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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나 해외원정군
Fuerza Expedicionaria San Tiana
산티아나 해외원정군의 기
활동 기간 1943 ~ 1945
국가 산티아나 산티아나
소속 산티아나 육군
산티아나 공군
종류 원정군
Expeditionary Force
역할 - 남 프랑스 침공작전(Operation Dragoon)으로 인한 지중해 전선 공백 지원
- 춘계 공세(Spring 1945 offensive) 지원
규모 12,350
명령 체계 미 제15군 산하 미 4군단
별명 Ejército de la Libertad de Sudamérica
남미의 자유군
표어 San Tiana lidera la libertad.
산티아나가 자유를 이끈다.
파랑, 노랑
마스코트
티아나 마리아
Tiana-Maria
장비 M8 그레이하운드, M4 셔먼
B-25 미첼, P-47D 썬더볼트
마한급 구축함, 캐논급 호위구축함
스프링필드 M1903, 스프링필드 M1903A3[1]
일부 M1 개런드, M1 캐빈 무장
참전 제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지휘관
주요 지휘관 호세루이스 곤살레스
José-Luis González

산티아나 해외원정군(스페인어: Fuerza Expedicionaria San Tiana)은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도중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유럽 대륙의 산티아나 소속 원정군이었다. 산티아나 해외원정군은 호세루이스 곤살레스(José-Luis González) 장군이 지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서 유일하게 본토 외부에서 활약했던 국군이자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함께 유일한 실질 참전국이었으며, 유럽 전장으로의 해외원정군 파견은 산티아나로 하여금 남미의 강력한 국방 개혁을 통하여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과의 우호 노선을 다지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배경

미국의 산티아나-브라질 침공 계획

1941년, 미국랜드리스 계획영국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호위 등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 상당히 깊숙하게 개입하는 형세였으며, 당시 미국이 가장 우려하던 했던 것은 프랑스의 지리멸렬한 패전으로 인하여 추축국들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프랑스 식민지를 흡수하여 팽창하는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까지 영향력을 가한 추축권의 입장에서 지리적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 본토와 대서양 수송로를 위협하기 위한 가장 짧은 노선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브라질의 북동부를 잇는 작업이었다.

1939년의 미국은 이미 포괄적 전쟁 계획의 일환으로서 전쟁 계획, "레인보우"를 완성했고 미국이 기필코 사수해야 했던 대원칙 중 하나는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사이의 대서양을 횡단하는 가장 짧은 루트인 브라질 북동부의 확보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점은 당시 브라질을 통치하던 제툴리오 바르가스(Getúlio Dornelles Vargas)의 정권으로서 바르가스 정권은 포르투갈을 모방하여 이른바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New State/신체제)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적인 독재 권력을 휘둘렀고, 각 주(州)의 독립적 성격이 강했던 브라질을 그는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서 연방 권한을 급속도로 강화시켰고 이러한 전체주의적 노선의 유지 및 비슷한 성격의 정치 체제를 갖춘 추축국과의 온건 우호 외교노선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30년, 쿠데타로 브라질을 장악한
제툴리오 바르가스 대통령

특히 당시 미 전략 사무국이었던 OSS의 보고서에 따르면 브라질 장교단의 약 70%가 친나치 성향을 갖추었고, 정부 고위층 대다수 또한 그러한 조사 결과를 나타냈으며, 거기에 더하여 브라질 남부에 거주하던 약 150만 명에 이르는 독일계 이주민들의 존재는 미국의 우려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2][3] 또한 독일 제3제국의 프랑스 점령과 북아프리카 장악은 미국의 군사 계획가들로부터 독일이 북아프리카 비시 프랑스 식민지를 기반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한 대서양 횡단으로 브라질 동부 원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게 되었고, 이는 곧 미국의 안방이나 다름 없는 남미 권역이 추축국 세력권 하에 들어간다는 초유의 결과를 가져오게 됨에 따라 미국의 국가 존립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편, 산티아나 역시 근왕적 전체주의 성격을 띈 에르네스투 데 오르살레스(Ernesutu De Orzáles) 정권이 존속하는 형세를 보였으며, 일본제국과의 우호 외교 노선을 통하여 태평양 남부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남미의 상당한 군사 강국이었던 산티아나가 브라질의 바르가스 정권과 함께 남미의 친 추축 세력권의 중심지가 되어 미국의 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모습이 보이면서 미국 정부의 고심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이 우려했던 추축축의 브라질 경유 침공 루트

이에 따라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의향을 떠 볼 심산으로서 미국은 1941년 말, 바르가스 정권과 오르살레스 정권에 대서양 항로 보호를 위해 각각의 영토에 항공 기지의 사용과 기지를 보호하기 위한 병력 파견을 타진하였고, 당연히 바르가스와 오르살레스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주권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판단, 이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미국은 이로서 바르가스 정권과 오르살레스 정권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했다고 생각(당시 워싱턴 주류층은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이러한 행동이 단순 미국 지배에 대한 저항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내는 행동으로 해석)하였다.

상황이 점점 극단적으로 흐르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본격적인 참전에 나서자, 이들 미국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추축국에 의한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협조를 저지하고 특히 브라질의 북동부 확보 시도를 저지하는 계획을 작성하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미국의 대 브라질-산티아나 침공 계획인 "고무 계획"(Rubber Plan)이 탄생하였다.[4]

브라질-산티아나 침공 작전에 전면에 나설 예정
이던 미 전함 텍사스(USS Texax)

북부 브라질과 산티아나 침공 작전인 고무 계획의 목적은 중요 비행장과 항구 시설을 확보하는 데 있었고, 브라질과 외곽 섬에 미해병대를 상륙시켜 확보할 예정이었으며, 주요 목표는 대서양 횡단 노선의 기본 비행장이었던 나탈(Natal) 공항과 나탈 공항 남쪽의 위치한 살바도르(Salvador) 공항, 벨렘(Belem), 그리고 북쪽에 위치한 페르난두 데 노론냐(Fernando de Noronha) 섬이었고, 산티아나의 주요 해안 시설과 함께 남대서양에 위치했던 세레노 이슬라 제도(Sereno Isla)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들 지역에 위치한 비행장과 주요 시설에는 모두 B17 폭격기, 대형 수송기를 수용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계획에 따라 미국 대서양 함대는 상륙 작전, 해안 포격과 폭격 등 화력 지원을 위해 전함 텍사스(USS Texas)를 동원하고 항공 지원을 위해 항모 레인저(USS Ranger) 기동부대를 동원할 심산이었으며, 이미 육군 제9보병사단은 계획 작성과 동시에 훈련에 돌입했고 1942년 1월에는 브라질 레시페(Recife) 지역에 상륙하기로 예정한 제1 보병 사단과 해병 제1 사단이 이 지역에서 예상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상정, 버지니아 주 케이프 헨리(Cape Henry)에서 상륙 연습에 돌입하였다.

한편 이에 맞서는 브라질 군과 산티아나 군은 해상에서 각각 두 척과 한 척의 영국산 구형 드레드노트급 전함(상파울로, 미나스제이라스/산티아스)를 포함하여 경순양함 4척 1척, 구축함 9척과 1척, 잠수함 3척과 1척 및 기타 소형 함정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각각의 항공기 역시 330대와 30여 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되었던 복엽기로 구성된 구식 전투기와 폭격기로 미 육군 항공대와의 맞대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되었다. 특히 브라질 육군은 남부에, 산티아나는 중부에 주로 집중 배치되면서 미국의 주 상륙지점인 브라질 북부와 산티아나 남부 전역으로의 신속한 동원이 불가능 했고 브라질 북쪽으로 산개된 육군 병력 1만 명과 산티아나 중부에 산개된 육군 병력 2,000 명으로 추산되었기에 당시 미국 침공군의 3개 사단 6만 4천명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수준이었다.

산티아나 해군의 구식 전함이었던 산 티아스 전함
(San Tias Battleship, 미 해군 코드 BB)

하지만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 행정부는 거의 준비가 끝난 브라질 및 산티아나 침공을 실행하기 위한 군부의 일부 강경론자들의 재촉에 난색을 표하면서 일단 외교적 해결을 모색, 먼저 1941년 12월에 국무부 차관 섬너 웰스(Sumner Welles)를 브라질과 산티아나로 보내 나탈과 벨렘 그리고 세레노 이슬라의 비행장에 항공 정비사로 가장한 200여명에 이르는 미 해병대 주둔을 허용하도록 바르가스와 오르살레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외부적으로는 브라질과 산티아나 당국의 초청으로 입국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떄 루즈벨트 대통령은 바르가스와 오르살레스가 그의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체면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미국의 접근을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루즈벨트는 브라질, 산티아나 정부와 군부에게 연합군에 대한 지원 수준의 병기 및 탄약의 수출을 명령했고 이러한 조심스럽고 친화적인 접근은 1942년 1월, 남미 국가 외무 장관 회의(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the South American Nations)에서 남미 국가들의 독일 외교 관계 단절을 촉구하는 성과를 이끌어 내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중요해던 것은 바로 돈의 힘으로서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았던 브라질과 당시 경제적 난황을 겪고 있던 산티아나는 이런 미국의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기 어려웠으며 마침내 1942년 1월 29일, 브라질 정부와 산티아나 정부는 추축국과의 단교를 선언했으며 그동안 남미권을 우호적인 인식으로서 보고 있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보트를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지시하였다.

남미 연안에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던
독일의 U-156와 U-507

이렇게 1942년 2월부터 시작된 남미 연안(특히 브라질과 산티아나 연안)에서의 독일 유보트에 의한 이른바 통상파괴 작전은 약 2,000여 명에 이르는 자국민의 희생을 몰고 온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항 독일 의지에 대한 불씨를 당겼고 마침내 1942년 8월 22일, 브라질 정부와 산티아나 정부는 독일에 대한 공동 선전포고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과 산티아나는 연합국에 가담하게 되었고 자칫 최초로 실시한 공세적 군사작전이었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과달카날 상륙작전이 뒷전으로 물러났을 브라질-산티아나 침공 작전이 실시될 뻔 했으나, 미 행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경제적 지원하에 작전을 취소되는 성과를 맞이했고, 특히 아이러니했던 부분은 브라질-산티아나 침공군의 선봉이었던 미 육군 제1 보병사단은 북아프리카 침공 작전의 선봉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해병 제1사단 역시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선봉부대로 활약하게 되었다.

산티아나의 참전

산티아나는 표면적으로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미국의 경제 지원과 거듭되는 요청으로 마침내 1942년 1월 28일, 루드비티오(Ludvitio)에서 열린 팬 아메리카 컨퍼런스(The Pan American States Conference)에서 산티아나 정부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그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산티아나와 브라질의 배신에 보복하려는 행세로서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연안에서 유보트를 이용한 무제한 통상파괴 작전을 명령하였고 1942년 2월부터 이 해역에 파견된 독일 유보트 21척과 이탈리아 잠수함 3척은 브라질의 상선 36척과 산티아나의 상선 11척을 격침시켰으며, 2,114명의 브라질-산티아나 민간인 사망자와 1,235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U-507에 의해 격침된 브라질 여객선 바에펜디(Baependy/민간인 270명 사망)

당시까지 친 나치 성향이 강하던 브라질 바르가스 정권과 산티아나의 오르살레스 정권은 비록 미국의 대규모 원조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추축국과의 단교를 실시하였으며, 직접적인 전쟁에까지 참여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히틀러의 보복 행위에 대해 브라질과 산티아나는 전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산티아나의 주요 대도시 여러 곳에서 발생한 대독일 타도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항의집회와 악화되어 가는 여론에 오르살레스 정부도 굴복, 마침내 1942년 8월 22일 정식으로 대 추축국 선전 포고를 발표하였다.[5]

이렇게 브라질과 산티아나가 중립에서 벗어나 대 추축국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연합국에 가담하기를 선언하자 가뜩이나 연합국의 공장이자 문턱 낮은 은행이었던 미국은 당장 브라질과 산티아나를 랜드리스 수혜국으로 지정하였고 이때부터 두 남미 국가에게 소총을 시작으로 전차, 각종 전투기, 폭격기는 물론 구축함, 대잠용 콜벳함 등의 병기와 군수물자, 자재는 물론 자금 지원까지 온갖 질적, 물적 지원을 시도했다.

한편, 이렇게 산티아나가 무작정 전장에 나선다고 하니 연합국은 이를 적극 환영했으나, 당장 산티아나 군의 장비들은 모두 노후화된 것은 물론이며, 육군은 75mm 야포와 제1차 세계대전 형 독일제 마우저 소총(게베어 1871, M1893 등), 그리고 몇 대의 경전차(르노 FT-17M1917 경전차를 개량화)가 전부였고 공군은 약 35기의 기체수를 헤아렸지만 대부분 1차 대전 이후 내놓은 고물들을 떨이로 사 모은 복엽기(모라네-솔리에르 P, 니우포트 10 등)였으며, 거기다 해군은 1차 대전 시기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덩치만 큰 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과 소형 연안 경비정 몇 척이 무장의 전부였다. 여기다 더해 산티아나 군은 근대적 전술은 전혀 활용해본 바가 없었고 병력 자원마저 대규모 전술 연습은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들이라 이들을 당시 전 유럽을 석권하던 최정예 독일군과 교전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유럽 전장에 파견할 산티아나 군의 소요 자금과 훈련을 미국이 지원하는 것으로서 본격적인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의 산티아나 원정군의 모습

한편, 당장 연안에 벌어지는 독일 해군 유보트의 통상파괴 작전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해결할 일이 못 되었기에 미 해군은 당장 8척의 캐논(Cannon)급 호위함과 각종 함정들을 브라질과 산티아나 해군에 양도함은 물론 마한(Mahan)급 호위구축함의 설계도와 건조 기술 및 자금을 제공, 자국 내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협력하였다. 또한 대잠수색과 공격을 위한 PBY-5A 카탈리나(Catalina) 수상기와 B-25 폭격기도 제공하였으며, 이는 브라질 해군 항공대산티아나 육군 항공대 창설의 기초가 되었고 브라질 해군과 산티아나 해군, 미 해군은 합동으로 브라질과 산티아나의 해안을 비롯하여 대서양 남부의 순찰과 대잠 작전을 실시함으로써 전 근대적이었던 브라질 해군과 산티아나 해군의 현대적 해군 전술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후 추축군 잠수함들은 1943년 독일 잠수함 U-199가 남미-미국 연합 해군이 발진시킨 카탈리나 수상기의 폭뢰공격에 격침되는 것을 시작으로서 총 10척의 독일 유보트와 이탈리아 잠수함 1척(아르키메데스)이 차례차례 격침되면서, 남미를 주름잡던 추축국 해상 활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전, 이탈리아의 남미군

산티아나 육군의 유럽 원정군은 미군에 의해 재편되고 미국식으로 철저한 훈련을 거친 다음, 1944년 7월 2일, 선발대 2,600여 명이 미국 수송선 제네럴만(USNS General Mann)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7월 16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들은 기본적 개인화기도 없이 상륙하였고 이후에는 막사 배치나 부대 전입은 물론 아무런 명령이나 안내, 관심도 받지 못하고 한참을 부두에 멀뚱이 서 있었으며, 이를 본 산티아나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원정군이 전선에 나가기 전부터 한차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는 함께 이탈리아 전선으로 나선 브라질 군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산티아나 원정군

이후 이들은 마크 클라크 중장의 미 제15군 산하 미 4군단에 편입되었는데, 이 군단은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집합체로 백인에서 분리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미국 흑인)으로 구성된 미 제 92보병 사단, 김영옥 대령이 소속되었던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442보병연대를 비롯,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구르카, 프랑스 식민지 군, 영국 위임령 출신의 유대인과 아랍인, 남아프리카, 폴란드, 그리스, 체코 군까지 소속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브라질 군과 산티아나 군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이후 브라질 군과 산티아나 군은 무기 수령과 현지 적응 훈련을 거쳐 이탈리아의 추축군 방어선인 고딕라인에 투입되었는데 그 첫 번째 임무로 남 프랑스 침공작전(Operation Dragoon)을 위해 전선에서 빠지는 사단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임무에 투입하게 되었다.

1944년 겨울, 일시적으로 소강상태를 맞이한 이탈리아 전선에서 1945년 봄, 연합군은 춘계 공세에 돌입하였고 브라질 제 1사단과 산티아나 제1 사단은 미 제 10산악사단과 협동으로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전략 요충이던 몬테카스텔로(Monte Castello)와 카스텔뉴오보(Castelnuovo)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딕 라인의 요충지, 몬테카스텔로를 점령한
산티아나 원정군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 제 15군의 최종공세는 1945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는데 산티아나 군과 브라질 군의 남미가 선봉에 나선 미 제 4군단의 목표는 몬테세(Montese) 지역으로서 공세 첫 날,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미 제 10 산악사단을 포함, 공세에 나선 연합군은 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격퇴되었으나, 브라질-산티아나 원정군은 대량의 야포를 동원, 몬테세에서 연합군 4개 사단에 저항하던 추축군에 대한 사전 포격을 실시한 후 M8 장갑차셔먼 전차를 앞세워 시내에 돌입, 마침내 이 지역을 손에 넣기에 이르렀다.

몬테세로 진입하는 산티아나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이후 산티아나 군은 퇴각하는 독일군을 추격하여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들은 약 8,000여 명의 추축군 병력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전쟁기간 브라질 원정군은 1개 보병사단에 연인원 약 1만 2천여 명이 약 10개월 가량 참전하였고 이 기간 동안 전사 251명, 행방불명 38명, 부상자 757명 등 약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당시 독일은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브라질과 산티아나 군 참전을 그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참전한 것으로 믿었으며 그들은 이를 그저 정치적 측면에서만 이해하려 했고 남미 원정군에 대한 선전 활동에만 집중하였으며 특별히 브라질 원정군과 산티아나 원정군 만을 대상으로 베를린 라디오 방송은 "Hora AuriVerde"(GoldenGreen 시간)이라고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로 매일 한 시간 동안 방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당시 남미 원정군들의 주력 무장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 바로 이들이 주력 개인화기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M1903 스프링필드 볼트액션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었다.

M1903 스프링필드 볼트액션 소총으로 무장한
산티아나 원정군

이 시기는 대부분의 미군 병사가M1 개런드 소총으로 무장했고 일부 지정사수나 총류탄 사수, 후방의 행정요원이나 헌병요원만이 M1903으로 무장했는데 문제는 이미 1차 대전 시 생산된 M1903이 약 100만정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전부터 미군 당국은 급속도로 불어날 병력의 무장을 위해 M1 개런드 소총 생산과는 별개로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의 재생산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후 스프링필드 소총 생산라인을 인수한 레밍턴 사가 전쟁 발발이후 수요를 따라잡고자 몇몇 부품과 공정을 간략화 시킨 모델을 내 놓았고 이것이 M1903A3 모델이었으며 이 모델의 생산은 2차 대전의 거의 막바지인 1944년 2월까지 계속되어 2차 대전 기간 중 생산된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은 약 129만 정에 달해 전쟁 중 생산된 M1 소총의 25%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 생산된다.

이렇게 막대한 양이 생산된 M1903A3 스프링필드 소총은 이후 후방에 위치한 병과 요원 위주로 지급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최전선 부대에 지급되기도 했으며, 2선 급 화기란 인식 때문에 미군 보급체계에 의존하는 동맹국 병사에게 주로 대량으로 지급되었고 여기에는 자유 프랑스의 식민지 군과 함께 남미 원정군이 포함되어서 이들의 제식 개인화기는 M1903A3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결정된다.

산티아나 공군의 활약

한편, 산티아나 공군의 유럽 원정군은 1943년 12월 18일, 호세 로드베스 중령을 지휘관으로 21명의 조종사를 포함, 21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제 1 항공전투단(The 1 o GAVCA/1st Fighter Group/1º Grupo de Aviação de Caça)이라 명명되었다. 이들은 민간인 출신들이었던 육군과는 달리 비록 복엽기를 운용했지만 대부분이 비행훈련을 이수한 우수한 인력들이었다.

이들의 훈련은 브라질과 함께 파나마에서 미군 교관들에 의해 실시되었고 훈련과 더불어 파나마 운하 방위작전도 일부 참가하였으며 1944년 6월 22일, 신예기였던 P-47D 썬더볼트(Thunderbolt)로의 기종변환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이후 1944년 10월 6일,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 도착한 산티아나 공군 유럽원정군 1 o Caça는 미육군 항공대 제 12 공군 휘하 제 62 전투 비행단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1944년 10월 31일,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 1945년 4월 22일, 산 베네데토(San Benedetto)지역에서 교량, 바지선, 및 이동하는 차량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수행, 이날 하루 동안 50대 이상의 추축군 전차, 트럭, 차량을 파괴했고 바지선 수십 여척에 피해를 입히는 대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종전 시까지 제 1 산티아나 전투비행단은 주로 대 지상임무에 투입되었으며, 1,256회의 출격, 총 비행시간 3,175 시간과 246회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500 여대의 차량, 철도 화차 3량, 장갑차량 4대, 철도 및 도로 교량 14개소 및 수많은 연료 탱크와 군수품 저장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 아래는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제1 산티아나 전투 비행단의 운용 총계
임무 수행 완수 246회
공격 임무 수행 1,256회
방어 임무 수행 3회
임무 수행 중 총 비행 시간 3,175시간
전체 총 비행시간 4,314시간
전체 폭탄 투여 횟수 2,841회
발사 폭탄(F.T.I) 85회
단편 폭탄 (260 lbs) 4회
단편 폭탄 (90 lbs) 29회
폭파 폭탄 (1.000 lbs) 5회
폭파 폭탄 (500 lbs) 3,456회
대략적 폭탄 투여 총 톤수 567톤
.50 구경 탄약 라운드 발사 횟수 680,230발
총 로켓 발사 횟수 451회
가솔린 소비량 1,648,561 L
목표/목적 파괴 손상
철도 기관차 01 13
자동화 운송시설 250 123
철도 및 탱크 63 83
장갑차 04 4
철도 및 고속도로 교량 04 8
철도 및 고속도로 절단 33 00
추축국에 점령된 건물 89 75
추축국에 점령된 군사시설 18 14
공장 04 03
기타 건물 39 04
연료 저장소 06 02
정유공장 01 01
레이더 시설 00 02

그외 이야깃거리

한편, 산티아나는 브라질과 함께 전쟁기간 내내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 남미 외교정책인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과 남미국가 중 비교적 개전 초기 전쟁 참가를 선언하였던 관계였기에 말 그대로 미국의 막대한 지원 아래 대규모 원조를 받음으로서 남미의 4대 강국(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산티아나)중 단기간 내에 군사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친독 성향을 갖춘 아르헨티나의
오르티즈 대통령

하지만 이웃 아르헨티나와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오르티즈 정권카스티요 정권을 거치면서 전쟁 내내 나치에 동조하는 듯한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며 중립을 유지하였고 1943년, 쿠데타까지 발생하며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자 미국은 이 사건이 친 나치 쿠데타라고 인식하여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조치를 취하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우방국이었던 우루과이에 사이에 있던 산티아나는 애매한 입장 차이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윈스턴 처칠은 아르헨티나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영국에 필수적이라고 지적하며 아르헨티나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정책에 대해 불평하며 아르헨티나로부터의 식량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국은 아르헨티나를 서반구의 나치 본부라며 맹비난하였다. 또한, 미국은 아르헨티나 침공을 고려했고 이 옵션들 중에는 브라질과 산티아나를 지원하여 아르헨티나를 침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침공하는 계획도 있었고 가뜩이나 앙숙인 브라질은 주미 브라질 대사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브라질 공군으로 완전 파괴도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서 외교를 펼치던 산티아나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전쟁이 추축국의 패배가 명백해 질 때 까지 온갖 압력을 받아야했고 1945년 3월 27일에 가서야 대 추축국 선전포고를 발표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나치 본부 역할은 계속되었고 매우 잘 조직된 친 나치 조직을 보유한 아르헨티나는 1946년, 후안 페론 정권이 비밀리에 유럽을 탈출한 나치 지도자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아르헨티나로 도망간 나치 도망자 수는 확인된 것만 1960년 5월, 3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각주

  1. 기존 M1903 모델 간략화
  2. 심지어 당시 브라질에는 나치의 문양이었던 히켄크로이츠를 팀의 마크로 사용하던 축구팀도 있었다고 한다.
  3. 실제 사진
  4. 고무 계획의 본제목은 "시리얼 넘버 737:브라질 북동부 및 산티아나에 대한 공동 기본 계획, 1941년 12월 21일(Joint Basic Paln for the Occupation of Northern Brazil and San Tiana, Serial 737 of 21 December 1941"이었으며, 주 된 내용으로서 브라질 북부 지역의 몇몇 주요 항구와 공항과 함께 나아가 산티아나의 해안가를 장악하는 수륙 양용 작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5. 여기에는 기존 브라질/산티아나 내 독일계 이민자들의 기득권 행세에 열 받은 민중의 반발 심리도 한 몫 했다고 학계에서 추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