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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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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8대 황제
선덕제 | 宣德帝
존호 개선위공숭덕현제경의경순효명황제
(改善威共崇德賢齊敬義景順孝明皇帝)
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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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닐락 어르셜트
출생 2000년 10월 8일 (23세)
황도특별시 강서구 황도국립병원
재위 대한국 황태녀
2019년 9월 12일 ~ 2019년 12월 31일
대한국 황제
2020년 1월 1일 ~
청 황제
2024년 1월 1일 ~
연호 선덕(宣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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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제8대 황제이자 대한국 최초의 여성 황제. 연호는 선덕(宣德), 휘는 희(憙). 전세계 국가원수중에서 가장 연소하다.

동아시아사의 두번째 여황제이며 황태녀 지위에 올라 직계 혈통으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오빠였던 황태자 이표가 2019년 2월 서울문사에 휘말리고 그해 9월 13일 유죄 확정 후 폐서인되면서 황태녀와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황실에 대한 인상의 쇄신이 절실했던 탓에 아버지인 숭영제가 상황으로 물러난 뒤 즉위하여 대한국 최초의 적장자가 아닌 황제가 되었다.

작위 및 칭호

상제가 보우하사 대한국 및 대청국, 그 밖의 국가와 영토의 황제이시며 대몽골국 대칸, 조선국 국왕이자 유가예법과 불도의 수호자이신 효명황제 폐하
국내 공식 호칭

즉위 이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다음과 같다.

  • 혜서공주(惠徐公主) 전하 (2008년 5월 1일 ~ 2019년 9월 11일)
  • 대한국 황태녀이자 조선왕이신 혜서공주 전하 (2019년 9월 12일 ~ 2019년 12월 31일)

다음은 공식 석상에서 사용되는 칭호로, 정식 칭호는 아니지만 편의를 위해 축약되어 사용되는 칭호이다.

  • 대한국 황제 폐하 (2020년 1월 1일 ~ 현재)

어린시절

2000년 10월 8일, 황도국립병원에서 태어났다. 황태자 이표의 탄생 이후 무려 9년만에 태어난 늦둥이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언론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 성장에 문제가 있을까 염려한 황후는 돌이 막 지날무렵부터 철저하게 궁을 향한 언론의 관심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는 공주가 5살이 지났을 무렵에도 공식석상에서 오로지 황태자 이표와 함께만 나타났으며 공주 책봉식 또한 황제와 황후를 비롯한 황실 일가와 몇몇 궁내성 신료들, 그리고 소수 언론인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여 언론의 관심을 무마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언론으로부터 차단된 상황으로 인해 공주에 대한 각종 잡설과 근거없는 추측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황족은 만 7세가 되는 해 대한한림원 초등부에 입학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공주는 만 10세가 되어서야 초등부에 입학했다. 이로인해 언론에서는 공주가 지적장애등 정신질환을 앓고있는게 아닌지 의심하는 보도를 연일 내보냈으나 궁내성은 반박조차하지 않아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가지 않았는데 2011년 6월 20일 황제의 사면령이 적힌 조서를 11살이었던 공주가 대신 낭독했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예법에 맞도록 절도있게 행동하는 모습이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주에 대한 유언비어는 크게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꽤 한참동안 공주대역설을 주장하는 황색언론이 설쳐댔다.

황태녀가 되다

2018년 말, 오빠인 태자 이표사건에 휘말리며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뀔지도 모르게 되었다. 황실궤범에 따라 숭영제의 장녀인 혜서공주는 제위를 이을 수 없었기에 황사 1순위는 숭영제의 조차인 동생 명친왕의 장남 효경군이었다. 하지만 계승순위에 따라 무조건 제위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추후 연속으로 개최될 황실회의에서 황사(皇嗣)가 결정될 터였다.

태상황은 조선왕을 폐하는 순간부터 황실궤범을 바꾸어 혜서공주에게 제위를 넘겨주게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황실의 큰어른들인 은친왕, 평순공주, 문정공주[1] 세명이 효경세자의 제위 승계에 대해 부정적이라 알려졌고 태상황도 그동안 명친왕의 행태에 대해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9년 봄이 되면서부터 언론에도 여계 세습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숭영제는 조카인 효경세자를 황사로 세우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9년 4월 7일, 태상황은 황실회의를 열기 전 태상황부 추밀원 의원들을 소집해 비공개 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사흘뒤 공개 황실회의에서 제위의 여계세습을 허용하는 것으로 황실궤범을 개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회의에서 황사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궤범까지 개정한 것은 사실상 차기 황제로 혜서공주를 낙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태상황과 황실의 큰어른들, 그리고 황제와 그의 의견에 따르는 일원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졌다.

9월 12일, 3일부터 열흘간 열린 황실회의 끝에 태상황이 황제 대신 칙령을 발표하면서[2] 한국사 사상 최초의 황태녀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오빠 이표가 폐서인되었다. 9월 황실회의는 진행이 모두 공개되었는데 참석자들이 일단 절대다수가 황족이니 만큼 목소리를 높이는등 직접적 충돌은 없었지만 태상황파와 황제파간 꽤나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치세

2020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즉위했고 즉위식은 2월 3일 열린다.

1월 27일 추밀원의 자문을 얻어 황실회의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태상황, 상황, 태상황후(태황태후), 상황후(황태후)순)이 아닌 재위중인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것으로 바꾸는 칙명을 내렸다. 언론은 상황이 딸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일격을 맞았다며 자신이 황실내 실권을 휘두르려는 시도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공화주의 언론인 인민일보등은 '아가씨의 역습'이라고 비꼬았다.

1월 29일, 정월대보름마다 열리는 황실만찬에 평민도 참가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황실과 귀족, 고위 정치인만의 파티라고 비판받았던 정월대보름 만찬을 민간인도 참여할 수 있게 바꾼 것이다. 온라인으로 참여를 신청할 수 있으며 추첨을 통해 초청장을 발송한다고 한다. 다만 추밀원에서는 즉위식도 얼마남지 않았고 만찬도 일주일이 조금 남은 상황에서 황실 일원과 정치인들의 신변보장을 준비할 수 없다며 계획은 수용하되 익년 정원대보름부터 실시하자고 조언했으며 황제가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

2월 3일 즉위식이 열렸다. 마이크 디터머 미국 부통령과 영국 찰스 왕세자, 원자바오 중국 총통등 각국 왕실 일원 또는 정치인들이 참석하였다. 대국민 즉위사에서 황제가 국민의 민의를 충분히 수용하여 국민과 더 가까운 황제가 되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오빠인 이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나는 누군가의 가족이기 이전에 황제다. 사사로운 감정을 황제로서 개최한 이 회견에서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답했다. 이후 이 기자는 1개월 정직 징계처분을 받았다.

3월 12일, 첫 국회연설에서 추밀원과 국회가 지금보다 민의를 잘 반영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하며 이 원칙이 개헌 논의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5월 19일, 앞선 여러 파격적인 행보에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지도가 많이 올라간 것으로 집계되었다. 19년 10월 초순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단 31%만이 지지하며 57%는 황제와 황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이날 발표한 조사에서는 무려 72%가 황제와 황실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6월 25일, 황제가 개정헌법을 승인하고 6시간 뒤인 오후 4시 추밀원 의원 전원이 퇴임을 결의하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다. 새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새로운 의원들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번 전원 퇴임 사태는 황제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된 일로 관측되고 있다. 여전히 상황이 임명한 추밀원 의원들이 다수 있어 황실회의의 장을 황제로 바꾸는 안에 14인이나 되는 사람들이 반대하였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후에도 황제의 칙령에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가 정치 이슈로 떠오른 개헌안을 지지하여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편, 이를 통해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상황계열 추밀원 의원들과 궁내성 인사들을 물갈이 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6월 30일, 궁내대신 이정호와 유영준 부대신이 사임했으며 익일 황제는 곧바로 후임 궁내대신으로 전 사민당 사무총장 출신 3선의원이었던 박준호를 지명했다. 8월 10일, 개헌 이후 첫 추밀원이 소집되었다. 이번 추밀원 의원은 기존의 방식대로 1/2은 황제가, 나머지 1/2은 국회가 지명하는 방식이 아닌 헌법대로 1/3은 황제가, 1/3은 중추원이, 나머지 1/3은 국민원이 지명하는 방식대로 구성되었다. 추밀원 소집 다음날 궁내성 각료 전원이 사임했으며 황제는 추밀원이 추천한 신임 각료 명단을 승인했다.

9월 7일, 칙명으로 국가예산을 사용하던 정부 차원의 생일잔치를 없애고 황실 재산과 국민들의 자발적 헌금이나 공물을 이용한 소규모 축하행사로 바꾸도록 조치했다.

2021년 신년사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언로는 늘 열려있을 것이며 어떤 신료들도 이를 막아서는 안된다고 발언했다.

다음날 1월 2일, 태상황이자 조부인 융희제가 붕어했다. 상은 상황 숭영제가 주도적으로 맡기로 하였으며 황제는 상복을 입지않고 3개월간 모든 공식석상에서 검은옷을 입는 것으로 대체했다. 국상으로 인해 정월대보름 만찬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5월 3일, 궁내성은 칙령에 따라 내탕금의 운용도 감사원의 감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으며 조사 결과 2020년 기준 내탕금은 16조 3천억 가량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내탕금을 황실 일원이 자유롭게 쓰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사실상 황실의 자금을 황제가 직접 틀어쥐게 된 것이다. 5월 6일, 내탕금의 운용을 투명하게 하기로 결정하면서 수십개의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회사에 투자하던 관습을 없애고 비상장 개인소유 회사인 ‘대한지주’를 설립하는 칙령을 내렸다. 소유주는 황제로하며 경영진은 정부, 국회가 논의하여 추천한 인물중에 황제가 임명하여 구성하기로 결정되었다.

국상이 끝난 후인 2월 초순 부친 상황 숭영제가 평양의 풍경궁으로 이주한 것이 건중일보에 의해 확인되었다. 효연상황후평안궁에 남았는데 황제의 업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건중일보는 궁이 ‘여인천하’가 되었다며 촌평했다.

2021년 하반기부터 학업을 위해 황제 업무를 일시중단하고 섭정을 임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12월 7일 공식적으로 궁내성에서 섭정을 시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력한 후보는 현직 총리인 이낙연이며 16일, 예상대로 이 총리가 섭정에 내정되었다. 섭정 임기는 익년 2월 11일에 개시된다. 언론에서는 황제가 친정을 중단하고 섭정을 구할 정도로 확고한 권력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민간에서는 상이 궁내성과 황실에서 상황의 권력기반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보는 중이다. 22년 9월 여러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20년과 22년 봄까지 궁내성 내에서 고강도의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다고 전해졌으며 상황파와 그에 일조했던 세력을 궁내성에 한명도 남지 않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상이 재위한 후에 궁내성 채용공고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2023년 3월 대학 3학년 새학기를 맞아 한국방송에서 진행된 옥음취재에서 섭정에게 중대사 결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한을 넘겼으며 그덕에 여유로운 수학을 하게 되었다고 밝히며 화제가 되었다. 현재 재위중인 군주가 대학교에 평범히 재학중이라는 것 자체가 대단한 화젯거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2024년

奉天承運皇帝詔曰 自今已后我卽大清國皇帝 臣民致敬于我 布告天下咸使聞知

宣德五年一月一日


짐이 말한다. 이제부터 짐은 대청국의 황제이니라. 신민들은 짐을 존숭하라. 이를 알고 명을 따르라.
선덕 5년(2024) 1월 1일

옹청 즉위선포조서
我對大清國臣民決定尊我為皇帝表示深深的謝意。我會保護大清的臣民和法律,尊重綜合國民意見的國會意志,在處理國家事務時以國家利益為優先。我毫不懷疑,大清和大韓兩國將在我治理下繼續保持密切的友誼。

짐은 대청국의 신민들이 짐을 황제로써 받들기를 결정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짐은 대청국 신민과 법률을 수호할 것이며 국민의 총의를 모으는 국회의 뜻을 존중하고 국사행위에 있어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짐의 치세 아래 대청국과 대한국 양국의 우애가 돈독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청국 국회에서 발한 즉위선언조서

평가

기타

국가원수인 황제의 신체조건과 건강상태는 어떻게든 공표하지 못하게 하는 궁내성 정보부의 요청으로 공주 시절에는 기재되어 있던 신체조건이 삭제되었다. 다만 168cm인 오빠보다는 반뼘보다 조금 더 크다. 한국 여성 기준으로 상당한 장신이며 모후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 하다.

왼쪽 눈동자가 안쪽을 향하는 심한 내사시가 있었으며 유아기에 질병등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교정받아 정상인에 가까워졌지만 대한한림원 초등부에 늦게 입학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1. 세조 황제의 6남, 7녀, 8녀. 모두 영귀비 금씨 소생.
  2.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많은 언론이 태상황과 황제의 갈등은 실제로 있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