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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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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제1-2대 대통령
쁠랙 피분송크람 |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출생 1897년 7월 14일
시암 논타부리
사망 1964년 6월 11일 (66세)
스위스 베른
국적 태국
재임 기간 태국 제1대 대통령
1948년 4월 8일 ~ 1953년 4월 7일
태국 제2대 대통령
1953년 4월 8일 ~ 1957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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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킷 킷따상카, 어머니 삼앙 킷따상카
형제자매 5남 3녀 중 차남
배우자 라이앗 피분송크람
자녀 3남 2녀
장남 아난 피분송크람
차남 쁘라송 피분송크람
장녀 지라왓 빤야라춘
차녀 랏차니분 프라니프라차촌
3남 닛 피분송크람
학력 태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 31기)
종교 불교
신체 167cm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 2, 3, 4
지역구 논타부리 제1선거구
최종 당적 무소속
성향 파시즘 빅텐트
좌익 파시즘, 군국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약력 타이 왕국 제3대 총리 (1933.12~1944.8)
타이 왕립군 총사령관
인민당 대표
자유 타이 운동 총사령관
태국 민족부흥위원회 위원장
태국 제1-2대 대통령
군사 경력
임관 태국 육군사관학교 (31기)
복무 타이 왕국 왕립군
1920년 - 1947년
타이 공화국 국군
1947년 - 1957년
최종 계급 육해공 원수
지휘 참모장
참전 제1차 시암 혁명
보원뎃 반란
송수라뎃 반란
프랑스-태국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시암 혁명
한국 전쟁
맨해튼 반란
베트남 전쟁
9.16 쿠데타
서훈 태국 최고대원수 훈장
태국 흰코끼리 대훈장
필리핀 시카투나훈장 라자
영국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미국 최고사령관 훈공장
스페인 군 공로의 십자가 훈장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일본 욱일대수장

개요

태국의 제1-2대 대통령. 현대 태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시암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서 좌익 파시즘적 사상을 추종하며 군사 독재를 행함과 동시에 태국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등의 행보로 인하여 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생애

평가

태국의 봉건주의를 탈피시키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데다 각종 위대한 체제 개혁을 이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어쨌거나 군사독재와 쿠데타를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독재자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태국 내에서 공존한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는 주류가 아닌데, 공화정을 출범시킨 현 체제의 효시인데다 항일 운동 및 여러 사회·체제 개혁을 이뤄낸 공이 워낙 큰지라 위인으로 대우하는 여론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짜끄리 왕조를 종식시킨 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공화정을 출범시켜 왕정 시절 못 다한 개혁을 완수했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다른 정치인과의 관계

쁘리디 파놈용

인민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쁘리디 파놈용과는 영원한 정치적 동지였으며, 쁠랙 피분송크람 역시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시암 혁명을 통한 급진적 체제 변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공화국 설립 이후로도 쁠랙 피분송크람은 쁘리디 파놈용을 총리로 임명하여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쁘리디 파놈용의 사회주의 정책에 경도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사 쿠데타와 군국주의를 통해 이상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좌익 파시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 타이 운동을 쁘리디 파놈용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9.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쁠랙 피분송크람은 1964년 현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쁘리디 파놈용은 1975년 당시 태국 대통령이던 타놈 끼띠카쫀의 배려로 태국으로 귀국하여 1983년까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사릿 타나랏

사릿 타나랏은 본래 쁠랙 피분송크람이 기용한 인물이였으며, 우익·왕당파 세력의 여러번의 쿠데타를 막은 것을 바탕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타나랏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그러나 급진적 개혁주의자였던 송크람과 달리 타나랏은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기에 1950년대 중반 이후 사이가 멀어져 타나랏은 송크람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결국 1957년 9.16 쿠데타로 타나랏이 송크람을 몰아낸 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

다만 타나랏은 쿠데타 이후로도 송크람에 대한 격하를 하지는 않았고, 대신 송크람의 업적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실정에 맞지 않기에 내가 그것을 개량하겠다는 논리로 집권을 이어나갔다.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33 제1대 태국 대의원의원 선거 논타부리 제1선거구 인민당 97,398 (68.8%) 당선 (1위) 초선[1]
1937 제2대 태국 대의원의원 선거 105,362 (70.4%) 재선
1938 제3대 태국 대의원의원 선거 111,253 (69.44%) 3선
1946 제4대 태국 대의원의원 선거 무소속 138,537 (75.61%) 4선[2]
1948 제1대 태국 대통령 선거 태국 인민당 14,058,530 (74.6%) 초선
1953 제2대 태국 대통령 선거 14,165,866 (70.0%) 재선[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인민당 1932 - 1942 정계 입문
입당
무소속 1942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
자유 타이 운동 1942 - 1945 창당
무소속 1945 - 1947 해산
인민당 1947 - 1957 재창당
무소속 1957 - 1964 9.16 쿠데타로 인한 정계 은퇴
사망

어록

인민들의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선 때론 무력 역시 필요한 법이다.
제1차 시암 혁명을 성공시키고 나서 한 말

기타

각주

  1. 1938.12.16 피분송크람 내각 출범
  2. 1947.05.21 인민당 재창당
  3. 1957.9.16 9.16 쿠데타으로 인한 대통령직 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