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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German Empire
독일 제국기
공식명칭 Deutsches Kaiserreich
(German Empire)
보통명사 독일
표어 "Gott mit Uns"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국가 Heil dir im Siegerkranz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공식 언어 독일어
수도 베를린
정부형태 연방 의회제
준입헌군주국
국가원수 빌헬름 2세 (1888 - )
정부수반 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1930 - )
통화 마르크 (ℳ)
성립 1871년 1월 18일
핵심 주 면적 약 544,000 km²
핵심 주 인구 약 7,400만 명

독일 제국(German Empire, 독일어:Deutsches Kaiserreich)은 보통 독일(Germany)로 불리는 중앙 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제국은 호엔촐레른 왕조가 통치하는 27개 구성국으로 이루어진 군주국이기도 하다. 독일은 열강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 영향력은 전 세계에 걸쳐 발휘되고 있다.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를 통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대전쟁의 승리자로 독일은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을 거느린 거대한 식민 제국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독일은 몇몇 동유럽 국가들과 중유럽, 북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군사 동맹인 라이히스팍트와 경제 동맹인 미텔오이로파의 지도국이기도 하다.

독일은 북쪽으로는 북해, 덴마크와 발틱해에, 동쪽으로는 폴란드, 리투아니아발틱 연합 공국에,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스위스에, 서쪽으로는 프랑스 코뮌, 플란데런-왈로니네덜란드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식민지까지 포함하면 스페인, 프랑스 공화국, 라이베리아, 아비시니아, 이집트, 소말리아, 남아프리카, 포르투갈, 시암, 청나라(정확히는 팔성연합산둥군벌)와 오스트랄라시아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역사

통일

"철의 재상"이라 불리는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독일은 마침내 통일되었다. 독일 제국은 1871년 1월 18일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되었다. 빌헬름 1세는 1888년 3월 9일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3세도 불치병으로 즉위 99일 만에 사망했다. 이에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이 너무 무르다고 생각한 카이저는 1890년 철의 재상을 해임하고, 더욱 카이저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대체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확장에 매진해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제독의 조언에 따라 영국과 건함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 독일의 고립이 심화되었다. 1911년 빌헬름 2세가 모로코를 요구하면서 유럽은 아가디르 위기와 함께 처음으로 전면전에 가까워졌다. 무책임한 카이저라는 별명을 가진 빌헬름 2세의 명성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추가된 순간이었다. 물론 이 위기가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발발을 겨우 몇 년 동안 지연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곧 보여주었듯이, 빌헬름 2세의 도박은 성공했고 그는 그가 생각한 모든 목표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를 향해 가장 강력한 비난을 쏟아내던 비평가들마저도 카이저의 결단력에 많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벨트크리그

본문: 벨트크리그

1914년 8월 1일, 벨트크리그를 선포하는 카이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했다. 한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선포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신속하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진격한 독일군은 서쪽으로는 마른에서, 동쪽으로는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전선이 나아가지 못해, 지독한 전쟁의 정체 상태를 만들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붕괴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동부 전선에서 서부 및 남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국내 전선의 전망은 암울했고, 기아, 박탈감,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분노는 1918년 9월 사회주의 봉기로 이어졌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결국 군부대를 투입한 진압이 필요하게 되자, 1918년 11월 수권법이 제국의회(Reichstag)에서 통과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공개적인 시위에 나섰다. 이들이 성탄절 시위를 벌일 때, 제국수상 헤틀링은 슐레지엔의 퓌르스텐슈타인 성에서 루덴도르프 장군을 만났다. 정치적 동향이 더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헤틀링은 건강 문제로 사임할 것이라는 의사를 장군에게 전달했다. 분노한 루덴도르프는 수상과의 만남 도중에 떠나 스파에 있는 OHL본부로 향했다. 1918년 12월 10일 제국수상 허틀링은 사임 요청을 카이저에 전달했다. 카이저는 이를 재가했고, 즉시 유명한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제국수상으로 지명했다.

1918년 11월 13일, 수권법이 통과되는 제국의회.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은 1919년 3월, 4년 반의 소모전 끝에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통해 마침내 앙테르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데 성공하며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던 프랑스 정부는 휴전을 받아들였다. 베르사유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한 이후 생디칼리스트 세력은 독일의 비밀 원조를 통해 프랑스 내전을 일으켰고, 독일은 프랑스에 요구한 영토를 온전히 가져갈 수 있었다.

루덴도르프 독재정

본문: 루덴도르프 독재정

프랑스를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둔 독일군은 조약으로 얻은 영토를 보호하고 오스만 제국의 남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히 재배치되었다. 1919년 가을 베르사유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영국의 지속적인 반발로 독일이 원하는 상당 부분은 철회되어야 했지만, 승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으로 꼽히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그러나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계속되었다. 인구의 대부분은 1919년에야 해제된 영국의 봉쇄에 의해 기아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으며, 경제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처참한 상태였다. 동원령 해제 때문에 돌아온 병사들로 많은 도시에 실업자가 폭증하였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다른 중립국들과의 무역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동쪽의 괴뢰국들은 계속해서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제국은행(Reichsbank) 총재 루돌프 헤븐슈타인카를 헬퍼리히, 얄마르 샤흐트, 한스 루터 등 저명한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대책팀을 구성했다. 헤이븐슈타인과 OHL은 증세와 세금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구성국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세제 개혁을 선호했다. 이 개혁안은 바이에른과 알자스 대표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의 지지를 받았고, 힌덴부르크 수상에 의해 가결되었다. 추가적인 대책이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시행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반면 폴란드 국경 지구의 붕괴로 인해 실패한 이주 정책은 융커들을 돕지 못했고, 폴란드-독일 사이의 경제적 유대관계를 붕괴시켜 동부 괴뢰국들이 미텔오이로파 경제권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해했다.

제국의회가 여전히 무기한 중단된 상황이 지속되자, 언론을 통한 선동이 야당의 운영 방식이 되었고 정부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사이는 점점 더 분열되었다. 모든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유일하게 활동을 허가받은 사회민주당은 합법과 불법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며 공격적 확장 정책을 펼쳐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야당으로서의 가치를 브랜드화 하는데 성공했다.

카이저는 점점 더 국내정치에서의 지분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의 가장 강력한 부하가 점차 카이저마저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독일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무소불위의 루덴도르프에게 재앙이 닥쳤다. 동부 원조 스캔들이 터지자 사회민주당, 자유당의 비난이 빗발쳤으며, 카이저 또한 그를 비판했다. 심지어 제국수상 파울 폰 힌덴부르크까지 합심하여 그를 공격하자, 루덴도르프는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추방당했고 독일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가 소집되었다.

티르피츠의 황금시대

1923년 7월 24일, 스퀄러의 날(Days of the Squallers)이라고 알려진 일주일간의 열정적이고 복작거린 선거운동 후 마침내 카이저는 자신의 목적과 개혁의 요구를 적절히 실행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 대제독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를 제국 수상으로 선택했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독일 제국수상을 지내며 1920년대 내내 독일의 세계 패권을 상징한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티르피츠는 DVLP, Zentrum, NLP, DkP, DRP로 구성된 대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NLP와 중앙당을 포함하는 정책은 DVLP의 많은 구성원을 실망시켰다. 제국의회의 보다 급진적인 의원들은 언론 거물 알프레드 위겐베르크가 이끄는 내부 모임을 형성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싸웠다.

티르피츠는 경제 분권 정책을 시행했다. 경제 침체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그의 정책은 마침내 미텔오이로파에 대해 행한 지속적인 투자금액을 모두 회수하고 남는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성과는 제국수상 폰 티르피츠의 재임기간 동안 계속된 경제 기적이었고, 그에게 엄청난 인기와 "제2의 비스마르크"라는 영예로운 별명 또한 안겨주었다.

티르피츠는 1925년 영국 혁명 이후 영국령 식민지의 점령을 지시했으며, 이듬해 중국 직예군벌과의 동맹으로 독일군의 해외 철수 계획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텔아프리카가 영국 식민회사(British Colonial Holdings)와 동아시아 총행정기구 감사위원회(Aufsichtsrat der Ostasiatischen Generalverwaltung)를 장악하면서 독일의 열망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한편 유럽에서 티르피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브리튼 연방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프랑스 코뮌의 확고한 동맹으로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반독일 세력이 형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실패는 독일 제국과 미텔에우로파의 소속 국가에서 생디칼리스트 테러가 증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부재기간

1930년 6월 6일, 제국수상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는 함부르크 방문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떤 다른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없는 DVLP를 멈추게 만들었다. 베를린을 통과하는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의 장례 행렬이 독일에서 벌어진 가장 큰 대중 집회가 된 후, 언론 거물 알프레드 위겐베르크울리히 폰 하셀을 상대로 DVLP 의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위겐베르크가 선출 직후 공석인 독일의 제국수상이 되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저는 위겐베르크를 새 제국수상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례적으로 긴 부재기간이 계속된 후에 카이저는 DVLP의 정책과 가장 비슷한 독일보수당(DKP)의 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총재를 8월 3일 제국수상으로 지명했다.

카이저의 결정에 분노한 위겐베르크는 즉각 반정부 선전과 함께 DVLP 당내에 광적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권위주의, 대독일주의, 융커우선주의를 포함하는 범독일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고착화 시켰다. 이런 당의 체제 정비는 1932년 7월 16일, 총선을 통해 보수당이 28%를 획득하고, 위겐베르크의 "새로운 DVLP"는 역사상 최저인 5% 수준의 득표로 결과가 발표되자 헛된 일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34%를 득표해 원내 1당을 유지했다.

독일인들은 모험적 정책에 대한 욕망을 모두 잃었다. 독일인과 독일의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독일의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이저는 늙어가고 있고, 벨트크리그의 유산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독일은 독일이 지금같이 강했던 적도 없었지만, 독일이 지금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적 또한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정치

정부 구성

독일 정부는 프로이센 보수주의인 독일보수당(DkP), 기독교 보수주의인 중앙당(Zentrum), 국가자유주의인 국가자유당(NLP), 자유보수주의인 독일제국당(DRP)의 연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책 이름 정당 초상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 빌헬름 2세
1859년 1월 27일생
무소속
제국수상(Reichskanzler) 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1864년 8월 12일생
독일보수당 (DkP)
국무장관(State Secretary for Foreign Affairs) 프란츠 폰 파펜
1879년 10월 28일생
중앙당 (Zentrum)
경제장관(State Secretary for Economic Affairs) 카를 헬퍼리히
1872년 7월 22일생
독일조국당 (DVLP)
내무장관(State Secretary for the Interior) 빌헬름 그뢰너
1867년 11월 22일생
무소속
제국은행 총재(President of the Reichsbank) 얄마르 샤흐트
1877년 1월 22일생
국가자유당 (NLP)
독일 제국 총참모장(Chief of the Imperial German General Staff) 한스 폰 젝트
1866년 4월 22일생
무소속
독일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of the Deutsches Heer)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1849년 12월 6일생
무소속
독일 해군장관(State Secretary of the German Naval Office) 루트비히 폰 로이터
1869년 2월 9일생
무소속
독일 공군장관(State Secretary of the German Airforce) 헬무트 윌버그
1880년 6월 1일생
무소속

정치 제도

본문: 독일 제국(카이저라이히)/정당

독일은 카이저에 의해 통치되는 준연방, 준입헌군주국이다. 1871년 제국 헌법에 따르면, 총리와 정부는 카이저에 의해 임명되고 오직 카이저에게만 책임을 지지만, 입법권은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득표율에 비례해 선출된 제국의회(Reichstag)와 연방 상원(Bundesrat)에 있다.

다소 권위주의적인 독일 민주주의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정치 체제는 다당제를 유지중이며, 다수당이 출현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다수당이 없을시 수상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 카이저가 정치에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연립여당은 독일보수당(DkP)와 중앙당(Zentrum), 독일제국당(DRP)이다.

1867년 이후 제국수상 목록

초상 이름 정당 재임 임기 중 사건 및 정책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1898)
무소속 1867-1890 독일 통일, 문화투쟁, 반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법 제정
장기불황, 보호무역주의, 폴란드 추방, 초기 식민주의,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레오 폰 카프리비
(1831-1899)
무소속 1890-1894 새로운 길 제시, 영국과의 화해, 반폴란드, 반가톨릭, 반사회주의법 폐지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독일-러시아 방위조약 갱신 거부, 진보적 세제&노동 정책 수립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벨기에, 세르비아, 스페인, 스위스와 무역협정 체결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 퓌르스트
(1819-1901)
무소속 1894-1900 많은 권력을 장관들에게 위임해 "그림자 수상"으로 불림
카이저의 직접통치와 벨트폴리틱 구상에 반대
군법 및 민법 개혁 무산, 가톨릭 중앙당과의 협력 시도 실패
베른하르트 폰 뷜로
(1849-1929)
무소속 1900-1909 "빌헬름 2세의 비스마르크"로 독일 벨트폴리틱의 전성기 주도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와 영국-독일 해군 경쟁 아래 대함대 건설
협상국 결성으로 독일의 유럽 내 고립화, 식민지 반란 발생(헤레로 전쟁, 마지마지 반란)
끊임 없는 국제 위기(복서 반란, 베네수엘라 위기, 제1차 모로코 위기, 보스니아 위기)
국내 정치적 스캔들(하덴-울렌부르크 사건,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 개혁 요구 억압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1856-1921)
무소속 1909-1917 영러와의 데탕트 시도, 유럽 평화 유지 노력 실패
아가디르 위기, 리만 폰 샌더스 위기, 바그다드 철도 마찰에 따른 독일 고립 심화, 식민지에서의 굴욕
발칸전쟁의 성공적 중재, 사회 개혁에 따른 불안, 대규모 육군 확장, 알자스-로렌의 헌법적 편입
자베른 사건, 7월 위기, 벨트크리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무조건 지원 약속
9월 정책 및 대전쟁의 목표 설정, 참정권 개혁 일부 성공,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놓고 지도부 갈등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통한 협상국과의 평화 타협 노력 실패
게오르크 미카엘리스
(1857- )
무소속 1917 국내외적 위기 발생, 케렌스키 공세, 파스첸달레 전투, 제1차 독일 총파업, 함대 반란
제국의회 평화 결의 및 교황의 평화 노력 실패, 극우 정당 독일조국당의 창당
프로이센 3계급 개혁에 대한 논의 진행, OHL의 정치적 영향력 폭증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843-1918)
중앙당 1917-1918 프리드리히 폰 페이어, 로버트 프리드베르크와 연립 내각을 구성해 의회민주주의 실현
그러나 OHL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함
동부전선 전역의 평화협정 주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부쿠레슈티 조약, 포티 조약)
전쟁 피로도에 의한 사회주의 폭력 시위 증가(1918년 1월 파업, 9월 항쟁)
파울 폰 힌덴부르크
(1847-1934)
무소속 1918-1923 세제 개편 및 구성국 특권을 축소하는 징세의 중앙집권화 개혁 실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한 벨트크리그의 종전 주도
동부 원조 스캔들의 폭로로 에리히 폰 루덴도르프와 함께 정계 은퇴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1849-1930)
독일조국당 1923-1930 황금의 20년대 시작, 폭발적인 경제 성장, 독일 사회와 문화의 급변,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쿠노 폰 베스타르프
(1864- )
독일보수당 1930- 황금의 20년대를 지난 직후의 경제 불황, 독일보수당의 우익 빅텐트화, 정치적 교착 상태

군사

육군

제국 전쟁기(Reichskriegsflagge)는 전세계적 독일 패권을 상징한다.

독일 육군(Deutsches Heer)은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끊임없는 추문에 시달렸으며, 이는 교리와 훈련 시스템이 늘어난 국방 예산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현 독일군 총사령관인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그는 늙었고 언제든지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대부분의 독일 육군은 1920년대 후반 독일 제국수상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가 고안한 방어 계획에 따라 유럽에 집중되어 있다. 플란데런-왈로니에서 엘자스-로트링겐까지 이어져 있는 루덴도르프 선이 서쪽 방어의 기초를 형성하는 반면, 동유럽은 괴뢰국을 통해 러시아와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모로코, 싱가포르, 태평양 제도 및 서아프리카의 전략수비대를 제외한 식민지의 방위는 미텔아프리카독일령 동아시아 식민정부에서 조직한 민병대에 맡겨져 있다.

해군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해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의 해상 전력에 빗대어 보면, 대전쟁 이전의 영국 해군이 가지는 수준의 위상은 아니다. 구식 군함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 함대를 자랑하는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을 보유한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해군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 기지를 두고 있는 해군 해병대는 독일 제국의 식민지 무역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루트비히 폰 로이터 제독이 제국 해군을 지휘하고 있다.

공군

독일 공군(Luftstreitkräfte)은 대전쟁의 에이스 헬무트 웰베르크가 이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군 규모를 자랑하는 독일 공군은 대량의 전술폭격기를 통해 육상작전을 지원하는데 운용의 방점이 찍혀있다. 독일 공군은 해외에도 주둔하고 있으며, 특히 칭타오에는 대규모 공군 파견대가 위치해 있다.

외교

구성국

식민지와 위성국

경제

문화

독일 여성

문학

음악

극장

기타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