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나에스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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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나에스테가
Coat of Arms of Royal San Tianaeste.png
국가 산티아나
Reino Oriental del San Tiana
작위 산티아나의 국왕
Rey de San Tiana
세레노 이슬라의 국왕[1]
Rey de Islas Sereno
설립자 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현재 수장 레온 3세
León III
건립일 1867년 8월 15일
본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House of Habsburg-Lothringen

산티아나에스테가(영어: House of San Tianaeste)는 현재 산티아나의 왕실이다. 개창자는 오스트리아 제국(Kaisertum Österreich)의 대공이자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이며,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의 공화 혁명으로 인하여 왕당파가 패배하자, 산티아나로 망명했으며 산티아나의 왕당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막시밀리아노 1세산티아나에스테(San Tianaeste)라는 성씨와 가문명을 사용하면서 독립적인 왕가가 되었다.

역사

1828년, 우루과이-산티아나 독립 전쟁(Cisplatine-Ciscalerate War)에서 패배한 브라질 제국(Império do Brasil)은 몬테비데오 조약을 체결하고서 우루과이산티아나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독립의 결실을 맺은 산티아나였지만, 공화주의적 연방체제의 수립을 준비하던 시스에르타 당(聯邦黨)과 중앙집권적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뎐 리베라 당(王政黨)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이른바 대충돌(Estupendo Conflicto)이라는 이름의 유혈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국가의장이자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던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José Oribe De Tiana)[2]왕정주의를 지지하면서 "브라질 제국절대군주정에 반면하여, 유럽 모델의 왕실을 조속히 개창할 것"이라고 엄포함에 따라 유혈 충돌은 일단락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에 갈등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산티아나 왕실 도입은 지지부진하기만 하였고 민중들 사이에서도 "국가평의회 같은 임시 정권을 마무리하고, 빠른 시일 내에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는 연방제의 입각한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여론이 다수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1858년에 발생한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는 등, 사회적 혼란도 극심하였다.[3]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함께 우루과이 내전을 종결한 군사 독재자인 카우딜로 프로레스우루과이와 함께 삼국 사이에 끼여 불안정한 대외적 정세와 함께 이념적 대립 및 동부-서부 간 지역 대립[4]까지 겹치면서 엄청난 혼란이 가중되었다.

한편 멕시코 제2제국(Imperio Mexicano)의 황제로 옹립된 막시밀리아노 1세인디언농민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따른 자애로운 통치에 나섰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멕시코 내에서 왕정을 폐지한다는 여론이 강세를 이루면서 공화 혁명이 발발하자 막시밀리아노 1세는 퇴위를 거부하고 왕당파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베니토 후아레스의 멕시코군이 들고 일어나 케레타로(Santiago de Querétaro)를 포위하면서 막시밀리아노는 1867년 5월 15일 항복했다. 이후 총살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와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그리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이 막시밀리아노 1세를 살릴 것을 요구하면서 결국 24시간 이내에 멕시코를 떠날 것을 조건으로 하여 망명을 허락하였다.

결국 망명길을 떠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산티아나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산티아나의 왕당파[5]들은 기회를 노려 막시밀리아노 1세를 새로운 산티아나의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에 유럽의 많은 왕실들도 개인적인 지지를 표하였고, 기존의 왕정주의에 반발하던 시스에르타 당"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지양하고 연방주의(Federalism)의 실현을 위하여 헌법에 명시된 권한을 중앙 정부에 귀속하고 이후 지방 정부간 권력이 나뉜 연방으로 정부를 구성하되, 최소한의 지방 통치 권한은 주에 귀속되는 체계를 확립할 것"이라는 조건 하에 왕위 추대를 묵인하였는데, 이는 공화제를 독단적으로 추진하기에는 막시밀리아노 1세에 대한 유럽권의 지지가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막시밀리아노 1세가 산티아나 국왕으로 추대될 것을 허락함에 따라 산티아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House of Habsburg-Lothringen)를 왕가로 한 독립 군주국의 건립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국민적 여론을 감안한 막시밀리아노 1세는 가문명과 성씨를 "산티아나에스테"로 하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로부터의 분가 선언 및 산티아나의 독립 왕가를 수립하였다.

이후 산티아나에스테 왕가는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상태이며 헌법 기관이자 역사적으로 중요한 직책으로 평해지고 있다. 이에따라 산티아나의 헌법 군주제는 산티아나의 군주와 그의 가족 그리고 왕실의 임무와 특권을 행사함에 있어 군주를 보필하는 형태로서 현재 왕실의 수장은 레온 3세(León III)이며, 2016년 8월에 부왕이 양위를 선언함에 따라 따라 새로운 산티아나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산티아나의 역대 국왕

이름 초상 재위기간 탄생 죽음 배우자 계승권리 참고
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Maximiliano I.jpg 1867년 8월 15일 ~ 1889년 10월 7일 183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 차남
1889년 10월 7일
산티아나 루드비티오
향년 51세
샤를로트 드 벨지크
1921년 1월 19일 사망, 향년 80세
1남 2녀
왕정 수립 멕시코 제2제국 황제 (1864 ~ 1967) 역임
막시밀리아노 2세
Maximiliano II
Maximiliano II.jpg 1889년 10월 7일 ~ 1923년 1월 23일 1869년 6월 27일
산티아나 베아시운
막시밀리아노 1세의 장남
1923년 1월 23일
산티아나 베아시운
향년 54세
조피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1929년 4월 16일 사망, 향년 63세
2남 1녀
막시밀리아노 1세의 장남
레온 1세
León I
120px 1923년 1월 23일 ~ 1939년 2월 9일 1895년 8월 11일
산티아나 베아시운
막시밀리아노 2세의 장남
1956년 6월 19일
산티아나 리베네그로
향년 61세
스테파니 드 벨지크
1935년 3월 14일 사망, 향년 49세
1남 1녀
막시밀리아노 2세의 장남 왕위를 동생인 하이메(Jaime)에게 양위
하이메
Jaime
Jaime.png 1939년 2월 9일 ~ 1968년 9월 4일 1896년 8월 21일
산티아나 베아시운
막시밀리아노 2세의 차남
1968년 9월 4일
산티아나 카렐노라도
향년 72세
베아트리스 에우헤니아
1970년 1월 23일 사망, 향년 67세
3남 2녀
레온 1세의 동생 형인 레온 1세(León I)의 퇴위로 왕위 계승
루이사
Luisa
Luisa.jpg 1968년 9월 4일 ~ 1972년 3월 11일 1931년 2월 16일
산티아나 카렐노라도
하이메의 장녀
1981년 3월 25일
산티아나 리베네그로
향년 72세
카를로스 데 고도이
1970년 6월 4일 사망, 향년 65세
1남 3녀
하이메의 장녀 산티아나에스테 왕가 최초의 여왕

각주

  1.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다.
  2. 열렬한 군주주의자(Royalist)였던 그는 자서전이자 자신의 이념을 총정리한 《잠재적 왕국의 기획》에서 "수많은 유럽의 군주국들은 정치의 극단화와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하여 왕실의 중요성을 인식한 바 있으며, 안정적이고 번영하며 자유로운 국가들에 대해 통치를 요하고 있다. 특히나 헌법 군주제는 정치인이 대체할 수 없는 전통과 관습을 확립함에 따라 국가적 전복 사태를 비롯한 극단적 정계 변혁을 방지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회고한 적 있다.
  3. 물론 본 쿠데타 모의 사건은 도리어 연방 공화제를 주도하던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시스에르타 당의 지지도와 민심을 감소시키는 역풍을 가져왔으며, 산티아나의 왕정이 실현될 수 있는 기틀로서 작용되기도 했다.
  4. 이는 이념 대립이 원인이 되었는데, 브라질의 영향을 받아 다수의 대농장주들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던 동부와 우루과이아르헨티나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연방제를 받아들인 중산층 사회의 서부간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5. 기존 절대군주정을 지향하던 구심 세력이 와해되면서 과거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푀양 파(Feuillant)와 같이 《인권 선언》의 정신을 준수하나, 왕권의 신성불가침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귀족, 부르주아 계층, 온건파 등 입헌군주파로서 리베라 당과는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