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제 (서태평양 연대기)

대한제국 제18대 황제
명화제 | 明和帝
국적 대한제국
출생 1902년 8월 3일 16:10
평도부 중구 명덕궁
즉위 1938년 5월 9일
평도부 중구 경명궁
퇴위 1942년 3월 6일
평도부 중구 경명궁

사망

1952년 12월 14일
태국 방콕
재위
대한제국 제18대 황제
1938년 5월 9일~1943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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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덕수 (德水)

국성

이 (李)

규 (揆)
연호 명화 (明和)
부모 부친 정종, 모친 태인태후
남매 여친왕 이주, 여동생 예상공주 이민
남동생 정친왕 이평
남동생 아주백 이신[1]
배우자 폐후 이성자[2]
자녀 장녀 자현공주 이의자, 장남 폐태자 이상, 차남 양친왕 이중
종교 유교, 일련정종(비공식적)
학력 육군무관학교 (군사학 / 학사)
일본육군사관학교 (1년 유학과정)
케이오기주쿠대학 (법문학부/학사)
병역 대한제국 육군 무관 (1924 ~ 1927/참령 전역)
대한제국 육수공군 대원수(1938 ~ 1943)

개요

명화제 이규는 대한제국의 제18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대한제국 최후의 방계 황족 계승자이며, 또한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마지막 사례이기도 하다. 퇴위한 황제이므로 별도의 묘호는 없으며, 종묘에도 신위가 오르지 않았다. 대한연방공화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를 폐황 이규로 칭한다.

생애

출생과 성장

명화제 이규는 1902년 8월 3일, 당시 황태자였던 (추존) 정종 이숙과 모친인 태인태후 지소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여은공(후의 여친왕) 이주였으며, 만5세가 된 1906년 여화공에 봉해졌다.[3]

원래 그의 아버지 이숙은 영종 흥경제 이진의 장자로 황태자에 봉해졌으나, 1904년 발발한 제2차 극동전쟁 당시 패전에 큰 역할을 하여 책임을 지고 폐위되고 상친왕으로 격하되었다.[4][5] 이로 인해 15년 전쟁 이후 근 300년만에 일본군이 한국 본토, 그것도 최대 항구인 동평에 상륙하여 금정산 전투가 벌어졌을 뿐 아니라 이숙 본인 역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한국이 패전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고, 분노한 민심이 한국 9월 혁명으로 폭발해 영종이 퇴위할 정도였으니 이숙의 폐태자 역시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동생인 은친왕 이금(현종)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실의에 빠진 이숙에게 접근한 것은 일본과 그들의 후원을 받는 한국 내 흥아론자들이었다. 이숙의 입장에서는 그저 성실하게 군복무를 하면서 명령에 충실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나라를 망친 역적으로 몰려 폐위로도 모자라 사실상 가택연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일본과의 대결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흥아론자들의 주장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했다. 한국 국내 여론 역시 패전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대일 강경론에 대한 회의가 늘어났고 이는 1906년 총선에서 흥아론자들이 결집한 아주당의 의정원 입성으로 나타났으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 측 참전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상친왕 이숙은 차남 여화공 이규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아우인 현종 광정제가 1915년 당시 만 34세임에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차남이 가장 유력한 추정상속인이었던 것이다.[6] 일반적으로 황태자 이외의 황족들은 태조 이후 오랜 전통으로 수군에 입대했으나, 이규는 1920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해 큰 화제가 되었으며, 내친 김에 192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도 1년 교환학생 코스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황실 내 대표적인 지일파로 유명해졌다. 당시만 해도 1차대전 승전 직후 한일간의 해빙기였던데다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춰가던 일본과의 교류는 민간은 물론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가를 세운 황실에서도 과거의 유산 정도로 생각하며 나쁘게 보지 않던 시절이었다.

친일파 황자

1924년 육군 참위로 임관한 이규는 원남군사령부에서 3년간의 의무복무 후 1927년 4월 참령 계급으로 전역하여[7] 한일친선협회 총재로 황실 공무를 시작하였다. 다만 이 때는 한일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한국과 함께 만주 방위에 협력하던 일본이 이규의 전역 직후인 1927년 6월 전격적으로 화국과 수교하면서 대청우호노선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간 경제교류는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규의 친일 행보는 일종의 필요악 정도로 여겨져 당분간 큰 제재를 받지는 않았다. 이에 이규는 1928년 일본 국비장학생 신분으로[8] 케이오기주쿠대학에 입학, 법문학부 학사 과정을 밟았다. 이 시기 이규는 일본 황실의 방계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의 차녀 세이코와 결혼하여(1929년) 일본 황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일련정종 계열의 단체들과 자주 교류했다. 이규 본인은 이에 대해 단지 사회생활의 일환이었을 뿐이라며 일련정종 귀의를 부인했지만, 이규의 주변인들을 포함해 대체로 이 때부터 일련정종의 신도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30년 아버지 이숙이 사망하자 우원흥아재단[9]을 설립하여 총재가 되었다. 이 해 자금난에 빠진 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흥아신문으로 재창간, 최대주주가 되었으며, 1932년에는 상화전문학교를 인수하여 1934년 4년제 흥아대학으로 재개교하였다. 이규의 사업자금들은 아버지 이숙의 유산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현양사 등 일본 우익단체들로부터 후원받은 것이었고, 이 때문에 흥아대학 부지 안에는 한일교류라는 명목으로 일련정종 사찰과 일본식 신사를 들여놓기도 했다.[10] 이때부터 흥아대학을 거점으로 흥아신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1932년 제1차 만주전쟁이 남북 분단과 휴전으로 마무리되자 한일남북만화의 5자 정치회담을 통한 만주문제 해결과 북만주 군사지원의 최소화를 주장했다. 이는 공영당과 인민당의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애초에 친일성향인 공영당은 일본과의 만주 공영방안으로써 5자회담을 지지했고, 반대 성향의 인민당은 만주에 들어갈 군사비 지출을 국내 경기부양에 투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국내 여론은 전반적으로 수백년간 피로써 지켜온 우방인 만주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군부 역시 이규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는 않았다.[11] 하지만 만주 분단 이후 남만주의 석탄과 철광석 직수입이 막힌 경제계는 사태의 빠른 정치적 해결을 주장하는 이규와 공영당 측에 적극 호응하였고, 1차 만주전쟁으로 인한 반짝 경기부양 후 빠르게 되돌아온 불황에 불만이 가중된 서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1934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원내 1당이 된 공영당은 이어 1936년 총선에서 여성 선거권 부여의 덕을 톡톡히 누려 과반 원내 1당에 등극했다. 이들과 정치적으로 보조를 같이 하는 이규 역시 현종 광정제가 여전히 아들이 없는 상황과 맞물려 점차 정계에서 주가를 높여가고 있었다.

황제 즉위

1938년 4월 20일, 현종 광정제가 끝내 아들 없이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황위 후계자는 현종의 형 상친왕의 차자 여화공 이규와 현종의 아우 명친왕의 차자 의경공 이철이었고, 이 중 의경공 이철은 제1차 만주전쟁 당시 주청한국군고문단장으로 참전해 다 망해가던 전황을 뒤집어[12] 인기가 드높았으나 앞서 1926년 의경공빈 성지유와 혼인하면서 황위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다.[13] 공영당 윤치호 내각은 당연히 이규의 승계를 환영했으나, 친서방 성향의 민주당, 친소 성향의 인민당, 제1차 만주전쟁에 이어 1937년부터 제2차 만주전쟁을 치르고 있던 군부 등은 하나같이 이규의 즉위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미 1938년 초 현종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여기저기서 황위 계승에 관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보수 근황 성향의 황국당 역시 친일파 황제의 즉위를 탐탁치 않게 여겨 의경공의 이혼을 전제로 하는 황위 계승을 제안했지만 이쪽은 엄청난 역풍만 맞은 채 유야무야되었다. 의경공은 황실예전(皇室禮典)을 개정하여 여성 승계를 허용, 아직 혼인하지 않은 현종의 삼녀 수은공주 이홍연의 즉위를 제안했지만,[14] 내각과 황실 모두 거부하였다.

현종은 친일 성향에, 그것도 자신이 밀어낸 형의 아들인 이규의 승계를 탐탁치 않게 여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규 외의 다른 대안을 택하기도 어려웠다. 여성 승계는 동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여왕 즉위를 허용하는 국가가 많지 않다 보니 한국에서 수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가장 유력한 대안이었던 의경공은 황위 계승을 포기해버렸다. 이규 외 다른 방계 황족 역시 1880년 제정된 민법으로 황실을 포함해 축첩이 금지되면서 황실 내 황위계승권자들이 급감해버렸고, 이규 외에 유력 계승권자로 거론되던 영천후 이재원[15], 영인후 이재격[16]은 모두 언론에 의해 사생아로 밝혀져 대망신을 당했다.

사실 이규에게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있었으면 순친왕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라도 방계 인물들을 찾아봤겠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규는 이철 정도의 로맨티스트까지는 아니라도 공빈 이성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축첩 근절 주장과 같은 나름 진보적인 면도 있어 당시 여러 황족들의 방탕한 생활과 여성편력에 지친 여성과 청년층에게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련정종 사찰이나 신사의 설립은 종교적 개방성으로 비춰져 불교계나 기독교계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친일파로 유명했다지만 아직까지 일본이 완전한 적성국가로 낙인찍힌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이어에서는 전통적으로 황후가 이어 출신이었던 관례가 끊어지고 외국인 황후를 맞이해야 한다며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17] 그의 원남 복무 경력과 교육사업 때문에 조선에 비해 소외받던 이어나 원남 등 해외지역에서는 호의적인 여론도 상당했고, 강경 조선주의자들은 이어계 황후라는 낡은 관례를 벗어던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야권 일각에서도 군 일변도로 경력을 쌓아온 의경공이나 다른 황족들보다는[18] 일찌감치 민간으로 나와 교육사업에 뛰어든 여화공 쪽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기류가 있었다.

이처럼 이규의 즉위 문제는 기성세대와 여성·청년층의 대립, 기성 유림과 기타 종교계의 대립, 조선과 그 외 지역들의 대립, 군부와 민간의 대립 등등 엮여있는 이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문제는 그의 대일관, 대외관이었고, 그를 지지하는 윤치호를 위시한 공영당 내각과 이를 반대하는 야권의 정치적인 대립이었다. 그러나 정권과 황실이 동시에 그를 비호하는 이상 여기저기에서 개별적으로 제기되는 반대 여론들은 당장 큰 문제가 되지 못했고, 가장 큰 반대세력이 될 군부는 9월 혁명 이후 내각 통제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었다. 특히 명인태후가 이끄는 황실은 대안이 없는 이상 이규에 대해 쏟아지는 친일파라는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 안간힘을 썼고 결국 1938년 5월 1일 윤치호 국무대신이 명인태후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규의 즉위가 결정되었다. 이규는 5월 6일 현종과 자명태후의 양자로 입적을 완료하여 화친왕으로 봉해졌고, 5월 9일 대한제국의 제18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명화제로 즉위했다.

광정헌정의 위기

일본인 황후를 들인 이규의 즉위에 일본 극우파들은 환호했다. 19세기 말 이래 한국을 향해 계속된 아시아주의자들의 구애와 노력이 드디어 공영당 정권의 수립과 공영주의자 황제의 등극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이제 한국이 일본 주도의 방공협정과 대동아조약에 가입하여 아시아를 석권하고 구미열강에 맞설 날이 머지 않았다고 믿었다.

일본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37년 7월 발발한 제2차 만주전쟁에서 한국이 북만주를 포기하고 화국 주도의 만주 친일통합정부 수립 혹은 화만통합에 찬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발발 하루만에 한국 상하원이 만장일치로 만주 파병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무산되었지만, 이 때까지도 일본은 반일성향의 황실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친일성향 황제의 즉위가 국면을 전환시킬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명화제의 즉위 후 그 해 9월 처음으로 열린 1938년 제73차 의정원 정기국회에서는 대만주군사원조액 1,200만원을 통과시키면서 이런 희망을 산산조각내버렸다.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도 공영당의 협조적인 태도에 놀랐을 정도였으니 일본의 충격은 말 할 것도 없었다.

이는 일본이 생각하는 아시아주의, 여기에서 발전(?)한 대동아공영주의와 한국에서 이해하는 아시아주의, 동아공영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선 양차 극동전쟁 이래 일본에 대한 한국의 시선은 정확히는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영미 서방열강들에 대한 시선과 연계해 이해해야 한다. 한국과 1:1 국력 비교에서는 별 우위가 없던 일본이 한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여 성과를 낸 것은 어디까지나 영미의 후원에 따른 것이었고, 한국 흥아론자들의 친일 정책은 이처럼 영미가 감싸고 도는 일본과의 관계를 더 이상 적대시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로 적어도 1910년대 후반까지는 친서방 정책과 거의 동일시되었다.[19] 즉 이름은 서로 아시아주의, 흥아론으로 같지만, 일본 아시아주의의 최종 목표가 '구미 열강에 대항'하는 것이었다면 한국 아시아주의의 최종 목표는 '구미 열강과 대등'이라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이는 이미 19세기부터 남만주, 산동, 원남 등을 식민지 혹은 사실상의 식민지로 경영해온 한국과, 19세기 말 들어서야 식민지를 새롭게 획득, 개발해야 했던 일본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1920년대 말부터 일본이 점차 동아시아 대륙부와 태평양 도서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가속화하면서 서방에서도 대일 경계론이 불거지기는 했으나, 당장 일본 극우파들이 대놓고 주적으로 취급하는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과 같이 격렬하게 일본 위협론을 제기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1931년 터진 제1차 만주전쟁 때만 해도 영국이 대놓고 무역규모가 큰 일본과 화국의 편을 들어줄 정도였다. 공영당이 만주전쟁 이후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도, 인민당이 1930년대 원내에서 대약진했던 것도 만주전쟁 이후 1910년대 이후의 친서방 기조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이후의 대응책으로 여전히 서방에서 예뻐하는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해서 서방에 잘 보이느냐(공영당 노장파), 아예 소련과 같은 제3의 대안을 찾느냐(인민당)의 문제였고, 아예 서방을 패싱하고 일본과 함께 전 아시아를 석권한 뒤 아시아-구미간 대전을 벌이자(공영당 소장파)는 쪽은 공영당 내에서도 제28대 의정원까지 주류는 아니었다.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한국의 핵심 이익을 양보한다는 것은 더더욱 논의거리가 되지 못했다. 한국은 제1차 만주전쟁 내내 연 12만명의 인원을 이민 형식으로 파병했고, 이들의 가족, 친지까지 합하면 1930년대 내내 북만주로 이주한 인구가 80만명이 넘었다. 이미 만주화된 이른바 舊한국계나 발해계는 차치하고서라도 19세기 이후 이주하여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新한국계 인구가 북만주에만 200만명에 달했다. 17세기 이래 근세 한국인들에게 만주는 단순한 이웃지역이 아니라 때 되면 출병하여 만주인들과 함께 러시아군을 막고 만주인들조차 포기한 북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가꾼, 자신들이 지켜내고 가꿔온 땅이었다. 만주를 포기하는 정권은 생존할 수 없었다. 일단 만주 출병으로 인한 군사비 지출이 단기적으로 국내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도 있었고, 황실은 황실대로 선대 황제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온 북만주를 안그래도 상당히 무리해서 즉위시킨 방계 황제가 한순간에 내치려 드는 데 큰 반감을 보였다.[20]

다만 대중 여론과는 별개로, 경제계는 만주 지원으로 이익을 본 일부 군수업계를 제외하면 위에서 설명한것처럼 만주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공영당과 명화제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사실 공영당을 정말로 곤혹스럽게 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공영당 주류계파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본과 서방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시점에서는 손절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정작 1938년 9월 치러진 제29대 의정원 총선에서는 재계의 지원으로 풍부한 자금력을 갖춘 소장파들이 당내 경선에서 노장파를 누르고 대거 원내에 진출하였으며, 경선을 통과한 노장파 의원들도 야권에게 지역구를 내주면서 당내 친일 반서방 기조가 더욱 강경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21] 그나마 급작스럽게 당내 주류가 되어버린 소장파들의 내부 갈등 속에서 3회 연속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윤치호가 국무대신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한데다가[22] 소장파들의 묵인으로 자리를 지킨 그의 당내 발언권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반대로 얼굴마담으로 전락한 국무대신을 대체할 소장파들의 리더로 떠오른 것이 명화제였다.

문제는 광정헌법에서 이미 황제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의회와 내각에 위임했으며, 헌법의 개정과 함께 즉위한 광정제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23] 1930년대 말에는 거의 정착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1939년 3월, 전당대회를 통해 이해창을 총재로 선출하며 당권을 장악한 공영당 소장파는 황제가 내각의 요청에 따라 군국사무를 처결하도록 한 광정헌법 4조와 광정제의 일부 국사 관여 사례를 들어 연정 파트너인 황국당과 함께 윤치호 국무대신에게 국사봉환(國事奉還)을 요구하였으나[24] 윤치호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원내 야3당과 공산당은 물론이고 김성수, 유억겸, 이규완 등 공영당 원외 노장파들까지 반발하며 대거 탈당하였다. 이 사태는 1939년 4월 명화제가 직접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헌법을 준수할것을 선언하면서(4.11 호헌 선언) 일단락되기는 했으나, 이 과정에서 공영당 소장파에 속한 일부 대신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퇴하면서 이때부터 출범 6개월차 윤치호 3기 내각은 사실상 식물 내각 상태에 돌입했다.

명화제는 4.11 호헌 선언 이후 내각의 반신불수 사태에 어떠한 입장표명도 개입도 없이 사태를 관망했고, 공영당 소장파 역시 원내와 당권을 장악했음에도 총리 교체나 내각 불신임을 시도하지 않은 채 윤치호 내각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있었다. 소장파와 명화제가 이처럼 윤치호 내각을 방치한 이유는 이들의 목적이 내각 장악이 아니라 황제 친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파, 특히 구 황도파와 활발히 교류했던 명화제는 애초부터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만들어진 의회 중심의 광정헌법 체제를 부정적으로 보았고,[25] 덴노가 총리대신을 임명하고 내각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메이지헌법 체제를 강하게 동경했다.[26] 공영당 노장파들에 비해 정치적 경륜이나 정치력이 부족했던 소장파들은 노장파들을 완전히 밀어내고 내각까지 장악하려 했다가는 자신들끼리 내전이 날 판이라[27] 윤치호를 눌러앉히는 것 외에 딱히 방도가 없었고, 차라리 황제를 전면에 내세워 갈등을 봉합하고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계획이 너무 섣부르게 진행되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 이에 김성수 등 공영당 탈당파들은 윤치호에게 국무대신직과 공영당을 포기할것을 권유했으나 윤치호는 그나마 소장파들을 제어할 마지막 방도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쨌거나 호헌을 천명한 명화제는 당분간 우호적인 여론을 즐길 수 있었으나 사실 눈속임에 불과했다. 애초에 공영당의 봉환 주장 역시 근거는 헌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9년 9월 초순, 태풍 제39-17호와 제39-19호가 연달아 이어 서남부를 강타하여 사망자만 764명에 달하는 기록적인 피해를 입히면서 윤치호 3기 내각에 본격적인 위기가 닥쳐왔다. 하필 태풍 피해복구를 주도해야 할 내정부와 농수산부 대신이 공석인 상태에서 내각은 피해 집계와 추경안 제출에 엄청난 혼선을 빚었고, 내각은 급한대로 당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하필 주 피해지역인 차화권은 전통적인 공영당 약세 지역이라[28] 현지 당조직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나 차화권은 대표적인 농어업지대로 추수를 앞둔 상황에서 맞이한 대규모 태풍피해는 국내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고,[29] 여기에 1939년 9월 25일 자허가 장강 수로를 전격 봉쇄하면서 상국산 농산물 수입이 중단되는 등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문제에 흥아일보를 위시한 언론에서 연일 윤치호 내각의 무능을 공격하자 결국 윤치호는 1939년 10월 2일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윤치호의 국무대신 사퇴로 공영당은 국무대신 재선출에 돌입하였으나, 소장파들이 대립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노장파들은 이미 대부분 당을 떠났고 그나마 당에 잔류한 이들도 국무대신직을 고사했다. 결국 국무대신 후보를 두고 소장파 내 신구파의 대립이 곧바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미 한 번 구파 국무대신의 선출을 저지한 바 있었던 신파는 구파에서 거론되던 박중양, 김윤정, 이덕주 등의 국무대신 후보들에 대해 차례차례 각종 비리와 사생활 문제들을 언론에 터뜨리며 저격했고, 초유의 국무대신 궐위 사태가 근 4주간 지속되는 속에서 명화제가 피해지역을 방문하고 내탕금을 복구사업에 내놓자 여론 일각에서 점점 황제 친정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황제친위대의 이어 복구작업 파견 시도가 내각의 파행 속에 차일피일 미뤄지는 상황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1939년 10월 29일 구파 출신의 윤의섭을 국무대신으로 선출하고, 대신 윤의섭은 비상시국을 이유로 즉각 국사봉환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도출되었다.[30] 야권은 극력 반발했으나 이미 이어발 경제파동에 지쳐있던 여론은 싸늘했고, 명화제는 11월 1일 현 비상사태의 해결까지를 전제로 시한부 봉환을 수락하였다. 이로써 1905년 광정헌법 제정 이후 34년만에 군상대권이 부활하였고, 야권이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법원 헌법재판 또한 11월 16일 사유불충족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광정헌법은 이후 두 번 다시 그 효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명화제정

이렇게 군상대권을 회복한 명화제는 즉각 황제친위대를 이어에 파견하고 수개월째 공석 상태였던 내정대신에 이달용, 농수산대신에 고흥겸을 임명하여 여권과 함께 사태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헌법 조항에 근거해 국무대신의 권한을 황제에게 맡긴 것이므로 헌법에 명시된 정부기관의 역할 및 국민 기본권이 정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광정헌법에서 국사봉환 상태의 종료에 대해 별도의 규정을 마련하지 않았고 명화제가 조건으로 내건 비상사태 해제 역시 황제가 장악한 내각 결의사항인 탓에 의회는 사실상 내각불신임을 통한 내각 통제능력을 상실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지역 피해복구가 한창 진행중이던 1939년 12월 20일, 명화제 친정내각은 국내 시장 안정과 구호를 명분으로 화국과 남만주에서 잡곡 5만t을 긴급 수입하고 추가로 약 12만t의 각종 곡물 수입 논의가 진행중임을 공개하였다. 당연히 공식 외교관계가 없던 화국 및 남만주와의 접촉에는 일본, 특히 현양사가 창구 역할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친여 성향 언론에서는 화국 및 남만주와의 국교수립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31] 여론의 반응이 생각보다 부정적이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내각은 1939년 12월 27일 2차 곡물 수입을 발표하는 동시에 일본의 방공협정 가입 요청 사실을 공개했다. 이는 사실상 정부가 방공협정 가입 의사가 있음을 시인한 것이므로 즉각 공산당과 인민당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반공 성향의 민주당이 여기에 적극 호응하지 않고 관망세를 취하면서 야권의 대응이 지지부진해지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1940년 1월 2일 평도고등법원 판사 김병로에 대한 공산당원의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물론 친공산당계열의 인민노총과 일부 인민당 의원들에까지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들이닥치자[32][33] 민주당과 인민당은 1월 10일 결국 방공협정에 대한 당론 채택을 포기하였고, 공영당은 내친김에 한일 불가침조약까지 추진하여 1940년 4월 10일 방공협정과 한일 불가침조약협정에 조인하고 그 해 6월 임시의정원에서 최종 통과되었다.

방공협정 가입과 한일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이미 1930년대 내내 동아시아 대륙 전역에서 벌어진 깽판질로 일본을 사실상 적성국가로 분류한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1940년 10월 일본에 주호산 원유 50만배럴을 추가 수출하자 미국과 영국은 한국 국채에 대한 조기상환 카드를 꺼내들며 압박을 가했고,[34] 야권은 방공협정으로도 모자라 한일 불가침조약까지 기습적으로 체결한 데 이어 남만주와 화국, 자허 등에 대한 수교가 공식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 이르자 다시금 반발이 터져나왔다. 군부 역시 한일 불가침조약으로 당장 북만주에서의 작전이 엉망이 되었고,[35] 그렇다고 만주전쟁에서 발을 빼지도 않은 채 갈팡질팡하는 정부에 대해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국채의 조기상환 가능성이 제기되자 평도 금융가는 휘청였고, 이에 경제계의 반응이 돌변하자 정부는 우선 3대 미수교국에 대한 수교 논의를 잠정 중단하였다.

그러나 수교 논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반공영당 기조가 강한 노동계는 본격적으로 헌정회복과 방공협정 탈퇴를 주장하며 총파업에 돌입했고,[36] 주식시장의 폭락과 환율 급등으로 닥친 불경기에 놀란 중산층들은 1941년 4월 동시재보궐선거에서 지난 15년간 아주당-공영당의 아성이었던 함경도지사에 민주당 문창학을 당선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1940년의 對野 정치파동의 영향으로 의정원 의석만 무려 27석의 미니총선급으로 치러진 이 재보선에서 공영당은 내심 과반 재확보까지도 기대했으나, 야권에게 부도지사 3곳, 의정원 19석, 시군현장 22곳, 지방의회 252석을 내준 대참패를 겪고 내홍이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파가 이해창 총재 체제에 대한 비토에 나서는 가운데, 야권에서는 명화제가 현양사를 통해 공영당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명화제 역시 선거 패배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후에 밝혀진 바와 같이 실제로 현양사에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했던 명화제는 다시금 극우 코노에 내각으로부터 친일3국 수교와 만주 종전의 압력을, 미국으로부터는 대일포위망 참여를 종용받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내의국을 통해 신경증 약을 처방받으며 버틸 정도였다.

  1. 정종 이학의 사생아
  2. 결혼 전 나시모토노미야 세이코
  3. 여은(麗恩)과 여화(麗華)는 모두 외가의 본관인 여강(麗崗)의 별호이다.
  4. 당시 이숙은 담수(淡水; 담쯔이)에 주둔중이던 주대만한국군 예하 수군육전대 중대장으로 복무중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과 대만군이 담수 요새를 포위하자 황실에서는 수군에 대만 구원을 종용했고, 황제 직속이라는 입장상 무리한 대만 방면 출동으로 전력이 분산된 수군 연합함대가 류큐 쿠메지마 서쪽 해역에서 궤멸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5. 인흥헌법에서는 육군은 내각 육군부의 지휘를 받으나 수군은 황제 직속의 수군사의 지휘를 받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한국 황실의 시조인 태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것과 함께, 수군의 육전사 전력을 황제 직속으로 두어 내각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6. 조선시대부터 장자는 본가를 이어야 하므로 양자는 차자부터 보낼 수 있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때문에 현종이 적자 없이 사망한다면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바로 다음 항렬 중 가장 가까운 차자인 여화공 이규와 명친왕 이보의 차자 의경공 이철이었다.
  7. 현재 육군무관학교 졸업자의 의무복무 기간은 최소 5년이나, 이 시기는 1차대전 종전 이후 군축이 진행되면서 1922~1927년 사이에는 최소 의무복무 기간이 3년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규의 최종 계급은 부위로 전역 시 정위로 진급하는 것이 관례이나 황실 특례로 예비역 참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8. 부유한 황족인 이규가 왜 하필 국비장학생 혜택을 받는지는 당시 한일 양국 모두에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황실 내 유력 친일인사를 후원하려던 일본 문부성과 한국 황족의 입학이라는 대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이오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유야무야되었다.
  9. 우원(優元)은 이숙의 호.
  10. 통칭 흥아신사라 불렀지만 공식 명칭은 지역명을 따 홍경신사라 하였다. 아마테라스신을 제신으로 삼았으며 평도 강남 최대의 신사로 일본인 거류민들이 많이 찾았다. 얄궂게도 흥아대학 부지가 망이·망소이의 난 때 불탄 홍경사 부지였는데, 이규는 홍경사 역시 일련정종 사찰로 재건하였다.
  11. 이규와 비슷하게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병사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군교들을 하대해 도대체 가서 뭘 배워왔길래 하나같이 이꼴이냐는 불평이 위부터 아래까지 공통적으로 나왔고 이규도 직속 상관에게서 비슷한 문제로 여러 번 주의를 받았다. 북청전선에서 연 동원병력 300만명을 갈아넣으며 서유럽과 비슷하게 초급장교와 사병들 간의 관계, 리더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한 한국군에게 일본식의 전근대적 상명하복 강요는 도저히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결국 한일 군사생도 교류는 1929년부터 중단된다. 참고로 이규에게 주의를 주었던 상관들 중 이규가 즉위할 때까지 복무중이었던 사람은 총 3명이었는데 이들은 이규가 즉위하자 바로 전역했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였으며 그 중 이규의 마지막 직속상관이었던 당시 원남 제991독립수비대대장 서상두 참령은 1951년 육군 부장으로 예편했다.
  12. 이철은 사실 황족이라는 이유로 임명된 얼굴마담에 가까웠고 실제 전쟁수행을 지도한 것은 부단장 강현 정령을 위시한 실무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고문단 자체가 곧 망할것으로 보였던 만주에게 체면치레용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라, 이철의 파견은 안그래도 애 딸린 미혼모와 결혼해 황실 체면을 구긴 데 대한 복수로 폭탄을 떠넘겨 자폭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이 당시에도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강현을 비롯한 대부분의 실무진들은 이런 고문단을 총대메고 조직해 추스르고 황족으로써 만주 측과의 관계를 중간에서 조율한 이철의 공을 인정했다.
  13. 의경공빈 성지유는 원래 원남 출신, 그것도 월남계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 이것까지는 한국 황실이 귀천상혼을 적용하지는 않으니 큰 문제가 없었는데, 그녀는 1차대전 중 한국군의 강간으로 이미 딸을 낳았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결국 이철은 평민 강하까지 불사하며 강경하게 나간 끝에 황족 지위를 유지하며 아내와 딸에게 각각 공빈과 공녀의 작위를 주는데 성공했지만, 대신 의경공 가계는 영구히 황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
  14. 미혼 공주로 제한한 것은 기혼 공주들은 이미 황실 호적에서 이탈하였다는 전통적인 관념의 문제도 있지만, 황제의 남편인 국서에게 요구되는 소양이 일반적인 부마들에게 요구되는 소양으로 갈음될 수 있냐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사실 진짜 문제가 된 것은 위의 두 언니가 모두 남편 및 시댁과 관계가 좋지 않아 당시 한국 가십지를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15. 혜종의 차남인 순친왕 당의 손자. 해원공 이규열(李揆烈)의 삼남.
  16. 순친왕의 사남 도원공 이수열(李秀烈)의 삼남
  17. 3대 문종 이후 16대 영종까지 모든 한국 황제들은 이어 출신의 황후를 맞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조선과 이어의 결합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계 황제와 이어계 황후가 그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사이에 형제승계가 2번, 조카승계가 1번, 차남승계가 2번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이어계 황후를 맞았던 우연까지 겹쳐져 이런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18. 심지어 의경공빈 성지유도 원래 수군 군무원이었다.
  19. 특히 2차 극동전쟁으로 대만이 완전히 일본령으로 넘어가면서, 한국 사회는 곧 설탕, 담배 등 각종 상품작물들의 수급처였던 원남까지 통째로 상실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고 이것이 9월 혁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10년대 한국의 대일 유화책은 원남 유지를 위한 수군 재건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처절한 노력이기도 했다.
  20. 특히 북만주 문제, 정확히는 북만주의 존속을 결정지은 강덕제 아이신교로 시하의 망명과 즉위 문제는 국정 개입을 최소화하던 현종이 전격적으로 개입한 몇 안되는 사안이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혁명으로 태자가 폐위되고 황제가 억지로 떠밀로 양위하는 등 황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패배감에 휩싸였던 차에, 그 광정헌정 하에서도 황실의 영향력이 살아있다는 몇 안 되는 사안으로써 엄청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21. 명화제가 현양사를 통해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 역시 공공연히 돌았으나, 현재까지도 몇가지 정황증거 외에 확실한 물증이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22. 486석 중 232석. 황국당과의 연정으로 간신히 과반인 244석을 확보하였으나, 단 1석 차이의 과반이었으므로 국정동력이 떨어질수밖에 없었다.
  23. 애초에 본인이 제왕수업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얼떨결에 즉위했기 때문에, 국무대신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개인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신문기사에서 지적된 내용들을 되묻는 것을 즐겼다. 심지어는 공산당 기관지도 정기구독했다. 다만 시하 공주의 망명 건 등 몇몇 사안은 본인이 직접 챙기기도 했는데, 이는 헌법에서 규정한 내각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별 문제는 없었다.
  24. 즉 국무대신이 국사 일체의 처결을 황제에게 요청하면 헌법을 위배하지 않고도 황제가 직접 국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논리.
  25. 이 점은 현종 외 황실 내 대부분의 원로들과도 의견이 일치했다. 4월 혁명이 결국 황실 폐지와 공화정으로 귀결된, 나아가 신생 대한연방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버리고 국무령제를 채택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26. 이 때문에 명화제는 잠저 시절인 1935년 2.26 사건 당시 히로히토가 쿠데타 진압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자 흥아그룹 계열 언론지들을 통해 이를 집중적으로 찬양하는 각종 기사와 사설들을 게재하기도 했다. 황도파와 교류가 깊었음에도 황도파 숙청에 호의적이었던 것을 보면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황권의 회복과 강화였다고 볼 수 있다.
  27. 애초에 19세기 말부터 이어져온 정통(?) 아시아주의자들은 공영당 노장파를 구성했다가 1930년대 일본의 폭주를 목도하고 질겁하며 공영당 자체를 이탈한 판이라, 남아있는 공영당 소장파의 친일관이라는 건 일본이 잘나가고 있으니 여기에 편승해서 한국도 한 몫 잡아보자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 안에서도 박중양을 위시한 정치명문가 중심의 구파와 박춘금을 위시하여 현양사 등 일본 극우조직들의 자금지원으로 급부상한 신파가 대립했는데, 구파는 신파를 주먹패들이라 조롱했고 신파는 구파를 (지)팽이들(지팡이나 짚고 다니는 노인네들이라는 의미)이라고 깠다. 사실 구파가 윤치호의 유임을 주도한 것도 박중양이든 누구든 구파 인사가 국무대신이 되었다간 당사를 들어엎겠다는 신파의 공공연한 협박 때문이었다.
  28. 공영당의 강세 지역은 주로 조선, 그 중에서도 북부권이었다. 만주 문제를 두고 줄창 다퉈왔던 한일 관계를 보면 조금 어리둥절할 수 있겠으나 사실 한일간의 이해관계 충돌은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어와 조선 동남부를 포함하는 서태평양 지역이 주무대였고 만주를 포함한 대륙지역이 경합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20년대 말 이후였다. 한국 유권자들이 대만(對滿)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정작 공영당의 집권을 허용한 것도, 조선 경제계가 만주 문제의 해결책으로 한일관계 개선을 기대하면서 공영당 소장파를 밀어준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29. 이미 1년 전 1938년 황하강 대범람에 산동 서부가 휩쓸리면서 국내 농산물 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는데, 여기에 1939년 추석은 9월 27일로 다소 일렀기 때문에 햅쌀 및 과일 등 제수용품들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높게 형성된 상황이었고 여기서 이어 서남부 농경지 전체가 태풍에 직격당하면서 충격이 더 컸다.
  30. 윤의섭은 당시 아버지 윤택영의 지역구(경상도 인동군선산군)를 물려받아 갓 당선된 만28세의 초선의원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봉환 처리용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1. 북만주는 당연히 즉각 항의했으나, 당장 한국의 식량파동은 한국의 대만(對滿)지원과 북만주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반대는 어려웠다. 이 시기 북만주는 남부의 농경지를 상실해 한국의 식량수출에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었고, 만주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 이후에도 한참 시간이 흘러 북부 농경지 개척이 본궤도에 오른 1960년대가 되어서였다.
  32. 김병로는 당시 평양 제칠일안식일 교회의 자금 횡령 사건을 담당, 1심에서 핵심 피의자인 김성주 장로에게 징역 6년 등 실형을 선고한 바 있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김성주가 교회 신자였던 오중흡, 최희숙(일명 최현) 등을 사주하여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이 오중흡과 최희숙이 직장에서 노조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해 있었던 것이고, 검찰은 이를 공산당 및 좌파 와해의 빌미로 활용했다.
  33. 여기에 다시 불똥이 튀어 1월 19일에는 민주당 상임고문 이승만이 불법 뇌물 수수혐의로 전격 구속기소되는 등 악재가 잇따랐고, 민주당 반일진영의 핵심 인물 중 한명이었던 그의 구속은 공영당에서 대거 이적해 온 김성수 등 대일온건파의 발언권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34. 일본은 매년 주호산 석유를 통상 150~200만배럴 정도 수입해갔으나, 이 해는 이를 훌쩍 넘긴 260만배럴을 수입했고 미국과 영국은 이 한국산 석유가 화국과 자허 등으로 재수출된다고 판단했다.
  35. 1940년 당시 만주전선에 투입된 일본 관동군 병력은 3개 사단 6만여명 수준이었다. 당시 남만주측 동맹군대들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전력인 관동군이 매번 한국군 전방에 배치되자 10만에 달하는 주만한국군은 꼼짝없이 발이 묶였고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악한 북만주군은 숫적으로 우세한 화만동맹군의 파상공세에 시달렸다. 물론 불가침조약 이전부터 내각은 계속해서 일본군과의 정면 충돌을 자제하도록 압박했기 때문에 한국군이 화끈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대대~연대급 작전 정도는 꾸준히 수행하고 있었다.
  36. 화국과 수교 시 싼 인건비의 화공(華工)들이 대거 유입되어 노동시장을 장악할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실제로도 항만 등 비숙련 임노동자가 위주인 일부 업계는 대놓고 이를 기대하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