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폴베니아 국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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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국방군
독일어: Deutchwehr 도이치베어
Deutches Iron Cross Model Heer 1.png
도이치 국방군의 문양
창립일 1976년 1월 16일
국적 우폴벤 독일 우폴벤 독일
편제 우폴베니아 육군
우폴베니아 해군
우폴베니아 공군
우폴베니아 정보군
우폴베니아 슈츠겔로크
충원방식 징병제
징집 연령 만 17세
상비군 3,527만 명
예비군 60만 명
지휘체계
명령체계 독일 최고 군사 사령부
도이치 국방군 사령부
본부 베를린, 라인벨트돔
통수권자 에른스트 폰 하이덴베르크
국방장관 토비아스 슈뢰더 (초대)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 (2대)
파울 폰 리히트호펜 (3대)
연합참모장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 (초대)
하인츠 클라인 (2대)
군사비
예산 9,816억 달러
기타 미국 6조 달러
방위산업
국내 공급 우폴벤 독일 DITRI
해외 공급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프랑스 프랑스
일본 일본
신자유세계관 이스라엘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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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국방군(大獨逸 國防軍 , 독일어: Deutschwehr 도이치베어)는 1976년부터 2001년까지 있었던 도이치벨트의 군대를 총칭하여 칭한다. 냉전 시대부터 시작하여 하이덴베르크-이케하라 대전 시기를 거쳐서 국가가 패망할 때까지의 기간동안 대독일 국방군은 독일 제국 연방군 (Bundesunion-Heer), 연방 통합 해군 (Bundesunion-Marine), 연방 통합 공군 (Bundesunion-Luftwaffe), 연방 통합 정보군 (Bundesunion-NIA)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칭의 기원

도이치베어(Deutschwehr, 도이치 국방군)는 문자적으로 독일의 '국방군'(防衛軍, national defense force)을 칭한다. 본래는 서독의 군대인 분데스베어(Bundeswehr, 독일 연방군)였으나, 1976년 1월 16일, 동독의 대대적인 침공 이후에 독일 지역의 영토가 축소되어 독일 계열 국가로서의 권위가 떨어졌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인 에른스트 빌헬름 폰 하이덴베르크는 떨어진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군의 이름에 국가의 뿌리를 밝히고 영토 회복의 의지를 담아 도이치베어(Deutschwehr)로 개명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 독일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라이히스베어(Reichswehr, 독일 제국군)[1]라는 용어가 국내외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2000년, 국가 패망 당시에는 가장 잘 사용되던 라이히스베어(Reichswehr)에서 이름을 따서 노이라이히스베어(Neureichswehr, 신 독일 제국군)라는 명칭으로 단일 국가로서 1년 간 존속하였다.

역사

1976년 1월 2일, 브라운슈바이크 작전으로 명명된 동독의 대규모 침공으로 지휘체계를 비롯하여 군의 근본적인 체제가 무너져 내렸다. 당시 중령이었던 에른스트 빌헬름 폰 하이덴베르크는 군의 체제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은 1976년 1월 2째주, 새로운 독일의 지도자로 그가 당선되며 실행되었다. 그는 부패한 고위관료들과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장교들을 모두 다시 평가해야하며 모두 적절한 직책에 배정되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명령했다. 그의 오른팔이자 큰 욕망을 가진 토비아스 슈뢰더는 그를 도와서 독일 국민 중 징병대상자를 모조리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일 국가 첩보원이자 NIA의 전신 기관이 탄생했다. 그 기관에서는 1주일간 총력을 다하여 모두 검토를 마쳤다. 그 결과로 진보적이고 뛰어난 상황대처능력을 겸비한 신진 장교들이 고위직에 승진되었고, 적당한 수의 보수적이며 경험이 많은 원 고위 장교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안정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지휘체계의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하이덴베르크 1세는 모조리 파괴된 군 장비를 비롯하여 다수의 군수물자를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로 부터 지원받았다. 특히 미국을 상대로 8만필의 M-16 소총와 4천량의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지원받았으며, 식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군수물자도 지원받았다. 이는 미국이 독일이 자본주의를 지켜줄 방어선이라 아직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하이덴베르크와 토비아스는 독자적인 군수품 개발에 나섰다. 우선, 독일 공업기술 연구기관에 부강해진 독일 첨단 군수업체 다수를 포함시켜서 뛰어나고 저명한 기술가들의 능력을 골고루 화합적으로 이용하여 더 질좋은 제품을 생산해내었다.

그 외에도 군의 근본적인 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 15세 이상이며 이전 교육기관에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우등생들은 국가에서 세운 각종 군사 대학을 필수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고등 교육기관은 법적으로 만 12세부터 자원으로 입학이 가능했다.

지휘체계

법적으로, 새로운 독일의 국가 원수의 자리에 뽑힌 것은 군의 체제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에른스트 빌헬름 폰 하이덴베르크였다. 1976년 1월 26일, 도이치 제일법이 제정되면서 하이덴베르크는 군의 총사령관의 직책에 올랐고, 그는 2000년에 국가 패망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하였다. 원래 군의 행정과 권한은 독일 제일 전략 전술 부서(OSA)의 총 책임자이자, 군사부 장관인 토비아스 슈뢰더였다. 이 부서는 특히, 연방 통합 해군와 연방 통합 공군의 지휘권을 주로 가졌으며, 독일 연방군은 독일 최고 군사 사령부(OKH)이 권한을 가지고 통제했다. OSA의 본부 시설과 OKH의 사령부는 모두 라인벨트돔(Rhineweltdome)이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 두 총괄 사령부의 권한은 간접적인 군의 통제에 지나지 않았다. 각 부서 별로 독자적인 사령부를 가지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독일 방위군의 사령부 목록을 참조하십시오.

초기에는 육군 중심인 OKH과 공군 중심인 OSA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났는데, 1979년, 제2차 군 개혁을 통해서 수립된 독일 정치-군사 복합 기관(DEMPO)에 의해 간접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둘의 충돌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본부와 원정 사령부

전쟁 기간

하이덴베르크-이케하라 대전 시기 초기에는 동맹국의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 군장비 지원과 내부 지휘체제의 안정성에 힘입어 정교하게 조직된 기갑 병력과 군의 경력을 앞세워서 2달 만에 냉전 시기 동안 소련 치하의 동유럽의 국가를 모두 해방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부터 꾸준히 발전되어온 독일식 기동전(전격전)의 정석을 프랑스영국에서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적이 집중된 곳을 우회하여 포위한 뒤 섬멸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베어마흐트(Wehrmacht, 독일 국방군)과 같이 군사 지휘관들에게 단시간의 집중공세의 개념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현실적으로 부족한 병력과 전쟁 중반기를 넘어 과도하게 확장된 국토를 지키기 위해 군사들을 분산 배치가 겹쳐지면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이 전쟁 후반기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연속됨으로써 증명되었다.

전역과 전투

주요인물

국가 해체 이후

국가가 해체된 이후에는 독일 지역에 세워진 바이에른-뉘른베르크-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과 대립하며, 단일 국가인 (독일 원정단국,獨逸 遠征黨國)으로 2000년에 건국되어 군의 통치를 받았다. 1년 뒤, 단치히 자유 해방 사건으로 군사 정권이 와해되고 1주일 간의 내전 후에 연방공화국에 합류하였다.

각주

  1. 1871년에 건국된 독일 제국의 군대의 정식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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