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제국
중국어: 東亞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East Asia
བོད་ཡིག: ཤར་ཕྱོགས།ཡ་ཀྲོའུ་གླིང་མེ་གོ
언어 오류(ug): ئامېرىكا قوشما شىتاتلىرى شەرقىي ئاسىيا
동아합중국
19111936
국기 국장
표어 만민의 축복, 공화의 실현
萬民的祝福, 共和的實現
국가 쉬어가자, 다시 갈 수 있기에
Let's go, let's go again
我們走吧,讓我們再去吧。

1925년경 세력도
수도 신징新京 (합중국 수도)
정치
공용어 한국어, 표준 중국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몽골어, 류큐어 등등 소수 언어
정부 형태 연방제, 부분적 공화정, 부분적 입헌군주정, 광역 자치정
대총통大總統 장쭤린張作霖 (초대)
융희제隆熙帝 (2대)
당경숭唐景崧 (3대)
복드 칸博克多汗 (6대)
툽텐 갸초土登嘉措 (7대)
호자 니야즈和加尼牙孜 (최후)
입법 동아입법원東亞立法院(1911~1930)
동아협화회東亞協和會(1928~1936)
역사
 • 신해회의 1911년 12월 29일
 • 합중국 조약 체결 1912년 3월 11일
 • 호국대립 1915년 5월 ~ 1916년 6월
 • 시베리아 출병 1918년 2월 ~ 1920년 8월
 • 직봉전쟁 1922년 4월 ~ 6월
 • 국민혁명 1926년 7월 ~ 1928년 6월
 • 당산조약 체결 1928년 7월 12일
 • 관동전쟁 1928년 6월 ~ 1928년 9월
 • 4.17 사태 1935년 4월 17일 ~ 20일
 • 협화 시대 선언 1936년 1월 7일
인구
1936년 어림 105,768,858명
기타
통화 동아 달러(東亞.$) (E.A $)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대한제국
복드 칸국
예티샤르 칸국
봉천 군벌
류큐 왕국
타이완 민주국
티베트 왕국
동아제국
동아 영토복합체 계보
東亞領土複合體系譜
동아합중국
東亞合衆國
1911-1936
동아제국
東亞帝國
1936-1951
동북아연합
東北亞聯合
1952-1960
아시아합중국
亞細亞合衆國
1988-현재

동아합중국(중국어: 東亞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East Asia, བོད་ཡིག: ཤར་ཕྱོགས།ཡ་ཀྲོའུ་གླིང་མེ་གོ, 언어 오류(ug): ئامېرىكا قوشما شىتاتلىرى شەرقىي ئاسىيا)은 1911년, 신해회의(辛亥會議) 개회 이후에 합중국 조약(合衆國 條約) 체결로 성립된 동아시아(東亞細亞)의 연방 국가(聯邦國家)이다. 이로서 20세기 초 동아시아는 일본 제국(日本帝國)과 봉천 군벌(奉天軍閥)을 제외한 중화민국(中華民國)과 함께 독자적인 자치 정권을 수립한 소수 민족들의 국가를 주축으로 수립된 동아합중국의 거대한 3대 세력으로 정립되었다.[1]

1911년, 신해 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자, 봉천 군벌의 수장이자 봉천 내에서 강력한 실권자로 군림하게 된 장쭤린(張作霖)이 당시 순방영 통령(巡防营統領)이었던 우쥔성(吳俊陞)과 동삼성 총독(東三城總督), 조이손(趙爾巽)을 설득하여 동북 정권(東北政權)을 중심으로 한 독자 세력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외몽골(外蒙古)에서는 여러 왕공들의 추대로 대칸(大汗)으로 추대된 복드 칸(博克多汗)과 고종 독살사건(高宗毒殺事件)으로 새로이 즉위한 융희제(隆熙帝)의 대한제국(大韓帝國)간의 삼국 연계(三國連繫)를 바탕으로 합중국 체제가 수립되었고, 이후에 독립 정권을 수립한 티베트 왕국(吐蕃王國)과 류큐 왕국(琉球王國), 예티샤르 칸국(喀什汗國)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台湾民主国)까지 합세하여 거대한 연방 체제로 정립되었다.

이후 수립된 다민족 연방 국가는 만족공화(蠻族共和)에 의거된 자치 사회를 추구하였으나, 실질적인 중앙 정부의 권력이 유지되던 곳은 동북 정권을 위시한 장쭤린봉천당(奉天黨)이었다. 허나, 호국 대립(護國戰爭)과 직봉 전쟁(直奉戰爭)을 거치면서 대내외적 입지가 좁아진 봉천당은 결국 이들을 통솔하던 장쭤린우쥔성 등이 관동주(關東州)를 둔 일본 제국과의 대립 과정에서 암살됨으로서 와해되었으며, 이후에는 동아 협화회(東亞協和會)를 위시한 파시즘(法西斯主义) 성격의 독재 체제로 변질되었다가, 1936년에 대한제국의화제(義和帝)와 동북 정권계운제(啓運帝)를 위시한 황제 정권(皇帝政權)이 수립되는 협화 시대(協和時代)의 선언으로 동아제국(東亞帝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

1910년대

신해 혁명을 기점으로 동북 정권조이손장쭤린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보경안민(保境安民)을 위시한 보황주의(保皇主義)를 표방하여 강제 퇴위된 선통제(宣統帝)를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이 당시 봉천성(奉天城)에서는 무창봉기(武昌蜂起)에 호응하기 위한 혁명단원들의 운동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징롄(吳景濂) 등의 당원 수령들은 동북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봉천 보안회(奉天保安會)를 조직하여 조이손을 내쫓고 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지방 정권을 세우기로 논의하였으며, 이러한 논의에 조이손장쭤린은 이들 회의에 참석하여 분통을 터뜨리며 이들 회의를 무산시킨 후 보황 세력 중 한명이었던 남천위(攝汝淸)를 앞세워 동북 정권의 앞날을 도모했다.

허나 장쭤린위안스카이(袁世凱)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정권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도리어 조이손을 이용하여 동북 정권의 독립과 만주(滿洲)에서의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자신에게 충성심을 보인 장쭤린[2]에 대해 조이손을 대신하여 동삼성 독판(督辦)으로서의 자리를 보장하고 장석란(張錫欒)을 견제장치로서 동북 정권을 수하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노령의 군인이었던 장석란은 도리어 장쭤린의 야심에 당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위안스카이의 정권에 대한 동아시아 사회의 안정을 명목으로 신해회의(辛亥會議)를 개회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주도한 복드 칸퇴그스오치린 남난쉬렌(那木囊蘇倫) 총리, 대한제국융희제(隆熙帝)와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을 접견하여 '합중국 체제'의 구상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장쭤린은 "중원(中原)을 기반으로 삼은 대총통(大總統)을 제제(帝制) 선언케 하여 훗날을 도모합시다."라는 말로서 비밀리에 연합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윽고 이듬해 3월에는 을 중심으로 한 합중국 조약(合衆國條約)을 체결토록 종용하여 합중국 사회의 기반을 다졌다.

이 당시 대한제국고종 독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기 시작했으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요청으로 제2차 서남전쟁(第二次西南戦争)에 개입하여 류큐 왕국(琉球王國)에 대한 형식적인 종주권을 획득한 것 외에는 전쟁 이후의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일당 정권(一堂政權)[3]에 대한 불신임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위안스카이러시아 제국(俄罗斯帝国) 등지에서 지속적인 정계 개입과 간섭과 함께 신해혁명의 발발로 국내에 공화파(共和波)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국제 상황까지 도달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을 것이 필요했다. 이때 장쭤린을 중심으로 한 동북정권과의 '합중국 체제'의 구상안은 국내에 불만을 외부로 해소할 수 있었음은 물론, 국격의 향상과 대외적인 제국주의적(帝國主義) 성격으로의 진출을 암시하는 통로로서 크게 각광받았으며, 이완용 역시 이러한 장쭤린의 노골적인 야심적 정책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외몽골의 경우에도 종교 수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겸임하는 신정 체제(神政體制)에 대한 몽골인들의 회의감과 지지부진한 근대화, 위안스카이몽골 지역에 대한 탈환의 야심은 러시아 제국의 일시적인 간섭으로 저지된 상태였으나 대한제국을 제외한 열강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상황에서[4] 장쭤린의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쭤린 역시 외몽골의 독립이 좌절될 시에는 러시아 제국위안스카이를 위시한 중화민국의 압박으로 동북 지대에 대한 권력의 자리를 포기하게 될 것임을 생각함으로서 외몽골의 독립을 최대한 비밀리에 지원하는 것으로 현재의 상황을 모면코자 했다.

1915년, 캬흐타 협정(布連斯奇協定)을 통해 외몽골의 자치권을 인정받는 동안, 위안스카이쑹자오런(宋教仁) 등의 정적을 암살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으며, 캬흐타 협정 체결 바로 전년에는 량치차오(梁啓超)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의회 해산을 단행함으로서 입법권을 장악하고 종신 총통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은연 중에는 군주론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키면서 황제로의 추대를 꾀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의 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은 빌헬름 2세로부터 군주론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더불어 주변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위안스카이는 제제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캬흐타 협정의 해가 끝나기 직전인 12월에 추대서를 받아 황위에 오름으로서 중화제국(中和帝國)을 수립하게 되었다.(홍헌제제, 洪憲帝制) 장쭤린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으나, 차이어(蔡鍔)를 중심으로 한 운남성호국군(護國軍)이 군주제에 염증을 느끼고 공화정의 복귀를 희망하는 호국 전쟁(護國戰爭, 혹은 호국 대립)이 발발함으로서 중원 각지에 엔시산(閻錫山)을 비롯한 군벌들의 난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는 다급히 장쭤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는 "앞으로 중원의 땅과는 이별이기에 가제(假帝, 거짓 황제)께서는 알아서 하시옵소서."라는 전보를 남긴 뒤 돤즈구이(段芝貴)를 내쫓고 공식적인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건립을 선언하였으며, 장쭤린은 국부(國父)로서 합중국의 초대 대총통(大總統)과 함께 합중국군(合衆國軍)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되었다.

이후 호국 전쟁이 한창인 1916년부터 군벌이었던 장쉰(張勳)을 주도로 한 복벽파가 득세하기 시작하자, 장쭤린을 주도로 한 동아합중국은 직예성(河北省, 하북성)과 산둥성(山東省)을 호북성(湖北省)에서의 복벽론의 호응 할 것임을 언급함으로서 선통제(宣統帝)의 복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동아합중국과 북양군벌들은 '제1차 서주회의'(第一次 西州會議)를 열어 안휘도독(安徽都督) 니쓰충(倪毓楓) 등의 도움을 받아 복벽을 확고히 결의했다. 1917년 6월에는 '제2차 서주회의'(第二次 西州會議)를 통해 복벽 이후에 대한 논의로서 일본제국의 압제를 받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와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国)을 지원하고 중원 서부에 국가들을 통합할 것을 결의함으로서 '대동아사회권'(大東亞社會圈)을 주창하였다.

동아합중국의 구성국이었던 복드 칸국(博克多汗国)은 근대화 정비와 사실상의 무력 행위가 불가한 소규모의 군사력을 이유로 들어 중화에서의 복벽 운동에 대해 불참여를 선언했으며, 대한제국이완용 총리대신을 주축으로 '반중원 정책'(反中原政策)을 표방함으로서 실질적인 복벽 운동에서의 참여는 봉천당(奉天黨)의 군사력을 주축으로 한 제1 합중병단(第一合衆兵團)만을 활용하게 되었다. 한편, 191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을 빌미로 한 논쟁이 동아시아에도 전달되면서 장쭤린안휘군벌의 수장인 돤치루이(段啓瑞)는 대독 선전을 통해 연합국(聯合國)의 지지를 선언하여 구미 열강에 대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부원지쟁(府院之爭)를 통해 돤치루이를 해직시키는데 성공한 리위안홍(黎元洪)과 장쉰안휘성, 직예성, 산서성 등의 각 군벌들의 독립과 더불어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복벽 여론들을 조성한 뒤 합중국군에 도움을 얻어 선통제를 설득하여 정사복벽(丁巳復辟)을 통해 약 12일 간의 왕정복고를 선언했으나, 청 황실의 복벽 거부와 함께 서구 열강들의 복벽 거부 및 베이징(北京) 시민들의 반발에 굴복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돤치루이가 이끄는 반복벽파에 의해 실패되었다. 이에 장쭤린선통제와 일부 청 황실을 이끌고 만주로 향하여 부분적인 황권 회복을 도모했다. 이에 선통제가 '만주국 황제'(滿洲國皇帝)의 직함이라는 제한적인 형태로 다시 복권되었으나, 여전히 만주국에 대한 실권은 절대적으로 장쭤린이 주도하는 봉천당에게 억눌리게 되었다.

이후 1919년, 쉬수정(徐樹錚)을 위시한 변방군이 외몽골 출병(外蒙古出兵)을 선언하여 복드 칸국을 침공코자 하자, 장쭤린제1 합중병단제2 합중병단을 이끌어 니슬렐 후레(Нийслэл Хүрээ) 시내에 진주시켰다. 이에 쉬수정중화민국 쉬스창(徐世昌) 정권에 대해 전면적인 도전임을 밝힘으로서, 대립 구도가 극심해졌다. 한편, 1918년부터 시작된 러시아 지역에서의 적백내전(赤白內戰)이 치루어지자 제6 합중병단의 지휘관이었던 우쥔성대한제국 의용군(大韓帝國義勇軍)을 이끌던 민영환(閔泳煥)과의 독자적인 작전 수립을 통해 시베리아 출병(西伯利亚出兵)에 나서면서 사할린(樺太)과 바이칼 호(贝加尔湖)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파르티잔의 저항과 러시아 백군의 의지 상실로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대한제국 내 정치 단체였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간부들과 민권대표 33인(民權代表三十三人)을 주도로 한 한성 데모크라시(漢城民主)가 시작되었다. 대외적 정세가 중원의 군벌 난립을 제외한 장쭤린봉천당동북정권을 주도로 안정화되며 이완용일당정권에 대한 지식인과 민중의 불만이 가속화됨으로서, 특히 시베리아 출병이 실패하면서 불필요한 군비가 지출된 점과 유기성(柳冀聖) 육군 참장(參將)과 현영운 육군 부장(副將)[5]을 중심으로 한 군정 내각(軍政內閣)이 성립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김창숙(金昌淑), 이상재(李商在) 등의 지식인들은 '민주혁신, 헌정개혁'(民主革新, 憲政改革)을 외치며 호민운동(護民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후 호민운동을 추진하던 민권주의자들은 입헌민당(立憲民黨) 등을 발족하여 대한제국 군부(大韓帝國軍部)의 정계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입헌민당이 출범한지 60여 일만에 지멘스 뇌물공여사건에 의해 총사퇴를 결의함에 따라 1910년대의 민정 정권 수립 운동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다만, 입헌민당의 주도 아래 그 지위가 불안정하게 유지되던 종속국, 류큐 왕국의 처분이 최종적으로 결정됨에 따라 합중국 체제에 가맹하는 것으로, 그리고 타이완 민주국류융푸(劉永福) 방변(幇弁)[6]의 가맹 요청을 받아들여 동북 정권복드 칸국과의 논의를 통해 이를 승인하는 등 남중국해(南中國海)에 합중국 세력을 넓히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1920년대

1920년 7월, 중원의 패권을 두고 합직전쟁(合直戰爭)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장쭤린직예군벌(直隸軍閥)과의 협력을 통해 안휘군벌(安徽軍閥)의 거두인 돤치루이, 쉬수정과 대립하였다. 특히나 외몽골 출병 이후로 합중국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요구하던 안휘군벌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내뱉은 장쭤린을 비롯하여 환계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던 직예독군, 차오쿤(曹錕)은 물론이며 강소독군 리춘(李純), 호북독군 왕잔위안(王占元), 강서독군 천광위안(陳光遠) 등의 직계군벌들은 합중국군의 대원수였던 장쭤린을 중심으로 흑룡강 방면을 통솔하는 제3 합중병단순열신(孙烈臣), 길림 방면의 제7 합중병단을 이끄는 포귀경(鮑貴卿)과의 이른바 '합직 연맹'을 구성한 뒤 비밀리에 회동했다. 점차 직계와 안휘간의 대립이 극도로 치열해지자 위기를 느낀 쉬수정복드 칸국 근처에 주둔해 있던 병력들을 베이징으로 회군시켰으며, 이에 대립이 극단화 되어 중원 통일 및 세력 확장에 우려를 표한 쉬스창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합중국 대총통, 장쭤린을 불러들여 현재의 난국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장쭤린 역시 이에 응하였다. 여기서 장쭤린중화민국의 시국 해결을 위해 진윈펑(靳雲鵬) 총리의 복직을 비롯하여 내각 개조, 쉬수정의 병권 박탈 등을 요청하였고, 쉬스창 역시 해당 방안을 채택하려 했으나, 돤치루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

화해 및 중재가 실패로 끝나간 장쭤린을 두고 쉬수정돤치루이에게 "를 비밀리에 압송하여 처형시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이를 진행시키려 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장쭤린이 화물 열차를 타고 톈진(天津)을 거쳐 봉천성으로 돌아오면서 실패하게 되었다. 파국으로 돌아간 중화민국의 내부 상황에서 결국 쉬스창돤치루이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북 정권(공식 국명은 만주국)과 직계 군벌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허나 안휘군벌 소속으로서 서로군 총사령관이었던 취퉁펑(曲同豊)이 우쥔성제11 합중병단[8]에 의해 붕괴되고, 정국군 총지휘관 돤즈구이(段芝貴)가 싸울 의지를 잃고 베이징으로 후퇴하면서 안휘군벌은 와해됨에 따라 전쟁은 종전되었으며, 진원펑 내각이 복권되고 직계 군벌이 중원 천하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뿐더러, 장쭤린 역시 합중국 내부에서 확고한 자리를 유지하고 외부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허나 봉천당직예 군벌간의 중원을 두고 영향권에 대한 행사가 양분됨에 따라 분열되었으며, 결국은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직봉전쟁(直奉戰爭)이 이어지게 되었다. 직예 군벌우페이푸(吳佩孚)는 "중원 통일로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작자가 도리어 장애를 만들고 있다."라고 비난하면서 "장쭤린이 죽지 않으면 중원의 통일은 결코 불가할 것이다."라고 표명한 후 펑위샹(馮玉祥)에게 후방 각군의 통제권을 맡긴 뒤 합중국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장징후이(張澄煇)를 합중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신점(長辛店) 사령부를 설치한 뒤 직접적인 대립 구도가 이어졌고, 직예 군벌합중국군 우익을 우회하여 앙향과 장신점 사이에 있는 남강와(南崗窪)의 합중국군을 공격함으로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합중국군은 전열이 무너졌으며, 제1 합중병단 산하의 장락산 여단과 주익청 기병단을 투입하여 일시적으로는 모면했으나 외몽골 방면에서 양조동 여단을 지원해 온 제16 사단이 피로에 누적됨으로서 격퇴되고, 과거 직계 군벌 소속이었으나 흡수하게 된 일부 병단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선은 붕괴되었다. 이에 장쭤린은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인정하고 총퇴각령을 발표하여 산해관(山海關) 북부까지 전력을 후퇴하였다. 이 시기에 직봉전쟁에서의 패전을 두고 장쭤린대총통 직책을 사임하고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융희제(隆熙帝)를 새로운 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중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합중국이었으나, 장쭤린신해혁명 이후 독립적인 사회를 갖추게 된 티베트 왕국예티샤르 칸국을 각각 1923년, 1924년에 합중국의 구성국으로 편입시켰다. 이때문에 합중국의 판도는 중국 대륙을 감싸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한창 합직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복드 칸국으로 러시아 백군의 지휘관 중 한명이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Роман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가 800여명의 군대를 데리고 귀순하였으며, 몽골 최초의 사관학교인 '호지르볼란'(Hkujirbulan)의 군사 교관으로서 후에 열하사변(熱河事變)에서 활약하여 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기도 했다. 장쭤린은 대총통 사임 이후 동삼성 총재가 되어 직계 군벌이 주도하는 북양 정부와 최대한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예티샤르 칸국복드 칸국의 협조 아래 양쩡신(楊增新)의 신강 군벌과는 디화전쟁(迪化戰爭, 1925~26)을 벌여 괴뢰국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어 중원으로의 영향력 확장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기간동안 내치에 치중하였으며, 융희제가 서거한 후, 의화제가 즉위함으로서 이전에 사멸되었던 한성 데모크라시가 부활함에 따라 안창호 내각(安昌浩內角)이 수립되기도 했다.

한편, 영풍함 사건(永豐艦事件)으로 북벌 단행을 포기하게 된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를 비롯한 국민당(國民黨) 세력은 연성자치론(聯省自治論)을 주장하며 광동군벌로서 군림하게 된 천중밍(陳炯明)을 피해 상하이(上海)로 도망 오게 되었으며, 천중밍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2.7 사태(二七惨案)로 군벌과의 합작을 포기한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과 함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논의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쉬충즈(許崇智)의 우로토적군이 양희민(楊希閔), 유진환(劉震環)의 국민당 계열 군벌들이 이끄는 서로토적군과 함께 광저우를 공격함으로서 천중밍을 내쫓을 수 있었으며, 국민당은 2차례에 걸친 국민동정(國民東征)에서 완전히 그의 세력을 몰아내고 광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쑨원 사후 중산함 사건(中山艦 事件)을 통해 장왕합작(蔣汪合作)이 붕괴되고 1인 권력을 장악한 장제스는 분열된 중원의 통합을 위해 1926년부터 북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당시 중화민국 북양정부(中華民國 北洋政府)의 실권자였던 우페이푸에 대항하던 펑위샹(馮玉祥)은 우페이푸를 이기려면 초기 국민당(國民黨)이 생각했던 것처럼 동아합중국과 합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1926년 5월에 장쭤린의 초청을 받아 신징(新京)을 방문하였다. 펑위샹은 신징에 3개월이나 머물면서 일부 유학생들과 류보젠(劉伯堅)을 비롯한 공산계열 당원들을 만났고, 합중국의 체류중이던 소련인들과도 회동했다. 한편 그가 신징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의 군대는 우페이푸를 선제 타격하는 것으로 직풍전쟁(直馮戰爭)이 발발함으로서 간쑤성(甘肅省) 일대를 제외한 영토를 잃게 되었다. 장제스는 호남 군벌 탕성즈(唐生智)의 투항과 함께 본격적인 북벌 단행에 나서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국민당의 북벌 참조.

장쭤린은 합중국군을 앞세워 장제스와 연합한 뒤 황허 북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종속화하려고 했다. 그 동안, 우한 국민정부(武汉國民政府)의 하야 요구에 대해 굴복할 수 없었던 장제스는 장풍합작을 포기하였으며, 정치적 패배를 대신해 국민정부의 통합을 포기한 장제스는 지역 국민당에 대한 영향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우한 국민정부왕징웨이도 정통성을 요구함에 따라 대립하였다. 쑨촨팡(孫傳芳)은 남방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면서 일시적인 분열에 놓이게 되었던 국민당국민통합을 발표하여 형식적인 이중 정권 체제를 수용했으며, 펑위샹을 국민당으로 포섭한 뒤 화북 지역을 압박했다. 우페이푸 등의 직예 군벌들은 사실상 항전을 포기하였으며, 장제스왕징웨이 등을 주축으로 하여 1928년,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 聯合政府)가 수립되었다. 표면적인 중원의 통일이었다. 장쭤린당산조약(唐山條約)을 체결함으로서 산둥 지역에 대한 합중국의 특권 및 독점 항구 활용,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9]에 대한 합판 및 광산 채굴 권리 등을 인정받음으로서 화북 일대에 대한 합중국의 영향권을 넓힐 수 있었다. 한편 이 조약으로 중화민국 연합정권에 대한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후에도 조약 개정에 대한 민중의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지게 되었고, 일부 군벌과 민중들은 합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을 토로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관동주(關東州)를 둘러싼 일본제국과 합중국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무라오카 조타로(村岡長太郎) 대륙 사령관 및 주지사의 급사 사건을 두고 일본제국이 타살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합중국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자 이에 장쭤린이 협조를 거절하면서 양국간의 표면적인 평화 무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관동군 촉탁이 합중국 게릴라군에게 납치되는 이시모토 사건(石元事件)과 관동군(關東軍)이 주도하여 봉천 교외에서 전차를 타고 이동하던 장쭤린우쥔성을 폭사시킨 황고둔 사건(皇姑屯事件)을 명분으로 관동전쟁(關東戰爭)이 발발했다. 열세에 몰렸던 일본군은 결국 다롄전투(大連戰鬪)에서 패배하여 항복함에 따라 관동 조약(關東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제국은 대륙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의 해체 요청과 배상금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930년대

최대 세력권과 구성국

동아합중국의 구성국
東亞合衆國的構成國
동아합중국의 소속 국가

대한제국

복드 칸국

예티샤르 칸국

만주국

류큐 왕국

타이완 민주국

티베트 왕국
...
최대 세력권
東亞合衆國

진한 초록색 : 동아합중국의 구성국 (1925년)
초록색 : 동아합중국의 괴뢰국 혹은 속국 (1936년)
연한 초록색 : 1차 대전 종전 이후 위임통치령 (사실상 남양군도)

동아 합중국유럽(歐羅巴)이나 미국(美國)의 식민지 정책과 유사하게, 군비를 확충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나 식민지 침략을 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확장에는 몽강 제국(蒙疆帝國)의 건국처럼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간접적인 강압책을 실행한 경우도 있고,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와는 전면전을 통해 직접적인 세력권 확장에 경우도 있었다. 침략한 지역에는 식민지 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을 동아인(東亞人)과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차별 정책도 병행했다.

합중국의 세력권이 확대되면서 기존 합중국의 구성국은 내지(內地)로, 식민지와 괴뢰국은 외지(外地)나 야지(野地)라고 부르며 구분하기 시작했다. 내지는 구성국 정부와 중앙 정부의 간섭을 통해 관할되지만, 외지는 총독부(總督府)나 괴뢰정부(傀儡政府) 같은 식민통치기관이 지역 정책을 수행했다. 사할린 섬(庫頁島) 이외의 식민지에서는 총 인구에서 내지인(內地人)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하였다. 그밖에 여러 이유로 화태청(樺太廳) 이외의 식민통치기관은 독자적인 입법권을 수행했으며, 남양 군도(南洋群島)는 형식적으로는 합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합중국 헌법의 효력이 미치지는 않아 독자적인 법률을 제정 및 반포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부터 동삼성(東三城)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서, 서쪽의 요하(遼河)에서 동북쪽의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기까지, 또 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이북에서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잇닿고 있는 곳이자, 만주족(滿洲族)의 발상지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장쭤린을 위시한 봉천군벌(奉天軍閥)이 지배하는 독립 세력이 되었으며, 신해회의합중국 조약봉천성(奉天城)의 선양(瀋陽)에서 개회 및 체결함에 따라 합중국 성립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정훈복벽이 실패한 후 장쭤린이 만주 일대에 대한 구심점을 확립하고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선통제(宣統帝)를 위시한 만주국이 건립되었다. 만주국의 지배 권력층이었던 봉천당(奉天黨)은 관동 전쟁(關東戰爭) 및 황고둔 사건(皇姑屯 事件)까지 확고한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동북 평원(東北平原)을 개발하여 곡창 지대를 조성하고 무순 탄광과 안산 제강소를 통한 철광산업 확장, 동청 철도(東淸鐵道)를 통해 대한제국복드 칸국을 잇는 교통 교두보의 역할을 행하는 등 합중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융성을 자랑했다. 1930년대 봉천당의 몰락 이후에는 계운제를 위시한 근왕 파시즘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수많은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적 식민제국, 동아제국(東亞帝國)에서 중심 역할을 행사하게 된다.

  • 대한제국(大韓帝國) : 조선(朝鮮, 1392~1897) →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36)

한반도(韓半島)를 강역으로 삼은 나라로서, 1897년에 지속적인 외세 및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가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조선의 자주독립 주장에 고종(高宗)이 호응하면서 황제 칭호를 사용하면서 제국을 선포하게 되었다.[10] 허나, 고종 암살사건(高宗暗殺事件)과 혼란한 국내외적 상황으로 기존 정권이 위협을 받자, 이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장쭤린의 '합중국 체제'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장쭤린의 중원 야욕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베리아 정벌에 정규군을 파견하는 등 외부 팽창에 집중하였다. 또, 운산광산(雲山鑛山) 개발 및 전기/교통과 같은 기간 산업을 적극 권장하여 광업 이권 수호를 위해 노력하고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과의 직통 노선을 여는 등 합중국 통합에 나섰다. 1930년대에는 의화제(義化帝)를 중심으로 한 황제법서사주의(皇制法西斯主義)를 주창하여 이범석(李範奭), 강세형(姜世馨)을 주도로 한 협화 정권(協和政權)이 수립되어 동아제국 내에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국력을 바탕으로 팽창을 꾀하기 시작하게 된다.

  • 복드 칸국(博克多汗国) : 청나라(淸國, 1635~1911) → 복드칸국(博克多汗国, 1911~1936)

외몽골(外蒙古) 지역을 강역으로 삼은 나라이며,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몽골 왕공들과 독립론자들의 추대로 복드 칸이 추대되면서 독립했음을 선포했다. 신해회의(辛亥會議)와 합중국 조약에 참여하는 초기 합중국 구성국 중 한 곳으로서, 1915년에는 캬흐타 협정을 통해 정식적인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중국 군벌이었던 쉬수정외몽골 출병이라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며, 곤치긴 붐첸드(冈奇金·布曼增迪) 총리 시절에는 슈디르가 바가투르 바부자브(舒达尔嘎·巴特尔·巴布扎布) 몽골군 총사령관과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출신의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의 탐사 아래 누란 왕국(樓蘭 王國)의 유적을 발견하여 고고학적 성과를 거두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중원 진출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1930년대에는 허를러깅 처이발상(霍尔洛·乔巴山)이 정계 영향력을 차지하여 독재를 실시하여 의무 교육을 전면 도입하며 통신선을 설치하고 동청 철도를 외몽골을 가로지르는 대륙 횡단 철도까지 확장시키는데 협력했다.

코칸트 칸국의 탐험가이자 장군인 야쿱 벡(阿古柏)이 세운 나라로서, 1870년에 돈황(敦煌)과 톈산 산맥(天山山脈)은 물론, 우루무치(乌鲁木齐)까지 진출하여 확장 사업을 벌였으며 위구르족(维吾尔)과 회족(東干族)과 연계하여 토벌하려 온 청나라의 좌종당(左宗棠)을 톈샨 북로에서 격퇴하면서 이홍장(李鴻章)의 제안 아래 자치 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티베트 왕국과 함께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독립하였음을 선언하였다. 욜바스 칸(يۇلبارس خان)이 에미르(埃米爾) 직책을 세습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칸국 지위가 해체되고 호자 니야즈(خوجا نىياز ھاجى‎)를 중심으로 위구르족을 주축으로 한 공화정이 선언되었다.

달라이 라마 13세(土登嘉措)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반청 봉기를 지시하여 독립을 일구었다. 심라회의(西姆拉會議)를 통해 영국의 티베트에게 가지는 특별이익의 승인,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 인정, 대신에 티베트를 중국의 성으로 편입시키지 않는 안전조항이 합의됨으로서 독립 주권 국가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의 통치 동안 티베트는 수력발전기를 설치하고 우체국을 창설했으며 1918년에는 각 지방에 티베트어 초등학교를 설치하고 1923년까지의 흡연을 금지했다. 그리고 1920년, 청나라 군대가 훼손한 조캉 사원(大昭寺) 수리 사업을 실시했다. 또한 1914년부터 티베트군 장교들을 영국군 주둔지에 보내 현대 군사학을 배우게 했고 구식 라이플 소총 5천정과 수십만발의 탄환을 구입하는 등 근대화 정책을 펼치고 외교적으로는 1923년, 합중국 체제에 편입됨으로서 중국 사회를 압박했다. 허나 현대화 과정에서 판첸 라마 9세(ཐུབ་བསྟན་ཆོས་ཀྱི་ཉི་མ་་)가 후장 지역에 대한 독립 통치를 선언하고 귀족과 승려들로 이루어진 지배층에서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진보 정책에 반발하는 등 1930년대부터 달라이 라마 13세가 사망하고 보수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일시적인 과도 상태에 놓여 있다.

1894년에 한청전쟁(韓靑戰爭)에서 패배한 청나라일본제국(日本帝國)에게 타이완을 할양하게 되면서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타이완의 주권 국가화를 선언하고 대만의 신사(紳士) 구봉갑(丘逢甲)과 순무 당경숭(唐景崧)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은 제2차 서남전쟁(第二次西南戦争)으로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고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대한제국에게 넘기던 상황이었기에 1905년, 타이완 조약(臺灣條約)을 체결하여 일본 제국의 특수 이익을 보장과 전권 장관을 파견하는 내용이 담긴[11]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서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류융푸(劉永福)는 실권을 장악하고 화폐국을 설치하며 타이난(臺南)의 국민 의회를 설치하는 등 청 말기에 이루어진 근대화를 지속했다. 1919년에는 대한제국에게 요청하여 합중국 체제에 편입했다. 이후에는 화롄 경비부(花蓮警備部)[12]가 설치되어 합중국군 해군(合衆國軍 海軍)의 남태평양(南太平洋)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1930년대에는 중국 본토 진출에 대한 제공권 위협의 담당을 맡은 중요 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1936년 협화 시대 개창 이후에는 류큐 왕국과 함께 열도 진출계획(列島 進出計劃)의 핵심 국가로서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되었다.

류큐 제도(琉球諸島)를 강역으로 삼은 나라. 1853년에 유미수호조약(琉美修好条約)을 체결하여 서양 열강과의 교류를 시도하는 듯 했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성립된 일본제국(日本帝國)의 무력 압박으로 쇼 타이(尚泰) 국왕을 일개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강등하고 30년 동안 종주권을 행사했다. 허나 일본제국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 간의 제2차 서남전쟁이 발발한 뒤에 참전 배상으로 류큐 번국이 대한제국의 종주권으로 넘어가면서 쇼텐(尚典) 번왕이 중산왕(中山王)의 지위를 회복하고 부분적인 주권 국가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1919년에는 합중국 체제에 편입하는 것으로 가맹하였으며 쟈히나 노보루(謝花昇) 총리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타이완 민주국 연립하여 일본제국에 대항하는 반일 정책을 펼쳤다. 이후 1920년대 후반에 우루마 경비부(宇流麻 警備府)가 설치되면서 합중국군의 해군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협화 시대 이후에는 열도 진출계획타이완 민주국과 함께 동참했다.

합중국군

자세한 내용은 동아합중국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합중국의 식민지 및 점령지

합중국 식민지
合衆國植民地
괴뢰국
몽강 제국

신강 왕국
蒙疆帝國
1933~1936
新疆王國
1926~1936
식민지
남양 군도

화태주
南洋群島
1919~1936
樺太州
1922~1936

각주

  1. 다만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북양정부(北洋政府)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군벌 사회로 난립했다가 1928년을 기점으로 국민혁명(國民革命)이 완수되면서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을 주축으로 한 군벌 연합 정권이 겨우 수립되었으며, 일본 제국 역시 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와 하코다테 철검단(函館哲劍團)으로 일본 열도가 양분된 형태를 띄고 있다.
  2. 이떄 장쭤린은 자신의 야심을 보이지 않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만날 당시에 술을 마신 채 촌놈 구식군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면서 아부를 떨음으로서 자리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3. 이완용을 위시한 근황 성격의 파벌을 통틀어 의미하는 용어로서, 1910년대의 대한제국의 정치는 독립 협회(獨立協會)와의 잦은 대립이 주가 되었을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4. 물론 대한제국은 중견 국가였으며, 외몽골의 독립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상황'(러시아 제국의 보호 및 중화 국가에 대한 자치형태)만을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5. 타국 군인 계급을 기준으로 각각 소장(小將), 중장(中場)에 속한다.
  6. 타이완 민주국총통(總統) 직책을 대행하는 직책을 말한다.
  7. 이는 돤치루이의 충실한 심복인 쉬수정의 병권이 박탈되는 것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우려한 것이었다.
  8. 시베리아 출병 이후 남아있던 제6 합중병단 소속의 잔존병과 제8 합중병단을 통합하였다.
  9. 당대 중화민국 최대의 철강기업이었다.
  10. 청나라한청전쟁(韓淸戰爭, 1894~1895)으로 체결한 한성조약(漢城條約)에 따라 근대적 조약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됨으로서 제국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1. 이후 전권 장관으로 임명된 인물은 제1차 서남전쟁(第一次 西南戰爭)에서 활약한 가바야마 스게노리(樺山資紀) 해군 사령관이었다.
  12. 합중국군 소속의 해군 기지는 지휘부(指揮府)→경비부(警備府)→요항부(要港部)로 규모를 구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