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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란나어 លីត្រមួយទេទេមួយ ដឹងខ្ញុំទេទៅទំ
현대 란나어 លមេេមដខ្ទទំ
릿에네에 쿱툼멧
한국어: 란나 왕국
중국어: 連南 王國
크메르어: ឡានណា រាជាណាចក្រ
국기 국장
표어 크메르어: វិបុលភាពនៃនគរនិងសេរីភាពរបស់ប្រជាជន
현대 란나어 ដខ្ទទំ ទំរ៉ូ សកំ ងគឆ
왕국의 번영과 인민의 자유
국가 란나의 자유

초록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란나 왕국이다.
수도 연경(連京)
최대 도시 부남(芙枏)
정치
공용어 크메르 어, 란나 어, 중국어
국민어 란나 어
국왕(ស្ដេច) 전하은
국무원 총리 이채원
역사
란나의 역사  
 • 전 왕조(ជអលេ ដទំស្) 수립. 1831년 5월 12일
 •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1951년 4월 3일
지리
면적 44,320 ㎢
내수면 비율 0.7%
시간대 (UTC+ 7)
인구
2016년 어림 15,014,325명
2017년 조사 15,000,365명
인구 밀도 338.4 ㎢ (18위)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 전체 3,844억 $ (48위)
 • 일인당 25,686 $ (30위)
명목 3,253억 $ (34위)
HDI 0.891 (25위, 2016년 조사)
통화 린(លីន) (LN)
기타
ISO 3166-1 117, .LN, .KLN
도메인 .ln , .連國 , .連南
국제 전화 +856


란나 왕국(លមេេមដខ្ទទំ, 중국어: 蓮南 王國)은 동남아시아의 입헌 군주국이다. 1951년, 영국의 식민지로 존속하다가 지속적인 요구로 인하여 독립하였으며, 말레이시아 연방의 속했다가 싱가포르와 함께 퇴출되었다. 안정된 정치[1]와 초고속 경제 발전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싱가포르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과 함께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 중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구를 보유한 국가들 중 하나로서 남중국해의 허브 중심지이자 중개 무역지로서 역할을 행하고 있다.

개요

보르네오 해에 위치한 도서국으로서 북쪽과 서쪽으로는 각각 베트남, 태국 및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바다 사이로 두고 접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약 44,320㎢이며,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싱가포르브루나이, 동티모르 다음으로 국토 면적이 적은 나라이다. 2017년 통계 기준으로 인구는 약 1,500만 명에 달한다.

국호

국명인 란나는 한자식 명칭인 연남(蓮南)이 영어권에서 와전된 것이며, 본토에서는 릿에네에(លមេ)로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명 그대로 음차한 "란나"(爛螺)라고 불리며, 과거에 사용했던 명칭으로는 토남(土南)이 있다. 영어권은 란나(Lan-na) 혹은 란나일랜드(Lan-nailand)로 부르고 있다.

역사

란나의 역사
លមេេមដខ្ទទំ

토착 문화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해, 란나 왕국의 선주민 문화는 대략 기원전 2,000년대 ~ 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문명의 수준을 갖춘 이들이 중국 동남부와 캄보디아 일대를 거쳐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후 2세기경 부터는 푸엣 호요랍 호를 중심으로 농경과 어로, 목축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직화된 원시적 사회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당시 푸난을 통해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 등 선진 문물을 통해 발전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발전은 원시적 연맹 국가를 성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옴브랍 왕조

기원전 3세기경에 세워진 옴브랍(ក្រស្) 왕조는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맹체로 이루어진 란나 역사의 기록된 최초의 국가로서 왕조를 지칭하는 "옴브랍"의 명칭은 이들 도시국가들의 연맹장을 의미하는 단어이자 연맹장의 호칭으로서 사용되었다. 초기 연맹은 정치적 공동체로서 내부의 이익이나 상황에 따른 마찰과 갈등이 빈번했으나, 처음으로 대왕(大王)을 자칭한 자야옴브랍 1세(ជយើក្រស្ I.)의 통치 하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옴브랍 왕조는 란나 남부 전역을 통치하였고 함대를 양성하고 관료제를 개편함으로서 실질적인 고대 국가 형성의 큰 영향을 끼쳤다. 전성기를 이룬 옴브랍 왕조는 부남, 진랍의 강력한 해상 함대와 견줄 수준이었다.

이후 왕위 찬탈과 쿠데타로 인한 잦은 왕위 변동으로 연맹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던 옴브랍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하였으며, 결국 옴브랍 왕조는 기원후 8세기경 각각의 도시국가들로 분열되는 전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프톰네 왕조

전란 시대를 통일한 건 동남아시아의 중개 무역을 전담하던 무역 가문인 프톰네(ទំេ)였다. 프톰네 왕조는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앞장 섰고, 이를 바탕으로 스리위자야 왕조 등 수많은 대국들과 교류하면서 축적된 부를 이용해 군사력을 키웠고, 이렇게 키워진 강력한 군사력 마침내 1367년, 자브위야 왕국의 수도였던 명지를 함락함에 따라 프톰네 가문은 스스로를 "란나의 왕"을 선언하여 왕조를 건립하였다.

프톰네 왕조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여 정치를 안정화 시킨 뒤 문화적/사회적 융성을 이룩하였다. 크툽 뭇(ដរ៉ រដ) 왕은 동남아시아를 넘어 인도와 중국 및 조선일본에까지 해상 무역권을 확장시켜 왕국의 부강을 추구하였다. 특히 이슬람 상인들과 화교들이 진출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를 잇는 중계무역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이용하였고 이들이 가져온 선진 문물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런 시기에 원나라의 원정이나 이슬람교와 왕실이 대립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여러번 연출되기도 했으나, 큰 사태로까지 빚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전성기의 몰락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갈 등 외세 세력들의 무역 난립이 격화되었고 이를 조속히 해결하지 못한 채 왕실의 품행이 방탕해짐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688년에 마지막 국왕이 반란군에 손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프톰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이후 란나는 하나로 통일된 왕조를 이룩하지 못한 채 각각의 지역마다의 공동체인 토납(土納)을 형성하여 유지되었다.

화교계의 진출과 세력 형성

15세기 이후 프톰네 왕조의 경제 주도권을 차지한 화교계는 외세 세력들을 적극 기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프톰네 왕조의 몰락은 그동안 왕실의 압박을 받던 화교 사회에게 던져진 기회나 마찬가지 였고, 화교 사회는 이를 이용하여 란나의 사회 주도층으로서의 위치를 자리잡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화교 사회는 각각의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이중 가장 강대했던 세력은 전문교(全門僑)였다.

전문교는 중국계 이주민인 전련(田聯)이 세운 화교 집단으로서, 전씨 집안을 수장으로 하던 일종의 사회 공동체였다. 전문교는 프톰네 이후 분열된 각각의 토납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때로는 실력행사, 때로는 경제적인 압박을 통해 세력을 불려나갔다. 또한, 전련은 유력 토착 가문과 혼인을 통해서 정통성을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화교 집단과 토납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하였고, 전문교의 지도자들은 협의를 통해 전련의 아들인 전합(田盒)을 새로운 왕위에 추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1831년, 전합이 전문교의 왕위 추대를 받아들이면서 화교 왕조가 수립되었다. [2]

화교 왕조의 수립과 서구 열강의 진출

왕위에 오른 전합은 연호를 태륭(台隆)이라 하고 칭황식을 올려 황제를 자칭했다. 그는 란나 전역에 토후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한편, 청나라와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를 본떠 법률과 율령을 새로이 제정하였으며 호적과 토지대장을 조사하는 등 한자 문화권의 통치체제를 담습했다. 그러나, 본토민들의 문화와 언어를 존중하였고, 실제로 한자와 란나 어를 병행하는 등 화합책을 펼치면서 민심을 다독였다. 실로 오랜만에 란나 전역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는데,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및 베트남을 흡수하여 만든 식민령 연방 지역을 만들어 동남아시아의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고 영국 역시 해협 식민지를 건설하여 싱가포르와 말레이 일대의 식민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칫, 프랑스와 영국의 마찰이 일어나는 위기를 우려하던 전흥진(田興陳)은 1877년, 해협 식민지의 총독직을 수행하던 에드워드 엔슨(Edward Enson)과 접촉하여 해협 식민지로서의 편입을 요청했다. 영국 본국과 해협 식민지 총독부는 이를 승낙함으로서, 란나는 식민지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3]

영국의 식민지화 및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식민 보호령으로 전락한 란나 지역은 영국 본토와 식민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따라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란나 전 지역에서는 도로와 철로가 건설되었으며, 근대식 교육 체계와 산업 기반이 고안되기도 했다.[4] 그러나, 이러한 식민 정책은 철저히 자국 이익으로 운영되었으며, 왕실의 간곡한 조언에도 식민 총독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히 란나 총독부의 장관이었던 조지 빙글리 클라크(Joerge Bingley Clarke)의 재임 시기에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책을 추진하면서도 흑자를 내기 위하여 예산을 높이 책정하면서 인두세와 토지세,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조지 빙글리 클라크의 뒤를 이은 토머스 프란시스 로빈슨(Thomas Francis Robinson)은 소금을 전매하면서 소금의 가격을 폭등시켰고 아편을 독점 판매하면서 아편 흡연자들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폐해를 낳았다. 당연히 아편 흡연자들의 다수는 화교계와 토착민들이었다. 또한, 그는 란나의 토지를 대거 영국에서 이주하는 기업과 국민들에게 헐값에 판매하면서 농민층의 양극화와 극빈층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결국 이러한 악조건은 왕실층과 지식인들이 주도한 란나 민족당이 조직되는데 일익하였다.

한편, 영국은 크메르 어를 일종의 이두나 향찰로 이용하던 란나 어를 로마 자로 표기하는 시도를 보였다. 목적은 전통적 문화 및 사상을 말살시키고 란나의 토착민과 화교계의 분열을 촉진하기 위해서였으나, 실제로는 새로이 개혁된 란나 어를 이용한 인쇄와 출판이 용이해지면서 계몽 운동은 더욱 확산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하였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과 당국의 관심이 적어 독립 운동이 활발치 못했던 라오스나 캄보디아와는 달리, 란나는 베트남처럼 영국 본토와 총독부의 착취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이 왕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세를 이루기 시작했고, 이는 란나 민족당의 결성으로 표출되었다. 독립 운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란나 민족당을 참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1942년에 영국군을 몰아내고 일본이 이곳을 장악하였으며 이는 1945년 8월 27일, 영국군이 탈환을 시도할 때까지 지배되었는데, 당시 일본군에서는 이곳을 안난(安爛)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독립과 연방 가입 및 퇴출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란나 민족당은 더욱 더 독립 열기를 불러 일으켰으며, 당시 왕실의 수장이었던 전관유(全寬惟)는 란나 민족당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에 영국은 약 6년 동안 란나 임시 정부에게 조금씩 통치권을 위임하였으며, 마침내 1951년에 독립을 완전히 승인함에 따라 란나는 기나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란나 민족당의 당수였던 프랏 하룹 티야벳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의원 내각제를 가미한 군주체제를 수립하였으며, 국민 투표를 통해 초대 총리에 올랐다. 그는 영국이 남겨놓은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경제 개발에 착수했고, 당시의 세계 정세를 통해 제 3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란나 어의 문법 체계를 재정립하는 등 전통 문화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경제 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민심을 잃자, 그는 개혁 헌법을 반포하고 독재 정치를 시도했으나, 군부의 전권을 장악했던 제니앗 툼 아타릿 중장이 195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프랏 하룹 티야벳 총리와 초대 내각을 몰아내고 군부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1년 남짓 총리 및 군부 통수권자로서 활동하며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1959년, 제니앗 툼 아타릿 총리가 돌연 총리직을 사임하고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함께 말레이 연방의 가입함에 따라 란나 자치주의 주지사로서 활동했으나 1963년에 화교계와 말레이시아계의 마찰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면서 란나 자치주는 말레이 연방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독립국' 란나가 되면서 제니앗 툼 아타릿은 군부의 힘을 통해 란나의 총리로서 재부임하였으나, 그에 부패하고 무능력한 통치를 지켜보던 마타 캇 타우눕 대령이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아타릿은 타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현대의 란나

마타 캇 타우눕 시대

마타 캇 타우눕 대령은 쿠데타 이후 아타릿 군부 정권을 무너뜨린 뒤, 군 직책에서 퇴임하고 행동 민중당(行動 民衆黨)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64년, 형식적 국민 투표를 통해 총리로서 선출된 그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 연방싱가포르를 롤모델로 개발독재식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타우눕은 이스라엘 장교단을 초청하여 선진 군대 체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재임 시기에는 통제 질서와 벌금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아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게 되었고[5] 이를 기반으로 경공업을 육성하였고 제3 세계를 표방했음에도 미국의 원조를 받기도 했다.

타우눕의 이러한 개발 독재 정치는 란나의 민주주의에 큰 악영향을 끼쳤으나, 경제 개발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여타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빠른 경제 성장을 갖추어 개발도상국의 타이틀에서 벗어나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1975년, 카타 쳇 미야롭 경위국장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타우눕 정권은 전복되었으며, 타우눕은 란나 인민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다.

카타 쳇 미야롭 시대

카타 쳇 미야롭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왕의 전제 통치를 부활시키는 전제 헌법(專制 憲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왕실의 후광을 이용하여 정권을 안정화 시키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섭정직을 자칭한 미야롭은 전제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민중의 불만을 종식하고자 타우눕 시대에 이루어졌던 엄격한 규율 정책을 완화하였고,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하여 지랑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외국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몇년간의 법인세를 면제하는 "텍스 프리데이"를 실시하여 해외 투자를 대폭 확장시키면서 외자 유치에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미야롭은 란나의 경제 기반을 "수출 주도 국가"로서 기능하게끔 위치함에 따라 과감한 투자 정책으로 경제 성장의 가속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하였다. 싱가포르-인도차이나 반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의 허브로서 급부상하는데에는 미야롭 시대에 경제 정책에 영향이 컸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야롭의 지나친 측근 정책은 외부 인사와 군부 및 민중으로 하여금 불만을 자아냈고, 이는 결국 1983년, 왕실의 전제 내각 해산 명령에 따라 지지 기반을 잃은 미야롭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후 왕실의 주도 아래 구성된 화교계 출신의 민택경(旼澤暻)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수립되었다.

민택경 시대

민택경 총리는 의원 내각제를 부활시켰으며,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측근/비리 인사를 배제하는 한편 공직 청렴성을 경제 성장의 성패로 보고는 "부정 인사 퇴출책"을 발표하여 공직자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힘쓰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설립된 "부정부패감찰국"은 공직자는 물론이고 기업의 부패 행위까지 엄격히 조사하여 사회에 만연했던 연고주의를 몰아내는데 노력했다. 그외에 공직자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높은 보수를 보장하는 한편, 그동안 엄격히 감시 받던 언론과 문화 활동 및 행사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였다. 또한, 준가공 산업과 대체 수입산업에 육성에 힘을 썼고 이를 위해 국민 통합을 위한 다양성 인정 정책과 교육 정책의 개편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지금의 란나의 튼실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왕실에 관여하에 구성되었던 내각이었던지라 왕실의 입김이 비교적 컸으며 민택경 총리의 재임 기간 내내는 란나 민주화 운동으로 내각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쳤고 내각의 노력에도 민심을 사로잡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90년에 발표한 "5.13 선언"으로 내각은 해산되고 본격적인 민주 정치에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란나 민주화 운동

1983년, 미야롭 전제 내각이 퇴출되면서 시민 의식과 민주 주권에 대한 인식이 함양된 국민들 사이에서는 수십년의 독재 체제의 신음을 앓고는 국민이 주권을 이루는 민주주의를 부활하고 퇴색화된 권위주의적 정치에서 퇴장하자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3.13 항쟁을 중심으로 이어진 일련의 민주화 운동은 왕실에 의해 세워진 민택경 내각에게 경각심을 주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특히 당시 민택경 내각의 얀메 툭 치아브렛 국가 안전부장은 "총리 각하는 오직 국왕 폐하에 의거하에 존립될 것."이라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촉발탄을 내놓았다.

국민들은 "독재 타도! 민주 정권 회복!"을 외치면서 전국적인 시위를 열었으며,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등 격렬히 진행되었다. 이후 민택경 총리의 "5.13 선언"이 발표되어 "민주 정권 존립을 위한 선거 제도 도입을 비롯한 국민 주권에 대한 국권 이양 약속"을 내걸면서 민주화 운동은 승리를 쟁취하는데 성공하였다.

현재의 란나

1990년 민주화 이후, 란나는 서구의 입헌 군주체제가 확실히 도입되었고,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 왕실이 독재 정치에 관여했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일시적으로 권위가 추락되기도 했으나, 왕실에서는 이에 대한 국민적 사과를 표함에 따라 정상궤도로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4년 란나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란나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가하는 사태가 발생할 뻔 했으나 왕실과 내각이 한 목소리로 쿠데타를 승인치 않음에 따라 결국 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을 바닥을 치게 되었고, 전택현(全澤炫) 총리 시기의 군부 개혁을 통해 문민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란나의 민주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기에 이른다.

자연 환경

지리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국토 면적이 작은 편에 속하나, 그 면적이 타이완 보다는 클 만큼 국토가 그리 좁지만은 않다.[6] 전반적으로 평평한 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푸엣 호요랍 호라는 2개의 호수가 존재하여 란나의 식수 및 어업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쳐주고 있다. 산맥으로는 남쪽에 위치한 크라브옌 산이 있으며, 란나에서는 최고봉으로서 해발고도가 약 1,320m에 달한다.

기후

란나의 기온은 대략 12℃ ~ 40℃에 이르며, 열대 온순 기후이다. 10월에서 1월까지는 32℃ 정도를 유지하며, 2월부터 5월까지는 34℃ ~ 37℃에 이른다.

우기와 건기로 나눌 수도 있는데 5월부터 10월 사이로 내륙으로 불어오는 남서 몬순이 타이 만과 인도양에서 습한 바람을 몰고오면서 이 시기에는 연 강수량의 68%가 집중되어 있다. 7월부터 8월까지가 우기의 절정을 이룬다. 건기는 10월 ~ 4월까지로서 11월부터 1월사이는 대한민국의 초가을 날씨와 같이 선선하나, 이 시기를 제외하면 건기 대부분은 매우 덥고 건조한 모습을 보인다.

정치

란나의 정치는 1990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입헌군주제를 따르고 있다. 란나의 총리[7] 는 의회 및 내각의 수반이고,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다당제의 형태의 정당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국왕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총리를 임명하며, 총리는 국무원(행정부)의 권력을 행사한다. 입법권은 상,하원 양 의회에 주어진다.

국왕은 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를 내각의 조언과 책임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총리와 내각의 임원들을 임명하고 그 신임장을 인증하며 이외에 형식상 의회를 소집하고 헌법 개정 및 법률과 조약 등을 공포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과 외교관례상 국가원수로서 대우 받으며, 정치적 실권은 없으나 국왕에 대한 국민의 높은 신뢰와 민심으로 정치/행정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가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의회는 유일무이한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서 영국식 의원내각제에 따라 수상의 지명권, 하원의 내각 신임과 불신임의 의결권을 가진다. 양원제를 채택하며 하원의원 및 상원의원으로 구성되며 양원은 전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된다. 과거 군부 정권에 잇따른 통치 시기에는 단원제 및 간접 통치 위원회를 통해 입법권이 행사되었으나, 1990년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거침에 따라 지금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총리는 행정권을 행사하는 국무원, 즉 내각에 수반으로서 내각의 행정권 행사와 함께 의회에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사무 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에 대한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이러한 업무를 분담하기 위하여 국무위원들을 책임자로서 두고 있다.

사법기관은 법아(法我)가 있으며, 법아는 대법아와 하급법아(고등법아, 지방법아, 간이법아)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법아원들은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독립된 직권을 행사함으로서 헌법과 이하 법률의 구속을 받는다. 대법아의 법아원은 내각의 지명을 받아 국왕이 임명한다.

정당과 선거

의회의원, 각 지방단체의 수장들과 지방의원들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만 19세 이상의 남녀 전원에게 선거권을 제공하는 보통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피선거권은 일괄적으로 만 20세 이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보통 양원 의원과 지방단체의 수장들은 특정 정당의 당원 혹은 그 정당의 추천을 받은 이들이 선출되나, 지방의원들과 하위 지방단체의 수장직은 무소속 혹은 지역 정당의 소속인 경우가 많다.

란나의 주요 정당은 그 시작이 근왕파 혹은 군부 출신이 주를 이루는 인민협당란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민주계열인 자유 란나당의 양당 구도로 유지되고 있고, 이외에 진보 진영으로서 민주협치당, 사회자주당 등이 있다.

외교 관계

1951년 독립 직후의 란나는 제3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주로 인도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수교를 맺었다. 이후에는 자본 진영과 관계를 맺음에 따라 미국, 일본,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유럽 및 북아메리카 국가들과 관계를 체결했고 소련의 해체 이후에는 반공 정책을 폐지한 뒤, 구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

난사군도 분쟁에서는 일부 실효권을 가진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일부 국가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그외에 란나는 유엔의 회원국이자 아시아개발은행(ADB)와 ASEAN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행정 구역

란나의 행정구역은 각각 1개의 행정주(行政州), 자치주(自治州)와 10개의 주(州)로 구성되며, 주 밑으로는 현(縣), 구(區), 촌(村)으로 나뉜다. 10개주와 자치주는 지방 선거를 통해 선출되나, 행정주 주지사는 국무원 총리의 임명으로 선출된다. 또, 지방 의회는 중앙 의회에 지방 운영법에 간섭을 받으나, 자치주의 자치 의회는 지방 자치법을 통해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다.

경제

란나의 경제정책은 1990년대까지는 국가에서 통제하는 권위주의식 자본주의였다. 2017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3,844억$를 유지하며, 1인당 GDP는 25,686$로서 전체적으로 부유한 국가이다. 란나의 이러한 경제 모습은 고도로 발달된 시장 기반 경제와 함께 역사적으로 수출입/중계 무역에 의존하여 발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제조업을 비롯한 2차 산업도 발달한 편인데, 2017년 기준으로 GDP의 30%가 2차 산업(제조업, 석유화학, 기계공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경은 런던, 뉴욕, 도쿄에 이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외환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업가들에게 가장 친화적인 정책과 환경으로 평가 받고 있다. 홍콩, 대한민국, 중화민국,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다섯 마리 용으로 불리곤 한다.

란나는 또한 관광산업으로도 유명한데 2016년에는 1,900만 명의 관광객이 란나를 방문했다. 란나 정부는 관광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도박 산업을 제한적으로 합법화 할 것을 조치했으며 여러 지역의 새로운 테마파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그외에 '란나 문화 축제', '서브컬쳐 축제' 등의 관광 이벤트를 추진하고 있다.

2001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GDP가 2.7%로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자 2001년 8월에 경제검찰위원회를 세우고 경제 정책을 수정할 것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인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04년에는 9.1%, 2010년에는 5.7%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현재까지의 조사자료를 통해 란나의 정부는 상당히 효율적이고 청렴도가 높으며 투명한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미야롭 정권 시기에 시작된 대규모 정부 공급 아파트 정책과 민택경 내각 시기에 추진된 우수한 교육 시스템이 유명하다.

사회

문화

각주

  1. 동남아시아 내에서 한정. 독립 이후 란나에서는 수많은 정계 혼란과 쿠데타를 겪기도 했다.
  2. 화교 왕조이지만, 실제로는 토착계의 영향도 받은 왕실이었기에 반 화교 반 토착계라고 볼 수 있다.
  3. 해협 식민지에 속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적인 총독부를 설립하는 등 보호령 및 독립적 식민지로서 기능하였다.
  4. 교육 시설에 경우에는 명목상 '모든' 란나의 거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왕실과 일부 중산층 및 총독부 자녀들만이 이용했다.
  5. 어디까지나 "안정"된 사회가 구축되었다는 것이지, 국민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6. 또한, 타이완에 비해 인구수도 적기에 인구밀도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7. 정식 명칭은 '국무원 총리수상'(國務院 總理首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