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망명정부
Сахалин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изгнания

19181922 파일:Flag of Sakhalin.png
국기 국장
러시아 제국의 임시정부
표어 Съ нами Богъ!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라!
국가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하느님이여, 차르를 지켜주소서!
수도 니콜라예프카Николаевка
정치
공용어 러시아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
차르царь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
망명각료평의회 주석
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게오르기 리보프
Князь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입법 망명각료평의회
역사
 • 사할린 망명정부 수립 1918년 11월 9일
 • 적백합의 선언 1922년 8월 3일
지리
면적 82,995㎢
내수면 비율 7.3%
인구
1922년 어림 543,000명
기타
국교 러시아 정교
현재 국가 사할린 차르국 사할린 차르국

사할린 망명정부(러시아어: Сахалин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изгнания)은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이 10월 혁명(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cкая революция)으로 인해 사실상 제국 정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 일가와 측근들의 주도로 극동으로 망명 길을 오른 뒤 사할린(Сахалин)과 쿠릴 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를 거점으로 하는 망명정부이다. 이후에 본격적인 적백내전(赤白內戰)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르 콜차크(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가 이끄는 남러시아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Юга России )과 표트르 브란겔(Баро́н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이 이끄는 러시아 백군(Белая Армия) 등을 포함하는 반볼셰비키 세력들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이 이끄는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에게 반볼셰비키 세력이 와해됨에 따라 사실상 러시아 본토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적백내전에 개입했던 연합국(聯合國)의 중재 아래 적백합의(赤白合意)를 통해 사할린쿠릴 열도 일대에 대한 독립 주권을 보장할 것을 소련(蘇聯)이 인정함에 따라 사할린 망명정부는 본토 수복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사할린 제1 차르국(Первая Царство Сахалинское)을 수립하였다.

성립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직전 - 10월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직전 러시아 제국은 니콜라이 2세의 전제 정치하에 놓여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르 3세(Александр III)의 보수적 전제 정치를 담습하고 있었는데, 그는 러시아 제국의 변화의 물결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제국은 봉건적·권위주의적 사회 구조로 인한 문제 해결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러시아 제국의 정치 개혁은 러일전쟁의 패배라는 쓴 맛을 맛본 뒤에야 당시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일요일 혁명(Воскресная революция)으로 러시아 제정 헌법과 함께 근대적 입법기구인 '두마'(дума)를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동안의 개혁 조치에 대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한편으로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군(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аторская Армия)은 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탄넨베르크 전투(Битва при Танненберге)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당하고, 이후 동맹국(同盟國)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Восточный фронт Перв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했고, 1917년 러시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차르 정부는 자유주의자, 기업가를 비롯한 민중의 전반적 지지를 잃은 상황에 이르자 2월 개혁(Февральская реформа)을 통해 게오르기 리보프(Князь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내각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내각이라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춘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이들은 기존의 탄압적 언론 정책을 개선하였으며, 사형제 폐지 등의 민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자유주의 정권들은 민중이 염원하던 '전쟁 타도'를 배제하고 당시 외무장관 밀류코프가 연합국(聯合國)에게 "과거 내각이 수립했던 조약을 지킬 것이며,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참전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에 따라 민중의 큰 파장을 일구었고, 7월 봉기라브로 코르닐로프(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의 쿠데타를 비롯한 극도의 혼란 상황이 이어져 있었으며, 이에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는 10월 25일을 기점으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봉기를 시작으로 자유주의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차르 일가와 자유 내각의 핵심 인물이 남아 있던 겨울 궁전(Зимний дворец)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급하게 망명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망명은 러시아 극동(Д́альний Вост́ок Росс́ии )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로 이동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임정 - 사할린 망명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차르 일가와 자유주의 내각 및 일부 러시아 백군들은 이곳을 "제4의 로마"(Четвертый Рим)라고 부르며 러시아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혁명 당시 활발히 참여했던 오호츠크 소함대(Охотская военная флотилия)의 수병들을 제압하였으며 상당한 해군 병력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1] 이후 이들 망명정부는 적군의 무장해체에 반발하여 봉기한 뒤 시베리아 철도(Транс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를 점거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귀환을 시도하려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Чехословацкие легионы)과 적군에게 패퇴한 뒤 시베리아 얼음 행군(Великий Сибирский Ледяной поход)을 거쳐 온 블라디미르 카펠(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과 알렉산드르 콜차크(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의 백군과 합류하였으며, 이들 망명정부 및 백군, 체코슬로바키아 소속의 병력만 5만 명이 넘는 수준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 반 볼셰비키 세력은 러시아 적군에게 빠른 속도로 추격되어 있던 형편이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반볼셰비키 전력만으로 이들을 제압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함에 따라 당시 적백내전에 개입을 시도했던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사할린으로의 망명길을 오를 것을 시도하였으며, 이에 일본시베리아 내전에 적극 개입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군함 이와미(石見)와 전함 미카사(三笠) 등의 함대 병력을 파병하여 반볼셰비키의 사할린 망명을 위한 물자 및 인력 수송에 도움을 주었다.[2]

1918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 임정이 종결됨에 따라 사할린 망명정부(Сахалин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изгнания)의 수립을 공포하였고, 러시아 적군의 사할린 상륙전과 해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오호츠크 소함대를 개편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조직적인 병력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녹우크라이나(Зелена Україна)와는 반볼셰비키를 전제로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3]

적백내전 - 적백합의

적백내전에 양상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망명정부는 게오르기 리보프(Князь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전 총리를 임시각료평의회 주석으로 내세운 뒤 망명정부에 체계적인 구성을 시도화했으며, 특히 시베리아 내전에 적극 개입하던 일본과는 러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체결하여 볼셰비키 세력에 대한 대항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당시 동부 전선에 있던 백군 계열의 세력인 코무치 인민군(Народная армия КОМУЧа), 서부군, 오렌부르크 독립군, 제1 중앙시베리아 군단(1-й Средне-Сибирский армейский корпус), 제2 스텝시베리아 군단(2-й Степной Сибирский корпус), 제3 우랄 군단(3-й Урал корпус), 제4 동시베리아 군단(4-й Восточно-Сибирский корпус), 제5 프리아무르 군단(5-й Приамурский корпус), 젬스카야 라트를 지지하고 지원할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백군은 단일화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기에 전폭적인 서방의 지원하에 있더라도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반볼셰비키에 대한 저항의 기치 아래 조직된 이들이었지, 그들 내부에 대한 이념적, 사상적 대립은 극심하였다. 반대로 러시아 적군은 그 훈련도나 장비에 대한 열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바 있으나, 조직화 된 군대 체계와 레프 트로츠키(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가 강제징병령을 시행함에 따라 500만 명에 이르는 초대규모의 병력을 편성하여 물량 공세를 이어감에 따라 백군은 차례로 각개분쇄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사할린 망명정부는 러시아 본토를 수복할 가능성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연합국의 중재 아래 러시아 적군과의 물밑 외교 협상에 나서기를 시도했다. 볼셰비키 정권에 입장에서는 사할린을 수복하기 위한 상륙전을 개시코자 했으나, 독일제국과의 철저히 참패한후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Бре́стский мир, 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Брес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을 체결했을 만큼 상태가 녹록치 못했던 소비에트 러시아 입장에서는 극동에 위치한 사할린으로의 상륙전을 벌일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마침내 1922년, 8월에 미국을 중재국으로 하여 적백합의를 통해 사할린 망명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재를 인정할 것과 본토 수복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전제로 하여 사할린쿠릴 열도에 대한 독립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아냄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할린 망명정부는 그 지위를 잃게 되었으며, 결국 사할린 제1 차르국(Первая Царство Сахалинское)으로 새로운 주권 독립국가로 분리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23년까지 이른바 '최후의 백군'이라 불리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지역을 기반으로 반볼세비키 저항을 시도한 아나톨리 페펠리야예프(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장군이 뒤늦게 소비에트 러시아로 부터 항복을 선언한 뒤 절차를 거쳐 사할린 제1 차르국으로 인도되기도 하는 등 소비에트 러시아에 반발하는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강제 합병된 독립 세력들의 무장 반발은 적어도 1930년대 초까지 진행되었다.

각주

  1. 이후 오호츠크 소함대는 1926년, 이반 코자노프(Иван Кожанов) 사령관을 중심으로 아무르 소함대(Амурская военная флотилия)로 재편되어 사할린 차르국의 핵심 병력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극동 연합함대(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Объединённый флот)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갖춘 함대 전력으로 현재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한편 이들 중에는 적백내전으로 혼란한 양상을 피하고자 사할린으로의 망명에 함께 나서는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되던 형태였으며, 1918년 12월 즈음에 사할린의 망명 인구는 약 25만 명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3. 물론 사할린 망명정부의 입장에서는 극동의 분리주의를 표방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도하는 녹우크라이나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사할린 망명정부의 계획에는 극동 지역의 적군을 빠른 속도로 패퇴시킨 뒤 녹우크라이나 병력을 무장해체 시킨다는 시나리오를 작성한 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