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사태

동쪽의 홀란트.png

동티모르 사태
냉전의 일부
동티모르 사태.png
날짜1975년 12월 7일 ~ 1976년 6월 17일
장소동티모르
결과

니우홀란트동티모르 합병

교전국

니우홀란트 연방 니우홀란트 연방
티모르 민주연합

지원국
미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영국 영국
캐나다 캐나다

Flag of east timor.png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지원국
소련 소련
지휘관
니우홀란트 연방 빌럼 비츠셔 3세
Flag of east timor.png프란시스쿠 자비에르 두 아마랄
병력
병력 15,000명
전차 30여대
항공기 150여대
병력 2500명 (상비군)
피해 규모
120명 사망
1250명 부상
185명 포로
6540명 사망(민간인 3470명)
850명 부상

동티모르 사태(영어: NieuwHolland invasion of East Timor, 영어: East Timor Incident)은 1975년 12월 7일니우홀란트 연방군동티모르 공화국티모르해 사건를 명분으로 침공한 사건이다. 티모르의 진실 과 화해를 위한 재단은 1974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합쳐 10만 2천명의 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그 중 70%는 니우홀란트 연방군에 의한 학살로 밝혀졌다.

점령초기에 니우홀란트 연방군은 산악 지대 내부에서 게릴라에 의해 심한 저항에 처하였으나, 1977년 7월부터 1978년까지 미국, 이스라엘 등으로 부터 신무기를 도입하여 게릴라 부대를 처리하였다.

유엔 안보리가 1999년 독립찬반투표를 시행할때 까지 20년 동안 니우홀란트 연방동티모르 간의 지속적인 충돌이 있었다.

배경

식민 통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으로 대체되었는데, 일본의 점령은 그 당시 국민의 13%인 6만명의 죽음을 초래하는 저항 운동을 발생하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니우홀란트 연방이 회복되었으며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얻었다.

포르투갈의 철수 및 내전

포르투갈의 1974년의 헌법에 의하면, 포르투갈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인 포르투갈령 티모르인 동티모르는 "해외의 지역"이었다. "해외"지역은 앙골라, 카르보데, 포르투갈 기니, 모잠비크, 상 투메와 프린시페를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 마카오도 포함하고 있었다.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쿠데타가 발생하고 이어 혁명 진행 과정(포르투갈어: 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 불리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공산주의 방향의 새로운 독재기로 빠져들려 했던, 뜨거운 여름(포르투갈어: Verão Quente)이라 불린 1975년 여름에 극에 달했다. 이 기간 포르투갈이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원로 지도자들과 농장 소유주들, 그리고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로 구성된 티모르 민주연합(영어:Timorese Democratic Union),(União Democrática Timorense, UDT)은 카네이션 혁명 이후 발표된 첫번째 정당으로 창당되었다. UDT의 지도자들은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친니우홀란트 성향이 강하였다.한편, 행정관, 교사, 엘리트,노동자들 구성된 동티모르 독립 혁명전선((the Revolutionary Front of Independent East Timor)은 사회주의적 공약을 내걸어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제3의 군소 정당이자 니우홀란트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티모르 민중연맹 (포르투갈어: Associação Popular Democratica Timorense; APODETI)등 포르투갈의 철수 이후 티모르에서 정당들이 급속히 생겨났다.

1975년 4월 까지 티모르 민주연합 내부의 갈등이 연합의 지도력을 분열을 야기하였다. 민주연합의 대표였던 로페즈다 크루즈는 친니우홀란트 파벌과 반 혁명전선 파벌을 이끌며, 혁명전선이 동티모르를 공산화 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무력을 이용하여 동티모르를 전복하여 동티모르를 공산화를 할 생각이 없음을 밝히며 오히려 니우홀란트가 민주연합을 통해 동티모르를 연방의 영향력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니우홀란트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양 세력간의 갈등이 깊어져갔다. 1975년 8월 11일 니우홀란트의 지원을 받은 티모르 민주연합은 ‘대청소 작전’이라는 쿠테타를 일으켜 라디오 방송국, 경찰서, 공항등 핵심 기반 시설을 점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해산시킨다.

티모르 민주연합은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 한 후 혁명전선의 당사를 습격하여 혁명전선의 주요 인사 및 니콜라우 로바토 부대통령의 동생 총 12명의 사람을 ‘국가전복죄’ 및 ‘내란음모죄’ 라는 혐의로 그들을 숙청하였다. 이에 대해 반발한 혁명전선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혁명전선을 지지하던 동티모르 군 장성 및 장병들을 포섭하였고 이를 통해 1500여 명의 민병대를 조직하여 민주연합에 대해 반격을 가함으로써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혁명전선의 민병대는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민주연합을 공격하였고 이에 대해 민주연합 역시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련과 포르투갈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혁명전선의 민병대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8월말에 민주연합은 니우홀란트 국경까지 밀리게 된다. 열세에 처한 민주연합은 니우홀란트의 망명을 요청하면서 니우홀란트로 후퇴하였고 이로 인해 니우홀란트가 동티모르를 침공할 때 까지 3개월간 혁명전선이 동티모르를 통치하게 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딜리에서의 400명과 그 이외의 지역에서 1600명이다.

니우홀란트의 침공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티모르 민주연합을 니우홀란트의 베스트포트핸트릭주로 몰아낸 후 1975년 8월 25일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니우홀란트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혁명전선의 정권장악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공산화를 우려하였다. 미국 역시 동남아시아 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도미노처럼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하였기에 동티모르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자유주의 정권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니우홀란트를 지원함으로써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니우홀란트 정부는 티모르 민주연합의 무장을 지원하였고, 1975년 11월 29일 새벽 4시 티모르해 사건을 명분으로 동티모르 국경을 공습하면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동티모르는 독립 선언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축제분위기였고, 군인들 역시 외박과 휴가를 나가면서 니우홀란트의 침공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동티모르 내의 티모르 민주연합 지지자들의 동시 다발적인 테러로 동티모르는 전후방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니우홀란트의 침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당시 동티모르 정규군은 5000명으로 전차 2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