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1]의 일부

시계 방향으로 가스마스크를 착용한 IEN 소속 해군 상륙대의 상하이 전투, 1946년 대륙타통작전 당시 활용된 1식 중기관총, 난징 대학살 당시 양쯔강에 놓인 희생자들과 제국 군인, 우한 전투 당시 중화민국군의 기관총 진지, 충칭 대공습, 1944년 인도에 파견된 중화민국X군
날짜1939년 7월 7일 - 1951년 9월 2일
소규모 충돌: 1933년 9월 18일- 1939년 7월 7일
장소내몽골, 중국 본토,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결과

연합국의 승리

교전국
연합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연합정부
대동아공영권:
동아제국 동아제국

해외 지원국
미국 미국 (1941-)
소련 소련 (1939-1941, 1946-)
영국 영국 (1942-)
나치 독일 나치 독일 (1937-43)

공동 교전국
일본 해외정부 일본 해외정부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3-1945)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제4공화국 (1945-)
동아 협력국
몽강제국 몽강제국 (1939-)
신강왕국 (1939-)
왕징웨이 정권 왕징웨이 정권 (1942-)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42)
대동항군자치정부 대동항군자치정부 (1940-)
중화민국 연성정부 중화민국 연성정부 (-1942)
중화민국 유신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1942)
지휘관

중화민국 장제스
중화민국 린썬
중화민국 허잉친
중화민국 천청
중화민국 옌시산
중화민국 펑위샹
일본 해외정부 히로히토
일본 해외정부 사이토 타카오
일본 해외정부 스즈키 간타로
미국 조지프 스틸웰
미국 클레어 셔놀트
미국 앨버트 웨더마이어
소련 바실리 추이코프
소련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나치 독일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나치 독일 한스 폰 젝트
비시 프랑스 필리프 페텡
프랑스 제4공화국 샤를 드골

... 그 외 지휘관

동아제국 아이신기오로 푸이
마오쩌둥
린뱌오
주더
펑더화이
동아제국 장쉐량
동아제국 김홍일
동아제국 장징후이
중화민국 연성정부 인주겅
중화민국 연성정부 왕커민
중화민국 연성정부 량훙즈
중화민국 연성정부 천공보
왕징웨이 정권 왕징웨이
몽강제국 데므치그돈로브
성스차이

... 그 외 지휘관
병력
8,700,000여 명
미 항공기 1300대
(1945-1951)
1,984,000 명
부역자 980,000여 명
전차 3,000대
항공기 12,000대 이상
피해 규모
3,720,000여 명 전사
1,956,000여 명 부상
민간인 사상자 및 피난민 23,000,000명
455,000-700,000여 명 전사
1,172,200여 명 부상
총합계 150-200만명 사상
동아시아 전쟁
20세기 ~ 21세기
1939~1951
동중전쟁
1943~1951
태평양전쟁
1952~1954
동아전쟁
관련문서 : 냉전 | 제3차 세계대전 | 중국내전 | 일본 침공 | 황색 상황

동중전쟁(중국어: 東中戰爭)은 1939년 7월 7일 동아제국(東亞帝國)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51년 제2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동아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다. 중화권 국가에서는 중국 항동 전쟁(중국어: 中國抗東戰爭), 일본국(日本國)에서는 지나 사변(シナ事變)[2], 서구권에서는 중국-동아시아 전쟁(Sino-East Asia War)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동중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1933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9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동아제국연합국(聯合國)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51년 9월 2일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동아제국제국주의(帝國主義)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民族主義)와 연성자결주의(聯省自決主義)는 전쟁을 중화민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9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3년 9월 18일,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은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9년의 루거우차오 사건(중국어: 盧溝橋事件, 한국어: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동아제국에 맞섰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 동중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동아제국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9년 즈음에 동아제국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51년 8월 15일의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溥儀)와 이강(李堈)이 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동아제국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동중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사상자는 2000만명이 넘었다.

배경

동아제국의 상황

동아제국의 전신이었던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聯合國)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東亞細亞) 지역에 있어서의 동아합중국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위선적인 것이었다. 동아합중국독일제국(獨逸帝國)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 남양군도(獨逸領南洋群島)를 점령하였다. 이후 동아합중국은 아시아의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인식됨에따라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동아합중국에서는 한성 데모크라시(漢城民主)를 기점으로 민권 향상을 도모하며, 전시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세계 대공황(世界大恐慌)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 세력들이 암살 및 쿠데타를 잦아지기 시작하였고, 동아합중국의 구성국들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기 시작했다. 이어 동아합중국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 전쟁의 길을 걷게 된다. 디화전쟁(迪化戰爭)으로 세워진 신강왕국(新疆王國)외에도, 인적-물적 자원의 병참기지로서 구체적인 중국 침략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내몽골 침략에 반대하였던 정샤오쉬(鄭孝胥) 동아협화회(東亞協和會) 의장이 암살된 데 이어 1933년 선전 포고도 없이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키게 되었다. 열하사변으로 내몽골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동아합중국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이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대동아 블록경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國際聯盟)은 '내몽골을 불법 침략, 점령한 동아합중국의 내몽골 지역 군사 철수'를 결의하자, 동아합중국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국제연맹동아합중국군의 내몽골 지역 철수를 결의한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연장인 오스만 제국 부흥운동(Osmanlı canlanma hareketi, 1919~1921)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가 이끄는 오스만 시민군에게 패함에 따라 체결된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 1923)에서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방 국가들은 동아합중국이 식민지 확장에 나서는 것은 동아합중국의 강대국 부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아합중국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을때 동아합중국에게도 똑같이 식민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중국의 상황

격동의 시대를 겪고 있던 중국은 1925년, 국민당(國民黨)의 당수 쑨원(孫文)이 사망한 이후, 새롭게 국민당 당수로 권력을 차지한 장제스(蔣介石)을 중심으로 쑨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장제스는 북벌운동을 통해 중화민국 북양정부(中華民國 北洋政府)를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허나, 그가 세운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는 미처 국민당이 통제하지 못한 군벌들과 내부에 산재되었던 국민당 계열의 분열된 형태라는 불확실한 표면적 통일이었다. 결국, 외부적 요인을 통해 중화민국 연합정부를 통합시키기 위하여 1930년부터는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 토벌에 나서기 시작했다.(초공작전, 1930-1934) 그러나 1933년 열하사변을 시작으로 동아제국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 차질이 생긴 장제스는 점차 연합정부에 반발하던 군벌 세력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공산당 장정과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1931년 산둥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中國共産黨臨時政府)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 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펴나갔다.(초공작전, 剿共作戰)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 명으로 구성된 국민당 연합군(國民黨聯合軍)이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공산당 토벌'을 4차례 실패를 겪은 장제스는 '군사 3할, 정치 7할'이라는 방침을 정했으며, 이에 따라 장제스의 지휘를 받는 국민당 연합군은 농민들을 홍군(紅軍)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철저한 경제적 봉쇄작전을 폈고, 수천 개의 토치카를 만들어 공산당의 근거지인 산둥을 압박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Otto Braun, 李德)의 지도 아래 정규군(正規軍)에 의한 정면대결 전술을 택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홍군의 거점은 차례로 격파됐고, 1934년 3월 중국 공산당의 영역인 산시성(山西省)이 함락되었다. 산시성이 함락됨으로써 공산당 세력은 거의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산둥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북상협동선언'(北上協東宣言)을 발표했다. 이어 1934년 10월에 홍군의 주력인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면서 산둥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내몽골 인근을 중심으로 한 북쪽 지방으로 탈주했다. 오랜 기간동안 국민당 연합군의 공격을 피하면서 1935년 10월에 산시성(陝西省) 옌안에 다다랐을 때,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다.

동아제국소련(蘇聯)과 협력하여 화북 지방의 농민과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중화 소비에트 정권을 사수하기 위해 국민당에 대한 봉기를 호소했다. 한편, 뒤늦게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초공작전에서의 대패에 대한 요인을 분석하고 소비에트 재건을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 준의회의(遵義會議)를 통해 오토 브라운보구(博古)을 위시한 세력이 몰락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왕자샹(王稼祥), 저우언라이(周恩来)가 새로운 중국 공산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적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더(朱德)가 사령관직을 역임하게 됨으로서 당군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으며 장궈타오(張國燾)와 합류하여 동아제국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를 건립할 것을 결의했다.

시안 사건

열하사변 이후에 서북군벌을 이끌고 항동전(抗東戰)을 이끌겠다는 양후청(楊虎城)은 산시성(陝西省)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게 빼앗겼다는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초계파적으로 운영된 국민당 회의조차도 열하사변에 대응하려는 얘기에서 내몽골산시성을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성토하는 자리로 바뀌었고 장제스양후청이 공식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후임으로 등장한 쑨커(孫科), 왕징웨이(汪精衛) 연립내각은 한 달을 버티지 못한 채 장제스에게 복귀를 요청하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국민당을 힘으로나마 누를 수 있던 것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육성한 국부군, 상하이의 자본가들과 4대 가문이 제공하는 권위와 자금, 청방(青帮)과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을 가지고 있던 장제스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1935년 11월, 초비 작전에서 양후청홍군의 공격에 섬서 2개 사단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양후청중화민국 연합정부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104사단과 107사단을 보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연합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104사단과 107사단을 해체하게 되었다. 열하성 정부주석이었던 탕위린(湯玉麟)은 그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는데 이때 양후청은 더 이상 초공작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탕위린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탕위린도 자신이 초공을 싫어한다는 속내를 밝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또한 섬북인들 사이에서도 타지에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열하군에 대한 동정여론이 퍼지면서 섬서군과 열하군 사이의 협력관계가 조성되었다. 탕위린산시성을 탈취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양후청에게 거듭 밝히며 안심시키자 양후청은 남아있던 휘하 장병들에게 열하군에 대한 인식을 바꿀 것을 지시했다.

이후 산시성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총공격에 나설 준비를 갖춘 뒤 12월 4일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섬서군의 양후청과 열하군의 탕위린에게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따르던가 아니면 섬서군과 열하군을 각각 푸젠 성(福建省)과 안후이 성(安徽省)으로 이동시키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탕위린양후청으로서는 '일치항동' 여론이 열하군과 섬서군 전체에 확산된 상황에서 공산당 토벌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뒤의 선택 역시 자신들이 거세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일종의 쿠테타인 병간(兵諫)[3]을 결의하고 제6차 공산군 소탕전 명령이 발동된 12월 12일 새벽에 양후청장제스를 그의 숙소인 '화청지'에서 체포, 감금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13일 양후청은 '일체의 내전 정지', '민중애국운동 개방', '쑨원의 유촉 준수', '구국회의 소집' 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했다. 이와 동시에 양후청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보안(保安)으로 비행기를 보내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측 대표를 초청했다.

시안사건은 '내전 중지, 일치 항동'의 여론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나,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감금한 사건이었으므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소련 신문들조차 이에 대해 "친동분자의 음모"이며 "반동세력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동아제국측 언론에서는 "양후청의 독립 정부와 소련이 협정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동아제국장제스가 제거되면 연합정부를 친동파(親東派)가 장악할 수 있게 하려고 획책했다.

중화민국 연합정부에서는 장제스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고서라도 양후청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는 견해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바라는 견해가 대립했다. 중국 공산당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으며, 당내에서는 중국통합회의(中國統合會議)를 개회하여 공개재판을 거쳐 장제스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나왔다.

시안에서 양후청에 체포되어 감금된 장제스는 병간(兵諫)을 수용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12월 16일 연합정부에서 실권자 가운데 한명인 허잉친(何應欽)이 토벌군 총사령에 임명되고 '토벌령'이 내려짐으로써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민당군(國民黨軍)은 양후청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산시성 동쪽의 동관(潼關)으로 진입하고 시안 근교를 폭격했다. 한편, 양후청의 섬서군 소속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장제스를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장제스는 석방되어야 하고, 연합 정부의 지도 아래 대동항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시안사건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면 동아제국의 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장제스만이 전국의 무력을 통솔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2월 18일 중국 공산당은 연합 정부의 실권이 허잉친에게 넘어간 것을 고려해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저우언라이(周恩来), 예젠잉(葉劍英), 친방셴(秦邦宪) 등 3명이 시안으로 갔다.

이로써 탕위린, 양후청, 중국 공산당 대표와 연합 정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탕위린, 양후청에 대해서는 장제스가 정식 교섭상대가 될 수 없는 자신의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교섭은 실질적으로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중화민국 연합정부간의 주도로 이루어진 직접 교섭이었다.

동중전쟁 이전 전력 비교

자세한 내용은 동중전쟁 양국 전력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쟁 전개

자세한 내용은 동중전쟁의 전개 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후처리

사상자 논란

역사에서의 비중

각주


  1. 1943년 진주만 공습 이후부터가 실질적인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이다.
  2. '지나'는 중국을 일컫는 여러 명칭들 중 하나이다. 기원은 (秦)을 산스크리트어로 음역한 게 그 원류라고 사료되고 있다.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 중 하나였던 '시나(Sina)'로도 추측하고 있다.
  3. 무력으로 통치권자를 위협하고 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