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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랴오 공화국 사람들은 본래 성격이 호탕하고 활 편이다. 특히 요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인권 지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여성군주가 황제를 맡았던 요 회조 때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반면 세계에서는 드물게 한 남성이 두명의 여성과 결혼이 가능한 일부다처제가 합법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여러 사회적인 파장을 낳고 있기도 하다.

랴오 공화국 사람들은 호탕한 성격과 다르게 중도 보수적인 스탠드를 취하고 있기도 하며, 덕분에 정치적으로 보수정당이 연이어 집권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포르노가 합법화된 유일한 나라이며, 윤리와 철학, 언어와 역사등의 인문학이 국민정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편. 특히 미술을 널리 즐기는 나라로도 인지도가 있다.

그중에서도 종교인 불교에 관한 애정과 자부감이 매우 크며, 현대 요국인들의 93%는 모두 대승 불교의 신자이다. 역사적으로도 요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세계최고수준의 불교문화를 발생시켰었던 탓에 국가적으로도 불교에 대한 투자 및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일본한국 러시아 3국의 영향력을 깊게 받았는데, 이는 일본 제국소련가라후토 청사할린 주를 설치하고 사할린 섬에 사상적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했고, 이 과정에서 부족하거나 약세인 거란 기존 문화들이 러시아 문화와 일본 문화로 채워졌다. 또 일본이 한국에서 사할린 고려인들을 들여오면서 음식,스포츠등에 한해서 헌국인이 다양한 영향력을 끼쳤고 현대에도 이들로 인해 한국정부와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비단 음식과 스포츠에 그치지 않고 게임,연예,음악등 다양한 산업에 걸쳐 한국문화산업의 영향력을 매우 깊게 받고 있다. 또한 지명이나 단어에서 선주민인 아이누족의 문화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요나라시기 풍경산수화

랴오 공화국의 예술은 주로 요나라신요 요 회조 시기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984년에 가 세운 허베이 성의 독락사 관음각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건축 기술을 계승한 것이다. 1054년에 산시 성에 세운 목탑은 8층으로, 규모와 기술에서 전대미문의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동몽골의 경릉에서 발굴한 인물화, 산수화, 사원 벽화가 대표적이다. 산수화에는 사냥을 즐기는 거란족의 생활 풍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당과 5대의 산수화 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요삼채(遼三彩)라고 부르는 도자기도 유명하다. 요삼채는 당삼채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자연 경관과 사계절의 변화를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거란민국은 전통적으로 미술문화가 매우 발달한 편. 특히 여성군주였던 요 회조는 미술을 즐겼던 왕이었기 때문에 산수화,인물화등의 그림등이 현대에 와서도 많이 발달했다. 또 그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수공예를 통한 조각예술도 많이 발달됬다.

또한 불교 관련 예술도 발달하였는데, 특히 요 태조 야율아보기 시기부터 크게 번성하였다. 요 태조는 건국 초기인 926년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승려를 포함한 발해인 50인을 당시 수도였던 요나라 상경으로 데려가 천웅사(天雄寺)를 짓게 하였다.

건국초기에는 불교가 요의 보편적 종교가 아니었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찰을 건립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으나, 이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과 운강석굴이 있는 대동(大同), 즉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이전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곳이고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 요의 불교 또한 황실의 보호 아래 발전해나간다. 현재 북경, 천진, 하북, 산서, 요녕, 내몽골 등 북방각지에는 요대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중 요녕성지역에는 유명한 조양북탑(朝陽겗塔)을비롯해 40여기의 거대한 요대 불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요나라 탑은 조양 북탑이 70m가 넘고, 다른 탑들도 대체로 평균 높이가 40m 이상이 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탑이 세워지는 장소가 사면이 트인 도로의 한 복판이나 높은 산의 정상부, 산이 없는 지역에선 구릉의 정상부 등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이다. 즉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곳에 탑이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도 도시에서는 상징이 되어 있다. 게다가 요나라 탑은 대부분 사찰과는 상관없는 곳에 세워져 있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불탑들과는 조성배경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또한 개방된 성문화 덕에 춘화도(春畵圖)도 매우 발달해서 요나라 시기부터 많은 작품을 남겼다. [2]

방송/연예

종교

요나라 시대 관음상.

요나라 시대 불상들

요나라 시기 지어진 불경탑. 중국 심양에 있다

요나라 시기 지어진 조양북탑. 역시 중국 심양에 위치

요나라 시기 지어진 세계최대 목탑 응현목탑 중국 심양에 위치.

랴오 공화국은 역사적으로도 전통적인 불교 국가이며 국민의 93%가 불교 신자로 불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중 하나이다. 그러나 원래 이렇게 키탄족(요족) 사이에서 불교가 국교로 섬기어 지던게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본래 거란의 고유 종교는 원시적 샤머니즘이었다. 태무(太巫)라는 사제가 범민족적인 제사를 주관했고, 각 씨족마다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가 있었다. 발해와 중국에서 불교를 도입했고,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많은 발해 승려가 요의 수도에 사찰을 세웠다. 화엄종이 가장 융성했고, 진언종과 다라니 신앙도 민간에서 성행했다. 성종 이후에는 대장경 등 불교 서적을 인쇄했고 명승도 나왔다. 한족이 들어오면서 유교와 도교도 함께 들어왔지만, 유교는 한족 지배를 위한 방책에 불과했고, 도교는 민간에서 유행했다. 요나라가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처음에는 불교를 믿던 한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거란은 원래 샤머니즘을 숭상하던 민족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불교에 심취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요나라 황실, 귀족을 비롯한 거란족들까지 진심으로 불교를 승상하기 시작했다. 성종[* 성종의 거란 이름인 문수노 부터 문수보살에서 따 온 이름이다.] 시기에 이르러서는 불교 문화가 중원의 한족 문화에 맞서 거란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이 됐다.

특히 흥종도종은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이 때문에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불교는 초창기부터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고 불교 신앙이 장려되었다. 유명 사찰의 승려들(대사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면서 사적으로 절친하게 지냈으며 거대한 사찰과 불상 건립, 대장경 간행은 물론이고 말기에 가면 승려들이 관직 진출이 두드러지는 등 정교 일체화 현상까지 일어났다.

요사에는 도종하루에 3000명이 출가(...)했으며 36만 명의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유학이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요나라에서는 사찰이 서민들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사찰이 관리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불교 국가가 된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은 크게 쇠퇴하였으며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나라 황실에서는 불교를 장려하면 승려들이 빈민층을 구휼하는데 힘쓰는 등 좋은 일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정작 그 시대 요나라에 다녀왔던 송나라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상당수 사찰들이 고리대업으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를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

요나라의 불교는 친척인 몽골티베트 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였다. 요나라 시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선연(鮮演)대사가 있다.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이외에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사람이 5.4% 정도이며 종교를 믿는 대다수가 러시아계이다. 이외에 무교 4.5%정도 되며 석유산업의 영향으로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믿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1.1% 정도 된다. [3]

음식

랴오 공화국의 대표 면발 음식중 하나인 '국수'

랴오 공화국의 대표 해물 음식인 '전골'

랴오 공화국의 대표 음식중 하나인 '만두'

랴오 공화국은 세계에서 한국외의 국가중 유일하게 한식이 가장 인기있는 지역으로 인기있는 것을 넘어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이 이유에는 일제시기 사할린 섬으로 강제징용된 사할린 고려인들의 공이 컸는데, 고려인들은 사할린에서 거주하면서 한국식 식문화를 전파시켜 일종의 유행을 발생시켰다. 이것은 곧 랴오 공화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덕분에랴오 공화국 에서는 한국음식으로 대표되는 김치,비빔밥 외에도 만두(혼합), 전골(혼합),김밥등이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외에는 해안가에서 잡히는 킹크랩과 랍스타 요리가 발달되었으며, 전골,잉여등을 이용한 해물 및 회요리도 발달되었다.

관광

유즈노사할린스키 시 수수나이 구에 위치한 신요의 황궁 상경임황부(上京临潢府)의 상경궁(上京宮)

이씨 거란의 궁전이었던 수경부 앞 벚꽃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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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후토 청 총독부의 모습.

러시아 정교회 성당 모습.

크루즈 프린세스 썬 호.

산넘어 보이는 쿠릴 열도 탸탸 산.

유즈노사할린스키 시에 있는 케이블카.

유즈노사할린스키 시의 스키장.

본래 기후가 눈이 많이 오기때문에 예전부터겨울 관련 동계관광패키지로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4]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키 자치구의 경우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등산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으며 케이블카를 타고 산 꼭대기로 이동할때 보이는 도시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외에 얼은 빙판에서 스케이트나 하키등을 탈수 있으며 요국의 저렴한 물가 특성상 동계관련 여행패키지로 이 모든 관광요소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4면이 바다고 산이 많기 때문에 낚시나 등산같은 단체 관광활동프로그램도 많이 이루어지며, 스쿠더 다이빙 , TBC(오토바이크운전&경비행기탑승)으로 중부지역을 여행하게 되면 탐험가 혹은 케이블카 및 차량을 통해 사할린 섬 야생지역을 탐방하며 살아있는 동식물들을 구경할 수도 있는 기회도 존재한다. 2박 3일당 숙박비를 합해 우리돈 200,000원인데 타국 여행비에 비하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동부지역 프로나이스크 구 대규모 마축장이 있어 승마 활동도 가능하며 수상스키는 물론 오로크,나나이,나브히등의 유목민족의 문화체험도 가능하며 툰드라기후의 얼음빙산들이 이르어있는 것을 직접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속초에서 9박 10일동안 8만톤급 대형 크루즈를 타고 일본 홋카이도, 랴오 공화국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여행할 수 있는 여행패키지도 있으며, 쿠릴열도에 솟아있는 케토이 섬, 치링코탄 섬, 타탸 산등의 화산들과 칼데라 호, 일출등 진풍경을 마음껏 경험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벚꽃이 매우 활성화되어 장관을 이루어내며, 일본 가라후토 총독부 박물관과 러일전쟁 박물관등이 위치하여 2차대전의 현장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외부링크

  1. 출처: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71
  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kes&logNo=130184524148&parentCategoryNo=&categoryNo=5&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3. 키탄에서 노동자로 들어온 중동계 이슬람인은 약 10만 1,521명이나 된다.
  4. 사실상 스위스의 알프스, 일본 홋카이도와 함께 세계 동계 관광의 메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