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우니 국민동맹
Alliance nationale de Réuni
약칭
ANR
표어
레우니의 유서깊은 정당
창당일
1690년 11월 8일
통합한 정당
국민당
전신
없음
중앙 당사
레우니 파벨로트 드 레우니 갈리옹 제1특별구 당사
이념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대표
레옹 드 마르시옹
부 대표
샤를 마르멘
당원회의의장
상티옹 칼레
원내대표
루이 드 발레랑
서민원
145석 / 320석 (45.3%)
귀족원
25석 / 70석 (35.7%)
당색
빨강색 (#cf0f26)
당가
레우니인의 노래
국제 조직
국제민주연합
당원 수
약 11,348,432명
학생 조직
국민학도동맹
청년 조직
청년동맹
여성 조직
레우니 여성동맹
당보
<레우니 국민동맹 당보>
정책 연구소
국민동맹 연구소(Institut de la Alliance nationale)


레우니 왕국에서 가장 유서깊고 저명한 정당,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 이후 세계에서 2번째로 창당된 정당

통칭 국민동맹 (Alliance nationale), 레우니 왕국 국민동맹 (Alliance nationale de Réuni)은 레우니 왕국의 여당이자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정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있고 전체 정당 중 유일하게 입법 수호자들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1678년 영국에서 창당된 휘그당과 現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 창당 이후 세계에서 2번째로 창당된 정당이며 76명의 역대 레우니 총리 중 54명의 총리를 배출했고, 당원 수가 1,1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정당이다.

역사

1678년 영국에서 왕위계승 찬반의 여부로 휘그당과 토리당이 창당된 지 12년 후, 레우니에서는 당시 재위하던 왕 루이 15세가 폭정을 일삼아 봉신들에 의해 폐위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하자 그의 아들 장 3세가 왕위에 올랐다. 1690년 봉신들과 신하들은 즉위한 장 3세에게 영국에서처럼 대헌장의 확립과 입헌 통치를 요구했다. 아버지의 강제폐위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던 레우니에서, 장 3세는 아버지가 스페인을 등에 업고 왕좌를 요구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봉신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이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동맹은 이때 대헌장과 입헌통치 확립을 요구한 봉신들과 신하들의 정치적 모임이 시초가 되었다. 입헌통치가 활성화되자 이들의 모임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한 정당으로 변모했고, 친국왕의 스탠스를 취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다수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장 4세의 즉위 이후 왕국 재상은 총리로 변모하였는데 의회와 국민동맹은 이때를 기점으로 확실하게 조직화되었다. 군주의 권한이 사실상의 명예직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면서, 의회와 총리의 권한은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의회가 총리를 단독으로도 최종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투표로 의회 의원이 선출되자 다수당이었던 국민동맹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여러 근대적 복지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0세기의 국민동맹 정부는 북유럽 국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정책을 수입해오는 경향이 다소 있었다고 평가되었다. 각국의 경제산업ㆍ정치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무작정 수입하지는 않았고, 레우니의 풍토에 맞게 개편하여 안정적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다소 진보적인 성향이 깊었던 국민동맹은 두 차례의 대전쟁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우경화되었다. 각각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재임했던 국민동맹의 아돌프 크네랑 총리와 프랑수아 롤루아르 총리는 당대 중도좌파 성향이 강했던 국민동맹 진보파들을 밀어내고 보수파에 대한 지원을 늘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의견을 견지했다. 전후 공산주의의 폭풍이 유럽을 덮치면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급격해지자, 국민동맹은 완전히 우파 보수주의 정당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해졌다. 기존에 진보적인 정당이었지만서도 근대의 근왕주의 정당이었기 때문에 군주에 관해서는 항상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했던 국민동맹은 우경화되면서 왕실에 대해 보다 너그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