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즈랜드

United of Middlesland
미들즈랜드 연방
中大洋洲 聯邦
Flag of Middlesland.png Coat of arms of the Middlesland.png
국기 국장
표어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는가!
국가 "God Defend Middlesland!"
신이시여, 미들즈랜드를 지켜주소서!
Map of Middlesland.png
수도 애들버러Adelburgh
최대 도시 토리루안Toriluan
정치
공용어 영어, 미들즈랜드 수화
국민어 한국어, 표준 중국어, 일본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등등
지역어 매니리쉬어 포함 토착어
연방 원수 헬렌 케이트 로던
Helen Kate Lordern
연방 세습 대표 루이스 바이너 미들란드
Louis Vyner Middrand
역사
독립 선언 1817년 5월 3일
 • 5국 영구동맹 체결 1823년 4월 15일
 • 미들즈랜드 조약 발표 1831년 7월 9일
 • 코스타리아 전쟁 1843년 4월 - 1844년 7월
 • 토미어스 조약 체결 1898년 11월 1일
 • 실라너바 충돌 1932년 1월 23일
 •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 1945년 8월
지리
면적 638,570㎢ (45 위)
내수면 비율 1.8%
시간대 MST (UTC+12)
인구
2018년 어림 약 34,346,300 명
2019년 조사 34,367,457명 (39위)
인구 밀도 53.7명/㎢ (114위)
경제
GDP(PPP) 2019년 어림값
 • 전체 $1조 297억 (26위)
 • 일인당 $29,979 (45위)
통화 미들즈랜드 달러 (M$)
기타
ISO 3166-1 037, ML, UML
도메인 .ml
국제 전화 +62

미들즈랜드 연방(영어: United states of Middlesland, 중국어: 中大洋洲 聯邦)은 오세아니아(Oceania) 지역의 속하는 나라로서, 미들즈랜드 본토(Continental United states of Middlesland)와 함께 많은 섬과 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일본(日本)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도서 국가들과 함께 파푸아뉴기니(Papua Niugini),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뉴질랜드(New Zealand) 등이 위치하고 있다. 관습적으로 연방의 수도는 애들버러(Adelburgh)이나, 연방 정부의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에만 치중하고 있으며, 나머지 주요 도시로는 연방 내 최대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는 토리루안(Toriluan)을 비롯하여 골디버른(Goldiburn), 노던블루프(Northernbluff), 후글리 브룩(Hooghly Brooke) 등이 있다.

미들즈랜드 연방의 수립 전까지 미들즈랜드를 이루는 소속국(State)들은 국방과 통화를 비롯하여 완벽한 자치권을 유지하여 독립적인 면모를 보였고, 연방의 수립 이후에도 연방 정부는 이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에 지날 뿐, 각 연방 소속국들의 고유한 정치 체계와 입법권, 행정권 및 심지어 연방군을 제외한 각 연방 소속국의 관할된 군사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의 이주 이전까지 최소한 40,000년 전부터 미들즈랜드 원주민(Indigenous peoples of the Middlesland)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1606년 네덜란드 공화국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미들즈랜드를 발견한 이후 1790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 미들즈랜드의 동부를 자국의 식민지로 선언하면서 유럽 이주민들에 의해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었다. 그 뒤 1790년대부터 세워진 뉴이스트코스트 주(New East Coast State)의 식민지로 죄인과 정치범들을 수송하여 정착시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유럽인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미들즈랜드의 사람들은 모국인 영국에 대한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점차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에따라 뉴이스트코스트 주의 정착민들은 본국인 영국에 대해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였고 1817년에 뉴애덤스 독립 선언에 의거하여 뉴이스턴코스트 주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애던베니아 공화국(Republic of the Adamsbenia)이 건국되었다. 이후에 미들즈랜드 제도(Middlesland Islands)가 지속적으로 개척되면서 애던베니아 공화국의 확장 방임 정책에 의거하여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난립하였으나, (난립기, 1817-1823) 작은 군소 국가들은 일부 큰 국가로 통합되어 갔으며 1823년, 5개의 국가로 좁혀진 미들즈랜드 본토는 이들 5개국을 주축으로 하여 외세의 침입과 주권 침해 및 생명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목적으로 한 5국영구동맹의 체결을 선언하였고, 이는 곧 지금의 미들즈랜드 연방 성립의 시작을 알렸다.

미들즈랜드는 명목상의 연방 원수(Head of state)를 선출하여 연방을 대표하고 있으나, 연방 원수의 실질적 권한은 극히 미비하다. 각 소속국들은 독자적인 정치 체계와 환경에 맞는 나름대로의 대표들을 선출하고 있으며, 이들 중 군주나 총독을 비롯하여 지위 세습제를 채택하고 있는 소속국들 간에는 나름대로의 협의를 통해 일정 기간의 임기를 갖춘 세습 대표(Dictator-General of Middlesland)를 따로 선출하여 연방 원수의 직무와 권한을 보조하는 역할을 행하도록 하고 있다.

미들즈랜드 연방 성립 이후부터 연방 정부와 함께 대다수의 연방 소속국들은 대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광역 민주정(廣域民主政) 정치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현재 미들즈랜드는 7개의 자치 국가들과 3개의 준주, 5개의 특별구 및 자치령으로 구성하고 있다.[1] 연방의 인구는 대략 3,340만 정도이며, 이들 미들즈랜드의 인구 대다수는 연방 내에서도 높은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애던베니아 공화국에 밀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외에도 도시화 비율 또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으며, 상당한 산업화를 이룩한 국가이기도 하다.

미들즈랜드는 GDP가 세계에서 26번째로 높고, 1인당 GDP는 45번째로 높은 대표적인 선진국이다. 인간 개발 지수에서 6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미들즈랜드는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등 상대적으로 다양한 국가들과의 비교에서 높은 순위를 연거푸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들즈랜드는 G21, OECD, WTO, APEC, 국제연합, 맨저스(MANZUS), 태평양 제도 포럼에 가입되어 있다.

국명

현재 정식 국호인 미들즈랜드 연방(United States of Middlesland)를 사용하고 있으며, 한국어권에서는 한자 음역인 미달주란토(米達州爛土)를 줄인 '미란'(美蘭)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한자권에서는 중대양주연방(中大洋洲聯邦)으로서 지칭되고 있다.

어원

미들즈랜드라는 국명은 영국 노스요크셔 주의 위치한 미들즈브러(Middlesbrough)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영국의 탐험가였던 제임스 쿡(James Cook)의 3차 항해에서 베링 해협을 지나고 하와이를 통해 본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원주민들에게 살해된 뒤 남은 선원들이 이 섬을 발견함에 따라 그의 고향이었던 미들즈브러의 이름을 따서 '미들즈랜드'라고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에 영국의 탐험가, 매슈 플린더스(Matthew Flinders)가 위 명칭을 재언급하였고, 뉴이스트코스트 주의 첫번째 총독이었던 아더 롤런드(Ahther Rowland)가 해당 지명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서 굳혀지게 되었다.

역사

미들즈랜드의 역사는 몇만 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파뇽-누아르(PaNyong-Nyuar)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버리진(Aborigine)과 함께 고대 인류와 DNA가 가장 비슷한 종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고대 일본의 문헌에서는 이 곳을 몽환향(夢幻鄕)이라는 언급을 통해 전설로만 인식해 왔고, 그 실체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구체화하지는 못하였다. 이후에 17세기경 이르러서야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 소속의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이 지역을 목격한 기록으로부터 실질적인 문헌 역사가 시작했으며, 1770년에 영국의 선장 제임스 쿡하와이(Hawaii)에서 사망한 뒤, 남은 선원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이 곳을 발견하였고, 본격적으로 이곳을 탐험하였으며, 1790년부터 영국의 늘어나는 죄수들과 함께 미국독립혁명(1776)으로 인한 새로운 식민지 개척의 필요성을 느낌에 따라 태평양에서 이를 찾기 시작하였으며, 본격적인 미들즈랜드의 식민 개척을 위해 아더 롤런드가 900여 명에 인원을 실은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지금의 애던베니아 공화국, 애들버러에 도착하면서 미들즈랜드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역사와 발전

미들즈랜드의 원주민인 파뇽-누아르는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넘어온 애버리진과 나뉘어져 지금의 미들즈랜드로 도착한 인류였다. 그 후 2~4만 년 간 간빙기가 옴에 따라 다른 대륙 및 지역들과 동떨어 지면서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되었다.

처음 유럽인들이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네덜란드 공화국의 탐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뒤에 북쪽 지역에 대한 탐험을 시도하여 미들즈랜드를 발견함에 따라 이곳을 니우오라녜(Nieuw-Orange)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미들즈랜드를 발견했을 때에는 약 30만 명의 원주민(파뇽-누아르)들이 10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수백 개의 언어 및 수백 여 개의 방언을 사용하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부족들은 각자 고유한 종교 및 원시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몽환시(夢幻時)에 대한 전승은 대개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는 이곳에서 또다른 식민 사업을 계획했으나, 이전에 네덜란드 탐험가들에 대한 지원 경비가 가중되었고, 이와 반대로 수익은 늘지 않았기에 곧장 미들즈랜드에 대한 개척을 중단하였다. 이후에도 아벌 타스만(Abel Tasman) 등을 비롯한 탐험가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나, 니우오라녜에 대한 현지 조사에 대해 모두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이 곳에 대한 탐험 열기는 금세 식었다.

1779년, 제임스 쿡의 3차 항해를 과정에서 제임스 쿡이 하와이 발견 이후에 현지 원주민들에게 살해됨에 따라 남겨진 선원들이 돌아가던 중, 지금에 미들즈랜드를 발견하였으며, 이들은 지금의 애들버러 일대에 대해 ‘국왕의 이름과 국왕의 깃발 아래’ 점령할 것을 선언하고서, 뉴이스트코스트(New East Coast)라고 명명하였다. 당시 선원들은 뉴이스트코스트 지역에 대한 현지 조사를 철저히 수행한 후에 충분한 농업 개발이 가능한 식민지 형태로서 활용할 수 있음을 판단한 후에야 본토로 귀환을 택했다.

이후에 영국의 주도적인 개발이 실시됨에 따라 1790년 4월 21일, 아더 롤런드가 이끄는 8척의 배에 900여 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애들버러 항구에 도착하고 뉴이스트코스트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농지 개발은 빠른 속도로 진척되지 않았다.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91년까지 약 8만 명에 달하는 죄수와 정치범들이 미들즈랜드로 호송되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1790년대 중반에도 세계 각지에서 자유를 찾아 넘어오는 정착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건설과 독립

아더 롤런드 이후에 뉴이스트코스트 주의 식민지 총독들은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이후에 본토에서 발생한 재정 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에 대해 가혹한 세금을 부여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과거 미국에서 행해졌던 식료품세와 인지세를 주민들에게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에 뉴이스트코스트 주의 주민들은 초기에는 본토 영국에 대한 평화적인 과세 폐지 요구를 시도했으나, 이를 식민지 정부가 무차별하게 탄압하였으며, 이러한 차별 대우에 대해 영국 본토에 대한 반감이 강해졌고, 특히나 본토에서 정치범으로 강제 이주된 이들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영국 인민과는 다른, 미들즈랜드인(Middleslandian)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 결과 1817년, 당시 영국 정치범으로 강제 이주해 왔던 지식인, 제프리 브랜트(Jeffery Brant)를 중심으로 식민지 주민들은 식민지 청사를 습격하여 식민지 총독을 감금한 뒤, 일방적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을 선언했다. 본토 영국은 1812년 전쟁(미영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연거푸 겪으면서 또다른 전쟁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영국은 결국 이들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식민지 총독을 비롯하여 영국왕립해군 및 그외 식민지 관리를 위한 인력들에 대한 평화적인 철수를 조건으로 한 조약에 대해 체결했다.

독립을 선언한 뉴이스트코스트 주는 독자적인 헌법과 상비군을 조직하고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 수립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1818년, 미들즈랜드의 독립을 이끈 제프리 브랜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식민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을 선언하는 한편, '애던베니아 공화국'이라는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애던베니아 공화국은 뉴이스트코스트 주의 영역을 계승하였으나, 추가적인 영역 확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미국이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의 정면적인 무력충돌이 빙자했던 것과는 달리, 과거 영국에서 비롯된 탄압적인 식민 정책을 원주민 탄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제프리 브랜트는 정착민들의 토착 민족에 대한 선교 활동을 허용하고 이들과의 공존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파뇽-누아르들과의 공존을 위한 조약 과정에서 '공존'에 대한 개념의 기준이 모호한다는 점을 들어 몇몇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파뇽-누아르와의 공존을 명목으로 원주민들의 생업을 방해하고 토지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 하는 점을 통해 맺은 불평등한 토지 계약으로 여느 국가들과 다를 바 없이 공공연한 탄압을 받게되었다. 애던베니아 공화국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려 했으나, 재프리 브랜트의 뒤를 이은 정부가 공존 정책에 대해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방임'을 선언하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묵인되어 가속화 되었다.

이로 인해 원주민들의 활동 구역은 점점 좁혀지면서 본토 남부와 여러 도서 제도로 내몰리게 되었고, 원주민들이 쫓겨난 곳을 이주민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미들즈랜드에서 거의 유일했던 근대 국가이자 이들에 대한 통솔력을 갖추던 애던베니아 공화국 정부가 영역 확장을 시도하지 않고 있음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고, 이들은 점차 마을에서 각종 산업 시설을 갖춘 도시 혹은 국가에 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 건설 활동이 제한없이 진행되면서 곧 미들즈랜드 전역은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게되었고, 이는 5국영구동맹이 체결되는 1823년까지 진행되었다. 이런 혼란기에서 자칭 '건국자'가 되기 위해 나선 이들을 필리버스터(Filibuster)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러한 필리버스터들의 활동은 끊임없는 혼란과 전쟁을 야기했다.

연방의 수립과 갈등

이후 필리버스터들이 세운 수많은 군소국가들은 점차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시아인들의 이주로 또 다른 세력권이 성립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기는 1820년대로 넘어가면서 호전되었고, 1823년에는 크게 5개의 국가들로 좁혀졌다. 이에 당시 뉴코스트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워커(James Walker)는 애들버러에서 각 국가들의 통합 및 협력을 목적으로 한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들 5개의 국가 정상들이 모여 공동 대응을 추구하는 5국영구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지금의 미들즈랜드 연방의 시작점을 알렸다.

미들즈랜드의 점진적인 통일을 기반으로, 필리버스터들의 난잡한 활동으로 본토 남부로 몰리게 된 원주민들은 이들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부족 연합 국가였던 카나와가 토착국(United States of Indigenous Kanawaga)를 건국하였으며, 1825년에 5국영구동맹에 추가로 가맹하였다. 이후에 뉴코스트 공화국과 인근 국가들은 공업, 어업을 중심으로, 카나와가를 비롯하여 본토 남부 및 북부의 국가들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플랜테이션에 기반된 농업을 중시하였다. 이에따라 더 뉴코스트(The New Coast)는 인간 평등과 자유에 기반된 평등제를 중시하였기에 노예제를 금지하는 한편, 더 사우턴 앤 노스턴(The Southern and Northern)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뒷받침 할 노동력을 이유로 노예제 유지를 선호했다. 이러한 갈등은 연방 내에서도 첨예해졌으나, 각 국가에 대한 불간섭을 이유로 하여 코스타리아 전쟁(Costaria War)을 제외하고서는 이러한 갈등이 무력 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노예제의 불만을 품은 각 국가들의 노예들과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내부 봉기로 노예제는 스스로 붕괴되는 수순을 맞이하게 되었다.

1829년부터 진행된 오로그란데(Orograde) 운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미델홀란트(MiddelHoland)와 베스트유니티아(Best Unitia)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기 위한 중앙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각국의 정상들은 베스트유니티아섬베스켈라(Sumbeskela)에서 모여 5국영구동맹의 이념과 목적을 계승하는 한편, 통합의 구심점을 위한 연방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 1831년, 미들즈랜드 조약(Treaty of Middlesland)을 체결하여 연방 정부를 구성하기 시작, 초대 연방 원수로서 당시 애던베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마틴 필리지(Martin Filridge)를 중심으로 초대 연방 정부의 수립을 알렸다. 구성된 연방 정부는 오로그란데 운하에 대해 양국의 군사 주둔 및 공동의 개발 및 경제 개입을 인정하되, 독자적인 특별구(District)로 둘 것을 전제로 합의하였다.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부의 헤이던(Heyden) 가문을 군주(Monarch)로 했던 인데란드(Inderand) 내부에서는 군주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군주권을 옹호하던 근왕파와 군주권을 제한하려는 제한파 간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특히 이들의 갈등은 인데란드의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보호무역과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는 제한파, 플랜테이션 농업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유 무역과 노예제 찬성을 주장하는 근왕파간의 갈등은 단순한 파벌 대립에서 정쟁으로 격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1843년, 코스타리아(Costaria)는 인데란드에서 가장 공업화된 도시였으며, 다수의 노예제 폐지 및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제한파와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상당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제한파는 공장을 경영하기 위하여 풍부했던 원주민들을 활용하려는 시도를 벌여왔는데, 반대로 인데란드의 상당한 농업용 토지를 보유하던 복벽파들은 영국과 일본으로부터 면화 수요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복벽파가 운영하던 플랜테이션에서는 원주민들을 노예로서 활용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원주민들의 처우에 대한 대립은, 인데란드의 복벽파가 코스타리아에 대한 아에스타(Ahesta)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내전으로 치달았다. 초반에는 복벽파가 상당한 우세를 바탕으로 제한파를 몰아붙이는데 성공했으나, 제한파는 지속적으로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 인델리(Indely)에서 보복전을 벌이려던 복벽파측 기병대가 제한파의 후방까지 밀고 들어가려던 중 미리 인델리 근처의 구릉지대를 장악했던 제한파의 보병대가 반격을 시도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결국에는 상당수의 지역을 빼앗긴 복벽파는 최후의 거점지였던 벤더스 힐(Wenders Hill)에서 제한파 군대에게 저항하려고 했으나, 제한파의 맹공으로 주춤하기 시작했고, 이에 복벽파는 전세 역전을 위해 다수의 보병 사단으로 돌격했으나, 벤더스 힐 주변으로 복벽파의 반격을 기다리던 제한파 군대들의 에워싸지면서 탁 트인 평원 위에 놓여있던 복벽파 군대들은 격파되는 수모로 내전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에 인데란드에서는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신흥 귀족들이 정계를 장악하였고, 이름으로나마 남아있던 노예제는 1850년대에 공식적으로 폐지가 선언되었다.

코스타리아 전쟁을 끝으로 1890년대까지 미들즈랜드는 전란이 없는 평화로운 기간(1844~1890)을 맞이하게 됨에 따라 경제적, 사회적인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하는 황금 시대(Golden Age)를 맞이하였다. 이런 소식은 미국의 도금 시대(Gilded Age) 이전에 중산층 계급의 이민자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미들즈랜드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상당수의 일본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아시아 이민자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이자 하위 노동자 계급을 주로 이루었기에 미들즈랜드 전역에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이들의 이주를 관대하게 여겼던 베스트유니티아 조차도 이들의 괴리한 생활 양식과 내부 다인종 사회간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탄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들 아시아 이민자들은 결국, 수많은 군소 세력과 국가들로 구성되었던 연방 소속국, '베스트 테미니아'(West Teminia)에서 기존의 군소 세력들을 몰아내고 독자적인 세력권과 일종의 도시 연합, 도시 국가를 수립하여 미들즈랜드 내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게 되었다.

황금 시대에는 각 지역별로 독자적인 농지법을 추진하였고, 이들 상당수는 1860년대에 미국에서 추진된 홈스테드 법을 따라한, 자영농지법을 기획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코스타리아 전쟁 이후에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연방적 움직임에서 비롯되었으며, 플랜테이션 농업의 종말과 함께 중산농민층을 양성하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영농지법들은 증인과 청구자간의 청탁, 공유지로 관리되어야 할 임지와 광산 인근에 대한 개척을 통한 사유화 시도, 그 외에도 농지의 활용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나여 자원 차지라는 의미로 변질될 요소가 농후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소속국들이 추진한 자영농지법들은 자연스레 폐지되었다. 한편으로는 연방 정부의 기획 아래 연방종단철도를 통한 남북 교류를 강화코자 했고, 1875년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종단 철도가 개통되면서 미들즈랜드 연방의 결속이 강화되는 효과를 맞이한 것은 물론이요, 물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롱 드라이브등의 새로운 생활 방식, 국내 시장 확대 등의 큰 이점을 가지고 왔다.

제국주의 시대와 1차 세계대전

황금 시대의 종결은 미국이 서부 개척 시대(1865-1890)를 끝맞치고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팽창 정책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곤봉 외교달러 외교로 경제 진출을 꾀하고자 했다. 특히나, 미들즈랜드를 위협한 것은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 1898)으로서 미국이 양면전쟁에 수행에 따른 필리핀 전역으로의 활동에 나서면서 연방을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느꼈다. 특히나 미국은 필리핀을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추가적인 전진기지를 삼기 위한 또 다른 전진기지의 후보지로서 미들즈랜드를 꼽으려 함에 따라 연방의 소속국들은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군함 건조에 착수하고 기존의 코스타리아 전쟁에서 머물던 군사 교본을 수정하고 독립적으로 조직되었던 각 소속국들의 병력을 연방에서 통합하여 '미들즈랜드 연방군' 조직을 시도하는 등 군사적인 면에서 여러모로 진일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러한 군사력 발전은 과거 5국영구동맹에서도 비롯된, 외세에 대한 공동 대응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들즈랜드의 소속국들은 군사적 발전과 함께 5국영구동맹미들즈랜드 조약에 의거하여 미국과 같은 국제 사회에 대한 고립 정책을 일관해 왔던 정책의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서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으로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을 지켜보았던 것과 함께 아시아에서 상당한 국력을 갖추게 된 일본이 자행하는 제국주의를 눈여겨 보게 됨에 따라 연방의 소속국들은 각자가 갖추고 있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활용하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연방 중심의 고립주의를 폐기하고 국제 여건에 발을 딛기 위해 토미어스 조약(Tomius Treaty)을 맺어 팽창주의를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미서전쟁 이후 필리핀 도독령으로부터 강매를 통해 획득한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등이 있다. 이외에도 본토 주변에 개척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 미들즈랜드 영역(Middlesland Territory)를 선언하여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에 열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연방 원수, 알프레드 미니스건(Alfred Minisgan)은 연방 차원에서의 중립을 선언하여 연방 소속국들의 무분병한 대전 참여를 억제코자 했고, 전쟁 중반까지는 이러한 중립이 큰 효용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독일령 뉴기니 개입과 함께 동남아시아, 태평양 진출을 시도하여 미들즈랜드의 태평양 영향력을 간섭하고 대서양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 과정에서 독일제국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상당수의 연방 소속 상선들이 격침되고 연방 내에 독일계 이주민들을 압박하여 연방의 외교 및 내부 정책을 간섭하려던 일(라폴드 아이크스 사건, La Folld-Ickes Incident)이 발생하자, 연방내 대독감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연방 내 여론이 주전파로 급물살을 타게 됨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선언하였고, 유럽 전역에 약 1만 명에 달하는 미들즈랜드 연방군(United Forces of Middlesland)을 조직하여 파병하였다. 이후 1918년, 동맹국이 항복함에 따라 승전국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베르사유 조약으로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미크로네시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목적이었던 태평양 세력권 확장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결과적으로 승전국이었으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와 특수 호황 외에 더이상의 외부 확장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는 대공황(大恐慌) 이후에 발현된 일본의 군국주의에서 미들즈랜드와의 충돌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2차 황금 시대와 대공황

승전 이후에 연방은 급격한 전쟁 호황을 맞이하여 2차 황금 시대(Second Golden Age)라 불리는 호황기를 누렸는데, 미국의 영향을 받은 방임적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로 인해 전 분야에서 획기적인 산업 발전이 이루어졌고, 연방의 중산층을 비롯한 전 국민적으로 윤택한 삶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악성 재고로 인한 국내 소비 한계와 함께 1929년 미국발 세계대공황으로 연방의 경제는 휘청거리게 된다. 연방 소속국들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연방 정부를 중심으로 해결 구심점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에 휴 로렌스(Hugh Lawrence) 연방 원수는 연방 소속국들을 위시한 블록 경제를 이룩하는 한편, 뉴딜 정책의 영향을 받아 공공 건설을 늘리고 사회 보장 제도를 확립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경제 위기 극복에 나섰고,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징조가 보이면서 각국의 군비 확장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호경기를 맞이함에 따라 겨우 결실을 맺었다.

한편으로 1930년대부터 일본 제국만주사변, 루거우챠오 사건 등의 군국주의의 폭발과 함께 각국에서의 파시즘의 영향으로 연방 내부에서도 군국주의를 위시한 정권이 들어서려는 시도가 있었다. 1936년, 미들즈랜드 연방의 영역권이었던 실라너바(Szilanevar) 제도에서 일본의 함대 진입에 대한 연방 해군간의 마찰이 발생하면서 연방내 친일 파시즘 세력은 급속도로 그 영향력을 잃었고, 일본 제국과 미들즈랜드간의 외교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각주

  1. 베스트 테미니아(West Teminia) 지역의 수많은 군소 자치국, 행정시들은 제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