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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 (리반)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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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청방기(중국어: 靑方旗, 언어 오류(qp): ㄙㄟㄏㄚㄑㄧ (세 이 하 키))
성람기(중국어: 星藍旗, 언어 오류(qp): ㄒㄧㄥㄌㄢㄑㄧ (싱 란 키))
용도 국기
비율 2:3
채택일 1947년 8월 10일
요소 청색 바탕, 다섯개의 노란석 별과 왕실 문양이 포함됨.
용도 육군기
비율 2:3
채택일 1947년 9월 6일
요소 붉은 바탕과 왼쪽 상단에 국기가 배치됨.
용도 해군기
비율 2:3
채택일 1947년 9월 6일
요소 청색 바탕과 가운데에 매화 문양이 배치됨.
용도 공군기 / 해상육전대기
비율 2:3
채택일 1947년 12월 23일
요소 매화 문양을 중심으로 욱광이 배치됨.

동녕의 국기(언어 오류(qp): 東寧ㄝ國旗 (ㄉㄨㄥㄋㄧㄥㄝㄎㄛㄑㄧ) 둥닝에 코키)는 1947년 8월 10일 임시내각 제2차 전체 회의에서 상정된 「동녕 국기제정에 관한 건」에 따라 공식 제정하여 성조기를 폐지하고 새롭게 지정한 국기이다. 별칭으로 '청방기'(靑方旗) 혹은 '성람기'(星藍旗)라고 부른다.

상징

  • 청색 : 푸른색 바탕, 평화에 대한 열망을 의미함.
  • 금색 : 다섯 개의 별, 민족의 통합을 의미함.
  • 백색 : 국기 가운데에 위치한 문양, 왕실동녕인을 의미함.

역사

월회이대실록(月懷異代實錄, 1487)에 따르면 948년, 경종(景宗)이 화려한 푸른색 비단을 이용해 조정의 상징으로 세운다고 했던 기록을 통해 10세기 경부터 '푸른색 깃발'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당대 귀족과 왕실은 각기의 독특한 문양을 넣어 권위를 과시하였는데 이를 '금어기'(언어 오류(qp): 錦御旗 ㄐㄧㄣㄛㄋㄑㄧ / 진온키)라고 불렀다.[2] 이런 금어기는 주로 사치품이나 은사품을 포장하는데 사용되었다. 허나 화비집(和備集, 1233), 천수휘고(天授彙考, 1673) 등에서 성읍 시대(城邑時代)에 이와 비슷한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나오면서 그 기원이 매우 불투명해졌다.[3]

가장 오래된 금어기는 영암사(英岩寺)에서 보관 중인 '몽월원년계여리영암사송기'(夢月元年啓黎鯉英岩賜送旗)로서 전승에 따르면 1021년에 새로이 즉위한 현종(顯宗)이 권력 암투로 살해될 위기에 처하자 영암사의 고승이었던 여리(黎鯉)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보전한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하사한 이래 대대로 절의 보물로서 전해졌다 한다. [4]

애류 왕조의 치세 말, 즉 근세에 들어서면서 열강 교역선들과의 접촉이 늘어남에 따라 자국 상선을 나타낼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상인들은 푸른색 바탕의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흰색 원 깃발을 달기 시작했다. 왕실의 경우에는 푸른색 바탕에 고유 문양을 그려 넣으면서 차별화를 두었다. 허나 1897년, 미국령 켈파르티아로 주권을 상실하면서 성조기를 달아야만 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의 침탈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장기를 사용해야 했다.

1945년부터 1947년 동안에는 군정 통치에 따라서 성조기를 사용할 것인지 독자적인 국기를 사용할 것인지 왈가왈부가 많았다. 이에 2대 군정 장관으로 부임한 로버트 S. 베이틀러(Robert S. Beightler)가 기존 국기 사용의 금지를 해금하고 자치 내각의 자율적 판단에 맡기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런 이유로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조기와 푸른색 바탕의 흰색 원 깃발이 동시에 백화궁(白華宮) 앞에 내걸렸다.

1947년 6월 14일에 자주독립을 이룩한 후, 8월 10일에 '국가상징법'을 시행하면서 현 국기와 국장에 법적 근거가 부여되었다.

규격과 색상

동녕의 국기 규격
색상 청색 흰색 금색
RGB 30–36–80
(#1E2450)
255–255–255
(#FFFFFF)
253–185–19
(#FDB913)

그 외의 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