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단일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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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단일화 정책(일본어: 性 單一化 政策)은 위태화국 당시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 제국 패망까지 태화국 내에서 진행된 간섭 식민 통치에 일환으로서 기존의 원주민인 태화인들과 외민족(外民族)들의 저항을 철저히 분쇄하고 최후까지 일본 제국의 봉사할 것을 강요하기 위해 취해진 정책이다.

개요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을 개시하여 전쟁을 확대하고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부터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는 것으로 식민지를 쥐어짜며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위태화국은 그런 상황에서 만주국과 함께 괴뢰국으로서 타 식민지에 비해 이러한 정책의 기조에 대해 저항할 수 있었지만, 제국 내에서 시행된 전시 국가총동원을 시작으로 지리적 요충지였던 태화국과 대만에 많은 병력을 파견하면서 이러한 말이 무색되었다.

성 단일화

일제는 이 시기에 이른바 성 단일화(일본어: 性 單一化)라는 구호를 내걸고 본 정책을 시행했다. 일본은 태화인들을 "2등 신민이자 봉사자(奉仕者)"로 지칭하고는 태화인들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성적으로 착취를 하기 위하여 수많은 악랄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일본 제국은 위태화국 당시의 국정 기관이었던 국무원총무국 지위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였고 이를 통한 명목상의 보건 교육을 실시, 모든 성적 활동과 민족 문화 활동을 탄압하고 태화관방공사가 지휘하는 모든 교육 제도 및 정책을 강요당해야 했다. 일본은 이를 통해 민족성을 말살하고 식민지로서의 권한을 다시끔 획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전시에 더욱 강화되어 1938년 이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던 사립 고교 교육 정책이 폐지되고 언어 말살 및 협화어 강제 시도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일본은 성주원 사건[1]을 이유로 "무분별하고 야만스러운 성 행위에 대한 기조 확립"을 내세우고 수많은 괴뢰국민의 성인 남성들을 강제로 체포하고 중국, 조선, 오키나와 등지로 강제 이주시키거나 당시 식민지에서 진행되던 실험체의 용도로 활용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저항하던 모든 이들은 즉시 처형권 및 정당 방위를 이유로 학살하였다.

일제는 또한 태화관방공사를 통한 황국신민화(일본어: 皇國臣民化)를 내세워서 "봉사자(奉仕者, 2등 신민으로 태화인들을 지칭한다.)들이 황국의 진정한 신민이 되기 위해선 황국 신민들과의 성적 교류를 주선해야 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집단 사회 성 교육 실시, 신민서사 제창, 신사 참배 등을 강제하였다. 특히 태화에서 거류하던 일본인 남성들에게 성 행위를 적극 장려하였고, 1940년에는 부분적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괴뢰국민 여성들 전체에 대한 성 노예화 정책이 진행되는, 진정한 지옥도가 시작되었다.

국무원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당시 친일 국무총리대신이었던 유영현, 서훤 같은 이들도 이러한 정책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대해서 망설였다고 전해진다. 일선에서는 태화인 출신 관리들이 이러한 비인륜적, 성적 학대 정책을 이유로 거부하였으나, 일본은 주둔군을 앞세워 이들을 반정부적 세력으로 내몰고는 체포 구금 및 사형을 지시하였다.

정책의 최후

이러한 성 단일화 정책은 지옥도를 펼친 만큼, 악랄한 행위를 자행했음에도 패망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며 일본군들이 철수하는 시점까지도 이러한 기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중 극일파(劇日化)[2]로 세뇌되거나 이를 인정한 이들은 이러한 정책이 결론적으로 대동아 공영권 실현 및 만민 협화를 위한 작업이었다고 말하는 등 심각한 모순 및 역사왜곡을 시도했다.

태화국 해방 이후 주태미군들은 임시 조사 위원회를 설치해서 해당 정책에 대한 증거물들을 압수 수색 및 제시하였고, 일본 역시 이를 인정하면서 일태 협의 조약에서 내각총리대신 및 관련 전범자들의 공식적 사과 단행 및 배상금 지불, 태화국에서 자행된 해당 시기 및 정책을 보여주는 문화 유산들의 유네스코 등재 인정 등을 통해서 철저한 사건 규명을 통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자행된 위안부 문제와는 달리, 태화 지역 내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정책에 수많은 자료 및 증언, 국제사회의 비난적 시선으로 진실 규명 및 사과를 받은 케이스이다.

영향

고국을 떠난 수많은 남성들은 중일 전쟁, 오키나와 전투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비공식적 통계상으로 약 2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고국으로 귀국한 이들은 대략 4만 명 정도이며, 이 역시 당시에 강제로 규정된 외민족 + 원주민들의 합산 통계치인지라 본토 태화인들의 귀환은 절반도 안된다고 추정된다.

가뜩이나 현재 심각한 인재난을 겪고 있는 태화국의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얄려져 있으며, 부계 사회로 유지되던 태화국이 심각한 성비 불균형으로 초래된 여초 사회 형성 및 여권 신장으로 사회 전체가 모계 중심의 노선으로 변경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여권 신장에는 도움이 준 것이 사실이나, 그 과정이 비정상적이므로 온전한 여권 향상이 아니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현재까지 회복된 성비는 2017년 기준 남성:여성의 비율이 95:100으로서 정상 성비인 105:100에도 아직까지 미달인 수준이다. 또, 남성 인구를 증가하기 위하여 영아 사망율을 낮추기 위해 진행된 지나친 과보호 현상은 남성 인구의 환경적응력을 약화시켜 실질적인 사회 인구로서의 구실을 힘들게 만드는 악영향을 초래했다. 특히, 이러한 비정상적 여권 향상과 모계 사회의 급격한 형성은 기존의 부계 사회로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붕괴시켜 남성 및 여성간의 주도권 갈등을 안게 되었다.

각주

  1. 1935년,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성주원이 지방에서 자금을 모으던 도중 일제 병력에게 체포되면서 일본인들을 겁박하고 강간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했던 사건을 말한다.
  2. 모든 가능성 및 생각을 배제하고 오직 일본 제국의 행위를 옳다고 말하는, 극단적 친일세력들을 일컫는 말.