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말·서진시대 국령
201 ~ 300
단주국령
(丹州國領, 201~300)
1대 2대 3대 4대 5대
무련
(201~231)
무휴
(231~234)
무란
(234~279)
이국
(279~281)
여원
(281~300)
초대 단주국령
무련 / 흥문왕
武憐 / 興文王
시호 흥문왕(興文王) / 단주대왕(丹州大王)
성씨 / 휘 무(武) / 련(憐)
재위 기간 201년 4월 3일 ~ 231년 1월 17일

무련(중국어: 武憐, 165년 3월 15일-231년 1월 17일) 또는 흥문왕(중국어: 興文王)은 후한(後漢) 말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吳國)의 인물이다. (字)는 형랑(炯浪).

산명 왕조(山鳴王朝)의 명제(明帝)는 그를 '흥문단주대왕'(興文丹州大王)으로 추존했다. 단주(丹州) 일대를 처음으로 장악한 권력자였으나, 손권(孫權)이 파견한 제갈직(諸葛直)과 위온(衛溫)이 이끈 오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생애

무련은 165년, 단주에 위치한 무산현(霧山縣) 시월만(示月灣)에서 태어났다. 단주는 당시에는 '이주'(夷州)라고 불리던 대만(臺灣) 옆에 붙어 있던 섬이었고, 교주(交州)와 함께 한나라(漢國)가 제대로 지배했던 시기가 전무했던 곳이었다. 그래도 진나라 관리였던 조타(趙佗)가 남월(南越)을 세우는 등 점차 한자 문화권의 영향을 받던 교주와는 달리, 단주와 이주는 1세기에 이르러까지 부족들이 나뉘어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는 원시 사회가 유지되었다.

본래 무련의 가문은 월국(越國) 낭야(琅瑘)가 본관이었는데, 그의 선조가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나라(新國)가 세워지던 혼란기를 피해 단주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의 가문 사람들은 여러 부족들에게 문자를 비롯하여 철기·우경 등의 선진 문물들을 전달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단주 일대를 아우르는 통치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1]

무련은 젊어서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학문을 스스로 익혔으며, 많은 이들이 그의 덕(悳)에 감복했다. 아버지의 상을 치른 이후에는 스스로 단주태수(丹州太守)에 올라 직접 통치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통치 동안 이민족들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후한(後漢)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업 기술을 들여와 땅을 개간하고 교육을 중시하여 직접 유학을 가르치는 등의 행보로 사회를 발전시켰다.

201년부터 손권(孫權)에게 종속되었고, 손권은 그를 '단주자사'(丹州刺史)로 인정했다. 그 이후부터 단주는 매년 오나라에게 진상품을 보냈다. 210년에는 아들인 무류(武柳)를 인질로 보냈으며 이에 손권은 그를 비롯한 가문 사람들을 모두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했다. 이때 무련은 사자를 보내며 손권을 알현할 때마다 진귀한 보물들을 한 해도 빠짐없이 바쳐 총애를 받았고, 손권 또한 항상 편지를 보내면서 후한 상을 내려 보답하였다.

각주

  1. 이연휘(李連彙),《대단사기(大丹史記)》외기(外紀) 권2 흥문왕기(興文王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