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하우젠베르크 침공을 지휘한 헤르베르트 위겐 린덴부르크는 참모총장서리로 활동하면서 베넨치에 침공 계획에 있어서 여러모로 의견을 낸 군사이론가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룽겐하임 사변(론디니아어:Lungenheim Incident)은 바르덴우펜 제국의 상급대장, 헤르베르트 위겐 린덴부르크(바르덴우펜어:Herbert Wigan Lindenburg)가 하우젠베르크 공국의 대공, 크루프 1세(Krupp I)와 대공비, 테레나 마리오(Terena Mario)를 살해하고서 하우젠베르크 군정청(델튼어:Military Administration in Hauzenberg)을 설치한 뒤 최종적으로 바르덴우펜 휘하 하우젠베르크 왕국을 세워 스스로 국왕을 칭한 사건을 말한다. 하우젠베르크 국왕직을 참칭하여 대관식을 이룬 것이 성 룽겐하임 성당(룬디니아어:Church of Saint Dediel)이었기에 '룽겐하임 참변' 혹은 '하우젠베르크 참칭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요

R.1919년 4월 6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하우젠베르크 침공(룬디니아어:Invasion of Hauzenberg)으로 인한 상황속에서 뒤겐러스크 전투가 발발, 바르덴우펜 제국군발루아 공화국군하우젠베르크 친위대간의 소규모 접전 끝에[1] 하우젠베르크 방위 발루아군이 패배함에따라 수도였던 하우젠베르크는 물론이며, 국토 전역이 바르덴우펜 제국에게 장악되었다. 하우젠베르크 침공을 지휘한 헤르베르트 위겐 린덴부르크는 '하우젠베르크 돌격대'를 조직하여 하우젠베르크 전역에 남아있는 라디오 통신 시설을 장악하고 바리케이드를 해체하는데 나섰으며, 크루프 1세와 테레나 마리오 대공비는 대공세자 일가를 먼저 베넨치에 왕국으로 피신시켰으나, 뒤늦게 슈트로비엔 대공궁을 나오던 도중 이들 돌격대에게 발각되면서 망명은 실패하였으며, 에슈알제트 주에 위치한 임시 하우젠베르크 군정청 수용소에 수감된다.

R.1919년 4월 9일, 크루프 1세 대공이 린덴부르크의 겁박으로 대공위를 비롯한 모든 작위를 포기할 것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민간인 저항부대였던 하우젠베르크 슈덴단트(바르덴우펜어:Hauzenberg Studendant)[2]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에 하우젠베르크 슈덴단트를 이끌던 기욤 스펠러는 대공에게 불복할 것을 표명, 대공세자 장 뒤퐁이 이끄는 하우젠베르크 망명정부를 따를 것을 선포했다.

하우젠베르크 슈덴단트의 게릴라전이 지속되자 린덴부르크 군정청장은 "지속된 슈덴단트의 위협이 있을 시, 전(前) 대공과 대공비를 즉결 처분할 것"을 선언했고 실제로 이에 대한 본보기로서 임식 군정청 수용소에 포로로 수용되었던 하우젠베르크 친위대 3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굴복치 않자, 린덴부르크는 최대의 결단으로 조치를 취하게 된다.

룽겐하임의 눈물

슈덴단트가 굴복하지 않자, 린덴부르크는 크루프 1세와 테레나 마리오 대공비를 성 룽겐하임 성당으로 압송했으며, 린덴부르크는 이들에게 당시 룽겐하임 성당 내부에 위치한 베르디니우스 제1사도의 유해를 모셔둔 옥좌 앞에서 제국에 대한 비협조적 행위로 인해 초래한 양측간 신뢰가 무너진 점, 이로 인해 떠나간 민심과 피해 입은 민간인들에 대하여 고해성사 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크루프 1세가 내놓은 작위들을 본인이 그대로 서임할 것을 발표했으며, 곧장 전(前) 대공과 대공비에 대해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형을 집행한 후 린덴부르크는 성 룽겐하임 성당에 대공과 대공비의 시신을 그 자리에서 버려둔 채, 군정청으로 복귀하였으며,[3] 슈트로비엔 대공궁에게 '린덴부르크 왕궁'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당시 바르덴우펜 제국하이젠링거 1세(바르덴우펜어:Hizenlinger I)에게 '하우젠베르크 국왕'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아 바르덴우펜 휘하 하우젠베르크 왕국을 수립했다.

각주

  1. 소규모 접전이라고 했을지라도 이 전투에서 하우젠베르크 친위대는 당시 가용 병력의 90%인 800명을 동원했으며, 발루아도 약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바르덴우펜은 3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50여 대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중전차, DT7과 장갑차, D-O/1 란치하르트를 동원했다. 이외에 하우젠베르크 상공에서 발루아 공화국의 일시적이기는 하나 항공 지원이 있기도 했다.
  2. '슈덴단트'(Studendant)는 바르덴우펜어 하우젠베르크 방언에서 '저항' 혹은 '불복'을 의미한다.
  3. 집행후 1주일 뒤에야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두 명의 시신을 하우젠베르크 슈덴단트 소속의 청년이 수습한 뒤 망명 정부로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