은 사법원에 속한다.

국민대표회의

여의도에 위치한 국민대표회의 의사당의 전경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입법 기구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일부 위임받은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의석 수는 대한민국 99년(2017) 현재 600석이다.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수장은 국민대표회의 의장이며, 총선거 이후 여야의 합의 추대로 선출된다. 대의원과 의장의 임기는 3년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기원한 바 만 18세와 만 23세부터 부여되며,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의 최대 3대손까지는 참정권이 제한된다.

국민대표회의는 법률안의 제출, 심의, 의결, 서명, 공포의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헌법 개정의 권한, 국무원 위원 선출의 권한, 조약 체결 및 비준의 권한, 예산심의확정의 권한, 국정감사의 권한 등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99년 기준 대의원의 소속 정당은 다음과 같다.

여당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Independent Party Of Korea)(성향: 삼균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 320/600

삼균주의통일당(三均主義統一黨/The Unity Party Of Three Equalitarianism)(성향:삼균주의,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 10/600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the Women's Patriotic Association Of Korea)(성향:자유주의, 여성주의, 민족주의) - 4/600


야당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People's Party Of Korea)(성향: 사회민주주의) - 94/600

인민공화당(人民共和黨/People's Republic Party)(성향: 사회주의) - 49/600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Chondoist Chongu Party)(성향:천도교, 자유주의, 평화주의) - 44/600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Democratic Party Of Korea)(성향: 민족주의, 보수주의) - 20/600

대한농민총연맹(大韓農民總聯盟/The agrarian League Of Korea)(성향: 농본주의, 사회자유주의, 생태주의) - 14/600

사회당(社會黨/Socialist Party Of Korea)(성향: 사회민주주의) - 11/600

청년동맹(靑年同盟/Korea Youth League)(성향: 청년정치, 진보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 8/600


무소속

무소속 - 24/600

국무원

세종대로에 위치한 국무원 청사

대한민국 국무원은 내각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최상위 행정 기관이다. 국무원장은 행정부 수반을 역임하며, 국민대표회의의 투표와 대통령의 임명으로 선출된다.

국무원은 1인의 원장, 2인의 부원장, 그리고 다수의 정무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총 12개의 부서가 있으며, 15개의 청, 5개의 위원회, 중앙은행,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다.


부(部)

· 내무부 · 외무부 · 재무부 · 군무부 · 농상공부 · 문교부 · 교통부 · 과학기술부 · 선전부 · 보건복지부 · 노동부 · 법무부

청(廳)

· 국세청 · 관세청 · 조달청 · 통계청 · 검찰청 · 병무청 · 방위산업청 · 경찰청 · 소방청 · 문화재청 · 농촌진흥청 · 산림청 · 특허청 · 기상청 · 환경보호청

위원회(委員會)

· 언론문화진흥위원회 · 공정거래위원회 · 금융감독관리위원회 · 원자력위원회 · 국민권익위원회 · 민족위원회

독립기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한국은행 (중앙은행) · 국립중앙박물관 · 독립기념관

법원

경제

참조 항목 : 대한민국 원 (통일세계관)

대한민국은 약 3조 3000억 달러의 명목상 국내 총생산(GDP)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상위권 내에 드는 우수한 경제를 지닌 국가이다. 1949년 독립 이래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 개발과 민영 중심의 중소-중견기업의 산업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져 순위권의 공업국가로 성장하였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는 선진국 규모의 경제에 진입하여 2017년 현재 10위 이내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전자 산업, 의류 산업, 미디어매체 산업, 관광 산업 등이다.

국영원산제철소의 야경

독립 이전 과도 정부에서는 정부 차원의 적산 기업, 적산 공장, 토지 국유화 정책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이끌 기반을 마련하였고, 농지개혁 작업을 통한 자영농 형성으로 1950~1960년대의 안정적인 식량 생산의 밑바탕을 닦았다. 1952년부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어 경제 성장을 시도하였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은 도시와 도시를 잇는 사회 인프라의 확충과 농촌 및 읍내의 공공시설 건립에 초점이 맞춰졌고, 2차 경제개발 계획부터는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단지 설치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비료공장과 의류공장, 생필품공장 등이 전국 각지에 들어섰다. 이와 더불어 정부에서는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퇴치작업, 주거문화개선, 도로 및 하수 시설 정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신생활운동은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21세기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대의 개도국에 그 비법이 전수되고 있다. 3차 경제개발 계획에서는 외국 자본과 국영기업의 합자로 나진-원산 일대와 울산-여수 일대에 석유화학단지와 철강콤비나트가 건설되었다. 대규모 공업단지의 조성으로 대한민국은 자동차, 전자제품의 자체 생산에 대대적으로 나섰고, 1964년 첫 자동차를, 1968년 첫 컬러텔레비전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흥 공업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은 과도한 공업화와 도시화로 전통 문화의 유실과 식량수급의 실패, 환경 파괴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당시 장준하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농업 장려 정책과 전통 문화 복원 사업을 실시하였다. 농업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일정 부분 이상의 농지를 국가가 직접 매수하여 국영농장제를 도입하였으며, 도시농업을 시도하였다. 전통 문화 복원의 일환으로 무형문화재 제도의 도입과 전통 문화의 현대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이는 현대 대한민국의 문화 산업에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1980년대 초반 선진국 경제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문화 산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영화 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개시하고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를 허용하였다. 이와 함께 금강산-해금강 일대와 백두산, 제주도, 황해도 일대를 관광 특구로 지정하여 외국인 관광을 대거 유치하였다. 현재 금강산에 위치한 금강호텔, 백두산 자락에 있는 온천리조트 등의 레저 시설은 이때 대부분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의 문화를 외국 신문, 방송 등에 알리는 홍보 작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첨단 산업에도 큰 투자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외국 기업의 하청, 특히 부품 생산을 도맡았으나 1980년대 이후 외국 자본에서 독립하여 부품과 완제품을 모두 생산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글로벌 기업으로 크게 성장한 곳이 바로 금성전자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디스플레이, 메인보드, 그래픽카드 생산 및 수출 규모는 세계 5위 내에 든다.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국제 경제의 위축과 내부의 노령화, 저출산이 맞물려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2008년~2009년에는 경제를 지탱하던 중소기업이 대거 도산함에 따라 국영기업과 민간 대기업-중견기업 위주로 경제 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2010년대 이후로는 문화 콘텐츠 산업에 크게 주력하고 있다. KBS-TV에서 방영된 <태양의 후예>,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메신저 프로그램인 <LINE>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회

언론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출판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신문과 잡지, 도서가 출간 발행되고 있다.

신문

조선시대 말 무렵부터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1883년 10월 한성순보가 첫 근대적 형태의 신문으로 창간되었으나 이는 관보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실제로는 1896년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이 근대적 신문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독립신문 이후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문이 다수 창간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의해 대부분 폐간됐으며, 영국인 배설이 경영자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 인수되어 매일신문이라는 어용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대운동을 기점으로 민중이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3.1 혁명의 여파로 조선총독부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의 출판의 자유를 허용함에 따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민족 언론은 총독부의 검열에 시달렸으며, 잦은 정간과 인사징계, 폐간을 겪는 등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편 원년 4월 11일 건립된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이란 이름의 정부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 신문은 1943년 7월 20일까지 발행되다 환국 이후 1946년 10월 3일 한국독립당의 기관지로 중간(重刊)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임시정부 시기의 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후신은 대한민국 공보(公報)가 맡고 있다.

1945년 임시정부의 환국 이후 그동안 일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한민족의 신문업계도 다시금 활기를 띄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노릇을 하던 매일신보는 과도 정부에 인수되어 서울신문으로 개칭되었다. 12월 1일에는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중간되었으며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주요 정당에서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 정신과 정치 이념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차원의 언론, 출판의 자유가 보장이 되고 또 인쇄 매체의 출간이 적극적으로 장려됨에 따라 수많은 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신문사 소유가 언론 장악이라는 비판이 일자 준(俊) 정부 기관지에 속하던 서울신문이 민영화되거나 소규모 신문사들이 대형 신문사에 통폐합되는 등 신문업계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99년(2017) 현재 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다음이 있다.

· 조선일보 (朝鮮日報) (자매지: 스포츠조선, 월간조선, 주간조선, 여성조선, 소년조선일보, 일간 조선경제 등)
· 동아일보 (東亞日報) (자매지: 월간동아, 신동아, 주간동아, 비즈니스리뷰, 어린이동아, 스포츠동아, 과학동아, 수학동아, 게임동아 등)
· 한국일보 (韓國日報) (자매지: 코리아타임스, 스포츠한국, 서울경제신문, 주간한국, 소년한국일보, 골프한국, 데일리한국 등)
· 서울신문 (서울新聞) (자매지: 선데이서울, TV가이드, 스포츠서울, 서울평론, 여성월간지 Queen, 뉴스피플 등)
· 자유신문 (自由新聞) (자유화학그룹 계열) (자유어린이, 리버럴 타임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자유일요일, cosplay 등)
· 상공일보 (商工日報) (대한상공회의소 계열) (주간상업경제, 주간공업신문, CTN, 리얼스타뉴스, 스포티아, 대학상업경제)
· 독립신문 (獨立新聞)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 조선인민보 (朝鮮人民報) (조선인민당의 기관지)
· 청우신문 (靑友新聞) (천도교청우당의 기관지)
· THE KOREA HERALD (영자신문)
· THE KOREA TIMES (영자신문 / 한국일보 계열)
· 한국금융신문 (韓國金融新聞/Korea Financial Times) (자매지: 웰스매지니먼트, 리빙신문, 비즈니스TV, FN TIMES)
· EVENING (무료 석간신문)
· 메트로 (무료 조간 신문)
· 포커스 신문 (무료 조간 신문)
· 노컷 뉴스 (CBS 계열 무료 종합 일간지)

방송

대한민국 방송의 시작은 민국9년(192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7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방송국(JODK)를 개국하여 한국 역사상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인 청취자를 대상으로 한 일본어 방송만을 하였으나 낮은 청취율로 인해 1933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을 실시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임시정부가 환국하고 과도 정부가 성립됨에 따라 전국 각지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하나로 통합, 국영방송사인 한국방송협회(KBS)가 출범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민간 기업과 신문사 주도의 라디오 방송국 개국 신청이 이어졌고, 이에 선전부는 1954년 CBS 기독교방송을 시작으로 1961년 DBS 동아방송, 1964년 RSB 서울라디오방송의 개국을 승인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전일방송(VOJ), 한국FM방송, 서해방송(SBC), 부산문화방송(MBC), 평양의소리(VOP) 등의 지역 독자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1971년 <한국민영라디오연합>(KRN)이란 방송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뉴스 공동 제작 및 취재, 프로그램 공동 제작 및 판매 등을 실시하였다.

현재 매일 전파를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KBS제1라디오(종합), KBS제2라디오(중장년층 음악라디오), KBS제3라디오( 청년층 음악-토크쇼 라디오) KBS제4라디오(뉴스, 보도), KBS한민족방송(단파방송), DBS 동아방송, MBC 문화방송, RSB 서울라디오방송, CBS 표준FM, CBS 음악FM, BCC 천도교방송 등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대한민국 36년(1954)에 처음 실시되었다. 국영방송사인 한국방송협회에서 미국 RCA와 합자하여 채널9, KBS 중앙텔레비전을 개국하였는데, 당시 텔레비전 방송은 신문, 민영 라디오와 달리 선전부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여 있었으며, 뉴스 보도 역시 선전부 방송보도국, 국무원, 국영통신사 등으로부터 기사를 제공받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관변방송의 형태로 출범한 것이다.

1968년에는 컬러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1972년에는 KBS 제2텔레비전을, 1978년에는 KBS제3텔레비전을 잇따라 개국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시작되었으나 과도한 광고와 친정부적인 논조, 그리고 국토 대부분이 산지여서 전파 송출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블 TV가 일찍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텔레비전 방송은 신문, 라디오와 달리 민간 기업의 설치 허가가 거의 용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방송을 일종의 대국민 선전 도구로 간주했던 당시 한국독립당 정부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디어 콘텐츠 산업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져 갔고, 이에 1982년 민영 텔레비전과 케이블 TV 시장을 개방하게 된다. 1983년에는 최초의 민영 지상파 TV인 DBS-TV(동아일보 계열)가 5번 채널로 개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한국일보와 금성전자의 합작 방송사인 코리아TV(Korea TV/K1)가 개국하였다. 1987년에는 문화방송 라디오 계열의 MBC-TV가 정동에서 첫 전파를 쏘아 올렸다. 민영 지상파 텔레비전의 도입과 함께 지역에서도 라디오 방송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지상파 TV가 잇따라 개국하였는데, 이들 지역 TV 방송국은 대부분 중앙의 지상파 채널의 단독, 또는 크로스넷 계열 방송사로 편입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케이블 채널이 속속 개국하기 시작하였고, 2004년부터는 유료종합채널이 도입됨에 따라 일백 개가 넘는 유료 방송 채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 유료종합채널은 케이블방송, 위성텔레비전으로만 시청할 수 있는 종합편성채널로, CBS-TV Main(기독교방송 계열), 채널J(자유신문 계열), K2(코리아TV 계열), CUN(SO연합) 등이 있다. 보도채널은 KBS 24(중앙텔레비전 계열), STV(서울신문 계열), 뉴스토마토TV(뉴스토마토 계열), C'NEWS(조선일보 계열), DBS NEWS 24(DBS 계열)이 있으며, 오락전문채널로는 DBS-MTV(음악전문채널), C'TIME(조선일보 계열), E채널(T캐스트 계열), Y-STAR(CU미디어 계열), TVN(CJ E&M 계열) 등이 있다.

공휴일

대한민국의 공휴일은 <공휴일에 관한 법>에 따라 지정되며, 일반적으로 관공서와 학교, 기업소는 휴무하는 것이 보통이다.

공휴일의 지정은 현 대한민국의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민속 명절을 쇠기 위해, 위인을 숭상하고 추도하기 위해, 그외 기타 사유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지정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짙은 글씨는 국경일을 의미한다.

 · 일요일
 · 양력 정월 초하루
 · 음력 정월 초하루 (전날, 당일, 초이튿날을 쉰다)
 · 독립경축일 (양력 3월 1일)
 · 민주절 (4월 11일)
 · 충무공 탄신일 (4월 28일)
 · 노동절 (5월 1일)
 · 어린이날 (5월 5일)
 · 한국 문화의 날 (5월 15일) - 舊 세종대왕 탄신일
 · 추석 연휴 (음력 8월 15일 / 전날, 당일, 다음날을 쉰다)
 · 국치일 (8월 29일)
 · 백범김구선생탄신기념일 (8월 마지막 주 화요일)
 · 입헌기념일 (9월 11일)
 · 건국기원절 (음력 10월 3일)
 · 한글날 (10월 9일)
 · 순국 제현의 날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