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향국

Title Haron.png

Formosa Flag.jpg
대화향국
화향제국 / 대월민국
大花鄕國
Empire of Formosa / 大越閩國

18541945
화향국 국기.png 화향국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 흥아쇄국(興亞刷國)
(동아를 일으켜, 나라를 닦으라.)
Haron on Globe.png
Blank map of Haron.png
수도 낭경(朗京)
최대도시 유신주(庾信州)
정치
공용어 향어(鄕語), 민어(閩語)
정부 형태 군주제, 훈정헌정[1]
황제(皇帝)[3] 성화제(成華帝)
1852~1885
건녕제(建寧帝)
1915~1926
광화제(光和帝)
1930~1944
군기장경(軍機章京)



흠차대신(欽差大臣)
위하문(魏夏文)
1854~1867
박중돈(朴中旽)
1913~1919
아예기원(阿禮岐元)
1865~1879
강유혼(强兪混)
1920~1928
입법 의정원(議政院)1854~1888
입법원(立法院)1888~[2]
역사
 • 갑인변법[4] 1854년 2월 6일
 • 태평천국 운동 1851년 ~ 1864년
 • 화청전쟁 1865년 ~ 1867년
지리
면적 299,610㎢
내수면 비율 약 2.8%
인구
1930년 어림 37,936,684명
기타
통화 화향 원(元)
  1. 訓政, 군주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립내각이 정권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 8.18 운동 이후에는 구색정당이 몰락하고 입헌군주정(憲政)이 확립되었다.
  2. 1920년 이후 국민대회(國民大會)가 실질적인 입법부의 역할을 행사함.
  3. 민월식 군호(閩越君號)로는 신손(神孫)이라고 칭함.
  4. 성화유신(成華維新)이라고도 불림.

대화향국(중국어: 大花鄕國, 영어: Empire of Great Formosa)은 1854년 2월 6일부터 1945년 3월 16일까지 군주정(君主政)을 바탕으로 동아시아(東亞)와 태평양(太平洋) 일대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주로 이 시기를 민월 제국주의(閩越帝國主義)라고 일컫는다.[1]

갑진민란(甲辰民亂, 1844), 신사교란(紳士攪亂, 1847)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자강회(自彊會)[2]갑인변법(甲寅變法, 1854)을 추진하여 구미 열강을 표방하기 위해 학제 개혁, 양력(陽曆) 사용, 행정 제도 정비를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군사 개혁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신식 군사 체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3]

1860년대부터 태평천국 운동(太平天國之亂)에 개입하여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1870년대에는 제헌운동(制憲運動)을 거쳐 근대적 법률 체계인 흠정대법(欽定大法, 1874)이 제정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확립하게 된다. 변법 이후 91년 동안 제국 사회가 유지되었으며, 1945년에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내 향주 공습(鄕州空襲)으로 인한 무조건 항복으로 화향 연합군 군정사령부(花鄕聯合國軍政部軍政)가 설치되면서 제국은 해체되는 수순을 맞게 된다.

최대 판도

화향 최대 판도
花鄕最大版圖
Formose Empire.png
초록색 : 화향 제국의 내지(內地) (1864년 기준)
연한 초록색 : 외지(外地), 괴뢰정권 혹은 점령 지역 (1940년 기준)

태평양 전쟁에 합류한 이후, 일본군(日本軍)과 함께 화남 전역(華南戰域)에서 공세를 시도하거나 미국(米國)의 자치령이었던 필리핀 전역을 차지하여 필리핀 제2공화국(Repúbliká ng Pilipinas)을 세우는 등 제국주의(帝國主義)와 군국주의(軍國主義)가 팽배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과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진먼 대학살(金門大虐殺, 1942)과 산페르난도 대학살(The San Fernando massacre, 1943) 등의 전쟁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말았다.

1940년 이후에는 화해작전(花海作戰)을 통해 하이난 섬(海南島)을 비롯하여 광동성(廣東省), 광서성(廣西省) 남부 및 동남아 일부를 점령지로 삼고서 최대 판도를 누렸으나,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 1944)에서의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국력이 고갈되고, 필리핀 해전(菲律賓海戰, 1944)과 포르모사 항공전(Formosa Air Battle, 1944)에서 제해·제공권을 상실한 뒤 본토 공습을 당하면서 몰락하였다.

역사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치로 세워졌던 정씨왕국(鄭氏王國) 내 이주민과 토착 민족국가인 유번국(流樊國) 지배층의 결합으로 세워진 동녕제국(東寧帝國) 이후로, 화향 제도(花鄕諸島)의 역사는 급격한 변혁을 맞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 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해짐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던 대륙·한반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관과 역사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향촌(鄕村)이라 불리는 봉건적 지방 제도와 중앙 집권적 체제가 혼합된 향사분봉제(鄕士分封制)가 실시되었으며, 사탕수수 및 장뇌 등의 특산물을 바탕으로 한 상품 경제의 촉진과 도시화의 진행이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무역항을 이용하는 서양 상선들을 통제 및 완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동요를 억제하고 양학(洋學)이라 불리는 유럽의 기술·학문·문화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충돌에 대응했다.

문호 개방과 근대화 개혁

팽호해전(澎湖海戰, 1842)에서 패배한 직후, 자국의 전근대적 행태를 비난하고 서구 열강에 맞서 부국강병의 기치를 세우려는 시도로서 화신양구운동(花神洋具運動, 1843)이 추진되었다. 이름 그대로 '화향의 넋 혹은 정신(花神)을 바탕으로 서양의 것을 갖춘다(洋具)'는 의미였는데, 이는 당시 화향 내 핵심 권력기구인 선정국(宣政局)의 실권자들이었던 경장파(更張派)가 주장한 온건적 근대화였다.[4]

화신양구운동을 통해 화향 내부에서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목표로 일련의 개혁안이 추진되었다. 서양의 기술 및 교류와 재정 정책을 단일화하기 위해 개혁 기구인 내각통상아문(內閣通商衙門)과 신식 군사 기술을 확보하고자 양포총국(洋砲總局)이 설치되었다. 또한 주요 도시에는 군수 공장인 서무기기창(西務機器廠)을 두어 근대식 포탄과 화약을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명주(鳴州)에는 조선청(造船廳)이 설립되어 양선(洋船)을 건조하였다.

신식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철강 및 석탄 확보를 위해 전국 곳곳에 광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대북주(台北州)에 기륭(基隆) 탄광, 묵주(墨州)에 인애(仁愛) 탄광 등이 이 당시에 개발된 광산들이었다. 또, 이들 공장들의 운영을 위해 서양 기술 서적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중앙 정부 주도로 동문학원(同文學院)을 설립하여 영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 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면에서 정부는 열강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지로 유학생들을 파견하였고, 기존 과거제(科擧) 아래에서 기술자들을 선발하는 성무시(成務試)와 개혁 인재들을 등용하는 양과(洋科)를 배치하였다. 군사면에서는 성륭수사학당(成隆水師學堂, 1843)을 세운 뒤 열강으로부터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유능한 지휘관들을 양성코자 했고, 봉건적 질서에 위치했던 향촌 사회를 관리하고자 '향사관제조관(鄕士管制條款)'을 발표하여 사병 제도를 혁파하였다.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양잠업(養蠶業)이 진흥하여 양광회사(洋鑛會社, 1844) 등 근대 농림 기업들이 등장했다.

잇따른 효란과 안정화

태평천국 운동 개입

제국 선포와 제헌 운동

제국주의화와 침략 전쟁

군국주의와 폭주, 그리고 몰락

각주

  1. 혹은 민월 군국주의(閩越軍國主義), 화향 제국주의(花鄕帝國主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장녕 조약(長寧條約, 1842) 이후 서양 열강의 직접 다녀온 유학생 및 외교 사절 출신의 인사들이 조직한 정치 개혁 단체이며, 다수의 소속원이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1870년대에는 입헌 정치에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제헌운동(制憲運動, 1872)을 주도하기도 했다.
  3. 향촌 사회를 주도하던 지방 사족들의 의용군 및 사병 조직들을 혁파한 후, 1860년부터 황실을 호위하는 시위영(侍衛營)과 태평천국 운동을 위해 조직된 북화영(北花營)이 초기 근대적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다.
  4. 이 시기에 훼손되었던 지방 통제가 강화되고,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일시적으로 사회 체제가 회복되었기에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서 '성륭중흥(成隆中興)'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