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제1혁명 (서태평양 연대기)

개요

만주 제1혁명은 1933년 3월 3일부터 1934년 7월 1일[1]까지 진행된 만주의 공화주의 혁명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화혁명으로,[2] 만주인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정부를 등장시켜 10년 후 한국 혁명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만주의 중원 '회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만주에서의 정착을 선언함으로써 동아시아사의 고질적인 패턴이었던 북방민족의 중원 침공, 남하를 종식시킨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제1혁명의 종료가 1934년 7월 1일인것은 관내 포기를 통해 만주 국가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음이 국제연맹 가입을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단

청의 만주 경영

최후의 퉁구스계 왕조인 청나라가 1636년 산해관을 넘어 화북에 입성한 이래, 만주 방위는 청나라의 영원한 고민거리이자 화두였다. 배후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청과 대등한 황제국이자 군사동맹 관계이지 몽골이나 후요와 같이 정복, 복속시킨 상대가 아니었고, 한국이 화북 침공을 지원한 것은 후요가 멸망하고 발해인 유민들이 쏟아져들어오는 상황에서 머리맡에 만주인이라는 시한폭탄을 이고 사느니 이들을 차라리 장성 너머로 보내버리자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전의 조선이야 요동을 제대로 정복, 영위할만한 국력이 없어 국경 일대에서의 부락 토벌 정도로 만족했지만, 조선과 이어를 통합하고 칭제에 이른 한국의 국력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는 1628년의 전쟁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후요는 발해인들의 국가였고, 자연히 만주 인구에서 발해인과 조선인의 비중이 상당했다. 입관 당시 만주지역 추정인구 700만명 중 발해인과 조선인 200만명, 만주인 150만명, 후룬 등 비만주 여진인 140만명, 니칸인[3] 130만명, 키탄(거란)인과 몽골인이 70만명 수준이었다.[4] 발해인들의 요동 개척과 경영의 수혜를 받아 여진계도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주민으로 요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발해인과 니칸인, 그리고 친요 여진계를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후요 성종 이여송의 사후 발생한 후계 분쟁이 아니었으면 요금전쟁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요와 조선(진)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으나 적어도 동족의식은 있었으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요동 침공이 과거 몽골의 연 지방 침공으로 만주와 중원이 차단된 채 말라죽어간 남금의 공포를 재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입관 직후 청은 화북 통치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와 만주 방위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해야 했다. 고심 끝에 청이 내놓은 결론은 만주에서 만주인의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유지하며 화북에서는 발해인, 요동니칸인, 몽골인 등을 최대한 '만주화'시켜 친위세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전제로도 만주인의 필요 인구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만주 여진인을 최대한 만주인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그러고도 최후까지 복속되지 않은 수완부 등은 서북 변경 수비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치로 만주 지역의 인구는 17세기 후반에는 200만명 이하로 무려 1/4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후요인들이 개척한 요동의 농업인프라는 황폐해졌다.

한국은 당초 청의 입관을 지원하면서 요동 할양까지도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직 15년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한국 조정 내에서 요동 개척과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요동의 무인지대화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청이 200만명 가량의 인구를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에 잔류시키는 반면 한국이 연계를 시도할만한 발해계는 대거 화북으로 이주시키자 결국 1644~1646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한청간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봉합된 것은 직후 1652년부터 오호츠크해 일대에 진출한 러시아와 청 사이의 무력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만주가 남으로 한국, 북으로 러시아의 양면 공격을 받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한러간 동맹이 체결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야 했다. 결국 청은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활동과 한-만 교역에 상당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한국의 불만을 달래고 대러전쟁에서 한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이는 만주에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린 한국이 청의 만주 경영을 묵인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상당한 숫자의 한국인들이 만주로 유입되어[5] 잔류 발해인과 함께 만주 경제를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입관 이후 방치된 농업 인프라를 노린 니칸인들의 유입도 장성 북부와 요동반도 등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만주 방위를 위해 인구와 농업생산력을 확보해야 하는 청 조정은 한국인 - 발해인을 포함하는 - 과 니칸인들의 만주 유입에 일관된 정책을 취할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류 만주인들이나 일부 여진인은 이미 후요 시기부터 수렵경제에서 농업 중심으로 전환에 성공하여 한국인 인구의 증가를 그럭저럭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상당수의, 특히 농사에 익숙하지 않았던 동요하 이북지역의 제 부족들은 이에 편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인과 니칸인들에게 토지와 경작권을 침탈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170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인들은 숭가리강을 따라 할빈 일대까지 진출하여 벼 재배에 성공하였을 정도로 침투의 범위는 겉잡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침투에 당황한 청조는 만주 주민들의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추진했다. 건륭 31년(1766)년부터 관동, 즉 산해관 동부 만주 지방의 모든 공문서는 만주문만을 사용하도록 하고 한문의 사용을 금하였으며, 건륭 33년(1768년)에는 관동 호적령이 공포되어 관동에 등록되는 모든 신규 호적은 만주식 성과 이름을 등록하도록 강제하였다.[6] 그러나 그 반동으로 상당수의 한인들과 니칸인들은 호구등록을 거부하거나 아예 만주를 떠나 몽골 혹은 누르칸(現 연해주 지방) 등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반발했고, 청조는 호구를 등록하지 않거나 만주식 성명으로 개정하지 않은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한국 역시 자국민들의 만주 유출을 반기지 않았기에 이러한 조치에 별 반응이 없었고, 이에 힘입어 1815년에 이르면 관동에서 만주식 성명을 등록한 인구는 약 800만명으로 입관 이전의 추정인구를 뛰어넘는 성황을 이루었다.

문제는 청의 만주 통치는 군현제에 의한 체계적인 행정체제가 아닌 각 장군부에 의한 사실상 군정에 가까운 체제였다는 것이다. 후요 시기 군현제가 실시되었던 요동 지역은 요동장군의 지배 하에 각 군사지역마다 별도의 전담 행정관이 배치되어 군현제와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길림장군 및 흑룡강장군부 지역은 각 부대가 그대로 지역을 통치하였다. 청조는 강희제 이후 각종 제도의 화화(華化) 속에서도 만주의 한화만은 극도로 경계하여 중원 및 한국과 구별되는 이른바 '만주 고유'의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내는데 집착하였다. 이는 만주인들 입장에서 중원과 별도의 지원책과 우대책이 시행되는 이득도 있었지만, 만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주민의 통치체계를 거부하는 상황은 행정의 비효율과 그에 따른 정책 시행의 난맥상을 불러왔다.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틈탄 마적과 수적의 발호, 상거래에서의 사기 등 각종 무법·탈법행위가 횡행했고, 19세기 들어 러시아와의 국경충돌이 빈번해지면서 만주인들은 과거의 우대와 지원이 아닌 관내 귀족들의 장원 경영과 군비 지원이라는 명목 하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1810년대 이후 만주인들은 이러한 상황의 해결을 북경 중앙조정에 청원하려 하였으나 청조는 1822년 통관조칙을 통해 만주 방위를 이유로 오히려 만주인들의 관내 진입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만주인들이 만주인 국가인 청이 아니라 적대적 이웃인 한국을 통해 물자와 정보를 습득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군비 문제에서는 한국에 빠져나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관동 방위를 책임진 팔기는 기병 중심인 구조적 문제 탓에 전통적으로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한족 녹영군을 관동에 대규모로 파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 청조는 이를 인접한 한국에 요청하여 지원받는 쪽을 선호했다. 문제는 '형제국'인 한국의 출병은 절대 공짜가 아니라서 한 번 수천~수만의 병력이 관동, 그것도 1,500㎞ 이상 떨어진 청러국경까지 이동하는 그 막대한 비용을 고스란히 청조에게 요구했고, 청조는 그 비용을 중앙정부의 은이 아니라 대체로 만주의 각종 자원으로 갚았다는 것이다. 이 현물자원에는 석탄이나 목재, 철광석 등도 있었지만 핵심은 두만강 및 무단강 일대에서 산출되는 금이었다.[7] 이로 인해 동부지방의 금광 개발이 활성화되었으나, 이 지역을 제대로 관리할 여력이 없던 청조와 지린장군부는 아편전쟁 직전인 1840년대에 이르면 아예 이 지역의 금광 개발과 운영을 한국 자본에 위임해버리는 길을 택하면서 관동 지역의 재정적 여력은 갈수록 감퇴되었다. 한국은 한국대로 은본위제 기조의 동아시아에서 금만 잔뜩 쌓이자 이를 기축통화인 은과 교환할 대외교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8] 그 과정에서 주요 교역품목인 만주산 자원들을 장군부들과의 (주로 뇌물을 통한)교섭으로 헐값에 반출해갔다.

만주조정의 수립과 이중통치구조

1858년 아이군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 이북 영토의 관리권이 러시아에 넘어갔으며, 2년 후인 1860년 북경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이 러청간 국경으로 확정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만주 인구의 증가를 위해 1860년부터 관동 호적령을 철폐하여 만주식 성명 없이도 호구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대러 방위라는 명목으로 숱한 희생을 감내해왔던 만주의 민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1864년 묵던에서 한국인과 니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폭동이 벌어진 데 이어[9] 1870년대 초까지 만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빈발했다. 이 와중에 한국은 자신들이 약 200년간 청의 우방으로써 만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한편 수차례의 출병으로 만주 방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였으나 청조가 러시아에 사하리얀강 이북 및 우수리 지방을 러시아에 넘겨버리는 행태를 배신행위로 여겼고 이는 한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 전격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베이징 조약으로 주강 하구의 향산과 뇌주반도, 주산군도를 뜯어냈던 한국은 이어 한국계 주민 및 기업 재산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수차례 출병하여 친한민병대와 함께 포수, 부르가투, 칭니와, 콰이다무 등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였다.[10]

청조는 북경 조약 이후 열강의 협조로 태평천국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영국의 후원 아래 광동성 지역이 월국으로, 프랑스의 후원 아래 운남성과 주강 이북 지역이 백국으로 독립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고, 이에 강남과 사천 지역에서도 외국 세력과 협력한 독립 논의가 활발해졌다. 위기를 느낀 청조는 정권의 핵심인 화북과 만주, 몽골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만주에 대해서는 한계가 명확해진 팔기 군정 중심의 기존 통치 방식 대신 만주총독 파견을 골자로 하는 대개편을 기획하였다. 그러나 하필 이 때 한국은 근 10년에 걸친 만주 내전으로 자국민과 기업들이 입은 피해와 만주 방위를 위해 치른 비용을 청조가 보상할 것을 요구했고, 아편전쟁 이후 각지의 반란과 분리독립에 시달리고 있던 청조는 이 요구를 수용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여기에서 청조는 발상지지라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미개척지에 양면전선의 위험을 안고 있는 만주보다 풍요로운 중원에서의 정권 유지를 택했고, 결국 1874년, 전 진수흑룡강등처장군 아이신교로 이샨의 장남 아이신교로 자이아[11]를 만주국왕으로 봉하여 관동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이는 왕조의 발상지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어 사실상 한국 자본에 배상금으로 넘겨준 격이라 많은 만주인들의 공분을 샀으나, 그나마 새로운 만주조정이 한국의 협조를 이끌어내어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1878년부터 만주 로현제를 실시하는 등 행정과 치안을 회복하면서 만주는 차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의 과중한 군사비 지출로 말미암은 고질적인 재정난과 조세부담은 계속되었고, 한국 자본은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만주 전역에서 이권 침탈을 가속화하였으며, 청조는 번국인 만주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조공관계를 강요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중앙조정은 만주에 대해 별 다른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만주는 꼬박꼬박 조정의 재정을 채워줘야 했다.[12][13] 특히 청 조정이 러시아와 가까운 몽골의 방위 문제에는 중앙조정 차원에서 대응하면서도 '집토끼'인 만주 방위는 만주 현지인들에게 떠넘기는 상황은 만주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여기에 만주의 통치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행정인력을 만주에서 충당할 수 없어 대부분 관내에서 데려와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니칸인 혹은 화화(華化)된 만주인들로 현지 만주인들의 언어, 문화 등을 무시하고 관내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했다. 이미 청조의 강요로 반강제적으로 만주화되었던 상당수의 한국계와 니칸계 만주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행태에 극렬히 반발하였고,[14] 만주 지식인들은 만주어, 만주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주장하며 만주교육운동을 벌였다. 그나마 공선왕 자이아 이래 만주왕실이 스스로 만주어를 쓰고 나름대로 만주인민들의 교육과 복리에 신경을 쓰면서 왕실에 대한 만주인들의 여론은 호의적으로 변했으나, 정작 만주국왕 역시 청조의 번왕이라는 신분상 권한이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고 만주 조정이 북경 중앙조정에서 파견된 인력들과 관내 귀족들의 영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이중적인 통치구조가 만주인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흠정헌법대강과 만주민권운동

1899년 의화단의 봉기로 시작된 북청사변은 1900년이 되자 만주에도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은 기본적으로 화인들이 주도한 멸만흥화 운동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1900년 들어 부청멸양으로 구호가 바뀐 후에도 관동 지역에는 거의 유입되지 않았으나, 대신 멸만흥화 구호에 자극을 받은 만주인들이 곳곳에서 니칸계 주민과 관리들을 린치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주 조정은 신설 만주군을 투입해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만주에 주둔중이던 중앙의 팔기부대는 나름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대러국경 수비를 위해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만주 조정은 한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1900년 8월부터 한국군 10만여명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15] 이유야 어찌되었건 번국 조정이 천조의 승인 없이 외국군을 들인 문제로 격분한 청조는 1902년 10월 한국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전격적으로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고, 만주 조정은 묵던성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국왕 아이신교로 유거와 세자 훙투이가 모두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조는 홧김(?)에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으나 정작 만주를 직할통치할 계획은 없었고, 이에 만주 왕실의 폐지에도 만주 조정은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는 공위 상태가 도래했다. 이러한 권력공백 상태를 틈타 러시아는 기어이 숭가리강 이북지역에 진주하여 할빈과 치치가르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한국은 압록-두만강 북안 9개 현을 점거하여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이 와중에 일본은 1905년 극동전쟁에서의 승리로 러시아로부터 수이푼강 서안지역을, 한국으로부터 두만강 동안지역을 획득하여 호세츠(寶雪)만에 항구를 건설하고 병력을 주둔시켜 동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란에 지친 만주인들은 1906년 청조가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자 만주 통치의 법제화를 기대하였으나, 1908년 반포된 흠정헌법대강은 장성 이남지역에만 적용되어 만주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간 청조의 만주에 대한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발상지지이자 황실, 귀족들과 동족이라는 사실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만주인들은 청조가 만주를 사실상 외국, 그것도 식민지로 취급하는 사실에 분개하여 대대적인 민권운동을 벌였다.[16]

사실 청조 치하에서 '만주인'에 대한 관념은 청조와 관내 만주인, 관동 만주인들 사이에 완전히 제각각이었고, 정확히는 관동에서도 정주민인 조선계, 니칸계 만주인들과 여진계 만주인들, 기인들이 또 달랐다. 원래 만주의 황족과 귀족들은 부족제 사회에서 출발했고 기인으로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언어와 이름을 사용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복속민이지 동등한 입장의 동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인이 아닌 일반 농민으로 새롭게 유입된 조선계나 니칸계는 말 할 것도 없었다.[17] 청조가 이들을 만주인이라는 이름 아래 묶은 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만주에 남아있던 우디거, 우랑카이, 나나이 등의 제 부족으로부터 우위를 점하고 조선인이나 니칸인 등의 정주민들로부터 관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18] 반면 여몽전쟁 이후 고려-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국가 정체성의 경험이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깊게 남아있던 조선계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만주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스스로를 황족과 동족인 만주인이 된 것으로 여겼고,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북방민족과 스스로를 구분했던 니칸인들 역시 만주화를 만주 정착을 위해 겪었던 고난, 통과의례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이후 관외 출신 관리들의 화화(華化) 강요에 만주 원주민들보다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물론 그 외의 원주민계 만주인들도 상당수는 건주에 무력으로 통합된 처지였고, 청조가 만주의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그저 발상지지 타령이나 하면서 묻고 넘어가려 드는데 고개를 끄덕거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똑같이 '만주인'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관내 만주인과 관동 만주인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관내에서의 만주인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계급 그 자체인 반면, 관동 만주인은 조금 더 근현대의 민족적 개념(그것도 혈통보다 문화에 기반한)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관동 만주인들, 특히 건주와의 투쟁경험이 없거나 희박한 조선계, 니칸계는 거의 짝사랑에 가깝게 청조에 동족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또 그것을 기대한 반면, 청조를 위시한 관내 만주인들은 만주 지역의 영위에 큰 문제가 없는 한 딱히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제화인(諸華人)들을 위무하며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한 관점에서 황권을 스스로 제약해가며 흠정헌법대강을 내놓았는데 굳이 만주에서까지 황권과 만주 귀족들의 구시대적 특권을 내려놓을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았던 팔기 소속의 관동인들 역시 최전선 방위를 책임지면서도 관내 기인들에게는 하대당하는 신세였고, 나름 출세할 수 있었던 만주 내부에서조차 중앙조정의 관리들과 충돌하면서 오히려 만주 지식인의 지위를 꿰차고 만주민권운동을 주도하는 판이었다. 이에 1908년 만주 최초의 정치단체인 민중회가 조직되었고, 1909년에는 만주노동연맹이 창설되는 등 만주 내 정치세력들의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여론의 결집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사실 만주의 열악한 교육여건 상 이런 민권운동을 만주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권운동 초창기 대다수의 만주인들은 어디까지나 청조가 자신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으로써 민권운동의 주요 요구, 즉 헌법, 선거, 의회의 시행과 설립에 찬성하는 것이었으므로, 만일 청조가 여기에서 어느정도 만주인들에 대한 유화책을 시도했다면 민권운동은 큰 반향을 얻기 전에 흐지부지되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조는 1910년 아이신교로 유거의 차남 훙루이를 공위 상태였던 만주국왕위에 앉히는 것 외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이웃한 한국에서 이미 30년간 헌법이 시행되는것으로도 모자라 극동전쟁 패전을 계기로 국가 권력이 황실에서 의회로 넘어오는 모습을 지켜본 만주인들은 점차 단순한 상징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민권 획득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절감하였다.

만주인들에게는 다행히도,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입헌정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만주 입헌운동가들과도 교류해왔던 훙루이는 중앙 조정을 설득하여 만주기본법과 만주의회 설립을 허가받았고, 이에 1912년부터 기본법 제정과 만주의회 설립을 추진하여 민중당과 노동당 등의 정당이 창설되었다. 다만 만주 민권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훙루이와 만주 조정은 베이징 조정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흠정헌법대강에 기초한 보수적인 흠정헌법으로 방향을 잡았고, 선거 역시 조정의 의향에 따라 연간 국세 15원을 납부하는 25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하였으며 총 180석 중 1/3은 청 조정이 지명한 의원을 당연직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19][20] 그러나 1913년 8월 민중당과 노동당, 학생단체, 노조 등이 참여한 묵던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여론을 확인한 만주 조정은 이에 고무되어 유권자 기준을 국세 5원 이상 납부자로 하향하였고, 청조가 이에 극력 반대하였지만 만주 정부는 1914년 3월 1일 만주기본법 초안을 발표하고 선거일을 6월 9일로 예고하였다. 청조의 경고에도 6월 9일의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나, 청조는 이를 반역으로 몰아 선거 다음날인 6월 10일 새벽 묵던에 주둔중이던 팔기를 동원하여 훙루이를 비롯한 왕실 일가를 도륙하고 만주 조정까지 폐지하여 관동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정체제를 수립하였다. 자무하, 할빈, 칭니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팔기에 의해 진압되었고, 시민들이 무장 봉기에 나선 할빈 역시 7월 16일 저항이 종식되었다.

관내 상실과 북청시대

만주 왕실과 조정이 폐지된 직후인 1915년, 흑령호 사건으로 한국이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협상 측에 가담한 한국의 침공으로 청은 어쩔 수 없이 산둥반도에 병력을 주둔시킨 독일과 손을 잡고 동맹 측으로 참전하였으나, 만주 전선은 한국과 일본의 협공으로 붕괴되어 7개월여만에 대힝간산맥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협상군에게 장악되었다. 이어 1916년 협상군의 베이징 진공과 산둥반도 상륙으로 황실과 정부는 타이위안을 거쳐 시안까지 도피하면서 체면을 구겼고, 반면 화인들로 구성된 신건 북양육군이 황하과 대운하에서 협상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북양원수 위안스카이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18년 2월 협상측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청 조정과 황실이 베이징으로 복귀하자 불만이 폭발한 베이징 시민들은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황족을 포함한 베이징 시내의 만주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고, 황실과 조정이 사라진 베이징에 북양군을 이끌고 입성한 위안스카이는 1918년 3월 3일 중난하이에서 대화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학살의 와중에 선통제 푸이와 조정의 핵심 인사들은 간신히 베이징을 탈출하여 산해관을 통과, 묵던에 도착하고 임시수도로 선포하여 청조의 국체를 지속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한때 5만명에 육박했던 만주 최대의 씨족 아이신교로 황족의 숫자는 급감했다. 또한 청조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5만여명의 만주경찰과 옛 만주군 복무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소집된 2만여명의 민병대가 전부로 당장 북양육군의 만주 진공조차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조는 급히 만주에서 징병령을 내렸으나 그동안 망가질대로 망가진 만주의 행정체제는 묵던과 할빈, 자무하 등 만주종관철도 연선의 대도시들에서만 간신히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화인들의 만주 침공을 원치 않았던 한국과 일본이 나서서 북양군의 산해관 통과를 저지함으로써 북청은 멸망을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 청 조정에서는 묵던 천도라는 용어로 에둘러 표현하였으나, 민간에서는 관내 상실이라 불렀다. 관내를 잃고 대청제국 조정이 관외 만주 지역만을 통치한 이 시기를 통상 북청이라 이른다.

그러나 입관 이후 수백년간 푸대접해온 만주에 복귀한 청조는 그 업보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관내 상실 직후에는 북양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로 잠시 근황 여론이 일기도 하였으나, 한일의 개입으로 만주의 안전이 확보되자 1920년부터 다시 민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특히 800만에 달하는 관내 만주인들 - 그것도 기득권층이었던 - 이 관동으로 몰려들면서[21] 만주의 경제적 문제도 심각했을뿐더러 이들이 만주에서 정부 최요직부터 지방 말단 관직까지 두루 꿰차는 상황은 민권운동의 핵심이었던 헌법, 선거, 의회에 대한 갈증을 부채질했다. 한국과의 교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만주는 민간의 주도로 민중 초등교육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었지만 정치적 권리의 보장은 주민들의 지식 및 의식수준 향상을 따라잡지 못했고, 이 부의 축적에 앞장선 만주 경제계 역시 정치 참여의 기회가 차단당한 데 대해 불만이 드높았다. 불법조직으로 지정되어 강제 해산당한 만주 민중당 등 기존 정당들은 한국군 점령 하인 1917년 새롭게 만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정부 투쟁에 나섰고, 여기에 1921년에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만주공산당이 창당되어 만주 민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게다가 250년간 화화가 진행된 관내 만주인들은 만주어를 거의 잊어 아예 연어(燕語)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황제인 푸이조차 만주어를 거의 몰라 매일 만주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청조의 오랜 봉관 정책으로 관내 만주어와 관외 만주어의 차이가 심해 숭가리 이북에서는 공무원들이 주민들과 대화가 어려웠고 군대와 경찰에서도 연어나 연어가 섞인 관내 만주어를 쓰는 관내인 간부와 관외인 하급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될 지경이었다. 이에 1922년부터 기존의 종학 만주관[22]이 황립언어원으로 개편되어 표준어를 제정하려 하였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관외 화자들을 무시하고 관내 중심으로 진행되는 제정 작업에 반발이 심했다.

북청 정부가 여전히 재입관을 외친 이유는 일종의 관성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없지는 않았다. 정부와 남청 황·귀족들은 직례를 비롯한 화북 전역에 방대한 부동산과 기업체 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관내상실로 이들 자산을 한순간에 상실해버린 것이었다. 특히 화북의 무수한 국영기업들, 그중에서도 방산기업체들을 상실하면서 당장 만주 방위에 엄청난 문제가 닥쳤고[23] 역으로 화국은 이들 산업인프라와 자산들을 거저먹었다(고 생각했다). 굳이 괄호를 친 이유는, 정작 화국에서는 이 자산들이 어차피 화인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화인 관료들의 계획에 따라 설립된 것이므로 화국이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화국부터가 만주를 가만 둘 생각이 없이 만주 침공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청 정부는 재입관 포기=화국 정부 인정을 택할 수도 없었고, 아직 한국과 일본이 북청 정부를 지지해주는 상황이었으니 화북의 자산들에 대한 권리를 쉽게 포기할수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력은 어느정도 회복되었지만 수도권과 남부지방을 제외한 전역에서 마적이 활개를 쳤고, 관내파 귀족들은 자신들의 봉건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부 재정을 압박하는것으로도 모자라 지역 방위를 명목으로 영지 일대의 경찰권을 사유화하였다. 관내 회복주의는 스스로를 중원 왕조로 여기는 인식의 발로였고, 이 때문에 황실과 조정 인사들은 만주 표준어 제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버젓이 연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화국은 만주와의 대치를 '내전'으로 규정하며 무력충돌을 정당화하였고, 최대 후원자인 한국 역시 만주 기병이 두렵지 않은 총기와 차량의 시대에 굳이 화국과의 무력분쟁을 야기하는것으로도 모자라 만주 현지 자본을 옥죄며 수십년간 구축되어 온 한만 경제협력 체계를 무너뜨리는 청 정부를 곱게 보지 않았다.[24] 심지어 일본은 1920년대 중반 들어 만주 정부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화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구만주군[25] 출신의 군인들은 만주 방위를 위해 피흘린 대가를 해산과 탄압으로 갚은 청조에 반발하여 북부 산간지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북부 최대 도시인 할빈은 서로는 눈강 상류, 동으로는 숭가리강 하류 지역을 점거한 반청 군벌들과의 내전과 러시아 백군계 군벌들의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눈강 평원 최대 도시인 치치가르는 1920년부터 1927년까지 만 7년간 구만주군 출신 군벌 마기야 잔샨의 지배 혹은 습격을 받았고 만러간 교역의 중심지였던 할빈은 동청철도의 운행이 수시로 통제되면서 피폐해졌다.[26] 심지어 1924년 1월에는 할빈 경찰이 치치가르 방면으로 출동한 틈을 타 아러추카 타이람이 이끄는 마적단이 할빈 시내를 습격하여 철도노조와 우정국 직원대, 철도중학 학도대가 이를 격퇴하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관외인들의 민심 악화를 절감한 청 정부는 결국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한 구 수도 묵던을 포기하고 1923년 만주종관철도와 지린우라-간도철도의 분기점인 자무하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단기적으로 친정부적인 관내인들로 채워진 안정적인 수도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관외인들은 만주 전통의 수도이자 중심지인 묵던을 포기한 행위에 분개했으며 관내인들 역시 태조 누르가치가 직접 건설한 구도 묵던을 포기한 데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다. 특히 인구 50만의 대도시 묵던은 한순간에 국가 중추기능이 모두 자무하로 빠져나가면서 도시 기능에 상당한 공백이 발생하였다.

1927년 할빈 봉기

라린강 이북지방은 17세기 이후에야 개척민들이 당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고대부터 꾸준히 개발되어왔던 요동과 남만주 지역에 비해 지역색과 자부심이 강했고, 그 중심에는 북방의 수도라 불리던 할빈이 있었다. 이미 1914년에 한차례 무장 저항의 경험이 있었던 할빈 시민들은 대체로 마기야 잔샨을 비롯한 구만주군 출신 군벌들에 대해 호의적이었고,[27] 만주 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 의회 선거를 치렀던 1914년 6월 9일을 기념하며 매년 선거 요구 시위를 벌였으며, 1924년의 할빈 습격 사건 이후에는 폭동 직전의 상태에 달했다. 북부지방의 불만이 높아지자 청 정부는 1925년부터 대규모 지원예산을 급편하였으나 할빈시장 아하교로 푸차 등이 엮인 대규모 횡령, 착복 사태가 벌어졌고, 1927년 6월부터 사건의 실체가 밝혀져 일부 하급공무원들은 처벌되었으나 정작 비리의 중심이었던 푸차는 교로씨라는 이유로 황실의 비호를 받아 해임으로 마무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7년 10월 11일, 할빈역광장 앞에 모인 시민들은 아하교로 푸차의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할빈시경은 시위 불허와 즉각 해산을 요구하는 숭가리로경무청과 경무국의 성화에도 충돌을 최소화하며 최초 신고된 시위 시간을 보장했다. 이후에도 시위가 계속되자 10월 15일 경무국은 부임 8개월차였던 할빈경찰서장 닝구타 가란타이를 압박하여 퇴직서를 제출케 하였고, 성난 시민들은 가란타이의 퇴직 반려와 푸차의 처벌을 요구하며 할빈을 떠나려는 푸차의 차량을 막고 진압을 위해 투입된 숭가리로경무청 경력과 할빈역광장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밤새 대치했다. 정부는 10월 16일 06시를 기해 숭가리로 전역에 계엄령을 발효한 데 이어 할빈시에서 발포를 허가하였고, 이어 치치가르 방면에 주둔중이던 11사단을 할빈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만주공산당은 철도노조로 하여금 정부군 수송에 고의태업을 시전하도록 하는 동시에 할빈지역 노조원들의 무장봉기를 촉구하였다. 안그래도 북부 출신으로 지역민들의 정서에 공감하던 차에 서장이 한순간에 경질되고 이웃들이 총격에 받아 희생되는 모습에 분노한 할빈경무서과 숭가리로경무청 소속 경찰관들이 대거 시민들에게 합세했고, 할빈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인근 지역의 마적들까지 시내로 진입하여 무기를 공급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10월 17일 벌어진 총격전으로 숭가리로청이 시 외곽으로 밀려나 푸루경무서에 임시로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11사단이 할빈 시가지 진입을 시도했으나 숭가리강을 넘지 못한 채 각개격파되며 돈좌되었다. 할빈시내는 무정부 상태에 놓였고, 정부는 병력을 추가 병력을 투입하려 하였으나 사방이 적대세력으로 둘러싸인 청 정부는 어느 국경, 전선에서도 병력을 차출할 수가 없었다.

1927년 10월 22일, 할빈시내 해방구에서는 1914년 이후 무려 12년만에 그토록 염원하던 선거가 치러져 총 16명의 시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할빈법학전문학교 교장 삭타 아바하이가 임시 시장 겸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민위원회가 출범과 동시에 맞딱뜨린 첫 의제는 어떻게 활동을 종료할 것인가? 였다. 일부 경찰병력이 합류했으나 할빈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열세였고, 외부와의 소통은 끊겼으며, 기대했던 북부 군벌들은 할빈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잔샨은 봉기 이래 처음으로 치치가르에서 뛰쳐나와 할빈으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무두리타샤호 일대에서 격퇴당해 다시 치치가르를 빼앗겼고, 한국은 한만국경에서 만주군 병력의 차출을 저지해주고는 있었으나 청 정부의 진압을 저지할 명분이 없었을뿐더러 입헌우국당과 공영당 등 보수진영에서는 오히려 좌익폭동에 대한 진압 협조를 부르짖고 있었다. 정부가 어느 한 전선에서라도 병력 차출에 성공하는 순간 할빈의 멸망은 시간문제였다. 시민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계엄군은 시민위원회 자체를 불법 사조직으로 규정하며 협상을 거부했다. 만주공산당의 개입은 노조의 조직화와 무장 지원으로 초기 할빈의 봉기에 도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부로 하여금 봉기를 좌익 폭동으로 선전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노조는 숭가리강 수로를 통해 할빈을 지원하려 하였으나 조직이 수면 위로 노출된 공산당은 즉시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려 일부 조직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고 자연히 노조 조직의 할빈 지원도 한계에 다다랐다. 민중당과 공산당 등의 정당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지원은 자무하와 묵던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당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력이었던 친위사단 파견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카드는 의외의 성과를 거뒀는데, 할빈에서 그 사이 최대의 협상카드를 찾아낸 것이다.

1927년 11월 10일, 마지막 만주국왕 훙루이의 차녀이자 만주 왕실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신교로 시하가 계엄군과의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28] 그동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첩보에 6년이 넘게 지명수배중이었던 그녀는 할빈을 거점으로 사하리얀 미로라는 이름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암약하던 중 할빈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시민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29] 청 정부는 즉각 시하를 묵던으로 비밀리에 압송하고[30] 뒤이어 일본과의 협의로 동원이 가능해진 제16국경경무여단, 무단기양로경무청 경력을 할빈에 투입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묵던 시내에 시하의 압송 소식이 퍼져 외신기자들이 묵던북부역에 진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31] 드라마와도 같은 공주의 귀환에 전세계 언론의 이목이 묵던과 할빈으로 집중되었고, 묵던 시내에서는 경찰이 통제를 포기할 정도의 대규모 환영 시위가 열렸으며, 한국 정부와 황실은 주한청국대사관과 주청한국대사관 양쪽 모두를 통해 1시간 단위로 시하 공주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결국 청 정부는 11월 15~16일 이틀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시하 공주의 한국 망명을 조건으로 할빈 시민들에 대한 보복 방지를 공언할수밖에 없었다. 이에 11월 20일부터 한국 및 일본 측 참관단 주재로 할빈 시민들의 무장 해제와 계엄군 철수가 진행되었고, 시하 공주는 할빈의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11월 25일 봉기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민위원회 위원 등과 함께 열차편으로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1927년 할빈 봉기는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1927년 할빈 봉기는 만주 민권운동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입헌의 관철에 실패한 채 종식되었으나, 임시적이나마 선거에 의한 의회와 행정부의 구성이라는 선례를 남겼으며, 무엇보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보복을 방지한 채 종료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만주 혁명에 매우 큰 자산을 남겼다. 이들이 봉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정부 권력에 대한 공포가 남지 않은 점이 혁명 초기 시민들의 대대적인 합류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만주 왕실의 적녀인 아이신교로 시하의 존재는 만주의 주체로써 정당한 권리를 찾는 만주 민권운동의 상징으로써 이후의 혁명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였으며, 민중당과 공산당 등 유력 정당들은 묵던 등에서의 시위와 총파업 주도를 통해 의회 부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대중정당으로써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봉기에 가담한 경찰관들은 이후 남김없이 해임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고, 청조는 할빈 지역에 대해 예산배정과 공무원 채용 등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행하며 보복을 가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돌고돌아 청조는 이러한 차별의 대가를 곧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제1차 만주전쟁과 3차 민권운동

1931년 9월 18일, 화국은 연만철도의 폭파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지원 하에 북양군 30개 사단을 동원하여 만주를 전격 침공하였다. 그동안 관내 회복을 외치던 청 정부는 정작 화국의 전면 침공이 닥치자 뾰족한 대응책이 없었고, 국제연맹은 이 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는 화국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었던 한국은 국제연맹의 이같은 결정에 남만주 일부 점령지에 대한 수비 외에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할 수 없었다.[32]

침공 1주일만에 요하 서안을 피탈당한 청은 곧 선통제 푸이가 몸져누우면서 후계에 대한 고민에 직면했다. 9월 30일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군의 사기 진작 차 무리해서 전방 시찰에 나섰던 황제가 폐렴이 들었고, 안그래도 페니실린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무리한 일정 소화까지 겹쳐 궁내 의료진이 달라붙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문제는 푸이는 황후 고불로 완룽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고, 다른 방계 황족의 승계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남동생은 푸제, 푸궁, 푸런이 있었으나 청조의 황위 계승법상 동항렬인 동생들은 황위에 오를 수 없었다.

방계 황족의 승계가 막힌 데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우선 1918년 관내 상실 당시 대학살의 여파로 아이신교로 황족의 숫자는 1918년 10월 주청한국대사관의 보고서에서 푸이의 직계만이 남았다고 할 정도로 줄어 있었다. 물론 총리대신을 지냈던 아이신교로 시치아처럼 만주지역 팔기 등에 속해있던 아이신교로 가문으로 넓히면 총 2천여명의 인구가 있기는 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태조 누르가치의 선대에서 갈라져나왔던 이들로 자칫하면 황위 계승의 혈전이 벌어질 수 있었다.[33] 이후 1918년 11월부터 대학살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황족들이 하나둘씩 만주로 귀환하고 있었으나, 어리고 후사도 없는 황제를 노리고 1920년 훙차의 난, 1922년 푸바오 반란모의사건, 1923년 5.11 쿠데타 미수사건 등 황족이 주도하거나 황족을 낀 각종 반란사태가 거의 연례행사 수준으로 벌어졌다. 특히나 상당수 반란사건의 배후에 화국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푸이와 황실의 귀환 황족들에 대한 불안감과 적개심은 깊어져갔다. 이에 1924년 2월 청 황실은 모든 귀환 황족의 황위 계승권을 영구히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당시까지는 푸이가 아직 젊고 건강했으며 남동생들도 있었으므로 후계가 태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으나, 불행히 푸이는 1931년까지도 황후와 수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단 한 명의 자식을 보지 못했고, 푸이와 가장 가까운 남동생 푸기예 역시 딸(그것도 사생아)만이 있었다. 순친왕 자이펑의 동생 자이순과 자이타오 집안 역시 푸이의 조카뻘 자손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이에 푸이의 폐렴을 계기로 귀환 황족의 계승권 박탈을 해제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1931년 10월 2일 귀환 황족인 아이신교로 유신[34]이 다시 화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모든 논의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총리대신 아이신교로 시치아 등의 방계 황족들은 한국에 망명중인 시하 공주를 여제로 즉위시키고 범순친왕가에서 후대 남성 황족이 태어나면 승계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35] 자무하에서의 쿠데타를 수습하는 와중에 이미 리요하강 방어선은 붕괴되어 묵던이 위험해지고 남만주철도마저 차단되자, 자이펑은 결국 종실의 강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화국과의 연계 위험성을 최소화하면서 한국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으로 시하의 귀환을 택했다.

시하의 만주 귀환에 고무된 한국 측도 국제연맹의 제재를 피해 만주를 지원할 방법을 찾아냈는데, 바로 수십만의 예비역 청년 실업자들을 만주에 이민 형식으로 파병하는 것이었다. 마침 한국 역시 1929년부터 불어닥친 대공황으로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터라 자국민의 만주 이민을 장려하는 상황이었는데, 만주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이 이민행렬이 중단되어 고민이었으니 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파병이민은 한국과 만주 모두의 요구에 딱 맞는 방안이었다. 묵던이 함락된 1931년 12월 2일 시하 공주와 함께 1차 파병이민단 6천명이 할빈에 도착하였고, 1932년 4월 20일까지 총 12만명의 인원이 파병이민 형식으로 만주를 밟았다. 이미 한국군에서 군사교육과 복무를 이수했던 이들 인원들은 전쟁 초기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만주군이 체계를 정비하고 반격에 나설 때까지 6개월여간 7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시간을 벌어주었다.[36] 1931년 12월 6일 헌종 선통제 푸이가 자무하의 황궁에서 붕하고 시하는 푸이의 약식 장례와 시신 운구를 해결한 후 12월 11일 자무하 동부 롱기야 비행장에서 약식으로 황제에 즉위한 뒤 곧바로 할빈으로 이동하여 전쟁을 지휘하였다.

1년여간의 전쟁은 1932년 10월 10일 동리요하를 경계로 휴전협정이 발효되면서 종료되었으나, 만주의 전후처리는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1차 만주전쟁은 만주인들이 사실상 처음으로 경험한 총력전이었다. 이전까지 러시아나 한국과의 국경충돌이나 한국군의 만주 출병 및 점령 같은 사태는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의 만주인들에게 그러한 전투는 소수 군인들의 일이었다. 한국은 건국 이래 돈 많이 들어가는 만주 점령이나 통치에는 별 관심이 없이 교류와 투자에 집중했기 때문에[37] 종종 정치적 이유로 만주 내륙까지 침공해도 해당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면 남부 국경지대가 아닌 이상 보통은 철수하였고,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 같은 문제도 거의 없었다.[38][39] 하지만 화국은 한국과 달리 만주를 완전 병탄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포화 상태인 직례 주민들을 식민하고자 곳곳에서 만주인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화국 북양군은 심지어 동족인 니칸계마저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니칸인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아 니칸인 유격대가 조직되어 후방에서 목숨을 걸고 북양군과 싸웠을 정도였다. 관내상실때까지만 해도 니칸계가 은근히 화국의 진군을 바라는 분위기라 청 조정이 바짝 긴장하며 집단이주를 고려했지만, 1차 만주전쟁 이후로는 니칸계고 뭐고 상관없이 온 만주가 반화감정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렇게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심지어 절반은 화국의 괴뢰정부인 만주제국(남만주)의 손에 떨어지면서 만주 사회의 구조가 급변하였다. 우선 관내계 귀족 대토지주 대다수가 풍요롭던 요동지역 영지를 잃어버리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하였고,[40] 그나마 동리요하 이북에 대영지를 가지고 있던 이들도 대부분 전쟁으로 토지가 초토화되어 경영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한 숭가리강 이동, 이북지방은 요동에 비하면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귀족 대영지가 많지 않고 자영농과 군사용 둔전 위주였으며 영지가 있어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많은 귀족들은 그 처참했던 전쟁에도 불구하고 요동 영지의 보전을 대가로 남만주 수립에 참여하기까지 했고, 특히 황위계승권을 박탈당해 불만이 드높았던 수만명의 귀환황족들이 대거 남만주로 전향하였다. 도광제의 황장자 이위의 집안인 보은진국공가는 모범적인 행동거지로 귀환황족 진영에서 황위계승권 박탈 해제론의 주요 근거로 제기되기도 했으나 정작 가주 위기양이 화국과 협력해 남만주 황위에 오르면서 만주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자신들이 피흘리며 지켜낸 나라를 그동안 자신들을 핍박하던 황족과 귀족들이 종잇장 뒤집듯 배신하고 철천지 원수인 화국에 붙는 모습을 본 만주 국민들은 분노했고, 남만주가 정부 출범을 선포한 1932년 11월 11일 일어난 남만주 건국 반대 시위는 그 날 저녁이 되자 반황족, 반귀족 폭동으로 돌변했다. 특히 전쟁 전부터 황족, 귀족의 비중이 높았던 자무하는 주변 지역에서 몰려든 폭도들에 의해 도시 전체가 불타올랐고 자무하에서만 약 300여명, 만주 전역에서 최소 2천명 이상의 황·귀족들이 학살당했다.

11월 중순 북만주 전역을 휩쓴 반귀족 폭동은 시하 여제가 전면에 나서 자제를 호소하고 파병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자경단이 경찰과 계엄군에 협조하면서 진정되었으나, 12월부터는 임시수도 할빈을 중심으로 헌법, 의회, 선거를 요구하는 민권 시위가 재개되었다. 스스로의 힘과 권리를 자각한 시민들과 주요 정당들의 기세는 거셌고, 북만주 지역이 활동 거점이었던 시하 역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북부 유권자들의 표심을 황실에 대한 지지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내세워 순친왕과 황실을 설득하고 나섰다.

사실 시하의 입장에서 순친왕을 비롯한 청 황실은 자신의 가족을 도륙한 철천지 원수에[41] 이후로도 자신을 끈질기게 추적, 추방하였으므로 좋은 감정이 있을 수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북청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복귀를 허락하고 전쟁 수행 과정에서 황족으로써 상당히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점을[42] 꽤 높게 평가했다. 이미 만주 관외계 아이신교로 황족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던 시하에게 순친왕까지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자 북청 내 황족이나 귀족들이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이미 군사훈련을 받은 수십만의 인민들이 폭도로 돌변하여 대살육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본 황·귀족들은 시하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그녀의 즉위식 거행와 헌정 실시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여 1932년 12월 10일 시하 여제와 황실 최고 원로인 순친왕 자이펑, 총리대신 시치아가 공동으로 헌정을 선언하였다.(12.10선언).

이로써 만주인들은 1906년 제헌운동 이래 26년에 걸친 투쟁 끝에 드디어 관외계 황제와 헌정을 쟁취하였으며, 이제 만주는 한층 강화된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고 본격적인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앞날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만주인들의 진짜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전개

강덕헌정과 쟁개헌(爭開憲)

12.10 선언으로 시하의 즉위식과 헌정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문제는 1933년 2월 25일 실시될 의회 선거였다. 관내계 귀족들은 이 헌정을 1908년 제정되었다가 관내상실로 정지된 흠정헌법대강, 1911년 제정되어 역시 정지된 헌법중대신조19조의 재시행으로 이해했으나, 수십년에 걸친 투쟁과 이웃한 한국과의 교류로 성장한 만주인들의 의식은 거의 1세기 전의 프로이센식 흠정헌법, 외견적 입헌주의 모델에 기초하여 20여년 전 제정된 구닥다리 흠정헌법대강과 신조19조 정도로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43] 소수였던 관내계 주민 상당수가 남만주에 남아버린 상황에서 북청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관외계 혹은 한국계였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만주의 유력 정당, 정파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 광정헌법을 모델로 하여 군민협약과 의회의 내각 구성 및 통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구하였다.[44]

관내계는 11월 폭동과 12월 항쟁의 여파로 우선 헌정에 동의하기는 했으나, 해가 바뀐 강덕(康德; 널허 어르더무) 원년(1933년) 들어 의회 선거의 결과가 범개헌파의 압승으로 예상되자 다시금 뭉쳐 극력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역시 이들의 화북관, 만주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북청 정부는 애초에 헌법의 시행영역을 어디까지나 관내 직할령 내로 한정되는 것으로 여겼고, 이러한 인식 속에서 관외에 헌법을 시행하는 것은 곧 재입관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이후 만주전쟁과 1932년 항쟁을 거쳐 북청 정부의 실효지배 지역에서 헌법이 시행됨으로써 관외인들을 북청 정부의 직할민으로 인정하는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인식했으나, 동시에 헌법을 관내 영유의 유산으로 여겼고 헌법의 개정은 (애초에 개정 자체에도 반대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청제국 자정원의 권한이며 2월 총선으로 구성되는 만주 의회는 이러한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관내계가 이런식으로 나오니 안그래도 대청제국 체제에 정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관외계는 헌법 개정을 곧 만화분리, 탈화입만(脫華立滿)으로 인식했고, 급기야 관외 강경파들은 대청제국이 아닌 만주제국 혹은 만주왕국[45] 수립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만주의 유력 3당(헌정당, 국민당, 노동당)이 선거전 내내 개헌 논의를 이어가자, 관내계는 대응 카드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해체된 자정원의 재구성을 요구했다. 종친 인사인 아이신교로 푸구이 등이 1932년 12월 21일 창당한 대청당은 1933년 1월 9일 강덕제에게 자정원 재소집을 청원했는데, 구성안은 기존 대청 자정원 흠선의원 98인에 북부 5로당 2~3인씩 민선의원 총 12인이었다. 만주 의회가 지역구별 민선의원으로 구성되므로 이들이 신조19조에 명시된 하원의 역할을 맡고 자정원은 사실상의 상원으로 기능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이는 자정원을 통해 대놓고 개헌을 막겠다는 것이었다.[46] 대청당은 순친왕까지 동원하여 강덕제를 전력으로 설득했으나 강덕제는 자정원 구성안을 강하게 반대하며 전원 민선화 이전까지는 자정원의 소집이 불가함을 천명했다. 사실 자정원의 구성방안은 법률로 정해진 사안이 아니었으므로 강덕제의 칙령만으로도 민선의 비중을 높이거나 전원 민선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소수의 관외귀족 외에는 궁중과 정부 내에서 우군이 없었던 강덕제는 일단 자정원의 설립을 최대한 늦추면서 만주 의회의 설립을 통해 만주 유권자들의 힘을 모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시하를 추대한 관외귀족들도 일단 귀족이다보니 막상 헌정이 눈앞에 다가오자 흠정헌법에 우호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특히 강덕제가 나름 우군으로 여겼던 시치아가 1월 13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정원 소집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자정원의 민선 전환을 주장하던 강덕제의 행보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강덕제가 대노하여 질책하자 시치아는 1월 15일 전격 사퇴했고, 선거가 고작 1개월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후임 총리 인선이 가능할 리가 없으니 이는 대놓고 국정 공백을 야기해 황제에게 타격을 주려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황제의 일정 관리 권한을 쥔 궁내부가 주요 정당 및 민간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그 책임을 은근슬쩍 강덕제에게 돌리는 언론플레이를 자행하면서 안팎으로 강덕제의 입지가 날로 축소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만주 민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녀의 입지 약화는 민권운동의 구심점이 약화됨을 의미했다. 특히 공산당은 말 할 것도 없고(어차피 출마를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동당 내에서도 강경파가 득세하여 공공연히 황실 폐지와 공화혁명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정부가 노동당과 민권운동을 탄압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선거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각 정당들은 막상 후보 선출이 시작되자 엄청난 난맥상에 시달렸고, 귀족들은 이 과정에서 자금력을 동원해 헌정당을 포함한 우파 정당에 대거 참여하여 농촌 지역 선거를 돈잔치로 몰고갔다. 1월 말이 되면 헌정당은 은근슬쩍 개헌논의에서 발을 빼고 사실상 흠정진영으로 전향하기에 이르렀고, 자금력 빵빵한 친흠정파 언론에서는 2월 내내 민선 무용론을 열심히 떠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흠정진영이 한가지 큰 실책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선거 무용론을 떠들다 보니 정작 선거운동 자체에는 소홀해질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특히 흠정파 언론들은 선거 무용을 주장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우군인 흠정파 정당들의 선거운동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개헌파 정당들이 이를 놓치지 않고 대놓고 물어뜯으면서 흠정파 전체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선거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2월 중순에 접어들자 결국 대청당과 헌정당은 슬슬 거리에서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됐다.

흠정계의 선거운동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자 선거 결과는 당연히 개헌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2월 25일 만주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전국 의회총선거는 만주의회 총 200석 중 국민당 96석, 노동당 74석, 농민당 19석 등 범개헌계가 무려 전체의 94%를 차지하는 결과로 마무리되었고, 특히 도시지역에서는 흠정계가 단 하나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집표가 최종 확정된 2월 28일, 강덕제는 선거 결과를 최종 승인하고 최대 의석을 차지한 국민당에게 황제 칙령의 형식으로 조각을 명했다.

3.1 쿠데타

할빈 시민 봉기와 널허 어르더무 한의 합류

할빈 시가전

'반란의 진압'과 퇴위 조서 발표

결과

만주 제1공화국 수립

국제연맹의 만주공화국 승인

영향

만주 현대사의 시작

한국 3월 혁명

  1. 만주 제1공화국의 국제연맹 가입으로 제1혁명이 완수된 것으로 간주
  2. 동아시아의 공화국은 1902년 남월공화국이 최초이며 1905년 대만공화국이, 만주혁명 직전인 1932년 상해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이들은 각각 영국(남월)과 일본(대만, 상해)의 후원을 받아 수립된 정부로 각국 국내에서는 공화혁명을 자칭하나 국제 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3. 만주에 거주하는 화북계 주민을 이르는 말. 원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을 이르는 말이다.
  4. 후요 인구는 400만명 수준으로 발해-조선인이 200만명이며 화인(니칸인) 100만명, 여진인 60만명 등이었다. 이 당시에는 흥안령 일대의 키탄부를 몽골인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5. 1660년~1760년의 100년간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은 약 60만명으로 추산된다.
  6.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 이후 호구를 등록한 조선인과 니칸인들은 대부분 본국에서도 성씨가 없던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일본과 비슷하게 지명을 따거나 거주지역의 특징을 따서 이런저런 만주식 성을 만들었는데, 만주의 부족적 특성에 기인한 무쿤-하라 방식의 성씨와도 달랐을뿐더러 복수의 씨족이 동일한 성씨를 가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화식 성씨가 있는 이들은 보통 성씨 뒤에 '기야'(家)를 붙였다. 또한 이름의 경우는 이미 청 황실부터가 한화된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식이나 니칸식 이름을 독음만 만주식으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7.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던 청조 입장에서는 외국인 한국에 대량의 은이 유출되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겸사겸사 동아시아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금을 제공함으로써 외교적으로 한국에 대해 우위를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8. 이 과정에서 한국이 주로 써먹은 방법이 마닐라를 통해 중남미산 은을 교환하고, 이를 일본에서 국제시세보다 3~4배 싼 가격에 다시 금과 식량 및 각종 제품과 교환해 중국 등지에 대량으로 푸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이는 대(對)한 교역에서의 손해를 벌충해주지는 않으면서 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교역은 강제하는 막부에 대한 웅번들의 불만으로 이어져 메이지 유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다만 이런 환차익 방식의 무역은 한국 자체가 금만 나는 환경이다보니 이미 17세기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9. '한국계 만주인'과 '니칸계 만주인'도 만주인으로써 이 학살에 대거 가담하였다. 물론 그 외에 만주인과 이름이 쉽게 구분되는 키탄계 등도 덤터기로 엄청나게 피해를 입었다.
  10. 그나마 청조와의 교섭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청간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외무부의 만류로 묵던 점령은 면했다. 대신 구도 리요안과 철광산지인 안산이 모두 한국군 혹은 친한민병대에 점거당했다.
  11. 강희제의 14황자인 순근군왕 윤티의 5대손이다. 그가 만주국왕으로 낙점된 것은 아버지를 따라 관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조상인 윤티가 옹정제의 동복제로 황실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샨이 아이군 조약의 청측 대표로 만주에서 반감이 드높았기 때문에 청조에 대한 불만을 떠넘기려는 의도도 있었다.
  12.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는 정통의 변을 계기로 중원이 분열되어 막대한 물산을 독점하는 천자국이 사라지면서 무역제도로써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고, 이후 동아시아의 교역은 민간이 주도하는 각종 형태의 사무역 중심이었다. 18세기 초 강희제의 청이 강남 원정에 성공하고 중원 천자국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한때 한국과 일본도 청에 재조공을 고려할 정도로 조공무역이 각광을 받던 시기도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들어 청이 빈발하는 자연재해와 내란, 외침에 시달리면서 조공은 다시금 번국들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었다.
  13. 청조가 이렇게 관동을 박대했던 배경에는 정권 보위의 핵심인 직례 지역의 경제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직례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던 탕산의 유연탄과 철광석은 하필 심요지방과 정확히 겹치는 품목으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고, 1850~60년대 염군의 난에 시달리던 청조의 입장에서는 직례산의 수출을 늘려 경제상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남만주철도 개통 이전까지는 이들의 수송이 수로 중심이라 요동반도를 우회해야 하는 푸시발 석탄과 안산발 철광석에 비해 탕산지역 유연탄과 철광석도 상당한 경쟁력이 있었지만, 1882년 남만주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는 상대가 되지 않자 청조는 이렇게 빈 곳간을 만주에서 뜯어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14. 니칸인들의 화화 강요에 오히려 니칸계 만주인들이 반발한 점은 킬트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사례와도 종종 비교된다.
  15. 북경 공략에 투입된 육수군 3만명은 별도.
  16. 일본제국조차 식민지인 류큐와 타이완, 가라후토, 서우수리, 캄차카 등지에서 헌법은 일단 시행 대상이었으나 대신 덴노의 직속 신하인 총독의 재량권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법외지대를 형성했다. 이에 비추어보면 청조의 만주 대접은 식민지 그 이하의 어딘가였다.
  17.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15년 전쟁으로 유입된 야마토여진 출신자들을 더 높게 쳤고 이들은 만주 팔기 귀족으로 편입되어 입관도 함께했다. 야마토부를 여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족 공동체로 인정했기 때문.
  18. 특히 이 조치는 화식 성씨를 중시하는 한국이나 니칸의 중류층들이 만주에 터 잡고 살면서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19. 1915년 기준 만주에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인구는 총 인구 2150만명 중 18만명이었다. 이렇게 기준이 높았던 이유는 국세 납부 상위권에는 관내 귀족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이들을 유권자로 등록하여 만주 의회를 통제하려던 중앙 조정의 꼼수가 있었다.
  20. 군상대권을 강조한 흠정헌법 체제를 택한 것은 민권파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청조의 의향에 반하는 부분이 있었다. 청조는 앞의 강력한 선거권 제한을 통해 관내 귀족들을 대거 만주 의회에 참여시켜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이었는데, 강력한 군상대권은 적어도 만주파 국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이런 의회의 권한을 제약하고 국정을 만주 조정의 의도대로 이끌 수 있는 나름의 장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청조가 만주더러 한국과 같이 본격적인 입헌체제를 도입하라 할 수는 없었으니 일단 선거권 제한으로 퉁치는 정도로 앙보(?)하기는 했다.
  21. 이 800만에는 관내에서 만주인과 함께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니칸 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관내의 만주 팔기 소속 인구는 800만 정도로 추산되었고 이들 중 200만 정도는 만주로 복귀하지 못한 채 학살당하거나 화성(華姓)으로 바꾸어 숨어 살았다.
  22. 관내 상실 이후로 황족의 숫자는 두자릿수로 줄어 종학은 사실상 역할을 상실했다.
  23.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만주 정부가 현지 조병창을 건설하려 할 때에는 북경 조정에서 막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1918년 당시 만주에서 자체 생산이 가능한 무기는 광정05식 소총의 만주 개량판인 ᠠ(A)식 소총, 연간 2만정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북청군의 무장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고 제1차 만주전쟁 초반의 난맥상에 엄청난 기여(?)를 한다.
  24. 화국이 만주 침공과 북청의 멸망을 공공연히 주장하기는 했으나, 1차대전의 승리로 자신감이 넘쳤고 일본과의 관계도 (공영당 내각 시절을 제외하면) 유사이래 가장 우호적이었던 당시의 한규설 내각은 적어도 한만일 3국이 굳건한 공조체제를 유지한다면 화국의 만주 침공 의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구호에 머무는 수준으로 관리가 가능할것이라 여겼다.
  25. 1914년 해체되기 전 만주조정 산하의 만주군. 이후 청조가 만주에서 새롭게 창건한 만주군은 만주신군 혹은 신건군이라 불렸다.
  26. 1919년 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러교역 자체는 급감하였으나, 한국, 일본, 미국이 이르쿠츠크 방면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경로로 동청철도를 이용하면서 할빈은 중간경유지로 여전히 활황을 유지했다. 그러나 잔샨이 이끄는 힝간군이 동청철도를 통제하면서 서방측은 1.5배 이상 돌아가는 아무르-우수리 철도를 이용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수차례 만주군의 힝간군 토벌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힝간군은 그때마다 대힝간산맥 서부 몽골령으로 도피하였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동청철도 연선을 습격하기를 반복했다.
  27. 힝간의 잔샨, 라하수수의 아무하 라이치야 등 구만주군 출신 군벌들 중 상당수는 청조가 헌정을 시행하고 관외인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한다면 군을 해산하고 정부에 협력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이 차별 시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관외인의 정부 참여에 있어서 많은 관외인들, 특히 북부에서는 잔샨 등의 군벌 지휘관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헌정에는 의회 구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한국, 일본식 보통선거를 실시하면 당연히 관외인의 몰표가 예상되었으니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전혀 수용할 생각이 없었고 선거 요구 여론이 드높은 북부에서는 내전의 책임을 반란군벌이 아닌 정부에게 돌리고 있었다.
  28. 삼녀인 아이신교로 시리 역시 1914년 6월 10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1924년 마적에 의해 살해당했다. 후에 아이신교로 시하는 동생을 죽인 마적 두목의 어린 딸을 동생으로 삼았는데, 우연히도 이름이 시리였다.
  29. 삭타 아바하이는 후에 실력 좋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인기가 있었을 뿐 그녀의 정체를 위원회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고 나섰다고 밝혔다.
  30. 묵던으로의 압송은 시하 공주가 요구했던 것으로, 수도 자무하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신도시인데다가 친정부 여론이 강해 자신의 협상력이 약해질것을 우려해 옛 만주 조정에 대한 우호 여론이 강한 묵던을 지정한 것이다. 물론 청 정부는 정보를 은폐할 속셈이었지만 이 은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31. 평소 시하 공주 - 정확히는 사하리얀 미로 - 와 친분이 있었던 월간 아이신지(紙) 기자 타타라 시하가 주도한 것으로, 당시 다소 통제가 느슨했던 경찰 측에서 할빈 봉기를 취재중이던 그는 협상장에 시하 공주가 나타나자 우정국 우편항공기를 타고 자무하로 날아와 오만 단체와 언론사들에 익명으로 시하의 압송 소식을 뿌렸다. 당시 대형 언론사들은 모두 자무하로 이전해있었기 때문에 묵던에서의 취재경쟁을 주도한 것은 비행기편으로 날아온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었다. 이 둘은 6년 후 결혼한다.
  32. 정 하려면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리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1931년 당시까지는 국제연맹이 그렇게 수틀리면 탈퇴해버리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국제연맹의 탈퇴러시는 1933년 일본과 독일이 동시 탈퇴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어차피 한국은 만주 문제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서방과 별 충돌 없이 보조를 맞추던 편이라 국제연맹 탈퇴 같은 짓을 벌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33. 당장 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시치아만 해도 누르가치의 아우 무르가치의 후손이었다.
  34. 건륭제의 4남 화석이친왕 융청의 5대손이다.
  35. 사실 이렇게 해도 문제는 있었다. 청 본국 황실이 중간에 15남승계(!), 5남승계로 세대교체가 엄청 느리게 진행된 데 비해 만주 왕가는 세대 진행이 매우 빨라 시하는 이미 푸이의 증손녀뻘(!)이었다. 즉 사실상 유일한 황실 종친으로 남은 범순친왕가가 복잡한 승계율 개정 없이 다시 시하의 후계를 이으려면 1908년생이었던 시하가 죽기 전까지 푸이의 형제 혹은 사촌형제 중 누군가가 고손자(...)를 봐야 했다.
  36. 사실 병력과 초급무관들은 이민 형식으로 보내줬는데 중간-고급간부들까지 보내줄수는 없었으니 제대로 된 경험이 없는 만주군 지휘부의 삽질로 병력이 뭉텅뭉텅 날아간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결국 1932년 1월 라린강 방어선의 붕괴를 겪은 후에는 아예 주청한국군고문단이 만주군 원수부를 조직해주고 만주군을 직접 지휘하다시피 하며 숭가리강 방어선 전투와 반격작전인 금호 작전을 치렀는데, 사실상 얼굴마담으로 지휘에 관여하지 않은 고문단장 의경공 이철 참장을 제외하고 최선임인 부단장이 만 31세의 강현 정령, 그것도 수군 소속이었다.
  37. 여기에는 이어의 역할이 컸다. 조선반도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에 비옥한 화산토와 남해의 온화한 기후로 태풍 정도만 아니면 농사도 잘 되는 땅 놔두고 굳이 척박하고 원주민들과의 충돌도 고려해야 하는 만주를 점령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간혹 군부가 북벌을 외치면 호부-탁지부가 거의 멱살잡을 기세로 말리려 들었고, 나중에 가면 아예 군부가 찍소리도 못하도록 틀어막으려고 추밀원에 예산심의 기능을 맡겨 탁지부-추밀원의 이중잠금장치를 구축한 것이 한국 의회제의 시작이었다. 반대로 이어와의 통합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던 조선-진조 시절만 해도 후요를 갈아버리고 요동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38. 오히려 남부 점령지역들은 내륙에 비해 치안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나은 편이라 가까운 묵던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혼란이 벌어지면 피난민들이 쏟아져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관외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통하는 관내인들이 찍어누르는 내륙이나 사고만 안 치면 크게 터치 안하는 한국 점령지나 별 차이 없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혼란기의 만주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한국 역시 이들의 기본권을 어디에 명시해둔 것도 아니고 한국 입국은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에 포수나 부르가투 등은 1차 만주전쟁 시기가 되면 과잉인구로 몸살을 앓았고 치안, 위생 등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39. 다만 이건 만주 출병 경험이 꽤 쌓였던 1800년대 이후의 이야기다. 과거에 수틀리면 여진족 부락 불태우고 소금 뿌리던 왕년의 조선군 성격 어디 안가서 1700년대 말까지도 한국군이 대러전선의 청군 지원하러 출병하면 지원군이라는 이유로 주둔지 주변 만주인들은 물론 팔기에게까지 행패가 대단해 원성이 자자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
  40. 1930년 기준 북청 귀족 소유의 토지 68%가 동리요하 이남에 분포되어 있었다.
  41. 특히나 순친왕은 1914년 당시에도 감국섭정왕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다.
  42. 푸기예 등 순친왕가의 성인 남성들은 전원 군에 입대하여 복무했다. 화국 측도 남만주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당연히 순친왕의 아우들에게 접촉하였으나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순친왕 역시 차라리 시하에게 죽으면 죽었지 화국에 붙을 수는 없다며 노발대발했다.
  43. 엄격히 말하자면 이 둘은 애초에 헌법 준비 단계의 초안이지 정식 헌법도 아니었다. 형태부터가 흠정헌법대강에서 군상대권과 신민의 의무에 대해 제시하고 의회에 대한 내용은 신조19조에서 보충하는 형태였다. 결국 자정원은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도 정식 헌법을 제정하지 못했고 이 여파는 청을 몰아내고 수립된 대화제국에도 이어진다.
  44. 정작 한국에서는 만주전쟁 직후 광정헌법조차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며 재개헌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친일 성향의 공영당 신정권이 개헌을 통해 반일 성향의 현종 광정제와 황실의 견제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45. 이미 남만주가 '대만주제국'을 선포했기 때문에 북만주 입장에서는 만주제국이라는 국명을 쓰기 곤란했다.
  46. 사실 만주 의회가 하원으로 명시되는 한 개헌안을 발의할수는 있어도 개헌을 통과시킬 권한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