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키 유독 사건

미라이키 유독 사건(일본어: 未來期 有毒 事件)은 미라이키켄(未來期縣)의 위치한 동광(銅鑛)에서 발생한 환경재해로서 타이난 최초의 공업재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대형사고 였다.

개요

지금의 미라이키 현을 흐르고 있는 미치와세 강 주변에 위치한 미라이키 동광산은 막대한 구리가 매장되어 있는 것을 처음 파악하고서는 18세기 중반에 처음 채굴이 시작되어 공화정 시기에 접어들면서도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많은 구리를 산출하고 있었다.[1] 그러던 중, 미나치와 광업은 공화 정부로부터 미라이키 광산을 불하받아 본격적인 경영에 나서기 시작하였다.[2] 이후 서양의 최신식 광맥탐사와 채굴법을 도입한 미나치와 유우지는 1883년에 대규모 동광맥을 추가로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미라이키 광산은 해마다 전체 타이난 내 산출량의 1/2를 생산하는 엄청난 규모의 광산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유독 발생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주변의 산림과 주변 농지의 작물들이 갑자기 말라죽었고 1885년에는 미치와세 강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물 위로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가을 난카이 전문학교에서는 '광독'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즉 광산에서 구리를 제련할 때 발생한 부산물이 문제가 된 것인데 제련할 때 발생한 연기에는 이산화황이 포함되어 있었고 제련에 사용된 공업용수에는 그 과정에서 온갖 중금속이 녹아들어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산화황이 비구름이 되면서 엄청난 농도의 산성비가 광산 주변과 강에 퍼부어졌고 중금속이 녹아있는 공업폐수는 사후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으로 무단방류된 것이다. 결국 오염된 강에서 사는 물고기와 오염된 강에서 물을 끌어와 기른 농작물을 먹는 주민들은 광독에 중독되었고 광독으로 죽지 않더라도 별 것 아닌 비로 일어난 홍수로 죽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사고 처리 경위

세월이 더 지나 1888년 여름에 이르면 이미 나무가 전부 죽어버린 산에 비가 내리면서 심각한 수준의 산사태와 홍수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피해를 입은 각 마을에서는 미나치와 광업에게 손해 배상과 제련소 이전을 요구하고 이를 현지사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890년에는 광산에 광독을 중화할 장치를 설치할 것을 미나치와 측에 지시하면서 처리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각 촌과 미라이키 현 하의원(下議院)이었던 다나카 메이란(田中明蘭) 등이 미나치와 광업의 손해 배상을 요구했으나, 미나치와 측은 주민들과 의원의 요구를 묵살했고 오히려 1892년 2월에 광독 피해주민들을 폭도로 내몰아 정부에게 사건 처리를 요구함에 따라 1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64명이 재판을 받아 23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1888년에 이루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묻지 않은 채 피해를 입은 마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고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시키는 행정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사건은 극에 달했다.

이에 다나카 메이란은 하의원을 사임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오누치 시다요리에게 직접 호소했으나, 도리어 공무방해죄를 이유로 수감됨에 따라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올랐고, 다나카 메이란에 전국적 구명 운동과 미나치와 광업 해산 운동을 벌임에 따라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1893년, 미나치와 광업에 대해 공해방지협정에 서명할 것을 지시함에 따라 미라이키 현 내 농지 상태 개선과 수질검사를 책임지고 실시하도록 합의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

일본아시오 광독 사건이 이와 비슷하며, 특히 아시오 광독 사건은 21세기 현재의 일본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각주

  1. 마리이키 동광산에서 산출되던 구리의 양은 아시오(足尾) 동광산에 견줄만큼 대단히 많았다.
  2. 기존의 경영은 미라이키 현의 주민들과 정부에 의해서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