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멜리아 제1연방

Rumelia Title.png

세르보크로아트어: Prvi Rumelija Federacija
български: Първo Румелия федерация
limba română: Prima Federație Rumelia
루멜리아 제1연방

 

 

 

1920년1943년
Flag of First Rumelia Federation.png Coat of arms of Rumelia.png
국기 국장
연방제를 채택한 과두왕정
표어 Један народ, један краљ, једна држава
Jedan narod, jedan kralj, jedna država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왕, 하나의 국가)
1280px-Europe-Rumelia.png
수도 베오그라드Београд
부쿠레슈티Bucureşti
소피아София
정치
공용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루마니아어, 불가리아어, 알바니아어
정부 형태 연방제, 입헌군주제, 부분적 동군연합, 부분적 전제군주정
과두위원회
1921년 ~ 1934년

1918년 ~ 1943년

1914년 ~ 1927년
주요 국왕
알렉산드르 1세(남슬라비아)
Aleksandar I Karađorđević
보리스 3세(불가리아)
Борис III
페르디난드 1세(루마니아)
Ferdinand I
입법 연방의회Kongres
원로원Senat
대의원Komora Zastupnika
지리
1930년 어림 면적 625,591km²
내수면 비율 4.9%
인구
1930년 어림 37,492,795명
인구 밀도 59.9명/㎢

루멜리아 제1연방(세르보크로아트어: Prvi Rumelija Federacija, български: Първo Румелия федерация)은 발칸 반도1920년부터 1943년까지 존속했던 연방제 중심의 입헌군주정 국가였다. 일반적으로 루멜리아 제1제국(Prvo Rumelija carstvo)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Österreich-Ungarn Monarchie)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해체된 이후 수립되었던 남슬라브계 통합 왕국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왕국(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과 같은 남슬라브계 민족국가인 불가리아 왕국(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을 비롯하여 범발칸 국가인 루마니아 왕국(Regatul României), 과거 세르비아 왕국에 의해 광대한 자치권을 획득했던 알바니아 자유통치령(Mbretëria Sundim)이 합쳐져 구성된 다민족 범발칸 연방국가로서 제2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명이 붙기도 했다.

역사

발칸 연방 계획부터 베오그라드 조약

발칸 연방 계획부터 베오그라드 조약의 체결까지 남슬라브계 국가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알바니아 자유통치령제1차 세계대전에 각기다른 상황을 겪으면서 안정화를 추구하면서도 극도로 통합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으로서 상당한 이권을 챙긴 루마니아 왕국, 몇 안되는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초기의 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패전한 불가리아 왕국, 이들 사이에 위치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알바니아 자유통치령은 내부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와 연합주의자 및 알바니아 독립주의자들간의 극심한 대립이 있었다. 그럼에도 발칸 국가들이 처한 국제 정세와 상황은 이들로 하여금 범발칸주의에 대한 동경과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곧 1920년을 기점으로 대(大)연방의 수립을 알리는 신호탄과 마찬가지였다.

발칸 연방 사상의 시작과 퇴색화

발칸 연방(Balkan Federation)이란 개념은 19세기 후반 좌익 정치 세력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 개념의 주요 목표는 발칸 반도국제주의, 사회주의, 사회 연대, 경제평등주의(Economic equality)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연합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의 주요 비전은 발칸 민족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방하기 전에 먼저 각 민족의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정치 개념은 2개 단계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첫 번째 단계는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دَوْلَتِ عَلِیَّهِ عُثمَانِیَّه)의 붕괴에 이어서 연결되는 개념이었으며, 두번째 단계는 전간기 초기 (1918년-1920년) 동안 지금의 그리스키프로스를 제외한 범발칸주의에 의거된 통합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개념이었다.

리가스 페레오스(Rigas Feraios)가
만든 발칸 연방의 깃발

1865년 베오그라드에서 처음으로 급진적인 발칸 반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 동방 연맹이 설립되었으며, 정치적 자유 및 사회 평등에 기초하여 알프스에서 키프르스에 이르는 범 발칸 연방을 주장했다. 그들은 앙리 드 생시몽연방주의 노선과 카를 마르크스 또는 미하일 바쿠닌사회주의 노선과 프랑스의 이념을 준수해야 된다고 말했다. 나중에 프랑스에서 1894년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으로 구성된 사회주의자들의 발칸 연맹 리그가 형성되었으며 나중에 연맹에서 마케도니아 문제(Macedonian Question)에 대해 다루기 시작함에 따라 자율적으로 마케도니아인 출신의 지식인들도 참여했다.

다음 시도에는 1908년 오스만 제국 내에서 청년 튀르크당(Jön Türkler)을 중심으로 입헌 혁명이 발생했다. 다음 해에는 살로니카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이 두 불가리아 사회주의 그룹과 합병하여 오스만 노동자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이 탄생했다. 이는 1913년까지 과소평가되지만 이 국가 문제의 정치적 의미는 민족 자치권과 극단적 민족주의에 비롯되어 좌익 운동이 변질됨에 따라 발칸반도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세르비아 왕국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당시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남(南) 슬라브인들 지역을 규합하여 만들어진 연합왕국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왕국(유고슬라비아)가 수립되면서 발칸 반도의 정세는 내부적인 민족간의 갈등을 제외하고서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남슬라브 지역의 안정화는 곧이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을 겪은 불가리아 왕국동맹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할 위기에 있었으나 빼앗긴 도브루자 지역을 찾아옴과 동시에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 대부분과 러시아 제국이 가지고 있던 베사라비아, 부코비나를 흡수한 루마니아 왕국으로서 주요 삼국을 중심으로 하여 범 발칸 반도지역은 전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제1차 세계대전

마라레슈티에서 행진 중인 루마니아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초기에 불가리아 왕국루마니아 왕국은 그리 좋은 관계를 형성치 못했다. 이는 루마니아 왕국러시아 제국브루실로프 공세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주춤할 위기에 있자, 1916년의 동맹국을 향해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친루마니아계인 트란실바니아를 흡수하려는 입장에 있었던 반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과 함께 루마니아 왕국을 감싸는 정세를 유지했다. 미숙한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과 전쟁에 대한 과소평가와 부족한 준비로 결국 루마니아는 동맹군의 본토 진군을 허용하는 입장을 지켜만 볼 수 밖이 없었다. 협상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당장에 맞닥뜨린 10월 혁명으로 동부 전선에 대해 독일 제국이 주도권을 잡는 형세였고, 루마니아는 살아남기 위해 1917년 12월, 포크샤니(Focsani)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1919년에는 수도였던 부쿠레슈티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남 도브루자로 불리던 카드릴라테르(Cardrilater)를 불가리아 왕국에, 추가로 북부 도브루자 지역에 이남을 양도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는 트란실바니아와 인접한 카르파치(Carpati) 산맥의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그외에 실질적인 역할을 주도한 독일 제국은 루마니아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주도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면서 연합국의 승리가 점쳐졌을떄, 루마니아는 그들이 입은 피해를 강조하면서 전쟁 전 자신들이 요구했던 사항들을 다시끔 이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다. 동맹국의 항복으로 1918년 12월 1일,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알바 이올리아(Alba Iulia)의 루마니아 민족회의에서 루마니아 왕국으로의 귀속을 선언한 것이다. 이들은 곧 루마니아 최고민족평의회를 조직하였고 12월 2일에 다시끔 이들에 의해 트란실바니아 직할평의회(Consiliul Dirigent al Transilvaniei) 가 성립되었다. 이후 12월 11일에 당시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는 트란실바니아, 바나트, 크리사나, 사트마르, 마라무레쉬의 루마니아 왕국령으로서의 합병을 승인하였다. 추가로 혼란에 빠져있던 러시아 제국 서남쪽의 베사라비아를 자국령으로 흡수함에 따라 이른바 '대(大)루마니아'라고 부르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패전 이후의 불가리아 왕국

알렉산드루 스탐볼리스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옛 후원국인 러시아 제국을 배신하고 독일 제국의 편을 들은 불가리아 왕국은 패전 이후 혁명을 대신하여 개혁이 들고 일어남에 따라 퇴위를 종용받은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위에서 내려오고 그의 아들인 보리스 3세(Борис III)가 즉위하였다. 한편 뇌이 조약(Treaty of Neuilly-sur-Seine)이 체결되면서 불가리아는 과거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일체의 조약을 폐기하고 각종 승전국에 대한 이권과 남슬라브계 국가들의 독립에 대해 인정 및 유고슬라비아 왕국에게 마케도니아를, 서트라키아를 그리스 왕국에게, 루마니아에게로는 도브루자를 할양하는 등 일대의 혼란을 겪었다. 다행히도 헝가리 공산 정권과는 달리 불가리아 왕국은 정권에 대한 유지를 계속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 패전 이후 혼란한 정계 상황 속에서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알렉산더 스탐볼리스키(Aleksandar Stamboliyski)가 이끄는 농민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칸 전역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몰두하였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불가리아는 동맹국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니콜라 파시치의 모습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수립을 주도한 인물들 중 한명이었던 크로아티아의 정치 지도자이자 달마치아에서 세르바-크로아티아라는 정치 조직을 이끌던 안테 트룸비치(Ante Trumbić)는 1917년 7월 세르비아 왕국의 총리였던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를 그리스 왕국코르푸 섬에서 만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대로 남슬라브계를 주축으로 한 통합 국가를 건국하기로 약속하게 되는데, 이들의 약속을 '코르푸 선언'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합의된 새로운 통합 국가는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우며,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나라가 될 계획에 있었다. 이는 크로아티아 측이 새로 세울 통합 국가의 기본틀로서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선출되는 의회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는데, 이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대(大)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국가를 수립코자 했으나, 민족 갈등으로 인한 남슬라브계의 붕괴를 촉진할까 두려워 마지못해 크로아티아의 조건을 수렴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뒤늦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이러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립을 지지하면서 불가리아 왕국헝가리를 견제코자 했다.

니콜라 파시치는 위에서 언급된 이유들로 해서 안테 트룸비치와 약속을 체결했지만 세르비아 극우파들은 대(大)세르비아를 향한 야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왕국 건국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또 다른 축이 될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쪽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1918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남슬라브 지역에서는 다양한 ‘유고슬라브’ 민족들의 독립 선언이 이어졌으며, 세르비아 왕국,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왕국, 슬로베니아 대표들은 그 해 12월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에 모여 통합 왕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에 1919년 2월 미국이 서양 열강들 중 가장 먼저 신생 통합왕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된 승전국들도 앞다퉈 미국의 입장을 따랐다. 신생국의 이름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으로 결정되었다.

알바니아 독립운동과 자치권 획득

알바니아는 1479년에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어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400여년의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의 약세가 두드러지고,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발칸 반도 일대에서 독립 및 무장 항쟁들이 이어지자, 알바니아 또한 뒤늦게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8년 이전까지는 산발적이고 지역적인 규모의 투쟁이 이어졌지만, 1908년부터 전국적으로 규합해서 투쟁하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의 독립운동은 격화되었다.

알바니아 자치를 선포하는 블로러(Vlorë) 의회에서의
이스마엘 체말리

이스마일 체말리(Ismail Qemal Bej Vlora)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 투쟁은 1908년부터 1912년 7월 자치 선언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실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력을 마비시키면서 독립 투쟁에 대한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으나, 1912년에 발칸 전쟁이 발발할 무렵, 세르비아 왕국은 아직 독립하지 못한 알바니아를 노리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는 그 배후에서 세르비아를 지원하였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아드리아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알바니아의 독립을 표명하였으며, 독일 제국이탈리아 왕국 역시 여기에 동조했다. 결국 1912년 11월, 알바니아 측은 동맹국들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언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이에대해 압력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발칸 전쟁에서 연거푸 패전을 거듭한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서 알바니아를 관리하는 일은 어려웠고 결국 이를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 측의 요청으로 1912년 12월부터 시작된 런던 회의에서, 그리스 왕국세르비아 왕국을 제외한 범 발칸 국가들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통치자로 독일의 귀족 출신이었던 빌헬름 비드(Princ Vidi or Princ Vilhelm)를 추천했으나, 주변국들과 열강의 복잡한 이해 관계와 맞물려서 회담이 장기화되는 사이, 제1차 발칸 전쟁이 재개되면서 알바니아 문제에 대해서는 명료한 결론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제2차 발칸 전쟁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인 1913년 7월, 런던에서 주최된 6개국 대사회의에서 열강은 알바니아의 독립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던 마케도니아코소보를 흡수하였으며, 열강들에 의해 범 발칸 국가들의 공통 통치에 있는 알바니아 자유통치령의 수립이 승인되었다. 비록 알바니아는 독립을 쟁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정적으로 알바니아 주민들에 의한 의회와 대표단을 선출한다는 점과 이에 의거된 통치를 전폭 허용한다는 점에서 만족하는 입장을 가졌다.

유고슬라비아의 '대타협'

범국민주의(Pan-nationalism)에 기반된 사상에서 비롯된 범발칸주의(Pan-Balkanism)는 범슬라브주의(Pan-Slavism)에 영향을 받았는데, 범슬라브주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 제국이 주장하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에 대항하여 발칸 반도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던 반면, 범발칸주의는 순전히 발칸 반도 일대에 위치한 국가들의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자는 자발적 운동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당시 발칸 반도에 만연했던 민족주의에 사상으로 이를 실현하기란 어려운 현실이었고 유고슬라비아 통합왕국 내에서도 사실상 중앙집권적 성격을 갖추어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왕국이 그러하였듯이 세르비아계가 주류 민족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머지 민족들을 강압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마케도니아에서 만난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드르 1세
그리스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1세

유고 연방 결성 이후 통일왕(Ујединитељ)으로 불리던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I)에 공인 아래 실시된 제헌의회에서는 전체 419석에서 세르비아계 2개 주요정당 183석,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118석을 차지하면서 삼당 체제 구도가 완성되었다. 초기에 논의된 유고 연방의 헌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당시 야당이자 정계에서 세번째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크로아티아 농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의 당수였던 스테판 라디치(Stjepan Radić)는 국가 연맹과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착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완고하게 정권 수립 협력을 거부하였다.

이에 당시 유고 연방 내에서 세르비아계의 뒤를 이어 24%의 높은 민족 비율을 유지하던 크로아티아의 민족적 지지를 받는 스테판 라디치를 무시하기에는 그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이란 어려웠고, 자칫 힘겹게 결성된 연방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크로아티아 문제'(Croatian Question)를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알렉산다르 1세를 포함한 세르비아계 정당 당수들과 스테판 라디치의 정권 구성 회의가 논의되었으며, 한편으로 세르비아 민주당이 이전까지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기조에서 반전하여 중앙 집권 체제에 반발함에 따라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을 띄던 국민 급진당(Narodna radikalna stranka)과 카라조르제비치 왕실은 대(大)세르비아 주의에 입각된 중앙집권제를 포기하는 노선으로서 연방의 존속을 택했고, 이에 다시 실시된 2차 제헌의회에서 세르비아 민족당크로아티아 농민당이 연합한 연방당이 대승을 거둠에 따라 온건적 성향을 띈 범민족적 내각이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극우 민족주의에 기반된 정치권은 급속도로 변혁을 맞이하였다.

한편으로 알렉산다르 1세는 이러한 대연방 통합 노선에서 만연했던 세르비아 중심의 헤게모니를 던지기 위하여 연방당(Federalistička stranka)과 함께 국민 통합책으로서 기존의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왕국'의 명칭에서 그동안 사석이나 별칭으로 사용되던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a)을 공식 국호로 채택하였다. 이후 '대타협'(Sporazum)을 통하여 크로아티아에 대한 내부 자치권을 대폭 허용하였다. 반(反)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를 주창하던 우스타샤(Ustaša)들과 극우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의 입장은 곤란해졌으며, 대통합을 위해 민족적 헤게모니를 없앤 알렉산다르 1세에 대한 비난이 오갔고, 심지어 왕실과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반란 작업에 나서기도 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이러한 대타협은 분리주의적 민족 색채를 흐리면서 다민족 사회에 입각된 연방 체제를 존속시킬 수 있는 발판을 다졌고, 이것이 곧 나아가 범발칸주의에 의거된 대연방을 수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루멜리아 연방 수립의 전초격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발칸 반도내 민족주의자들의 입지를 갈수록 약화시켰다.

베오그라드 조약

불가리아 왕국의 총리였던 알렉산더 스탐볼리스키(Aleksandar Stamboliyski)는 기존 동맹국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하여 그리스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대타협' 이후 민족주의가 약세를 이루고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한 발칸 연방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진전을 이루게 됨에 따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 등의 반국가 분리주의 세력을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공동 전략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이러한 발칸 연방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기 위한 동력으로서 러시아 혁명 이후 사실상 사멸하거나 몰락하였ㅇ나, 당시까지 범슬라브주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동유럽에서의 슬라브계를 주축으로 한 연방 국가 수립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봄과 함께 위협적이었던 외부 세력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위기 인식 등의 포괄적인 이유도 발칸 연방의 실현화에 대한 이유로서 곁들여졌다. 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상을 겪은 발칸 주민들의 반전 사상은 이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에 입각된 투쟁적인 분리주의 단체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의식하였고, 서유럽중부 유럽을 포함하여 다민족 사회를 건립한 미국의 사회를 동경하는 지식인 계층의 폭발적인 증가도 발칸 연방의 수립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1919년, 불가리아 왕국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소피아(София)에서 유고슬라비아 측의 알렉산다르 1세스테판 라디치, 불가리아 측의 보리스 3세(Борис III)와 알렉산더 스탐볼리스키가 만나 소피아 선언을 통해 발칸의 연방화에 대한 논의를 적극 검토하고 자국내 분리주의를 표방하는 반국가 단체에 대한 대응에 협력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한편 루마니아 왕국제1차 세계대전에서 상당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대(大)루마니아 내에서 높은 교육열과 문해율을 갖춘 헝가리인들과 남부의 불가리아 왕국으로부터 획득한 불가리아계 중심의 도브루자 등 민족간 대립과 격차도 크게 차이가 났다. 루마니아의 지방 행정도 보복적 민족 정책성을 추구했던 만큼 내부의 소수민족을 억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 베오그라드의 모습을 담은 엽서

비단, 내부의 헝가리인들에 대한 소수 민족 문제뿐만이 아닌, 헝가리 본국에서도 루마니아를 견제하고 압박하기 위하여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루마니아군이 몰아낸 공산 정권을 바탕으로 비롯되었으나, 그들 역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루마니아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불 보 듯 뻔한 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동북방에 새로 수립된 소련도 루마니아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새로이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왕정을 채택한 루마니아 사이에서 양측의 체제는 상극에 가까웠다. 또한, 과거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베사라비아(Basarabia) 지역이 루마니아에 합병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루마니아와 소련 양측은 여러 번 회담을 거치나 결국은 실패로서 무산되었다. 특히나 소련의 사주를 받던 루마니아 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에 불을 끼얹으면서 사회적 혼란을 극심화했다. 루마니아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고립적인 위치에 있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한 역량은 충분치 못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에 당시 루마니아의 총리였던 알렉산드루 바이다-보에보드(Alexandru Vaida-Voevod)는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Magyarországi Tanácsköztársaság)을 상대로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에서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공산 정권의 붕괴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전쟁을 계기로 당시 헝가리와 대립을 세우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접선을 통해 동북부에 소련과 헝가리에 대한 공동 대응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발칸 연방의 조심스럽게 발을 담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당장에 맞닥뜨린 공산국가들의 위협은 미성숙한 루마니아의 국력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버겁다고 판단하였으며, 자국 내 자유주의자들과 소수민족들에 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다민족 사회였던 유고슬라비아가 좋은 파트너이자 참고자료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거라는 기대 경향도 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발칸 연방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불가리아 왕국과의 도브루자 입장에 대해서는 판이한 차이를 보였다. 알렉산드루 바이다-보에보드는 발칸 연방으로 통합할 시 북도브루자였던 '도브로제아'(Dobrogea)와 남도브루자였던 '카드릴라테르'(Cadrilater)를 통합하여 연방 내 자치권을 행사하는 자치 국가로서 귀속시킬 생각이었고, 불가리아 왕국은 남도브루자와 북도브루자를 반환받는 것이 주 목표였다. 최종적인 논의 끝에 카르릴라테르는 연방 내 불가리아 왕국의 귀속 영토로서, 도브로제아는 불가리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이 공동 관할하는 자치령으로서 존속시킬 것을 합의로 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는 내용을 담은 다뉴브 협의를 끝으로 발칸 연방의 결성을 위한 큰 걸림돌이 제거됨에 따라 속전속결로 연방화가 진행되었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Београд)에서 삼국 정상과 함께 대폭적 자치권을 인정받긴 하였으나, 공통 통치령에 속했던 알바니아 자유통치령의 대표단이 만나 연방 결성에 대한 최종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이윽고 알바니아를 제외한 삼국에 왕실 대표자들로 구성된 과두위원회를 결성하여 연방 내 왕실간 교류를 강화하는 한편, 보통 선거제와 다민족주의, 범발칸주의에 기반된 자치 연방제, 민주정을 위시한 대(大)연방 국가에 수립을 알렸다. 국명은 과거에 오스만 제국과 타국이 발칸 반도를 지칭했던 루멜리아(Rumelia, Rumeli, Ρωμυλία)으로 결정되었다. 그리스 왕국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Ελευθέριος Βενιζέλος‏‎)의 외교적 성과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로서 당시 그리스로서는 발칸 연방의 수립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이에 대해 큰 관심을 표하지도 않았기에 불참하였다.

광란의 20년대

1920년, 공식적인 대(大)연방을 수립한 루멜리아 연방은 성립 초기부터 알바니아 왕정 선언부터 철위단 사태, 마케도니아 내전연방 남부 분쟁 등 일련의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민족 사회에서 시작된 루멜리아 연방은 차츰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에서 연방을 중심으로 한 범발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이전 전쟁의 참상을 딛고 새로운 문화 풍조를 만들어 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기계 및 공업과 타협하여 직선미와 실용미 등을 강조한 아르데코(Art Déco) 미술 사조라든지, 반전 사상과 평등 사회에 대한 동경을 내세운 슬로보다(Slovoda) 문화라든지 다양한 사회적 양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알바니아 왕정 선언

1913년, 런던 조약(Treaty of London, 1913)에 의거하여 대폭적인 자치권을 획득한 알바니아는 루멜리아 연방의 성립 이후 행정 개편 과정에서 '알바니아 자유국'(Mbretëria Vendi i lirë)으로서 이전의 인정되었던 자치법률과 자치권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알바니아는 지방마다 토착 영주들의 입김이 강해 사실상 수백개의 지역으로 쪼개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친 뒤 막상에 자치권을 부여받았음에도 근대적인 정치 체제를 경험해본 적이 전무했으며, 이러한 후진성 때문에 알바니아의 자치 환경은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띄었다. 특히나 이 불안정은 극심해서 1921년 7월부터 12월까지 불과 다섯 달 동안 다섯 번이나 자치 내각이 바뀔 정도였고, 연방 내에서도 알바니아 내부에 대한 후진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조구 1세의 모습

한편 아흐메트 조구(Ahmet Muhtar Zogolli)는 북부 지지층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키우고 있었는데, 1920년부터 1년 동안 슈코더르(Shkodër) 자치 행정관, 1921년부터 1924년까지는 내무부 자치장관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자치장관 시절인 1923년에 자치 총선이 실시되고 조구를 지지하는 세력은 반(反)연방 분리주의 세력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자치 의석을 차지하게 되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흐메트 조구는 본격적인 알바니아 정쟁에 나서게 전면으로 도전하였다.

그에 경쟁자였으며 당시 알바니아의 저명한 학자이자 알바니아 정교회(Kisha Ortodokse Shqiptare )에 확립에 큰 기여를 한 판 슈틸리안 놀리(Fan Stilian Noli)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으나, 북부 출신이면서도 당시 알바니아 내 무슬림 지주들을 대변하던 조구는 놀리의 토지 개혁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이 때문에 놀리와 극심한 충돌을 빚는다. 여기에 더해 조구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지배하던 코소보(Kosova) 지방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권리 보호를 제대로 부르짖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바니아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후 조구는 급진파였던 아브니 루스테미(Avni Rustemi)에게 암살 될 위기에 처해지고 판 놀리를 지지하는 이들이 좌익 쿠데타를 일으켜 조구를 연방 내 '유고슬라비아' 지역으로 퇴출시켰다.

그러나, 판 놀리가 소련을 이용하여 루멜리아의 연방주의를 이간질하고 알바니아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인식한 다른 연방 내 국가들은 조구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12월 24일에 조구가 알바니아의 자치 수도였던 티라나(Tiranë)를 장악함으로서 판 놀리가 이끌던 좌익 정권은 붕괴되고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권력을 장악한 조구는 이듬해 1월 7년 임기의 자치 총리에 선출되고 자치 의회 의장직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이후 연방의 국가들에 비호 아래 1인 권력을 확립하던 조구는 자치 총리라는 직함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그는 1925년 9월 1일 아흐메트 조구는 알바니아 일대에 대한 자치 제도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알바니아 왕국(Mbretëria Shqiptare)을 선언하고서 연방에 재가입을 선언한 뒤 '알바니아인들의 왕 조구 1세' (Zogu I, Mbreti i Shqiptarëvet)라는 이름으로 국왕 즉위를 선언하였다. 연방의 다른 국가들은 아흐메트 조구의 왕정 선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과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그는 이들의 비호 아래 있던 만큼 친연방적 성격을 띈 연방 소속 알바니아 왕국으로서의 승격을 요구하고 이전의 알바니아 자유국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에 의거하여 나머지 연방 소속국들에게 연방에 대한 분리주의, 친소 정책을 통한 반(反)연방주의를 추구하는 자치 정권의 수립을 법률과 정책으로서 금지하면서 연방 유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조건에 서명한 뒤 지지를 얻음에 따라 알바니아 왕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신생 연방 소속국으로서의 지위로 승격하였다. 다만, 알바니아의 조구 왕가는 다른 왕실들과는 달리 과두위원회(Oligarh Komitet)에 직접적인 참여는 불가능하였고, 옵저버로서 참관만 가능하였다.[1]

마케도니아 내전

마케도니아 내전의 시작은 1920년부터 1934년까지 토도르 알렉산드로프, 알렉산다르 프로토게로프, 이반 미하일로프 등 연방 내부의 마케도니아 혁명단 지도자들이 유고슬라비아그리스가 점령한 영토를 해방하고 지역이나 민족성과 상관 없이 모든 마케도니아인들을 위한 마케도니아의 민족 통일을 이룩하고 알바니아 왕국과 같은 주권국가의 형태로서 연방에 가입하자는 내용의 마케도니아 통일(이른바 대(大)마케도니아) 사상을 내세웠다.[2] 이러한 통일 사상 이전에 1918년부터 알렉산데르 말리노프불가리아 왕국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러한 목적[3]을 위해 피린 마케도니아(Pirin Macedonia)를 내놓겠다고 제의했으나, 유고슬라비아그리스는 이를 반대하였고 열강들 역시 이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20년에 루멜리아 연방 정부가 구성됨에 따라 무산되었다.

그러나 극우 마케도니아인들은 당시의 연방의 대타협 체제가 마케도니아 통일을 이룩하는데 불리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한다는 생각에, 또한 민족성을 억제한다는 판단으로 비쳐졌으며, 한편으로 블라고에브그라드(Област Благоевград)[4]에서 분리주의를 표방하던 마케도니아계 주민들을 주축으로 한 독립 반란이 일어나자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은 반란에 가담하였으며, 이와 함께 분리주의적 민족주의를 공공연히 표방하던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도 블라고에브그라드 소속 불가리아 관청과 지역 군대에 대해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1923년에 슈티프(Штип)에서는 일부 세르비아계 게릴라들이 조직한 준군사 조직인 '불가리아 도적 대항 연합'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의 변절자들을 포함하여 마케도니아 연방단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과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에 대립하는 형세를 이루면서 마케도니아 전역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이에따라 인접 소속국인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일대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하며 모든 반(反)연방적, 내란적, 분리주의적 성격을 띈 단체에 대한 보복적 학살을 개시하였으며, 이에따라 수많은 마케도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내전의 상황은 격화되어 갔다. 마침내, 지속적인 내전 수행을 이루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마케도니아 단체들은 내부의 대립을 종식하는 한편,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둘러싼 삼자 협상을 개시하면서 임시적으로 휴전이 진전되었으며, 1934년에 유고슬라비아의 행정구역인 바르다르 주(Vardar Banovina)와 불가리아의 행정구역이었던 블라고에브그라드(피린 마케도니아)를 '마케도니아 독립국'(일명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Вардарска Македониа)으로 불가리아 정부,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외교권, 군권을 위임한 우호 보호국 형태로 대폭의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철위단 사태

철위대 봉기 당시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철위단 소속 민병들

1926년 6월 24일,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Corneliu Zelea Codreanu)는 '대천사 미카엘 군단'(Legiunea Arhanghelul Mihail)을 창단하고 철위대 운동의 서막을 알렸다. 철위대는 여타 극우 파시즘 단체들과는 달리 루마니아 정교회의 많은 요소를 정치 강령에 삽입하는 등 그 명백한 종교성으로 여타 지역의 유럽 파시스트 운동과 대조를 이루었으며, 철위대 운동의 지도자 코드레아누 역시 종교적 신비주의자를 추구했다. 코드레아누의 이단적 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죄악스럽고 폭력적인 정치적 전쟁이며, 궁극적으로 영적인 국가에 의해 초월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철위대 대원들은 지옥에 갈 정도로 광기에 찬 행동을 해야 할 수도 있었는데, 이는 국가에 대한 궁극적인 희생으로 여겨졌다.

철위대는 '녹색 셔츠'(Cămăşile verzi)를 입고 서로에게 로마식 경례를 하였으며, '대천사 미카엘 십자가'(Crucea Arhanghelului Mihail)로 불리며 감옥의 철창을 의미하는 삼중 십자가(순교의 증표)를 공공연히 사용하였다. 이들 철위대의 핵심은 바로 루마니아인들을 주축으로 한 배타적 민족주의였으며, 종교적 행사와 열정적이고 애국적인 찬송가를 부르며 시가 행진을 하고 단합을 과시하여 루마니아 내의 이목을 끌었다.

철위단은 당대의 수많은 파시즘 정당들과는 달리 종교면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냈는데, 에스파냐폴란드에 만연했던 교권파시즘 정당들이 종교를 '외피'이자 '수단'으로 이용한 반면에 루마니아는 정교회 그 자체로 국가의 '핵심' 이자 '체제' 그 자체를 이끌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철위단은 이에 기반되어 코드레아누를 중심으로 한 우상숭배가 강요되었으며, 이들 추종자는 종교의 권위를 뒤업고 루마니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루멜리아로부터의 분리주의를 촉구했다.

코드레아누의 추종자들은 루마니아에서의 소극적 봉기를 벗어나 루마니아 그 자체를 뒤흔들 대규모 봉기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대혁신'을 이룩하기 위한 신(新)인류로서, 농민과 노동자 및 청년들을 자극했다. 루마니아 인구의 전체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철위대가 계획한 인종주의와 파시즘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등에 업은 추종자들은 본격적인 '철위대'(Garda de fier)를 조직하고 루마니아의 행정수도였던 부쿠레슈티에서 '모두다 조국을 위하여'(Totul penrtu tara)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봉기가 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권위에 압도된 봉기는 곧바로 루마니아의 파시즘화와 민족주의를 우려하던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의 제지가 들어왔으며, 당시 루마니아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 역시 이러한 인종적, 민족 배타주의가 훗날 연방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한편, 루마니아가 연방에서 분리될 시 소련과의 지속적인 영토 분쟁에서 그나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준 국력면에서 큰 손실을 가져다 줄 수 밖이 없다는 판단하에 철위대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하였다. 결국 1927년 1월, 유고슬라비아군과 불가리아군의 개입과 당시 루마니아 근위대를 중심으로 철위대의 해산 명령과 함께 봉기를 진압하였으며, 페르디난드 1세는 곧바로 배타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를 해산하는 명령과 함께 연방주의에 입각된 우파 내각의 수립을 추진함에 따라 사회·교육 개혁을 통한 농민층의 문해율 해소 및 근대 지식 양성을 추진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루마니아 내에서의 극우 파시즘은 민족기독방위연맹을 비롯한 소수계로 전락하였고 이마저 붕괴되었다.

연방 남부 분쟁

코소보 지역은 알바니아인들이 주류를 이루던 유고슬라비아 내 영토로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주의 정책과 코소보 지역의 민족주의 성향에서 판이한 차이를 보였다. 코소보 알바니아 공동체에 대한 해결을 위해 유고슬라비아는 행정 구역 내 '코소보 자치주'를 건립하여 알바니아계를 다독이려 했으나, 코소보-알바니아 인들은 나름대로 '알바니아 자각운동'으로서 알바니아 왕국의 흡수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 지역은 과거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항전한 성지로 여겨졌으며, 이 곳은 세르비아 중세 국가들의 핵심 지역이었고,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정교회가 자리잡은 유서 깊은 곳이기에 유고슬라비아 내 세르비아계의 입장에서도 코소보 지역을 알바니아 왕국에 할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코소보 일대는 곧바로 알바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하여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세르비아계 지도자를 중심으로 코소보 지역 조치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결국에는 코소보-메토히야 자치국(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ја)을 건립하고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양측의 공동 독립 자치로서 존속시킨다는 내용으로 이른바 '코소보' 합의가 이끌어지면서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알바니아 왕국은 왕정 성립 이후 또다른 영토 갈등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북이피로스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계 자치 공화국이었던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Αὐτόνομος Δημοκρατία τῆς Βορείου Ἠπείρου)의 존속 문제였다. 1912년에 있었던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인해 알바니아가 자치권을 획득한 후, 알바니아 자유통치령그리스 왕국 간의 국경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있자, 당시 알바니아령으로 유지되던 북이피로스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왕국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며, 1914년 2월 28일에 북이피로스의 자치를 선언하고 수도를 당시 이피로스의 중심도시인 아르기로카스트론(Αργυρόκαστρον)을 수도로 정하였으나, 결국 같은 해 5월 17일에 임시 정부 상태에서 알바니아 자유통치령이 내부의 전근대적 정치 혼란과 같은 이유로 인해 사실상 독립국으로 유지되었다.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던 요르요스 흐리스타키스조그라포스(Georgios Christakis-Zografos)는 북이피로스 지역이 그리스 내부로 편입될 시 발생할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혼란을 예상하고서 독립국으로서의 존립을 택하는 길을 선택했다.

1919년 파리 회의 당시 그리스와 프랑스의 기획 영토안

이후 루멜리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북이피로스 지역은 그리스 왕국과 루멜리아, 그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상태를 유지했으나, 알바니아계 북이피로스 주민들은 알바니아로의 합병을 촉구하고 있었으며, 나름대로 그리스계 북이피로스 주민들은 루멜리아로의 연방 가입을 통한 국체 존속 혹은 그리스 왕국으로의 합병을 추진했다. 결국 그리스 왕국, 루멜리아 연방 내 알바니아 왕국간의 물밑 교섭이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북이피로스 지역의 다수를 차지하던 알바니아계의 주장대로 알바니아의 합병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으나, 그리스계 주민들의 산발적인 봉기로 최종적인 결론은 루멜리아 연방 내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으로 가입하는 형식으로 존속하는 길을 택했다.

북이피로스 문제와는 다른 양상으로서 루멜리아 연방은 그리스 왕국위대한 이상(Μεγάλη Ιδέα) 정책을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으며, 그리스 내부 국정과 외교 관계에 큰 영향을 준 공상적인 민족주의 열망을 주는 사상은 곧 루멜리아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어 분리주의, 연방주의를 책동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있었다. 그리스 왕국은 이오니아 해에서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폰토스 바다(흑해)에서 동방에 이르기까지, 트라케에서 마케도니아북이피로스에 이르기까지, 크레타에서 남쪽으로 키프로스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르는 '비잔틴 제국'의 건설을 희망하고 신생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그 수도를 둘 것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터키 전쟁 (1919-1922)에서 그리스가 패배하고 1922년 스미르나 대화재로 그리스군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자 위대한 이상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루멜리아와 그리스간 민족, 영토에 기반된 사상 대립은 자연스레 종식되었다.

격동의 30년대

1920년대에 수많은 영토, 민족주의, 분리주의적 요소들의 해소는 루멜리아 제1연방이 연방주의와 범발칸주의에 입각된 대(大)연방 국가로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역할을 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은 녹록치 못하였다. 1930년대로 진입하기에 앞서 1929년, 대공황은 루멜리아의 사회 및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입각된 극우 성향의 유럽 정치계의 광풍이 불고 있었다. 특히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제국은 해소되어가던 내부의 분리주의, 민족주의의 불씨를 주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루멜리아의 근대 지식인들과 연방주의자들은 발칸 지역이 또다시 전쟁에 구렁텅이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부의 산재된 문제로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또다른 외세 열강들의 침략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수많은 대비책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맞이할 폴란드1939년 방어전(Wojna Obronna 1939 Roku)의 시작과 함께 그 진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공황

1929년 10월, 미국 월스트리트의 갑작스런 주가 폭락(the Wall Street Crash)의 여파가 전 세계의 경제 구조를 위협하는 미국발 '대공황'이 발생하자 유럽 전역에는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크나큰 위기감에 따른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쟁취하기 위해 얻은 민주주의는 침체되었으며, 정치적 극단주의(스페인 내전 등)의 자생이라는 복합적인 요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낳는데 큰 일조를 하였다.

미국의 경우,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당선되고 나서 제도주의 비주류 경제학 등을 중심으로 한 뉴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에 정통적인 식민 제국들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식민지에 의존하는 블록경제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후반부터 회복세를 이어가던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과 함께 턱없이 작은 국내 시장과 적은 식민지, 전후 복구 처리에 대한 어려움을 겪던 일본 제국이탈리아 왕국은 세계 대공황을 견뎌낼 수 없었고, 결국 이것이 나치즘파시즘이라는 기치 아래 군국주의 성격을 갖춘 국가들이 탄생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취업을 위해 나선 공황기의 미국인들

당장에 맞닥뜨린 글로벌 위기에 긴장한 것은 루멜리아도 매한가지였다. 20년대를 힘겨운 반(反)연방주의와 분리주의에 맞서 지켜낸 이들로서 세계 대공황은 발칸 반도의 통합을 붕괴시키고 분리주의와 민족주의에 의거된, 극도록 혼란한 사회를 만들 것임을 이미 연방의 지식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루멜리아의 몰락하는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방안으로서 주요 정책 자문단을 구성하고서 블록경제와 뉴딜정책을 혼합한 '위기 정책'을 펼쳤다. 위기 정책은 뉴딜 정책에서 진행된 연방 정부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한편, 루멜리아의 경제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농업 부문에서 과잉 생산된 주요 농산물 가격에 대한 통제를 시도했고 연방 정부의 직접적인 원조 아래 농업 구제책을 내놓았다. 또한 아드리아 항구를 적극 운용시켜 이탈리아 왕국과의 교류를 강화하는 동시에[5] 대공황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이었던 알바니아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일자리 창출과 전간기 발칸 반도 전역에 문제였던 전력 공급을 위한 방안으로 대규모 개발공사를 지시했다.

그외에 통일된 은행체계 없이 유지되던 루멜리아는 금본위제를 중단하고 각지에 공황상태에 놓인 지방 은행들을 대체하는 형태로서 연방 전역의 은행 업무를 정상화 시키기 위하여 '루멜리아 연방은행'을 설립하고 아직 미숙한 루멜리아 내 금융 시장을 제어하기 위한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연방증권법을 통과시켰다. 또, 미국의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았던 "전국산업부흥법"(Zakon o nacionalnom industrijskom oporavku)을 통과시켜 연방 내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위에서 언급한 개발공사들을 연방 정부가 주도하도록 하여 실업률을 낮추는 한편, 경제의 부흥을 꾀했다. 또, 유럽의 여타 식민 제국과 같이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블록경제권[6]을 형성하여 발칸 반도의 자급자강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으나, 내부에서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 일대를 제외하여 경제적인 악재를 겪고 있던 알바니아불가리아는 다른 연방 소속국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떠맡음에 따라 뉴딜 정책에 의거된 개발 공사 과정에서도 회복세를 이어가기 어려워지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루멜리아의 '위기 정책'과 이에따른 대공황 극복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 부작용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상황에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발발로 전시 호황을 이루기 전까지 루멜리아의 민족주의, 분리주의에 의거된 내부 혼란을 억제하여 독립적인 경제권을 구성해낸 한편으로 낙후되었던 발칸 지역의 전면적인 개발과 함께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특히나 이 당시에 도입된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법률과 사회보장제도는 지금도 연방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루마니아, 혼돈속에서

1927년, 철위대 사태를 간신히 제압한 루마니아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가 서거하는 비극이 발생하였고, 당시 루마니아의 왕위 계승자는 그의 장남이었던 카롤 2세(Carol II)로서 바람둥이로 소문난 루마니아 왕실의 문제아였다. 카롤 2세는 미하이 1세(Michael I)의 친모인 엘레나 왕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의 관계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25년에 대영제국 황제였던 에드워드 7세의 정실인 알렉산드라 왕비의 장례식에 연방 소속 루마니아 왕실 대표로 참석한 카롤 2세는 내연관계에 있던 유대계 루마니아인, 엘레나 루페스쿠를 몰래 만나 이탈리아 왕국으로 떠나 버렸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아들 카롤 2세의 기행에 화가 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는 장자인 카롤 2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맏손자인 미하이 1세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였다.

사실 카롤 2세가 문제아로 낙인 찍히면서 기행을 벌인 것이 왕위 계승권의 박탈로 이어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가 당시 루마니아의 국법을 위배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국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루마니아 본토민과 결혼을 해서는 아니되었다. 이는 외국의 국왕을 모시고 있던 루마니아에서 당시 토착 루마니아 귀족들이 단합하고 왕위 계승을 위한 음모와 암투를 벌이는 것으로 루마니아 왕실의 후광 뒤에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카롤 2세는 국법을 위배하면서까지 사랑을 쟁취하려든 풍류아였다.

결국 카롤 2세는 왕위 계승권에서 박탈된 채로 망명을 했고, 미하이 1세가 차기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는 6세에 불과했던 어린아이였다. 결국 삼촌이었던 니콜라이 왕자와 루마니아 대법원장 게오르게 부즈두간(Gheorghe Buzdgan), 루마니아 정교회 주교 미론 크리스테아(Miron Cristea)의 3인 섭정 체제가 실시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본 카롤 2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루마니아의 수상, 이올리우 마니우(Iuliu Maniu)에게 접근하여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공동 섭정자 직책에 만족하면서 루페스쿠와의 인연을 끊고 엘레나와 재결합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로 다짐하고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카롤 2세는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이 폐위된 법령을 무효화하는 한편, 이올리우 마니우가 개혁 정책에 실패를 책임지고 사임하게 된 뒤, 루마니아의 내각은 끊임 없는 인물들이 취임과 사임을 반복하는 혼란을 맞이하였다. 한편으로 카롤 2세는 우경화를 더욱 공고히 하여 민족자유당과 민족연맹(Uniunea Nationala)이 상당한 득표율을 획득하면서 강력한 왕당파를 형성하고 전제 반동 정치로의 회귀를 기도했다. 동유럽에서 훌륭히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된 루마니아의 민주주의는 무너지면서 금권 정치와 부정부패가 극심해졌다.

미하이 1세의 지지파와 이전 3인 섭정자들은 이같은 루마니아의 전제 정치가 다시 회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했고, 한편으로 중도 우익을 자처했던 민족자유당알렉산드루 바이다-보에보드이온 두카(Ion Gheorghe Duca)의 지지 협력 세력을 확보했다. 마침내 1931년, 반(反) 카롤 2세파 지지 세력들의 봉기와 함께 유고슬라비아군과 불가리아군이 진입하였다. 이로서 카롤 2세는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서 다시끔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하였고, 미하이 1세를 복권시킨 뒤, '인민에 의한 자유 선언'(Declarația Populară Democrată)을 통해 동유럽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격동적인 1930년대의 진입하면서도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준, 루마니아의 기적적인 회생을 알렸다.

철위단 사태와 카롤 2세의 전제 정치 회귀라는 일련의 내부 혼란 동안 소련은 과거 파리 조약에서 루마니아에게 넘겨준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해 주권이 있음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베사라비아는 동 ·남 유럽을 잇는 발칸의 회랑(廻廊)으로 민족이동 교체가 격심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상당수의 인원들은 루마니아계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베사라비아 지역은 기름진 농업지대로서 상당한 농업력을 구사할 수 있던 곳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기에 당대만 하더라도 농업 비율이 상당히 높던 루마니아에게는 필수적인 곡창지대였다. 결국 지속적인 소련과의 교섭에도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해 루마니아는 일체 양보할 수 없었으며, 결국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한 분쟁은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가시화 되었다.

잇따른 제국의 악재

유고슬라비아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그 나름대로 전제정치에 대한 면모를 보이던 인물로서 1919년, 유고슬라비아 헌법 제정 당시에 성인 남성에게도 공평한 참정권을 인정하겠다고 결정했으나 비밀 선거에 관한 규정은 기각되었으며, 루멜리아 성립 이후에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치뤄지는 모든 정치적 용도로서의 투표는 알렉산다르 1세, 본인의 헌법 체계와 관리 및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유고슬라비아의 국회는 국왕이 직접 하원 의원의 절반을 승인했고, 법안도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만 합법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당시 탈(脫)민족적인 거대 연립 정당이었던 연방당(Federalistička stranka)의 민주주의적 선거 체계 확립 요구에도 그는 굽힐 수 없었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정치인들은 그에게 퇴위 혹은 개혁을 요구했으나, 그는 공개적인 집무 수행 거부를 협박으로 사용하면서 이들의 요구를 압력해 나갔지만, 1934년 10월 9일,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하여 두브로프니크급 구축함(Разарач Дубровник)을 타고 마르세유를 방문하던 사이, 그곳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외무장관이자 프랑스의 전직 총리였던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를 가던 도중에 불가리아 출신의 개혁가이자 유고슬라비아내 야당 당원이었던 저격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가 쏜 권총에 맞아 암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루이 바르투 또한 경찰의 실수로 권총에 맞아 죽었다.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은 '유럽 최후의 암살된 군주'라는 오명이 붙여졌고, 여당이었던 연방당은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의 암살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암살된 것은 그로서는 불행한 일이나, 유고슬라비아로서는 기쁜 일이다."라는 발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권위 통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곧장 알렉산다르 1세의 뒤를 이은 장남 페타르 2세(Петар II)는 어린 나이였기에 사촌이었던 파울(Paul)이 섭정직을 맡았다. 이후부터 유고슬라비아는 1943년 방어전 이전까지 연방당의 독주가 가속화 되었으며, 의회 정치가 활성화 되고 민주주의의 정착이 시도화 되었으나, 야당들의 난립과 파시즘 및 민족주의 정당이 활개, 공산주의 운동 등 혼란한 정계 상황이 이어졌다.

한편, 불가리아 왕국은 '위기 정책'을 통한 개발 공사 지역 중 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멜리아 내 블록경제권 확립에 따른 공산품 주수입 국가로 지정됨에 따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많은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불가리아의 잇따른 정권의 붕괴와 재수립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알렉산더 찬코프(Александър Цолов Цанков)는 193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Georgi Kyoseivanov) 내각을 전복하고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그는 불가리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일당우위제를 실시하여 독재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몰락의 40년대

폴란드 제2공화국1939년 방어전에서 패배를 겪고, 프랑스 침공(Bataille de France)까지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던 루멜리아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나치 독일로 인해 시작된 뜻밖의 이른 개전은 루멜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시키려고 했었고,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원하도록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들, 루멜리아의 지식인들은 나치의 인종주의와 반(反)유대주의, 민족주의와 파시즘으로 범벅되었고, 이것은 루멜리아라는 연방의 기치와 정면적으로 대립되었으며, 그렇기에 루멜리아는 더욱 더 연합국들과의 연대 활동에 목매여 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과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에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등 연합국의 패색이 짙어질수록 루멜리아의 위기도 한 층 짙어졌다. 이탈리아 왕국알바니아 침공을 시작으로 열린 1943년 방어전에서, 루멜리아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그라지고 말았다.

개전 이전의 배경

이른 개전

빛의 도시의 함락

경악, 준비, 전초전

각주

  1. 이는 당시 조구 왕가를 왕실로서 인정하기 어려운 당대의 왕실 사회에 인식이었는데, 신생 왕실로 분류되던 카라조르제비치 왕조(Карађорђевићи)만 하더라도 19세기 초반 제1차 세르비아 봉기 당시 "대수장"(Veliki Vožd)이던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 Karađorđe Petrović)를 시조로 하는 등 못해도 백년 이상을 존속하였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왕가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가(House of Hohenzollern-Sigmaringen) 역시 프로이센과 국왕과 독일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호엔촐레른가에서 분가된 명문가였으며, 불가리아 왕국작센코부르크코타(Sachsen-Koburg und Gotha) 가문의 분가인 코하리 가(Sachsen-Koburg und Gotha-Koháry)를 왕조로 내세우고 있었다.
  2. 사실 연방 내부에서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민족 구성에 대해 많은 이견이 오갔는데, 사실상 마케도니아인이라고 규정된 이들은 알바니아계를 비롯하여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 남슬라브 민족을 주축으로 한 주변 민족들의 혼합한 형태로서 '독자성'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마케도니아라는 정체성이 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독자적인 마케도니아어를 사용하는 등 '독자성'을 갖춘 문화를 일구어내고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을 독립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는 민족 집단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3. 실상의 목적은 마케도니아를 독립시키고 유고슬라비아그리스의 영토로 하던 마케도니아계가 주축이 된 지역들을 분리시켜 발칸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코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 물론 뒤를 이어 불가리아 총리로 선출된 알렉산드루 스탐볼리스키가 친발칸 정책을 펼치면서 금세 꼬리를 내렸다.
  4. '피린 마케도니아'로 불렸으며, 연방 가입 이후에는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계가 주류를 이루던 지방 행정 구역 중 일부로 편입되었다.
  5. 이러한 이탈리아간의 교역 활동은 193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으나, 베네토 무솔리니의 루멜리아 경제 봉쇄 방안으로서 교류가 끊김에 따라 아드리아 항구는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전후에는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에 따른 경제협력을 강조하면서 아드리아 해 교역은 재개되었다.
  6. 당시의 연방 소속국들은 특혜관세 없이 '연방정부'을 중심으로 결성된 느슨한 연방체 모습에 더 가까웠다. 지금에 루멜리아가 비교적 강력한 연방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원인이 바로 대공황의 여파로 진행된 '위기 정책'에서 비롯되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