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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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Manuel Esbada Cordano
1850년대의 모습
1850년대의 모습
산티아나제4대 국가의장
임기 1858년 9월 9일~1867년 8월 15일
신상정보
국적 산티아나 산티아나
출생일 1816년 4월 6일
출생지 산티아나 동방 연합 리베네그로
사망일 1899년 11월 15일
사망지 산티아나 산티아나 탈란치바
정당 왕당파Partido Reino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스페인어: Manuel Esbada Cordano)는 산티아나 과도 공화정(República de Transición)의 4대 국가의장(Jefe de Estado de San Tiana)을 역임하였으며 이외에도 왕정 선포 이후 임시 총리(Primer ministro de San Tiana)를 역임하기도 했다. 리베라 당(王政黨)의 "코르다노 파"(Cordano Club)를 이끌었으며, 이후에는 전제 정치 성향의 군주주의자(Royalist)들과 의견이 충돌하여 왕당파(Partido Reino)라는 독립적인 정치 당파를 형성하였다.

일생

1816년에, 동방 연합 존속 당시에 리베네그로(Rivenegro)에서 출생하였다. 초등 교육 과정을 마친 후에 스페인브라질의 지배하에 놓인 시스살레라테 주(Ciscalerate)를 떠나서 프랑스 유학을 시작했다. 그는 거기서 계몽주의와 입헌 정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는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당시 프랑스루이 필리프 1세(Louis Philippe I Roi des Français)의 치세로서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와 내각책임제(Parliamentary system)를 도입하여 민주정치가 발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군주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1845년, 29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산티아나라는 독립국 수립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의 프랑스 유학 시절을 눈여겨 보던 과도 공화정의 주요 인사들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사절로서 활동하였다. 이에따라 산티아나-프랑스간 외교를 전담하는 외무관으로서 공인받았다. 이후 리베라 당의 입당하였으며 적극적인 군주주의자를 표방했으나, 브라질 제국과 같은 절대 왕정(Absolutism)을 위시한 "로드베이츠 파(Lordvehiz Club)"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입헌 정치와 왕정의 혼합정을 기대하던 그는 실망하였으며,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파벌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절대 왕정이라는 중앙집권적 독재 체제 사상에 불만과 함께 신음하던 온건 군주주의자와 일부 중도파, 연방주의자들은 코르다노 파벌에 합류하여 강력한 연대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마침내 로드베이츠 파를 주류권에서 몰아내어 리베라 당을 이끌기 시작했으나, 내부적인 갈등을 해결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자 결국 왕당파(Partido Reino)로 갈라지게 되었다.

1858년,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으로 시스에르타 당(聯邦黨)과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가 민심을 잃고, 결국 원동력을 잃은 시메네스가 사임서를 제출하자 과도 위원회는 후임 국가의장으로서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력을 행사하던 코르다노를 새로운 국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기존의 엘리트 계층을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불만이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것을 염려하여 연안 교역에 대한 금지령을 제한하는 선에서 해체하는 한편, 당시 파라과이에 확장력에 위기를 느끼면서 이를 견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해군 사관 학교와 기병대를 창설하였고 조선소도 건립하였다. 또, 루드비티오리베네그로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방직, 유지 및 제지 공장, 파즈 중앙 시장 건설 등 대대적인 공공 사업을 전개하였다.

1864년, 파라과이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이 발발하자 코르다노와 과도 위원회는 중립을 공포했으나, 브라질의 상파울루 주를 공격하고 우루과이 내전을 진압하기 위한 루트를 개척한다는 이유로 당시 파라과이의 대통령이었던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즈(Francisco Solano Lopéz)가 요구해오자 코르다노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결국에는 브라질 군의 우루과이 개입을 두고 볼 수 없던 로페즈는 당시 산티아나의 변경 지역이었던 로데베술(Lodevesul)을 침공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로데베술 학살) 이에 분노한 코르다노와 과도 위원회, 국민들은 즉시 의용군을 조직하여 참전을 선포하였다. 1865년, 파라과이가 종전을 선언하면서 패배하자 파라과이의 남부 지역이었던 이타푸아 주, 알토파라나 주 일부를 합병하였으며 배상금을 충당 받았다.

1867년, 막시밀리아노 1세멕시코 제2 제국에서 망명을 해오자 극진히 대접했으며, 왕당파와 일부 온건적 연방주의자, 기존의 리베라 당과 연대하여 그를 산티아나의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러한 계획을 사전에 유럽권에 밝히자 다수의 왕족 및 유명 인사들에게 개인적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유럽권 내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스에르타 당의 국제적 위기감을 조성하였고, 결국 시스에르타 당과의 제한적 조건을 통해 왕정을 수립할 것을 결의, 산티아나 왕국(Reino Oriental del San Tiana)를 수립하는데 공헌했다.

이후 1867년 8월부터 1868년 5월까지 임시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5월 10일에 산티아나 제헌 의회가 개회식을 선언하자 총리를 사임하였으며, 이후에는 정치권에서 은퇴하여 말년을 저서 활동과 사회 복지 활동에 노력 하면서 노후를 보내던 중 1899년에 사망했다.

각주

전임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산티아나의 국가의장
1858년 9월 9일 ~ 1867년 8월 15일

산티아나의 국가의장
Jefe de Estado de San Tiana
과도 공화정 시기
1대 2대 3대 4대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막시밀리아노 1세 시대 총리
Período Maximiliano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