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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봉래에는 구석기시대 말기 (5만년전 ~ 1만년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는 명확한 편인데, 이 시대의 유물들은 말레이계 원주민이 남긴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최초의 인류 흔적은 3만 년 전 쯤에 나타나며 이들은 키작은 흑인계통의 네그리토로 추정되며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8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봉래로 이동해 왔다. 네그리토 종족들은 이후로 서서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종족들에게 점차적으로 동화되었고, 마지막 네그리토 종족은 사이시얏 족 거주지 근처에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봉래 해역의 풍부한 어장을 바탕으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봉래 원주민은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루지 않고 부족별로 흩어져 살았으며, 현재도 크고 작은 부족집단으로 나뉘어 있고 부족별로 언어도 다르다. 고산족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쓰는 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1]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이 섬에 살아온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진수가 지은 《삼국지》에서 오나라가 종종 이주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고, 《수서》에는 "유구국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군[2]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측 학자들은 이를 대륙과 타이완 사이의 교류 증거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주나 유구국이 타이완을 지칭하는지 확실치 않고 《수서》의 유구국은 유구국[3]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고대에는 원주민들 외의 세력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나라에서의 접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나라는 이곳을 이주라고 불렀다. 230년에 이르러 오나라 황제 손권은 위나라와의 잦은 전투 등으로 인하여 인구가 감소 추세에 놓이자 위온과 제갈직에게 1만명의 병력을 주고 이주와 단주 등에 건너가서 징발을 명했다. 하지만 위온과 제갈직은 이주에 도착했으나 그곳은 원주민들만 있었으며, 원주민을 1천명 징발하였으나 풍량으로 8천명의 병력을 잃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중세

1360년 원나라는 펑후 제도에 순검사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푸젠의 취안저우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이것이 봉래 지역[4]이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최초의 기록이다. 1590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루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봉래를 보고 Formosa(포르모사, 아름다운 섬)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봉래를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한다.

16세기까지 봉래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이 섬 전역에 널리 분포하여 거주하였으며, 한족 이주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명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봉래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들의 봉래 이주도 시작되었다. 이후 송나라부터 원나라 시대 때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해양무역이 발달하였다. 봉래는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러 해금정책이 실행되자 봉래의 해양무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봉래 중서부에서는 원주민들의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이 성립하였다.

조기봉래시기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제국의 봉래 통치 시대부터 정씨 왕국 통치 시대까지를 지칭하며 보통 조기봉래시기라고 불린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봉래는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해양무역의 거점으로써 봉래를 정복하고 세력을 다투다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쫓아내고 타이완 일부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청나라에 맞선 일본계 중국인이였던 후루스미 소지로(古住 宗士郎)는 이런 봉래에 주목하고, 청나라 타도를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고 봉래를 통일하여 후루스미 번을 수립하였다. 후루스미 소지로와 그의 자손들은 후루스미 번을 거점으로 수십년동안 청나라에 항쟁했으며 마침내 청나라에게 사실상 승리를 거두고 일본계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하였다.

후루스미 소지로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네덜란드인들이 이곳에서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큰 수익을 올렸는데, 이는 이후에도 봉래의 주요사업원이었다. 다만 이들 세력과 국가들이 봉래 전체를 지배하던건 아니고 서남부나 항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다두 왕국을 비롯한 원주민의 영역이었다.

남북국시대

남북국시대는 남부에 후루스미 번이 위치하고 북중부에 다두 왕국이 존재하였던 시기를 일컫는다.

후루스미 번국

후루스미 번국은 후루스미 소지로가 1661년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봉래 남부를 통치하게 된 시기를 말한다. 일본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청나라로부터 괄시를 받아왔던 후루스미 소지로는 반란을 일으켜 난징을 거의 점령할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 교두보 확보를 위해 당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봉래를 공격해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봉래 남부를 차지하게 된다. 후루스미 소지로가 죽고 아들 후루스미 아스노리가 즉위한 뒤에도 반청 정책은 유지되어 삼번의 난 때도 군대를 보내 푸젠 성 일부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 뒤 1683년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영토가 일부분 상실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당시 해군을 지휘한 아야노코지 헤이마로소선화공전술과 공로로 인하여 청나라의 추가 상륙을 저지하였고, 서방 세력이 남기고 간 장비들을 통하여 청나라 세력에 반격하는데 성공하였고, 장기전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여 청나라의 물자 규모를 유도하였으며 결국 1693년 청나라가 퇴각하게 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독자적인 세약 구축에 성공하였다.

후루스미 번국은 중국계에 대한 적대심과 봉래가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과 만주족들의 봉래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봉래만의 자주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대신 일본계의 이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청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뒤 류큐와 큐슈 일대에 사자를 보내 교류를 시작한 때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주한 일본계는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면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봉래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후루스미 번이 아주 왕국과 접촉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두 세력이 결합되며 마침내 1725년 후루스미 왕국이 건국되는 결과를 낳았다.

다두 왕국

다두 왕국은 854년경부터 1725년까지 900여년간 존속한 봉래에 존재했던 왕국을 말한다. 45명의 왕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상세히 밝혀진 것은 없다. 854년경 말레이계 원주민인 파이완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파포라족, 바부자족, 파제흐족, 호아냐족과 연합하여 세운 왕국이다. 10~12세기경 남쪽의 말레이시아와 오세아니아로부터 아미족, 아타얄족, 브눈족, 르카이족, 프유마족, 쩌우족, 사이시얏족, 타오족, 싸오족, 카바족, 타로코족 등이 이주하면서 수많은 부족이 모이게 되어 왕의 권위는 떨어졌고 족장이 왕의 간접통치를 받는 연합왕국 체제가 되었다.

한편 몽골족이 대륙에 세운 원나라가 강성할 무렵인 13세기에는 봉래 인근의 펑후제도에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다루가치만 둠으로써 다두 왕국은 원의 직접적인 통치는 받지 않았다. 14세기 말에는 한족들이 세운 명나라가 다시 대륙에서 발흥함으로써 원나라와 똑같이 펑후 제도에 관청을 설치하지만 타이완을 비롯한 다두 왕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17세기, 1600년대 초반에는 스페인이 타이완의 북부를[5] 그리고 네덜란드가 타이완의 남부[6]를 점령했다. 곧 남, 북에서 서양세력들이 중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고 결정적으로 1624년 네덜란드는 다두 왕국을 멸망시키고 스페인을 타이완에서 몰아냈다.

다두 왕국의 원주민들은 네덜란드의 대규모 농장에 강제로 노동을 하는 등 혹독하게 다뤄졌으며, 약 10년간 사실상 노예 신분이 되었다. 고된 노동과 처우에 분개한 원주민들은 1635년 다두 왕국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네덜란드인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농장과 시설을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네덜란드인들의 무기고를 미리 탈취하여 무기를 확보함과 동시에 네덜란드인들의 공격을 차단하였고, 수적으로 우세한 점을 이용하여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독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원심호가 왕으로 추대되어 다두 왕국이 이어졌다. 이들은 1710년대부터 후루스미 번 출신의 일본계와 만나기 시작했으며, 계속된 접촉은 당시 왕이던 원현석과 당시 후루스미 번의 수장인 후루스미 마사시가 만나게 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이들은 두 세력 모두 서방 세력을 몰아낸 점이 있음을 이유로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원현석의 딸인 원소혜(오오하라 칸나, 大肚 楓菜)와 후루스미 마사시의 아들인 후루스미 타이헤이가 혼인하며 후루스미 번과 다두 왕국은 사실상 한 나라가 되었으며, 그들의 아들인 후루스미 미네히데가 1725년 왕의 이름을 쓰며 즉위하게 되면서 후루스미 왕국이 성립되었다.

근세와 근대

후루스미 왕국(古住王国)

봉래 제국(蓬莱帝国)의 등장

중국 대륙의 태평천국의 난과 봉래제국의 확장

1894 봉래협정(대만협정)

일본 제국과 봉래제국 간의 평화수호와 동아 계도를 위한 합의서(불가침조약)

일중전쟁 발발과 1939.9.29 일봉 긴장(일본 제국의 무력 시위)

1939.12.12 일봉병탄

1939~1945 일치시대(日治時代)

봉래국민정부 문서 참조.

현대

1945 봉래동방제국 재 등장

1945~1951 제2일본제국의 등장과 봉래동방제국의 영토 회복

호우안 연합황조의 탄생

봉래동방제국의 현대

  1.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와 태평양 지역의 많은 언어들이 같은 남도어족계 그룹이다.
  2. 현재의 푸젠성을 지칭한다.
  3. 琉球國,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 현
  4. 타이완 섬 서쪽의 "펑후 제도"에 한정된 것임
  5. 지금의 타이베이시, 신베이시, 지룽시 등
  6. 가오슝시, 타이난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