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세이·덴포의 난
날짜1829년 (분세이 연간) 음력 6월 12일 ~ 1836년 (덴포 연간) 음력 4월 20일
장소아키시오
나다노 제도, 신페이 제도, 엔카이 국
결과 카미가와 요시노부와 철검대의 승리
타치바나 씨 멸망
교전국
카미가와 요시노부
철검대
카미가와 요시마사
엔카이 타치바나 씨
지휘관
카미가와 요시노부 (요시노부군)
철검대
철검대장 이케다 모토아키
제일방령군참[1] 무노 무네후사(武濃宗總)
제이방령군참 반고 키요이에(万梧潔家)
내성부령[2] 사바에 미치즈구(鯖江道順)[3]
기타 다이묘
나다노 성아츠타 유키사다(熱田幸定)[4]
에사카 성신보 타카모리 (新保高盛)
히이로 성소요 모토이에 (宗陽本家)
카미가와 요시마사 (요시마사군)
타치바나 씨
영주·자칭 엔카이노카미[5] 타치바나 쿠니모치
기타 다이묘
사쿠마 성코키리 아키타케(小桐章毅)
소베 성·히구레마츠오카 성미요세 히로오키(三奇弘吉)
로고후시미 성반노 미츠히데 (潘能光英)
유카와 성조노우치 아키노리 (城之内彰紀)
병력
120,000명
요시노부군 20,000명
철검대 100,000명
88,000명
요시마사군 62,000명
타치바나군 18,000명
기타 8,000명
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분세이의 난 (일본어: 文政の乱 (ぶんせいのらん) 분세이노란[*])은 1829년부터 1836년까지 아키시오엔카이 국·나다노 국, 나카야마 막부히마키 국 일대에서 벌어진 철검대엔카이 타치바나 씨의 전쟁, 그리고 나카야마 막부 내부의 쇼군 계승 전쟁을 포함한 일련의 전란을 말한다.

개요

나카야마 막부의 쇼군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카미가와 요시마사 (이하 요시마사)와 카미가와 요시노부 (이하 요시노부)가 대립하자, 요시마사를 지지하는 다이묘들과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다이묘들이 각각 요시마사군, 요시노부군을 구성하여 전쟁을 벌였다. 최초에는 요시마사군이 요시노부군을 압도하여, 요시노부를 붙잡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요시노부는 후지시로로 도주하여 철검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철검대이케다 모토아키 철검대장을 필두로 100,00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에 맞서 요시마사군은 엔카이 타치바나 씨타치바나 쿠니모치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지금의 마이아미 반도인 엔카이 남쪽의 사쿠마 반도(佐熊半島)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하던 코키리 아키타케를 끌어들였고, 철검대 또한 타치바나 씨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나다노 제도의 다이묘 아츠타 유키사다를 포섭해 반란을 선동하는 등 나다노, 신페이 일대의 모든 다이묘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분세이의 난은 최종적으로 카미가와 요시노부와 그를 지원한 철검대의 승리로 끝났다. 카미가와 요시노부는 쇼군직에 올랐으며, 철검대는 골치아픈 반란 세력이었던 타치바나 일가와 코키리 일가를 멸망시키고 엔카이 부와 나다노 제도를 되찾았다. 물론 카미가와 요시노부는 철검대의 지원을 받아 쇼군에 올랐기 때문에, 나카야마 막부는 이 떄부터 철저히 철검대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명칭

명칭을 두고 말이 많았고 지금도 키배가 벌어진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신페이 제도 측 사학자와 아키시오 측 사학자가 자신들의 사관(史觀)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카야마 막부도 어쨌든 '막부'라고 본 신페이 제도의 사학자들은 나카야마 막부 쇼군 계승 전쟁 혹은 줄여서 쇼군 계승 전쟁이라 부르고, 나카야마 막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키시오와 일본의 사학자들은 '카미가와 씨 가독 계승 전쟁 혹은 카미가와·타치바나의 난이라고 부르고 있다. 표제어 명칭인 분세이의 난은 1958년 미국의 북태평양사학자 더글러스 헤링턴 박사가 제안한 것으로, 오닌의 난이 일본의 연호를 딴 것처럼, 전란 당시 일본의 닌코 덴노가 사용한 연호 "분세이"(文政)에서 따 온 것이다. 참고로 아키시오에서 태양력을 도입한 것은 1884년 제1공화국 건국 이후로, 그 이전까지는 일왕 (덴노)이 사용하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분세이 연간에 있었던 전란"으로 본다면 틀린 표기는 아니다.

다만 전란이 시작된 1829년에서 바로 이듬해인 1830년 연호가 "덴포 (天保)"로 바뀌었고, 덴포 연간인 1836년에 전란이 끝났기 때문에 분세이·덴포의 난(일본어: 文政·天保の乱 (ぶんせいてんぽうのら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단 둘 중 분세이의 난 쪽이 많이 쓰이므로 표제어는 분세이의 난으로 한다.

과정

배경

일반적으로 분세이의 난이 일어난 배경으로 나카야마 막부의 쇼군 계승 문제를 꼽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그것이 근본적인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전쟁으로 일이 커진 데에는 동시대에 있었던 몇 가지의 큰 배경이 있었다. 즉 여태까지 산적해있던 이 일대의 문제점들이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한번에 폭발하고 해소된 것이다.

첫 번째 배경: 나카야마 막부 쇼군 계승 문제

두 번째 배경: 타치바나 씨의 문란

세 번째 배경: 나카야마 막부와 타치바나 씨의 갈등

세 번째 문제는 나카야마 막부와 타치바나 씨의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타치바나 씨의 당주 타치바나 쿠니모치타치바나 요시이에의 아들이었는데, 요시이에의 아내가 원래는 카미가와 시게마사에게 시집갈 예정이었는데 요시이에가 아름답다고 하여 납치혼(..)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1793년의 사건) 심지어 그 여인은 에사카 성신보 타카모리의 누이로, 신보 씨가 카미가와 씨와의 사돈 관계를 맺기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맞선과 결혼을 주도하며 큰 그림을 Big Picture 그리던 것을 요시이에의 납치혼이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이 때 카미가와 시게마사는 신부감을 기다리다 지쳐서 가신이었던 오시노 씨의 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고, 그 밖에 여러 첩을 두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설령 납치혼이 실패해 카미가와의 부인으로 들어갔더라도, 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6]

신보 부인이 납치된 뒤 에사카 성 성주이자 신보 부인의 아버지였던 신보 카게카츠(新保景捷)는 나카야마 막부에 상소하여 타치바나를 공격해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당시 카미가와 시게마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몇차례의 간청을 듣다 못해 "그럼 요시노부랑 같이 가던지" 라며 측실 오후유 부인의 아들(이자 서자) 카미가와 요시노부와 3,000명의 군사를 보내주었다. 물론 시게마사는 정실 카메아리 부인과 적자 카미가와 요시마사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요시노부더러 죽으라고 그렇게 한게 아니라, 용병술과 지략이 뛰어난 요시노부에게 정예 근위대 3,000명을 붙여주어 그를 떠본 셈이다.

당초 시게마사가 요시노부에게 내린 명령은 적당히 싸우다가 '될 것 같으면' 신보 부인을 구출하라는 것이었지만, 자기과신과 의협심이 강했던 요시노부는[7] 신보 부인을 구출해오는 것은 물론이고 따지고보면 새어머니 중 한명가 될 분을 납치하는 악행을 저지른 타치바나를 처단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여 당시 하타모토로서 토지 관리인이었던 오부 시로(尾生士朗), 소베의 긴모치(蘇邊の金望), 아키다의 로쿠기치(明田の六吉)라는 세 칼잡이로 자객단을 꾸려 급파한 뒤, 본대로는 타치바나군의 주의를 끄는 한편으로, 자객단으로 하여금 요시이에를 살해한다.[8] (1806년) 당시 요시노부의 나이는 불과 17살. 오늘날로 따지면 타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짓을 저지른 셈이다.

사리사욕에 찌들어있던 가신들이었지만 당장 도읍의 성이 불타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타치바나의 가신들은 일단 성의 불을 끈 뒤 주군의 유해를 수습하고 유일한 아들이었던 쿠니모치를 성주로 추대한다. 당연히 쿠니모치는 아버지를 살해한 요시노부를 원수로 여겼고, 이는 나카야마 막부와 타치바나 씨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후, 쿠니모치는 요시노부가 이케다 철검대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바로 요시마사를 지원하겠다고 나선다. 이유는 철검대와 마찬가지로, 요시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한 뒤 신페이 제도를 쥐락펴락하기 위해서였다.

발단

그 놈을 믿지 마세요

가짜 전쟁

전쟁을 시작합니다. 어, 안되잖아? ???: 어이구, 아니 이게 지금 뭐하는거야!

실질적인 전쟁의 시작은 1829년 음력 6월 12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이는 <의정일기>(義政日記)의 서술에 의한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오시 정오(午時正午, 12시 경)에 요시마사의 집 기둥으로 선전포고문을 담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9] 포고문에는 "북패(北牌; 북쪽 패당. 곧 타치바나 씨)의 꼭두각시 요시마사를 단죄하러 간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화살이 날아든 뒤로 3개월 간 요시노부군의 공격은 없었으며 요시마사군도 딱히 요시노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가짜 전쟁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1829년 당시의 사상 유례없는 폭염과 그로 인한 가뭄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식량을 구하는데도 엄청난 제약이 생겼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곧 싸우고는 싶은데 너무 덥고 배고파서 못 싸우겠다는 것. 그럼 안 싸우고 처음부터 타협하면 됐었잖아[10]

전개

요시마사의 선제 공격

야타마의 헬게이트

철검대 개입과 전세 역전

우리 어쩌면 좋지?

1833년 8월, 철검대는 요시노부군에 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내성부령 사바에 미치즈구가 이끄는 3만 명의 선봉대가 8월 12일 정오에 후지시로 성을 출발하였고, 이어 제일방령부장 무노 무네후사와 철검대장 이케다 모토노부가 이끄는 7만 명의 본대가 8월 19일 후지시로 성을 나섰다. 전투 병사만 10만명이고, 이외에도 포 400문, 여유분의 총 3만 정과 200일치의 탄약, 식량, 10만 명분의 천막을 이끄는 군수 부대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15만 명 이상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1]

선봉대는 사사오 성 (지금의 삿소 시) 근교에 진지를 건설하였고, 본대와 9월 6일에 합류하였다. 사바에와 무노는 다음 진로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당시 엔카이 율령국의 타치바나 씨는 철검대의 침공을 대비하여 엔카이 율령국과 사사오 율령국(笹生國)을 나누던 아무로 강 (安武呂川)을 따라 아무로 장성(安武呂長城)[12]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아무로 장성에 정예 병력과 대포를 상시 배치하였기 때문에, 아무로 강을 건넌 뒤 아무로 장성을 거치면 바로 엔카이 성을 칠 수 있었지만 예상되는 손실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의견이 갈라진 것.

우선 무노는 해로를 이용해서 사쿠마 성 (사쿠마 반도)의 코키리 씨를 먼저 치고, 당시 밀월 관계를 맺었던 나다노 성아츠타 씨와 함께 포위망을 구성해서 타치바나 씨를 포위해 고사(枯死)시키자고 주장하였다. 타치바나의 주요 밥줄은 오사카 상인들과의 밀무역이었으므로 주요 길목인 사쿠마 반도엔단 수도(遠灘水道)를 점거해 밥줄을 끊고 장기전에 들어가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

반면 사바에는 여기에 대해 곧 겨울이 찾아오는데, 타치바나가 각잡고 농성을 시작하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반대하였다.[13] 사바에는 호제 율령국 (지금의 마츠오카 현)으로 우회해서, 호제 율령국과 엔카이 율령국의 경계인 나미에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미에 강은 엔카이 성의 해자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9월 중순까지 도착해서 둑을 터뜨려 엔카이 성을 수몰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노 역시 하지만 둑을 지키고 있으면 어떨까?라는 반박을 내밀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소다케로 간다!

이 때 기똥찬 제안을 내놓은 사람이 바로 제이방령군참 반고 키요이에였다. 그는 무노의 말도 일리가 있고 사바에의 제의도 일리가 있지만 타치바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난점이라고 언급한다. 하여 역발상으로, 별동대를 만들어서 마치 둑을 터뜨리러 갈 것처럼, 그리고 마치 바닷길로 돌아서 갈 것처럼 적을 기만한 뒤 본대는 사사오 율령국과 엔카이 율령국 사이의 산이자 아무로 강의 발원지인 이소다케 산 삼림 지대를 뚫어서 엔카이 율령국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더운 날씨에 산을 넘는다는 것은 정신나간 도박이 분명하였으므로 두 장군은 당연히 반대하였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는데다가, 반고가 실패하면 본인의 목을 걸겠다고 이케다 모토이에에게 맹세하고 본인이 선봉에 서겠다고 하자 속는 셈 치고 계획에 동의하였다.

엔카이 수중전

타치바나의 몰락

요시노부의 반격

요시마사의 최후

종전

결과와 영향

전쟁으로 인한 피해

신무기의 실험장

평가

같이 보기

각주

  1. 방령군참(防領軍參)은 현대의 지휘체계에 빗대면 사단장이다. 방령군(보료군)은 사단 규모. 즉 1사단장인 셈이다. 참고로 제일방령군은 타치바나 세력과 대치하는 핵심 전력이었다.
  2. 內城府領. 후지시로 부의 행정을 관리하는 지방관이었으며 동시에 전시에는 후지시로를 방어하는 근위부(近衛府)의 지휘를 담당한다.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수도방위사령관 겸 서울시장이다.
  3. 수도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정예부대까지 파견한데서 철검대가 얼마나 이 전쟁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타치바나와 카미가와를 동시에 갈아버릴 절호의 기회였으니! 역사학자 키노 아키오는 "분세이의 난은 철검대장에게 교착 상황을 타개할 천우신조였다."고까지 평가한다.
  4. 지금의 마에하마 현 아츠타시오네 시(熱田塩根市) 일대에서 아키시오 최초의 대규모 천일염전을 개발하여 도시명의 유래가 된 농업학자 아츠타 미치아키의 할아버지다.
  5. 遠海守. 엔카이 율령국의 수장. 그러나 이러한 직책은 덴노가 임명하는 것이었으므로, 덴노의 책봉이 없었던 이러한 자칭은 사칭에 불과했다.
  6. 그리고 정작 이쁘다면서 졸렬하게 보쌈을 해 그녀를 데려온 요시이에는 신보 부인(타카모리의 누이)과의 사이에서 쿠니모치를 낳은 뒤로 첩실을 끼고 사는 문란한 생활을 하였으며, 아이는 유모들과 후견인 손에 넘어갔으므로 신보 부인은 독수공방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케다 씨에게 유리한 기록이 많으므로 걸러 읽어야겠지만 철검대실록의 원소지(元昭誌) 겐로쿠지 서고본에는, 신보 부인이 죽은 뒤 (1808년) 그의 유해와 일기가 신보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극심한 우울증 증세를 앓고 있던 (일설에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보 부인의 일기를 읽은 타카모리는 격노하여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께 맹세하니 나 타카모리는 도적 요시이에 놈을 세상 끝날까지 쫓아가 찢어 죽일 것이다." 라며 맹세하였다고 적혀있다.
  7.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은 이러한 만용과 자기과신 때문에, 그는 노년에는 침례정사단에게 거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물론 침례정사단도 아키시오에게 사기를 당하며 비참하게 망하지만 당대의 기록에는 요시노부의 가신이 "만용은 화를 부른다"고 요시노부에게 간언하는 장면이 있다.
  8. 단칼에 베어버렸으면 또 모르겠는데 와리가리 칼을 꽂았다가 뺐다가 하며 고통스럽게 피를 뽑아 과다출혈로 끔살한 뒤, 시체에는 불을 질러 엔카이 성 천수각째로 태워버렸다고 한다. 오부는 무사히 탈출해 귀환하였지만 나머지 두 자객의 이후 행적은 불명. 살해범을 잡아 오체분시형에 처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붙잡혀서 끔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9. 그런데 선전포고를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시에도 관례가 아니었다. 원래는 사람을 보내서 선전포고를 하는게 맞는 것이었다.
  10. 그러나 서자 출신인 요시노부가 당시 엄청난 능력 (물론 상술했던 병크도 있지만...)으로 촉망받던 존재였기에 오직 적자 계승 원칙에 입각해 쇼군 계승권을 갖고 있던 요시마사의 입장에서는 요시노부는 죽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요시노부 또한 권력욕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하물며 자신보다 훨씬 무능력한 요시마사와 공동 통치? 그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는 이후 요시노부가 자존심을 버리고 철검대의 힘을 빌려서까지 쇼군직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근본적으로 시게마사가 축첩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도 없었다.
  11. 고도익 (2009년), 139쪽.
  12. 삿소 현 나가시로키타 시, 엔카이 부 나가시로미나미 시, 하쿠엔 본선 나가시로 역 (長城駅)은 모두 아무로 장성에서 유래.
  13. 그리고 엔카이 성 함락 뒤, 수년은 충분히 먹고 살 정도로 넉넉한 식량이 지하 창고에 쌓여 있던 것을 확인한 무노는 벙찌고 말았다. (...) 엔카이 성은 후지시로 성처럼 외곽에 성곽을 하나 더 둘러서 성곽 안에서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 <지전씨실록>에 이 장면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