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1제국 (승리의 왕관)

러시아 제1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1721년1915년
국기 국장
표어 Съ нами Богъ!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
국가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하느님이여, 차르를 지켜주소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1721-1728)
모스크바(1728-1730)
상트페테르부르크(1730-1914)
페트로그라드(1914-1916)
정치
공용어 러시아어
지역어 핀란드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차르
•1721-1725
•1894-1915

표트르 1세(초대)
니콜라이 2세(마지막)
대신회의 주석
세르게이 비테(초대)
니콜라이 골리친(마지막)
역사
 
 • 표트르 1세 즉위 1682년 5월 7일
 • 제국 선언 1721년 10월 22일
 • 데카브리스트의 난 1861년 3월 3일
 • 봉건제도의 폐지 1861년 3월 3일
 • 피의 일요일 1906년 4월 23일
 • 헌법 채택 1906년 4월 23일
 • 10월 혁명 1915년 11월 12일
지리
면적 22,800,000km2
인구
1916년 어림 181,537,800명
인구 밀도 8.3명/km2
경제
통화 루블 (руб)
현재 국가

러시아 제국(러시아어: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혹은 러시아 제1제국표트르 1세가 1721년에 세운 군주제 국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15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에 의해서 붕괴될 때까지 존재했다.

제국 멸망 이후 케렌스키 주도의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6년 1월 혁명 이전까지 존속했고, 러시아 내전을 거쳐 러시아 공화국이 존속했다. 이후 모스크바 쿠데타로 인해 제1제정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의 제정이 들어선다.

역사

러시아 제국의 성립

러시아 제국의 시초는 러시아의 군소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타타르족이나 주변의 루스 국가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이반 3세 때 처음으로 스스로를 차르라고 자처했다.

차르러시아어로, 루스 사회에서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 한해서만 사용되었던 칭호다.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있던 동방정교회의 주교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모스크바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제3의 로마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등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는 제국을 자부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547년에는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가 자신을 전 러시아차르라고 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는 곧 전 러시아의 군주이며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단지 국내용에만 머물렀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군주를 황제는 커녕 왕도 아닌, 단순히 모스크바 대공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국내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동란 시대). 1606년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코사크, 스웨덴 등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대동란은 정점에 다다랐다. 1610년에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수도 모스크바가 점령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로마노프 왕조 등을 중심으로 국민군을 결성하여 외세에 대해 맹렬히 저항했다. 1612년, 10만에 이른 국민군 병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랫동안 혼란 상태였던 러시아는 그동안 유럽으로의 진출이 정체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로부터 국제적인 지위는 높지 않았다. 1613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원로원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으나, 아직 서구는 로마노프가를 러시아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 대홍수 시대(Potop)로 불리는 내전에 개입하여 동구권에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지만,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큰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다.

러시아 제국의 흥망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했다. 그럼에 따라 농민들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 과정에서 그로스브리튼 일랜드 연합 왕국프랑라이히와의 충돌로 크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브리튼프랑라이히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다.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1861)이었는데, 이는 지주들에게는 물론이고, 지나치게 높은 토지 상환금을 강요받고 지나치게 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노들에게조차 인기가 없었다. 이 무렵 러시아의 도시들에서는 해방 농노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는 농노 해방 이외에도 군비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다. 귀족과 부르주아, 중산층 자제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시작했고(국민 개병제), 병역 기간을 25년에서 6년으로 줄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1881년에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 알렉산드로 2세의 암살에 충격을 받아 그간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를 제한하고, 전제 정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시켰다.

알렉산드로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였는데 니콜라이 2세 역시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어떠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격동하는 시대에 변화하는 것에 오히려 두려워 했었다. 그는 러니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두마'라는 의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니혼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 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당하고, 이후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했고, 1915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5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장군,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의 퇴진을 원하였으며, 이는 곧 10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