Ανατολική Χαλδία Αυτοκρατορία
流鬼部 / Nova Chaldia
동칼디아 제국
유귀부 / 노바 할디아
14941865
 

국기
표어 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
임금들의 임금, 통치자들의 통치자

미하일 1세 시기 (1560년경)

안드로니코스 1세 시기 (1630년경)
수도 네아 트라페주스
(Νέατραπεζοῦς)
정치
공용어 극동 그리스어, 나나이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정
황제[1] 알렉시오스 1세(1494-1533)
미하일 2세(1577~1613)
안드로니코스 3세(1789~1811)
테오도라 2세(1863~1865)
입법 칼디아 원로원
(Χαλδία Σύγκλητος)
역사
 • 극동침출 1493년 ~ 1494년
 • 무오노란 1558년 ~ 1560년
 • 누르간 전투 1618년 8월 27일
 • 신정혁명 1865년 3월 ~ 4월
기타
국교 동방 정교회, 샤머니즘

  1. 공식 명칭은 '하느님 아래 신실한 황제이자 모든 동방령의 통치자'(ἐν Χριστῷ τῷ Θεῷ, πιστός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πάσης Ἀνατολῆς)

동칼디아 제국(그리스어: Ανατολική Χαλδία Αυτοκρατορία)은 동로마 제국(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의 후계국으로서 트라페주스 제국(Βασίλειον τής Τραπεζούντας)이 오스만 제국(دَوْلَتِ عَلِیَّهِ عُثمَانِیَّه)에게 멸망한 후 극동으로 이주한 콤니노스 가문(Κομνηνός)과 로마인들이 건립한 제국이다.

트라페주스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다비드(Δαβίδ)가 산발적인 저항 끝에 제국민들을 이끌고 트라페준타(Τραπεζούντα)에서 조지아 왕국(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의 쿠타이시(ქუთაისი)로 도망쳤다. 살아남은 황족과 유민들은 킵차크 칸국(اولوس جوجي), 티무르 제국(گورکانیان)을 거쳐 북방 개척을 명목으로 추방되어 동시베리아로 이주되었다. 1494년에 이르러 다비드의 손자인 알렉시오스 1세(Αλέξιος Α')가 지금에 네아 트라페주스(Νέατραπεζοῦς)의 성채와 마을을 건설하고 '동방령의 황제'(Αὐτοκράτωρ πάσης Ἀνατολῆς)를 자칭하면서 제국이 건립되었다.

토착 민족이었던 나나이인(那乃族)들과 융화된 로마인들은 마우리 강(Μαύρη Ποταμός) 일대를 개척하였고, 미하일 1세(Μιχαήλ Α') 이후에는 콜로네이아(Κολώνεια) 지방을 세력권으로 삼았다. 뒤이어 쿠예(Καληυε)[1]와 전쟁을 벌여 복속시켰으며, 안드로니코스 1세(Ἀνδρόνικος Αʹ) 시기에는 아이누모시리(アイヌモシリ) 지방과 아나키온(Άνακιον) 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제국은 주로 여진족(女眞族)과 교역하였으며, 갤리선을 이용해 아이누인(アイヌ人)과 교류했다. 명나라(明國)는 '노진'(露秦) 혹은 '유귀'(流鬼)라고 부르며 제한적인 조공 무역을 시도했고, 조선(朝鮮)도 동칼디아의 황제를 '유귀거추'(流鬼巨酋)라고 부르며 부분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17세기 초부터는 청나라(淸國)와 루스 차르국(Царство Русское)과의 모피 무역이 성행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지방 사회를 통제하던 네아 테마 제도(Νέα θέματα)와 프로노이아 제도(πρόνοια)가 붕괴되었다. 이후 마타이우스(Ματθαίος)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통제 아래에 테마 제도를 폐지하고 재정 체계를 일원화하며 교육 및 자치 속주 등 행정 법령을 개혁하였다. 허나 종교 개혁 과정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던 비자스 총대주교(Πατριάρχης Βύζας)와 마찰을 겪었고, 독립 교회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던 제국 군부는 1865년, 신정혁명(神政革命)을 일으켜 테오도라 2세(Θεοδώρα Β')의 실권을 탈취하고 군부 및 신권(神權) 통치가 시작하게 되었다.

역사

트라페주스의 몰락과 로마 유민

요안니스 4세(Ιωάννης Δ΄)가 재위에 오른 후, 트라페주스 제국은 인근 투르크 민족들과 오스만무라트 2세(مراد ثانى)의 침략을 받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스 11세(Κωνσταντίνος ΙΑ')와의 혼인이 파기되는 등 비잔틴계 국가들의 협력은 점차 약화되어갔으며, 결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의 함락과 함께 정교권 세계를 지탱하던 동로마가 멸망하자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محمد ثانى)는 해협세를 부과하면서 유럽 상인들의 흑해 진입을 통제하였고, 아마세이아(Αμάσεια)의 지방 세력가들을 동원하여 트라페준타를 공격하였다. 침략을 버티지 못하던 요안니스 4세는 공물을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바치면서 일시적으로 제국의 목숨을 지탱코자 했다.

요안니스 4세 사후 황제가 된 다비드에 이르러 제국은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고, 다비드는 오스만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최후의 수단으로 조지아 왕국조지 8세(გიორგი VIII)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포함한 황족과 수천 명의 유민들을 받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조지 8세는 그동안 이슬람 세계에 맞서 정교권 세계를 지켜온 로마 후예에 대한 예우로서, 내부 반대파를 물리치고 다비드의 요청을 수용했다.[2] 이윽고 트라페준타의 수십 척에 이르는 수송선을 보내왔으며, 제국 최후의 수호를 맡은 황자 마누엘(Μανουήλ)과 수백 명의 병사들[3]을 제외하고 수천 명의 제국민들이 탈출을 감행했다.

조지아 왕국의 트빌리시로 이주한 다비드와 로마 유민들은 조지 8세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과의 관계 붕괴를 염려한 내부 반대파에 의해 탄압될 위기에 처하였다. 결국 조지아 왕실의 종용 아래 다비드는 조지아에 정착할 일부 제국민들을 놔두고 휘하의 신하들과 함께 북부 초원지대에 위치하던 킵차크 칸국으로 도피했다. 이에 동방 정교회와 로마 황실에 우호적이었던 마흐무드 칸(محمد)은 로마 유민들의 정착을 지원했다.

1465년, 킵차크 칸국의 분열로 인한 혼란으로 로마 유민들의 처지가 곤란해지던 와중에 다비드는 장남이자 황태자였던 알렉시오스카자흐 칸국(Қазақ Хандығы)으로, 둘째 아들인 바실리오스(Βασίλειος)를 티무르 제국의 주도권을 잡고있던 백양 왕조(آغ‌قویونلولار)의 타브리즈(تبریز‎)로 이주하도록 했다. 각각 두 집단으로 나뉘어진 로마 유민 일행은 제국 부흥의 뜻을 다짐했고, 다비드는 킵차크에 남아있다가 내부의 권력 투쟁 과정에 희생양이 되어 아메드 칸(أحمد)에게 죽임을 당했다.

시베리아 추방과 극동 여정

바실리오스와 로마 유민들이 백양 왕조의 군주였던 우준 하산(حسن‎ اوزون)의 확장 전쟁에 동원되다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백양 왕조와 함께 견제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사절단의 도움을 받아 지중해의 유럽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알렉시오스가 이끌던 로마 유민들은 우즈베크인들의 연합 국가를 건설하려던 자니벡 칸(خان جانيبيك)과 케레이 칸(وكيري خان)을 도와 무함마드 샤이바니(شیبک خان ازبک)를 물리치는 등 타국의 이국인으로 살아남기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 사회 유지와 불안정한 외부 상황에서 로마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포용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케레이 칸이르티시 강(Эртiс) 인근으로의 개척을 명목으로 유민들을 추방했다. 허나 이미 정착하고 있던 타타르인(Татарлар)과 원주민들의 위협이 거세지자 알렉시오스와 유민들은 끝없이 펼쳐진 울창한 삼림지대를 향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유랑하게 되었다.

야생 동물들의 모피로 만든 털옷과 억척스러운 정착 정신에 힘입어 수차례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유민들은 바이칼 호(Озеро Байкал)의 야영지를 건설하고 일시적인 정착에 나섰다. 허나 강렬한 추위로 인해 농경 및 목축 산업이 사실상 불가했기에 다시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극동에 다다르자 보인 로도피 해(Ροδόπη Θάλασσα)와 마우리 강 인근에 이르러 농경 및 목축업을 일구어 낼 평야 지대에 정착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수십년에 걸친 북방 추위에서 유민들을 통합하고 이끈 알렉시오스는 정착지를 건설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풍토병과 면역 약화로 숨을 거두고, 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재건을 선언하면서 수천 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로마가 극동에서 부흥하게 되었다.

역대 황제 목록

각주


  1. 극동 그리스어로는 '칼리예'(Καληυε)로 부른다.
  2. 조지 8세 이후 조지아 왕국은 주변 일대에 이슬람 세계와의 충돌로 인해 여러 국가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3. 이들은 수도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했다. 소식을 들은 다비드와 유민들은 마누엘 황자의 죽음을 기리려 므츠헤타(მცხეთა)의 추모비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