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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旗 | |||
滅亡以前 | 復興以後 | ||
百濟 | 後百濟 |
槪要
百濟復興運動은660年滅亡한百濟를再復興시키려했던運動으로、朝鮮의古代史中에서比重있게扱어지는部分이다。
背景
皇山原戰鬪에서新羅軍이敗하자唐軍은新羅와의約條를破고、熊津都督府를設置하며、百濟地域을唐國의羈縻州로製乙고자하였다。이로因해羅唐聯合은破졌고、이는復興軍에게有利하게作用했다。
展開
百濟復興運動의始作
唐軍은占領地域內에서掠奪、虐殺같은蠻行을犯乙렀는데、겨우脫出한難民들의所聞이洩게된게蜂起의直接的原因으로推定된다。이런所聞은百濟遺民들이團結한契機가됐다。一便、百濟의地方軍은如前히健在하였는데、地方軍에民兵들이加勢하면서百濟復興軍을成었다。이時、鬼室福信、道琛、扶餘自信、정무、等의人物들이中心이되었다。百濟復興軍은10日만에無慮城200個를奪還하는氣焰을見여줬다。또、百濟의首都였던東原城을包圍하였다。高麗또한大江以北地方에서新羅軍과唐軍을攻擊했고、狀況은復興軍에게有利해져만갔다。
進廣帝의歸還
鬼室福信、道琛은當時倭에有던進廣帝를百濟의新로운王으로擁立하여正統性을確保하고자했고、倭王은要請에應해、마침내661年9月、進廣帝는倭國의將帥들、그리고倭軍의約5,000의兵力과共、百濟에歸國한다。以後、復興運動은一의國家로서의體制를備고、勢力을擴張해出갔다。
危機
그러나都邑을定하는過程에서부터鬼室福信과道琛과의葛藤으로內紛이發生하였고、道琛이處刑당했다。게다가1年만에軍을整備한新羅가攻擊하였고、只今大田地域을奪겼다。
再整備
一便、駐屯中이던唐軍과新羅軍이661年12月부터662年1月까지成어진平壤城戰鬪에서大敗하면서、이時를狙仒、餘아있는唐軍을諸包圍殲滅했다。또、進廣帝는金馬로遷都하며再一番安定을成었다。
東進
662년10月、3萬의倭軍이追加派兵되었다。663年1月에는王子中一名이新羅와의戰鬪途中戰死했다。이에激怒한進廣帝는直接5萬大軍을導고金原로向했다。
管山城戰鬪
仔細한內容은 663년 관산성 전투 文書를參考하십시오。
金原戰鬪
仔細한內容은 쇠벌 전투 文書를參考하십시오。
結果
663年陰歷5月8日、新羅는結局滅亡했다。結果的으로百濟는668年滅亡한高麗까지包含해統一國家를成仒냈으며、新羅滅亡以後의百濟는普通後百濟라고稱한다。一便新羅末代王、法敏王은671年金原에서死亡했으며、그의屍身은火葬되어東海上의一巖에播仒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