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크 내전
Rànké Teforènst
기간
장소 랑크, 콰링튼, 데모 전역, 시레스 일부 지역
원인 구제국과 신제국 세력 사이 갈등과 식민 세력 봉기, 좌우 이념 갈등 극대화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신제국파 범인민전선
랑크 제국 준비 위원회
케스프주 좌익 자치연합
랑크 공화파
랑크 제2제국
제국 WP 정예여단
국민 참여 돌파 전선
랑크 사회주의 광화국
랑크 사회주의 인민해방전선 국기
랑크 사회주의 아나키 평의회
랑크 식민 왕국
지휘관 데이트 단 베이러
카이스티렌 위치 토뷘
슈클리트 사이클린트
라이너 수크타 린네테이스트
페이슨 델 스탈론
셔후스 이스틀릴본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오스카 디를레방어
하인리히 힘러
병력 19만 4천명 21만 6천명
피해 사상자 11만 8천명 사상자 38만 4천명
결과 신제국 세력 승리,랑크 제3제국 건국
영향 공화파 몰락 촉발
제2제국 붕괴
식민지 독립 일부 성공


[목차]

개요

랑크 내전은 대식민지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최근 랑크 현대사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부패한 제2제국애서 공화파, 왕정파, 사회주의 계열의 각 세력이 판을 치며 득세해 왔는데, 이때 몰락했던 랑넴 황가를 주축으로 한 신제국파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반대한 좌익 계열의 인민 전선이 만들어져 여러 세력간의 내전으로 퍼진 전쟁이다.

전개

내전 발생 전

제2제국 정부의 파인츠 2세는 식민지들에게 높은 자치를 허용해주고 랑크 영토 내의 소수민족에게도 자치권을 주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반면, 본토에서는 세취법의 도입으로 내야할 세금이 많아졌는데, 이와 더불어 기존 군인들의 대우는 더욱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파인츠 2세 당시 궁전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친랑넴파였고, 국민들의 강한 항의와 더불어 1920년, 라이진은 파인츠 2세의 아들은 라이니츠 티렌테 14세를 폐위하고 세러 10세 이후 끊긴 랑넴가의 황위를 되찾고자 한다며 세러의 3세의 후손인 카르신 랑넴을 모시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진과 카르신이 처형당하자, 신제국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여, 헤른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필두였다. 헤른은 케스프 주의 주도로, 당시 케스프 정부를 장악하고, 케스프 공을 사로잡아 점령했다. 뒤이어 케스프의 우익 자치 연합이 군대를 조직해 지지를 선언하옄ㅅ다.

인민 전선의 창설

제2제국의 파인츠 2세는 신속히 반란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쉽사리 진압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에 따라 공화파가 본거지인 랄론(Ralron)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크네발(Kénebal) 지역에서 반란을 동시에 일으키자, 파인츠 2세는 군대를 무려 3군데로 나눠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이에 따라 파인츠 2세는 관료를 보내 공화파와 사회주의 세력의 대표와 3자 회담을 통해, 투표권 확대, 부분적 민주화 약속, 사회주의 요소 투입 등을 약속하고 케스프의 반군을 함께 물리치자는 동맹을 맺었다. 여기서 이 전선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건,

1) 신제국파의 민주세력 탄압 2) 반공주의 세력의 신제국파

등의 이유가 있다. 반면 제2제국 황실은 이미 <사회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에 온건한 태도를 펼쳐 왔다. 여기에 조건부로 허락받은 아나키 세력들과 케스프주의 좌익들이 우익 연합에 대항하여 만든 좌익 연합이 가세하여 범 사회주의 연합, 범좌익세력이 창설되었다.

식민 세력의 개입

당시 랑크의 해외 식민지들은 랑크 식민 왕국으로 거의 별개의 나라처럼 묶여서 통치 받아왔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엔 데모 지역도 왕국 구성원 중 하나였는데, 특히 데모 공국이 왕국의 리더로서 독립을 주장해왔다. 제2제국은 해외 병력을 끌어들일 심정으로, 식민 왕국에 고도의 자치권을 약속한 뒤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데모 공국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반발한 나머지 구성국들이 데모 공국을 왕국에서 제외시킴으로서 나머지 국가들은 인민전선에 참여했고, 데모는 신제국파에 따로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