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iance Justice Démocratique
알리엉스 주스티스 데모크라틱
벨포르어명 Alliance Justice Démocratique
약칭 AJD
한글명 민주정의동맹
창당일 1949년 10월 17일
이념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파
당색 파란색
당수 오귀스트 벨로
원내총무 알베르 드 마크마옹
국민의회 의석 550석 중 201석, 1961년 기준
상원 의석 348석 중 100석, 1961년 기준
당원 3,760,347명

민주정의동맹(벨포르어 : Alliance Justice Démocratique)은 벨포르 공화국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약칭은 AJD이다. 창당 이후 대선에서 승리하며 집권에 성공하였으나, 총선에서의 참패로 인해 현재는 신사회당과의 동거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개요

민주정의동맹은 과거 1851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중도·리버럴 세력이 섞여 탄생한 민주공화당의 후계정당으로, 국제자유연합(IFU)에 가입되어 있다.

역사

창당

1930년대부터 벨포르의 파편화되어 있던 우파 세력들은 유로파 대륙의 패권 장악과 경제적 자유주의란 가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와중, 2차 대전쟁으로 인한 참상에 질린 여론이 염전주의로 흐르고, 그에 발맞춰 사회당을 비롯한 그들의 이념적·정치적 경쟁자들이 1949년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자, 저명한 보수 정객이었던 필리프 드 브로이프랑수아 메스메르를 중심으로 우익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등장하였다.

그에 따라 보수우파 세력들은 파편화된 우산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한 논의를 계속하였고, 그에 따라 1949년 10월에 항구적인 정당인 민주정의동맹을 결성한다.

민주정의동맹은 보수주의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필두로 중도 성향의 정당인 정의동맹의 상당수를 흡수·합병하는 한편, 그 전까지 정의동맹과 연합 관계였던 리버럴 성향의급진당까지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민주정의동맹은 본디 급진적인 자유주의 정강을 내세우는 급진당과 통합할 생각은 없었으나, 1951년의 지방선거에서 공화국 본토의 28개 선거구 중 단 9곳에서 겨우 승리하는 참패를 겪고서, 보수가 리버럴주의까지 품지 않으면 영영 집권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에 통합하게 된다.

하여튼 통합으로 인해 민주정의동맹은 국민의회 의석 550석 중 270석을 차지하는 거대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1956년 대선의 영광

1950년 대선에서 승리한 당시 민주정의동맹은 그로부터 2년 뒤 치러진 총선에서 정의동맹·급진당·39동맹의 소연정으로 인해 39동맹필리프 보방을 총리로 임명해야 했다. 이로써 1924년 총선 이후 9번째 동거 정부가 들어서자, 계속된 정국 불안에 지친 국민들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여 의회 임기와 맞추자는 의견과, 그 전까지는 사실상 명예직이던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이원집정부제 개헌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좌우 각 진영이 찬성하면서, 대통령 임기를 줄이는 것과 이원집정부제 체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를 통과하였다. 한편 민주정의동맹의 필리프 드 브로이와 신사회당의 조제프 마리에르가 맞붙자 새로운 체제 하에서 치뤄지는 첫 번째 대선이라는 점과 맞물려 유권자의 관심도가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사회당의 조제프 마리에르의 측근의 리베이트 의혹이 다시 제기되면서 마리에르 후보에 대한 불신이 커진 가운데, 드 브로이 후보가 약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1차 투표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서는 드 브로이와 마리에르가 모두 2차 투표에 진출한 후 초접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1차 투표 결과, 뜬금없이 39동맹필리프 보방이 마리에르를 누르고 결선에 진출하였다. 드 브로이는 25%, 보방은 19%, 마리에르는 17%를 얻었다. 선거 결과에 충격받은 마리에르는 당일 신사회당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보방이 대권에서의 경험부족을 드러내며 몰락하고, 그 결과 결선투표에서 드 브로이가 82%를 얻어 보방을 꺾고 승리하였다.

이로서 민주정의동맹은 대권을 얻고, 국민의회까지 장악한 명실상부한 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당내 갈등, 동거정부 성립

그러나 총선을 앞둔 1960년 6월, 움베네네 위기를 둘러싸고 당내 파워게임에서 패배함으로서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던 프랑수아 메스메르 총리가 드 브로이 대통령과 당 주류와는 다른 노선을 걸어나갈 것이라는 선언[1]을 하면서 당내 갈등이 불거졌다. 이는 주류 계파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왔고, 당시 당 원내총무였던 오귀스트 벨로가 주류 계파 의원들을 결집시켜 메스메르를 향한 네거티브 공세를 행했다.

결국 공천위원장 선출에서 메스메르 계파의 벵상 발라뒤르가 떨어지고, 벨로 원내총무 계파의 도미니크 드 생메랑이 공천위원장으로 당선되며, 메스메르 계파 정치인들이 공천에서 탈락하는 등의 사단이 벌어졌고, 메스메르는 결국 당수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각주

  1. 이는 당 주류 계파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겠다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