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미국 폭격기를 피해 급선회하는 히류
날짜1942년 6월 4일 ~ 1942년 6월 13일
장소미드웨이 섬
결과 일본 제국의 결정적 승리, 미드웨이섬 점령
교전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체스터 니미츠
미국 프랭크 플레처
미국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일본 제국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제국 나구모 주이치
일본 제국 야마구치 다몬
일본 제국 야마시타 토모유키
병력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7척
함재기 233기
지상전투기 127기
일본 제국제국해군
항공모함 7척
경항공모함 5척
전함 7척
순양전함 4척
중순양함 11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11척
함재기 792기
일본 제국제국 육군
강습상륙함 10척
1개 상륙사단
피해 규모

항공모함 3척 격침
중순양함 7척 격침
경순양함 1척 격침
구축함 11척 격침
구축함 3척 대파
함재기 233기 파괴

10,540명 전사

항공모함 1척 대파
항공모함 1척 중파
순양전함 1척 대파
순양전함 1척 중파
중순양함 1척 격침
중순양함 1척 중파
함재기 176기 파괴

7,320명 전사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ミッドウェー 海戦)은 1942년 6월 5일(미국 시간 6월 4일) 태평양의 전략 요충지인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제국 항모기동부대가 미국 항공부대와 접촉하여 전투를 개시하여, 압도적인 전력차로 미국 항공부대를 궤멸하고 미드웨이 섬을 점령한 전투이다. 또한 최초로 일본 제국 해군과 육군이 합작한 전투로 기록되어있다.

미드웨이 해전은 산호해 해전에 이어서 처음부터 전투함의 포격전 없이 항공모함 함재기로 치뤄진 두 번째 전투였다. 서로 직접 보는 일 없이 오직 항공기만으로 승부를 냈다.[1] 이 전투에서 일본 제국은 미국의 항공모함 3척을 격침시켜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미군에게 본토 공습의 가능성을 막아버렸다.

배경

일본이 산호해 해전에 이어 미드웨이 공략을 결심하게 된 것은 동일본 공중전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의 군 지휘부는 외국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풍 같은 자연 현상이나 천황에 대한 미신적인 신봉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교전국 중에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일한 두려움이었던 소련은 일본이 건드리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해 적대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2] 동남아시아 근해와 태평양의 제해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연합군 해군(주로 영국군)은 인도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이었으며, 미국도 진주만 공습의 여파에서 회복이 덜 되었을 뿐 아니라, 항공모함도 적었다. 또한 태평양을 가로질러 날아올 수 있는 대형 폭격기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의 서태평양 출현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감시선의 미군 쌍발기 발견 보고를 받은 육군은 즉시 육상전투기를 출격시켰고,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계획은 동일본 공중전으로 궤멸되었다. 역사상 한 번도 외국군에게 본토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던 일본은 적군의 항공모함이 그렇게 가까운 곳까지 들어와 공격 부대를 날려 폭격하려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혹했고, 외해의 방어선을 더 멀리 확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최전방 기지는 미드웨이 섬에 있었고, 야마모토 제독은 이곳을 지목했다. 미드웨이 섬에는 이미 해병대해병 항공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미국은 이곳의 무장을 확충하는 중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이곳을 점령하여 일본의 최전방 기지로 삼아 예상되는 미국의 일본 본토 공격을 저지할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계획과 준비

일본의 작전 계획

일본은 미드웨이를 공격하기 위해서 알류산 열도를 함께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야마모토 제독은 이 계획에 “M1 계획”이라는 암호명을 부여했고,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알류샨 열도애투 섬키스카 섬을 점령함으로써 알래스카를 거쳐 북쪽에서 일본을 위협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주목표인 미드웨이 섬에는 신경을 못 쓰게 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알류샨 열도에 대한 공격은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보다 앞서 이뤄지게 했다.
  2. 미드웨이 점령 :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여 하와이 및 미국 본토 공격의 발진 기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의도했던 대로 미국 해군의 작전 거점을 미국 본토로 철수시킴으로써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3. 잔존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멸 : 이번 공격에서 야마모토는 지난 번 진주만 공습 당시 놓쳤던 미국의 항공모함들을 잡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 태평양 함대가 출동하지 않으면 손쉽게 미드웨이 섬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점령 이후의 작전 계획도 수립했다. 미드웨이를 점령하면 전함 부대는 일본으로 복귀하고, 나머지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된 기동 함대를 그대로 남태평양으로 보내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섬피지 제도를 점령하고 오스트레일리아시드니멜버른을 폭격하고, 8월에는 하와이를 점령한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이 요구하는 협상안에 서명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야마모토의 생각이었다.

이 작전은 본래 일본 대본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반대한 작전으로, 둘리틀 공습작전 누출 이전에 수립된 계획이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후에도 태평양의 미국 항공모함들이 늘 신경 쓰였고, 이들을 찾아내어 모두 침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본영은 진주만 기습 이후 계속 “남방,” 즉 동남아시아와 남서 태평양 공력에 가용한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 애초 전쟁 목적이 외국으로의 주의 전환이었기 때문에 가장 손쉬운 전과를 올릴 수 있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레이시아 반도싱가포르,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인도네시아관동군 및 중국 침략군을 제외한 병력을 모두 남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위협적인 배후를 남겨둔 채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리틀 공습작전이 누출되어졌고, 미국의 항공모함 운용능력이 일본과 비슷한 수준임을 과시하는 듯한 산호해 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파들도 작전 결행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파일:Midway Atoll.jpg
전투가 있기 몇 달 전에 찍힌 미드웨이 섬의 사진. 보통 미드웨이 섬 사진으로 이 사진이 많이 알려져 있다. 정면에 보이는 활주로가 있는 섬이 이스턴 섬이다.

우왕좌왕하는 미군 참모부

1942년 5월 20일의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통신문은 태평양 함대에서 감청되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육군과는 별개로 1939년부터 개발한 0식 전문인자기를 통해 이, 로, 하 세개의 별개 문자열로 구성된 암복호화 장비를 전 함정에 보급한 상황이었다. 약 15일 단위로 문자열이 변경되었으며 이를 통제하기 위해 1달치의 전문인자기운용지시명령서를 함당 1개씩 배부받았다. 이 전문인자기의 암호를 미군은 해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급증한 통신문 전달 동향 수신으로 곧 대규모 해상작전이 예정되어있음을 심증했다.

니미츠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미드웨이 또는 하와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통신문을 해석하지 못하는 한 폭격기 등 어떠한 지원도 할 수 없다는 육군과 미드웨이가 아니라 하와이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강한 의중을 느낀 니미츠는 미드웨이에 항모부대를 해상연습하러 보낸다는 명목으로 밖에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5월 29일에는 돌연 육군이 폭격기를 지원하겠다고 하고 미드웨이에 육군항공기를 파견하였다. 니미츠는 이 기회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드웨이 방어를 위한 함대파견을 요청했으며, 5월 30일 자정이 지나서야 함대를 파견하고 미드웨이 보수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광적인 집착

야마모토 사령장관은 이번 MI작전에 어떤 문제적 요소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수리중이던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최대한 빨리 수리토록 하고 서둘러 출격시키려고 압박했다. 연합함대 본대 역시 최전방으로부터 불과 20KM까지 격전간 진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야마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대본영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야마토를 쓸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일본의 7대 전함을 모두 최전선에 투입하였다. 육군에의 상륙전 지원 요청에 육군이 이런 계획에 줄 도움 따위는 없다고 면박주었음에도 많은 해군 장교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야마시타 사령관에게 찾아가 개인적으로 부탁할 만큼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결국 육군이 1개 상륙사단을 내어주기로 결정하면서 육해군 합작의 첫 상륙전이 예정되었다.

야마모토 사령장관은 그만큼 미드웨이 섬 점령, 나아가 하와이 점령을 통한 본토 방위선 확장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전투

전초전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약 하루전인 1942년 6월 3일 오전 7시 46분,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의 정찰기가 스프루언스 함대를 발견했다. 당시 야마모토 사령장관은 미군이 미드웨이 주변 해상에 항공함대를 배치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작전의 속행을 명령했다.

오전 9시 30분 경에는 미드웨이 육군항공대의 정찰기가 일본의 수뢰전대를 발견했다. 미드웨이 상륙전이 일본의 목표임을 확신한 니미츠 사령관은 바로 항공모함 부대를 일본군의 위치로 접근시키기로 결정하고, 한 시간뒤인 10시 20분에 미군 육군항공대가 B-17폭격기를 출격시켰으나, 수평폭격의 한계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오후 8시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를 추가로 발진시켰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6월 4일 오전 2시 경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 20기를 추가로 발진시켜 주변 해역을 모두 정찰할 것을 명령했다.

미드웨이 공방전

  1. 미군은 미드웨이 섬에 주둔한 미국 해병 항공대의 전투기도 가담했고, 일본군은 미드웨이 섬에 함포 사격도 하였으나, 전투의 승패는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결정했다.
  2. 전 해인 1941년부터 독일과 전쟁을 시작한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침략한 것에 안심하며 시베리아 주둔군을 유럽으로 돌렸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 것은 독일과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뒤인 1945년 8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