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노바 공화국


로마 노바 공화국
Republic of Roma Nova / Δημοκρατία της Νέα Ρώμη
로마 노바 국기.png
로마 노바 공화국의 국기[1]
정치체제 민주제, 공화제
정부 체제 집정관제, 양원제
경제 체제 시장경제
국가의 표어 영광스러운 전통을 되돌려 새로운 영광으로
설립 연도 1789년
국가 ISO 코드 ROM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Constantinople
국가 로마 노바 찬가
세계관의 국가 상징색 #8A084B
화폐 단위 드라흐미δραχμή/Drachma/RRD
현재 인구수 약 8,483만 명

개요

로마 노바 공화국가상지구 BF 세계관의 국가 중 하나이며, 현실의 발칸 반도 ~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을 실효지배하는 국가이다. 주요한 역사적 변곡점은 동로마 제국이 어느정도 세력을 유지하면서 붕괴하지 않아서 더욱 오래 유지되었으며, 자유주의 혁명에 의해 제정이 붕괴되어 공화정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 국가의 정식 국명은 로마 노바 공화국이나, 일반적인 통칭으로는 '비잔티움', '비잔티움 공화국'이 자주 쓰이는데, 이는 '로마 노바 공화국'의 영역에 로마 시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은 로마뽕과 민주주의뽕이 가득한 설정의 국가

역사

로마제국은 어떻게 망하지 않았는가

현실 세계의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권역의 침공에 의해 점차 영토를 잃고, 끝내 1453년 멸망하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가며,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와 투르크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과 아나톨리아 지역이 여전히 로마의 세력권으로 남았다는 데서 로마제국 존속의 주요 분기점이 된다.

이 세계관에서도 4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격 및 점령당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아나톨리아가 여전히 로마 제국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현실보다 비교적 신속하게 라틴 제국을 참칭하는 무리를 쫓아내고 제국의 천년 수도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 병력을 무리하게 차출한 여파로 인하여 해당 지역에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슬람권의 침공에 의해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이슬람권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고, 그들이 현실 역사와 동일하게 로마 지역으로 진군하며 동로마 제국은 지속적으로 위축되었으나, 1400년대 말 오스만의 후계자 분쟁에 의하여 오스만 세력이 분열되자 이 틈에 서유럽 세력과 다시금 관계를 개선한 로마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얻어 아나톨리아에 총공격을 감행, 분열된 오스만 세력을 무찌르고 아나톨리아를 수복함으로서 다시금 동방의 강국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자유주의,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

다시금 부흥에 성공한 로마 제국은 그 위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으나, 사상사, 철학사적으로 자유주의 이념과 천부인권 의식이 부각되면서 이에 따른 '자유주의적인 국가'에 대한 설립 열망이 유럽 대륙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본래 로마제국이 공화주의 전통을 수백년 동안 유지하고 있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선포함으로서 공화국이 멸망한 역사가 다시 부각되면서, 현재의 로마 황제는 '공화국을 파괴한 찬탈자의 후손'이며, 따라서 참된 '로마인'이라면 다시금 옛 공화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로마 제국의 음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적발된다면 그는 법률에 의해 극형으로 다스려졌지만, 그러한 주장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신대륙을 개척한 국가들이 신대륙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부를 받아들여 강성해지고 있었으나, 로마 제국은 이에 뒤처져 있었다는 점에서 점차 국력의 차이가 발생하였고,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제정의 무능함 또한 부각되고 있었다.

제정 체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는 점차 체제 변혁의 열망으로 변해갔고, 1790년,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라고 불릴 사건이 터져나오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마누일 플레톤'이 제국 정부로부터 제국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 후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그는 단지 유명한 철학자였던 것을 넘어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는 저명한 인사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그에 대한 자비로운 선처 또는 사면, 무죄 석방 등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당대의 황제 요안니스 11세는 그러한 여론을 모두 무시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을 모두 엄벌하겠다고 선포한 것이,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폭발시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대의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이 먼저 반기를 들었으며, 나라가 혼란해지자 국가에 불만을 가진 빈민들이 일제히 항거한 것이다. 이들은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성 소피아 대성당과 황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그곳에서 제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황제 요안니스 11세를 참수함으로서 혁명의 완수를 선포하였다.

제 1 공화정

동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한 가지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공화정이었다. 혈통에 의해 대대손손 세습되는 군주직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 기간동안 임기를 맡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는 다시금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공화정 전통'을 다시 세워보자는 생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금 로마의 지도자로서 '황제'가 아닌 '집정관'이 선출직되는 공화정의 복고가 일어나고 로마는 1800년 만에 다시금 공화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당시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기조에 의해 로마 노바 제 1공화정은 '신 로마법'을 제정하고, 집정관을 선거로 선출하며, 원로원 의원들 또한 선출하는 등 의회주의적 체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후대의 평가에 따르면 '제 1공화정은 비록 로마에 공화정 전통을 되살렸다는 의의가 있으나, 지나치게 고대 로마, 그리스의 공화정 전통에 집착하여 시대착오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는 크나큰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 1 공화정은 사실상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2]들과 요안니스 11세의 반대파,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원로원직과 집정관직을 독점하는 과두제에 가까웠으며, 집정관은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처럼 연임에 제한이 없어 10년, 20년 이상 연임하는 등 사실상 '선거 군주제'에 가까웠다. 당연히 피억압자이자 하층 신분이었던 민중들은 로마 제정이 있던 시기나 제 1 공화정이 있던 시기나 '억압자가 혈통으로 계승되는가, 아니면 형식상 선거로 뽑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비록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당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 점거당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속주의적 경향이 자리잡은 것과 달리 교회는 여전히 강성하였고, 종교적인 억압정책과 제국내 반이슬람 기조도 유지되었다.[3]

두 번째 혁명, 그리고 제 2 공화정

이러한 '귀족 과두제' 체제가 공고화되자 처음에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때는 전 세계의 자유주의적인 철학자들이 혁명을 칭송하였으나, 점차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은 반전되어 갔다. 심지어는 혁명을 '실패한 혁명'또는 '반동된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1 공화정은 권위주의적이고 민중 억압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갔으며, 집회 탄압, 언론 검열, 반대파에 대한 숙청 등을 유지해 갔다. 그리고 그만큼 로마 공화정에 대한 반감마저도 팽배해졌다.

한편, 제 1 공화정은 여러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었는데, 그 일부분으로 이탈리아 반도지역에 대한 재정복 시도가 있었다. 로마 노바 공화국 정부는 로마의 옛 역사를 들어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노바 공화국의 정당한 영토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지를 이어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를 되찾고 로마 시를 당연히 로마 국가의 영토로 해야 한다'라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심지어는, 공화주의를 주창한 로마 공화국이 로마 황제를 들먹이는 것도 말이다.)을 펼쳤고, 이에 대대적으로 군비를 일으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으나, 비록 로마 노바 공화국이 대대적으로 군비를 투자하여 전력상으로는 이탈리아 측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 이탈리아 또한 리소르지멘토를 통하여 이탈리아라는 국민 의식이 점차 형성되어 갔고 비록 이탈리아가 한때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을 지언정 로마 제국과는 갈라진지 천 년도 지났는데 그 시대의 명분을 들이밀면서 통합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항복할리 없을 점이었다는 점, 그 이외에 레스카티에 왕국등의 이탈리아 지원군 등의 가세로 인하여 로마 노바 공화국의 이탈리아 '수복전쟁'은 좌절되었다. 로마 노바 공화국은 이로 인해 국제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으며 국민들의 불만은 더더욱 거세졌다. 특히 이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에 대한 보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수많은 상이군인들이 빈민이 되어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1893년 공화국령 테살로니키에서 현재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훗날의 역사는 이 사건을 두 번째 혁명으로 평가한다. 첫 번째 혁명은 군주제라는 체제에 대한 반기와, 공화제라는 형식의 수립이었다면, 두 번째 혁명은 로마 민중들의 혁명이었다. 첫 번째 혁명은 현학적인 자유주의자들의 혁명이었다면, 두 번째 혁명은 민중들의 자기 권리 주장, 빈곤에 대한 저항, 이탈리아 전쟁으로 양산된 상이군인들의 실존적인 투쟁 등이 집합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또한 '로마'의 주류였던 '로마인 남성'에서 벗어나서, 여성들, 뒤바뀐 역사에서 피지배 소수자들이 된 투르크인들 등이 대대적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요구하면서 혁명에 참여하였다.

두 번째 혁명으로 인하여 제 1 공화정 정부가 총사퇴하고 엉겁결에 집권한 과도정부는 '두 번째 혁명'을 일으킨 민중 세력들과 전면적으로 타협,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로마 노바 공화국은 제 2 공화정으로 진입하게 된다.[4]

제 2 공화정이 설립되면서 제 1 공화정과 달라진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민회의 신설: 제 2 공화정 초창기에 이들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에서 '민회'라는 제도에 주목하였는데, 로마의 원로원이 귀족이나 소수의 부유층 평민 등 귀족주의적인 기관이었다면, 민회는 모든 평민과 시민권자들에게 열려있었다는 기관이었다. 제 1 공화정 당시에는 오직 원로원만이 존재하였고 민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 2 공화정의 초창기에는 원로원을 아예 폐지하고 민회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정치적 타협 끝에 원로원은 폐지를 면했지만 대다수의 의회 권력을 민회로 넘기게 되었다.
  • 모든 성인들의 보통선거권 보장: 당시의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성년 남성만의 투표권이 인정되고 있었으나, 제 2 혁명 당시에 나타난 수많은 여성 혁명가들의 영향으로 모든 성인들의 선거권이 보장되었다.
  • 완전한 세속주의의 보장과 정교회의 특권 폐지
  • 자유주의적 원칙, 민주주의적 원칙의 강화와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이행.

정치

로마 노바 공화국은 국제적으로 민주주의가 널리 실현되고 있는 국가로 공인되고 있으며,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인 집정관이 매 4년마다 선거로 선출되는 집정관제 국가 이다.

민회

로마 노바 공화국의 민회έκκλησία는 로마의 양원제 의회 중 하원에 해당하며, 그 임기는 4년마다 전 로마인의 보통선거 원칙에 따라 선출된다. 몇 번의 선거제도 개혁 끝에 민회 선거는 집정관 선거로부터 1년 뒤의 해에 치루어지도록 맞추어졌다. 본래 로마 노바의 제 1 공화정에서는 원로원 중심의 단일 의회 체제였으나 로마의 제 2 혁명에 의해 민회가 도입되었고, 원로원의 상당수 중요 기능을 이양받는 합의가 나옴으로서 공화국의 주 입법기관의 지위를 민회가 차지하게 되었다.

민회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 공화국의 법률 입법
  • 원로원에서 가결된 개헌안에 대한 표결
  • 외국과의 조약에 대한 국회 의결
  • 집정관에 대한 탄핵안 의결

현 시점에서 로마 노바 공화국의 민회 정원은 총 600석이며, 모두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선거로 선출된다. 이에 대해 비례대표제 도입 등의 논쟁은 여전히 격렬하다.

원로원

원로원Σύγκλετος은 로마 노바 공화국의 상원에 해당하며, 그 임기는 4년으로 정해져 있다. 한때는 로마 공화정의 유일한 의회였으나, 과두제화된 원로원이 민의를 제대로 대변치 못한다는 것 때문에 발생된 제 2 혁명에 의해 원로원의 권한은 상당수 축소되어 민회로 이양되었다. 원로원의 선거는 집정관의 임기 2년차, 중간기에 치루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원로원은 큰 권한이 없으나 집정관에 대한 일종의 여론 평가가 가능한 중간선거로 파악된다.

원로원의 의석은 총 300석이며 모든 정원은 완전한 비례대표제 선거로 선출된다.

원로원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민회에서 가결된 법률안에 대한 최종심사.
  • 민회에서 가결된 개헌안에 대한 표결
  • 원로원장(상원의장에 해당)은 집정관이 탄핵 및 유고시 일시적으로 집정관의 직을 대행한다.

집정관

집정관άρχων은 로마 노바 공화국의 국가원수이며, 일반적인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집정관이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선출직 지도자인 '집정관Consul'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집정관의 임기는 4년이며, 한 사람은 최대 2회까지의 임기만을 이행할 수 있다. 본래는 집정관의 임기 제한이 없었으나, 집정관직이 사실상 장기화되면서 '선출된 군주'이지 '공화국의 대표'가 되지 못한다는 '제왕적 집정관제'에 대한 비판 이후로, 제 2공화정 체제에서는 집정관 임기에 제한을 두게 되었다.

집정관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 로마 노바 공화국의 국가원수
  • 로마 노바 공화국 행정부의 수반
  • 의회에서 가결된 법률을 집정관의 명의로 공표
  • 각 부의 장관을 임명할 수 있음 - 민회의 동의 필요
  • 로마 노바 공화국의 군통수권

각주

  1. 본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 설명
    원출처 : [1]
    저작자: 상기 사이트의 유저 Bilrow로 추정
    저작권 : 본 위키에서만 비영리적으로 이용하며 공정 이용.
  2. 실제 역사적 사실로,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 따르면, 오히려 180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제한적인 선거권'을 옹호하였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통 선거권'을 도입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표수'로 눌러버렸다.
  3. 로마 제국이 반이슬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제국 내에서 이슬람교는 악마화되었고, 대 투르크에 대한 총반격이 성공하면서 상당수의 투르크인들이 로마 제국의 백성으로 복속되었는데, 이들의 이슬람 신앙 자체는 제국법에 의해 일단 보장은 되었으나 제국내 반이슬람 정책에 의해 꾸준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4. 한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토대로 제 n 공화정의 표기가 달라지지만, 로마 노바 공화국은 세부적으로 헌법이 개정된 일은 많았으나 첫 번째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으로 설립된 정부를 '제 1 공화정'으로, 테살로니키의 두 번째 혁명으로 설립된 체제를 '제 2 공화정'으로 일컫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로마 노바 공화국 제 2 공화정 체제인 것으로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